A Corporate Underling Who Excels at Work RAW novel - Chapter (305)
대기업 말단이 일을 잘함-305화(305/357)
305화. 소모임 (2)
채온익은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다.
그가 자라 회사 일을 배우기 시작했을 무렵엔 이미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었다.
아무도 자신의 뜻은 물어보지도 않았다.
그저 늦게 태어났을 뿐인데.
채온익은 억울했다.
“온익아. 그냥 나처럼 포기하면 편해. 태성 가져봤자 뭐 한다고 아등바등 사니? 요리나 같이 하자.”
형인 채한익은 패배자였다.
도전도 해보기 전에 포기한 사람.
아무것도 해보지 않고 무대에서 내려간 사람.
채온익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뭐라도 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있는 태성은 견고했다.
뭔가를 해보려고 해도 이미 모든 것이 정해져 있었다.
채온익은 사장단과 임원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애썼지만 그들은 요지부동이었다.
사장단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채태익의 후계자 자리가 견고한데 뭐 하러 채온익의 편을 든단 말인가.
출세하고 싶으면 채태익에게 잘 보여도 모자랄 판국에.
채온익은 절실하게 깨달았다.
이미 자리를 잡은 사람들을 끌어들일 수 없다.
그렇다면 그 외로 눈을 돌리자.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곳으로.
마침 거기에 배척받는 한 무리가 있었다.
태성에 들어왔으나 받아들여지지 못한 이들.
바로 고졸 채용자였다.
소외받는 이들은 관심에 목마르다.
그들이 어떤 심정일지 채온익은 훤히 알 수 있었다.
자신도 같았으니까.
그리고 그럴 때 내미는 손은 절대 거부하지 못한다.
채온익은 탁재민의 말을 떠올렸다.
“동생 희민이는 사람의 마음을 얻는 걸 잘합니다. 제가 관찰해 보니 항상 어려울 때 손을 내밀더군요. 절망에서 구해주면 그 사람은 절대 배신하지 못해요. 충성을 다하죠.”
채온익은 피식 웃었다.
지금 자신이 딱 그랬으니까.
사장이든 임원이든 부모님이든 상관없다.
누구든 자신의 손을 잡아준다면 끝까지 함께할 자신이 있었다.
자신이 그러한데 고졸 채용자들은 어떻겠는가.
물론 그들은 당장의 힘이 될 순 없다.
다들 들어온 지 1년밖에 안 된 신입 직원이라 권한도 직함도 없으니까.
하지만 투자는 원래 미래를 보고 하는 법이다.
자신에게는 세력이 없다.
머리 좀 돌아가는 사람이라면 절대 자신의 손을 잡지 않는다.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자기만의 사람을 가진다는 것이 기분 좋았다.
“어디 그다음은…….”
채온익은 단톡방을 열었다.
30명에 달하는 고졸 채용자들이 모인 대화방이었다.
채온익을 포함해 31명.
그는 여기서 유일하게 이질적이었지만 때문에 구심점이기도 했다.
모두가 채온익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채온익이 없는 동안 그들끼리 나눈 대화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가는 게 있어야 오는 게 있는 겁니다. 다들 공짜로 얻어먹기만 할 생각은 아니시죠?
-그럼요. 저희가 상무님을 도와야 또 상무님도 저희를 좋게 생각하시지 않겠습니까?
-저는 언제나 준비되어 있습니다.
일부러 채온익이 보라고 남긴 듯한 대화가 있었다.
물론 여기에는 채온익의 수작도 작용했다.
채온익을 빼고 자기들끼리 대화방을 만들지 못하도록 프로필이 안 보이게 방을 만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굉장히 노골적이었다.
자신들을 알아봐 준 것에 대한 고마움, 버림받지 않기 위해서라면 어떻게든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겠다는 절실함.
그리고 따지고 보면 이들끼리도 경쟁자였다.
자신이 다른 사람을 제치고 채온익의 눈에 들어보겠다는 경쟁심.
그런 것들이 대화방 전체에 녹아 있었다.
채온익은 대화방 참여자의 프로필을 쭉 살펴보았다.
-태성 보안/심준호
-태성 테크니카/유원진
-태성 제지/양선효
…….
대부분 3군 계열사였지만 꽤 고루 분포되어 있었다.
당장은 큰 도움이 되지 못하겠지만 정보망 역할은 해줄 것이다.
이제 겨우 2년 차에게 각 계열사의 동향 같은 걸 보고하라는 지시는 어렵겠지.
하지만 반대는 가능하다.
채온익이 준 정보를 각 계열사에 뿌리는 것이다.
‘일단은 입지를 흔들어야지.’
채태익의 자리는 견고하다.
지금 부딪혀 봐야 조금의 타격도 없을 것임이 분명했다.
채온익은 자신의 조언자, 구현수가 한 말을 떠올렸다.
“땅 밑을 파 들어가면 되죠.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어떤 꼬투리를 잡아서 크게 만들면 돼요. 이왕이면 부회장의 가장 큰 지지 기반인 태성 건설이 좋겠군요.”
가능하면 태성 건설을 건드리되 정 안 되면 다른 계열사도 상관없다고 했다.
찌르면 반드시 뭐가 나온다.
채온익 역시 오너 패밀리인 이상 어느 정도의 형제 싸움은 눈감아줄 것이라 했다.
지분이 변동되면 안 된다는 불문율 역시 사실은 경영권을 방어하기 위한 것인 만큼, 태성 내에서의 자그마한 지분 변동은 크게 문제 삼지 않을 거라 했다.
기껏 해봐야 조금 혼나고 말 거라고.
=안녕하세요, 여러분. 이 방은 소모임 구성원분들이 친목을 쌓으라고 만든 방입니다. 편하게 대화하세요.
채온익은 대화방에 처음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안녕하세요, 상무님!
-안녕하세요!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들 대화방만 들여다보고 있었나 보다.
기다렸다는 듯이 인사가 주르륵 올라왔다.
다들 채온익에게 어떻게든 어필하기 위해 안달이었다.
채온익은 별 기대 없이 말을 던졌다.
=아, 그래. 회사에서 어떻게 지내시는지 말씀해 주시면 어떨까요? 여러분의 업무 환경이 어떤지 저도 궁금하거든요.
이왕 만든 정보망, 아무리 별거 없다 해도 써먹긴 해보자.
당장 좋은 정보가 있으면 좋고, 없어도 차차 키우면 되고.
채온익의 메시지가 올라가고 한동안 대화방에는 말이 없었다.
다들 머뭇거리고 있었다.
잘 보여야 하는데 시답잖은 회사 얘기나 해도 되는 걸까?
채온익의 진의는 뭘까.
눈치를 보고 있었다.
채온익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3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의 마음에 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니 반드시 튀려는 사람이 나올 것이다.
40초 정도 지났을까.
잠잠하던 채팅방에 짧은 문장이 올라왔다.
고민하고 적은 흔적이 역력한 글이었다.
-저희 회사는 올해도 고졸 채용한다고 하더라고요. 후배가 들어오면 고생 안 하게 챙겨주려고요. 같은 부서로 올지는 모르겠지만.
별 얘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처음으로 올린 것이다.
회사가 좋다고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빈말로라도 직원들이 잘 해주고 일이 재밌습니다, 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회사 험담을 할 수도 없었다.
지금 이 채팅방에는 무려 오너 패밀리가 들어와 있으니까.
남은 선택지는 하나다.
좋고 싫고 표현할 여지가 없는 객관적 사실만을 전달하는 것이다.
그래도 그것 또한 채온익이 원하는 바였다.
한 번 물꼬가 터지니 시답잖은 대화가 올라왔다.
몇 개인가 각자의 근황이 올라온 이후 다시 소강상태가 되었을 때.
채온익은 아무런 메시지도 보내지 않고 채팅창을 보았다.
그러자 어느 순간 대화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다들 채온익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채온익은 지금 이들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고 있는 것이다.
어디까지 가능한지.
아무리 채팅이라도 머리가 좀 돌아가는 놈이라면 채온익이 뭘 원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채경준이라면 되겠지.’
문득 오래전 만났던 채경준이 떠올랐다.
자신보다 훨씬 젊은 나이인데도 그 나이대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노련함이 묻어나왔다.
사실 노회함이라고 표현하기에는 조금 부족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항상 몇 수를 내다보는 듯했다.
대화를 하면서 자신의 마음이 들여다보이는 느낌이었다.
회장인 아버지와 몇 임원들을 제외하고 이런 상대는 처음이었다.
채경준 같은 인재를 원하는 건 아니다.
능력 있고 머리도 잘 돌아가며 상대의 속을 헤아릴 줄 아는 심계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지금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그것만이라도 알아채는 사람이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몇 분을 기다려도 채온익의 심중을 헤아리는 사람은 나오지 않았다.
채온익은 실망과 함께 현실을 자각했다.
‘그래, 그런 놈이 또 있다는 게 말도 안 되지.’
아무래도 눈이 높아져 있던 모양이다.
채온익이 자판을 치려던 때였다.
태성 보안의 심준호라는 사람이 메시지를 올렸다.
-제가 주워들은 얘기가 있는데 태성 보안에서 사외 이사를 새로 선임할 모양입니다. 아마 기관 쪽의 의견을 반영한 것 같습니다.
채온익이 씨익 웃었다.
자신의 의중을 파악한 게 틀림없다.
바로 여기 있는 30명을 자신의 정보망이자 수족으로 부리는 것.
아직 수족 역할은 무리일지라도 정보망이 되어줄 수는 있다.
각기 다른 계열사로 퍼져 있는 모임의 장점이었다.
이어서 동일인이 메시지를 보냈다.
-태성 카메라에서는 내부 인사 하나가 승진해서 이번에 상무가 되고요.
그는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총동원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아마 채온익이 구체적으로 어떤 정보를 원하는지는 생각이 닿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쓸 만하다.
채온익은 그의 이름을 기억했다.
태성 보안/심준호
채온익이 인사 이후 처음으로 채팅을 쳤다.
=심준호 씨는 어떻게 다른 계열사 일을 알고 있어요?
채팅이라 망정이지 직접 얼굴을 대면한 자리였다면 술렁이는 것이 느껴졌을 것이다.
-평소 경제 소식지와 관련 블로그를 몇 개 구독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심정으로 타자를 쳤을지 짐작이 갔다.
지금 이 순간만을 기다렸겠지.
그동안 꼬박꼬박 경제 잡지를 구독하길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태성 전자와 태성 화학, 태성 건설 등은 상무님이 더 잘 아실 것 같아서 일부러 말하지 않았습니다.
왜 주요 계열사 얘기는 하지 않나 했더니 나름대로 채온익의 의중을 짐작해 보았던 모양이다.
주요 계열사는 오너 패밀리인 채온익의 귀에 들어오는 게 훨씬 자세하고 빠를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들이 채온익에게 줄 수 있는 게 뭘까.
채온익의 눈길이 미치지 않는 변방 계열사의 소식이다.
그런 결론에 다다른 것이다.
‘나름 생각을 했다 이거군.’
조금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채경준이었다면 지금 채온익의 상황을 파악하고 그가 뭘 원하는지 콕 짚어 이야기했을 테니까.
아마 지금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야 한다는 방향도 알려줬을 것이다.
‘아니, 이 정도만 해도 감지덕지지.’
채경준만 한 인재를 바란다는 건 과분한 얘기다.
처음 채경준을 만났을 때는 그저 권태호가 주목한다는 청년이 누군지, 그를 통해 권태호를 끌어들일 수 있을지 알아보러 갔을 뿐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그가 한 일을 어머니인 백화승 사장에게 듣고서야 알았다.
건설업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채경준이 그걸 이용해 무슨 짓을 벌였는지도.
입이 떡 벌어질 만한 행동이었다.
자신도 나름 야망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저런 짓은 엄두도 못 낸다.
일단 재시공부터가 상상도 못 할 일이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채경준의 놀라움은 이 시점부터였다.
재시공은 그저 재료에 불과했다는 듯이 그걸 이용해 판을 만들어갔다.
멀리서 봤기에 알 수 있었다.
채경준은 업계를 들었다가 놨다.
거기에 자신을 이용한 이미지 전략까지.
그의 행적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지금까지 가만히 있던 채온익이 하필 지금 움직이기 시작한 것도 그 덕분이었다.
채경준의 행동력을 보고 눈이 번쩍 뜨인 것이다.
‘고졸이 저렇게까지 하는데 나라고 못할 것 같아?’
채경준을 먼저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던 생각은 일찌감치 접었다.
먼저 자신이 후계자 자리에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증명한 뒤에 설득할 생각이었다.
채경준 같은 사람들은 능력 있는 사람을 미워하지 못한다.
그러니 능력을 보여줄 생각이었다.
=계열사에 구애받지 말고 하고 싶은 말 다 해보세요.
채온익이 아예 판을 깔아주자 심준호는 신나서 아는 것을 모조리 주르륵 늘어놓았다.
정말 다양했다.
태성 전자도 있었고 태성 패션도 있었다.
채온익이 아는 내용도 있었던 반면 처음 듣는 것도 있었다.
소문에 불과했지만 언론이나 세간에서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태성 건설 아파트 사고 현장에서 인명 사고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태성 건설!
채온익의 눈이 번쩍 뜨였다.
구현수가 목표로 하라고 했던 곳이자 채경준이 있는 곳이었다.
다른 수많은 계열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지만 유독 태성 건설이라는 단어가 눈에 꽂혔다.
‘이거다.’
채온익의 머릿속에서 계획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그는 채경준이 어떻게 나올지 기대하며 심준호를 재촉했다.
=태성 건설 이야기가 흥미롭네요. 좀 더 자세히 말해주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