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Corporate Underling Who Excels at Work RAW novel - Chapter (328)
대기업 말단이 일을 잘함-328화(328/357)
328화. 아무도 몰라 (4)
양정훈은 생각했다.
멈춰, 생각을 멈춰야 해.
아까와 똑같다.
하지만 이번엔 유도해서 허를 찌르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확인 작업이었다.
이미 채경준은 태성 바이오에 대해 거의 확신을 가진 상태였다.
여기서 사장의 반응까지 덤으로 얹어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저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어떻게 하필 골라도 그걸 고르냐.’
셋 다 가능성 있는 얘기였다.
모르는 입장에서 추측해 보자면 충분히 나올 만한 경우의 수다.
거기에 하필 정답이 끼어 있었다.
운명적이라고 해야 하나, 감이 좋다고 해야 하나.
아니. 그런 불확실한 것이 아니다.
채경준은 철저하게 경우의 수를 따졌고, 그중 가장 확률이 높은 세 가지를 던졌을 뿐이다.
올바른 과정을 밟아 계산했다면 정답에 가까워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글쎄요. 참 재미있는 얘기를 하시네요.”
양정훈은 두 번의 실수를 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건 채경준 역시 알고 있는 바다.
이미 한 번 당했는데 또 당할 사람이 아니니까.
곧바로 나온 대답이었지만 채경준은 깔끔하게 무시했다.
“셋 중 정답이 있습니까? 없어요?”
“대답을 맡겨둔 것처럼 얘기하시네요.”
채경준은 눈을 가늘게 떴다.
미리 깨끗한 회사 한 군데를 다녀오길 잘했다.
바로 여기로 왔다면 알아채는 게 좀 더 힘들었을 것이다.
태성 보안과 비교해 보니 똑같은 상황인데도 조금씩 다른 게 보였다.
물론 사람마다 성향이 다르고 성격이 다르니 반응이 다르게 나올 수 있다.
그래서 염두에 두고 봤다.
‘태성 보안의 사장님은 어땠더라?’
그를 기준점으로 두고 비교하니 양정훈의 반응은 180도 달랐다.
기분 나빠하며 화를 냈던 유현식과는 다르게 양정훈은 대수롭지 않게 받아 넘겼다.
당당하게 보라던 유현식과는 다르게 양정훈은 이 상황이 되어서까지 증명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권태호에게 직접 전화해 항의했던 유현식과는 다르게, 양정훈은 채경준과 담판을 지으려 한다.
티격태격은 했어도 깊게 파고들지 않았던 유현식과는 다르게 양정훈은 채경준과 수 싸움까지 하고 있다.
하나하나 뜯어놓고 보면 별일 아닌 사소한 일이다.
워낙에 온화한 사람이라니까 대수롭지 않게 그냥 넘길 수도 있지.
증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대화로만 해결하려는 걸 수도 있다.
그러나 아래의 두 개는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했다.
일단 직함은 권태호의 비서다.
팀장이든 비서든 사장과 대담하기에 부족한 건 사실이다.
명목상 상사인 권태호에게 항의해야 옳았다.
하지만 전화하지 않고 있다는 건 하나다.
권태호와의 통화를 피하고 있는 것이다.
‘나보단 권태호가 더 무섭다는 거네.’
팀장 겸 비서는 어찌저찌 타일러서 돌려보낼 수 있다.
하지만 권태호는 속일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한 결과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수 싸움.
태성 보안과 비교하자면 이게 가장 의아했다.
‘대체 내가 뭐라고 이렇게 머리 아프게 싸우고 있는 거야?’
차라리 윽박질러서 돌려보냈으면 이해했을 것이다.
어디서 감히 팀장급이 사장실에 와서 건방지게 요구를 하냐고.
하지만 그것도 아니다.
점잖게 모든 이야기를 들으면서 무려 대담을 하고 있었다.
서로 생각을 읽으며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계산하고 있다.
아무리 권태호의 대리인으로 왔다 해도 사장이 팀장급에게 이렇게까지 할 위치인가?
사장이 진지하게 대하면 대할수록 채경준의 의혹은 짙어져만 갔다.
그리고 양정훈이 그 분위기를 모를 리가 없다
알면서도 이제 방법이 없는 것이다.
시치미를 떼는 수밖에.
“사장님. 이러실수록 더 확신이 드는 거 알고 계시죠?”
문제는 양정훈이 그렇게 행동할수록 채경준에게는 하나의 근거가 되어주고 있다는 것이다.
양정훈 역시 알고 있었다.
점점 구석에 몰리고 있다는 것을.
남은 것은 하나다.
어떻게 양정훈의 입을 여는가.
“사장님. 분명히 아까 이렇게 말씀하셨죠. 태성에 해가 될 만한 일은 안 한다고. 그럼 사장님이 무슨 짓을 하셨든 그건 태성을 위한 결정이었을 겁니다.”
채경준이 상체를 앞으로 기울여 깍지를 꼈다.
“저는 솔직히 말씀드려서 회사에 이익이라면 상관없다는 입장입니다.”
양정훈이 허허, 하고 사람 좋게 웃었다.
하지만 이것은 표정을 관리하기 위한 필사적인 움직임이었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감정을 내보일 것 같았으니까.
“그럼에도 쉽게 털어놓지 못하는 건 그게 불법이거나 태성 내부에서 용납하기 힘든 일이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니 여쭙겠습니다. 사장님은 정말로 끝까지 숨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세요?”
양정훈이 가장 두려워했던 일이다.
아까 채인하가 말했듯 회장이 이미 알고 있다면.
이런 대화는 의미가 없다.
당장이라도 회장실에 가서 무릎 꿇고 석고대죄 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오히려 채경준 때문이었다.
사실 아무도 모르고 있다면?
채경준이 그저 떠보는 거라면?
그의 함정에 넘어가 제 발로 자수하는 거나 다름없다.
‘쓸데없이 똑똑해서 헷갈리게 만들고 있어.’
이게 다 채경준이 생각보다 꽤 하는 놈이라서 벌어진 일이다.
물론 평범한 비서 입장으로 왔으면 양정훈도 이렇게까지 몰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팀장 겸 비서에게 이렇게 밀릴 줄은 몰랐다.
하지만 반대로 채경준이 너무 영리하기에 함정인가 싶은 마음도 들었다.
지금까지 있었던 대화와 그 밑에서 이루어진 수 싸움을 보자면 충분히 함정을 파고도 남을 놈이다.
양정훈이 의심할 만도 했다.
너무도 익숙하게 밀어붙였으니까.
차분하게 생각해 보면 지금 채경준에게는 아무런 증거도 없다.
그저 추측만 가지고 밀어붙이는 것에 불과하다.
“정말 회장님이 알고 계시다면 왜 직접 말씀해 주지 않으셨겠습니까?”
채경준이 무슨 바보 같은 소리를 하느냐는 표정으로 답했다.
양정훈보다는 표정 관리에 미숙한 그다.
일부러는 아니겠지만 이렇게 새어 나온 표정이 더욱 양정훈을 헷갈리게 했다.
“회장님이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저는 몰라요. 근데 그걸 꼭 확인해야만 계산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회장님이 태성 내부의 일을 모르시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구요. 만약 아신다고 쳐보죠.”
채경준이 깍지를 낀 채로 검지를 펼쳐 양정훈을 가리켰다.
“직접 언급하지 않는 건 뻔하죠. 내부적으로 조용히 덮고 싶으니까.”
양정훈도 짐작하는 바였다.
그리고 그럴듯했다.
권태호 역시 마찬가지다.
그가 직접 연락하지 않고 대리인을 보낸 것은 조용히 처리하고 싶어서일 것이다.
일단 그건 확실했다.
‘권태호 사장님이 우리 회사 내부 일을 어디까지 아는 거지? 그건 몰라도 일단 의심하고 있는 건 확실한데.’
권태호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파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나마 최근에 채경준이 조금 유명해지면서 권태호 사람이라고 인정받기는 했다.
그런 권태호지만 부릴 수 있는 사람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하다못해 자기 비서실에 있는 비서를 보내도 되고, 아직까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전략기획실에 부탁해 사람을 보내도 된다.
하지만 일부러 채경준을 보냈다.
분명 거기에도 뜻이 있을 것이다.
‘권 사장님이 경고하고 있는 거구나.’
양정훈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엔 다 들리도록 내뱉는 한숨이었다.
그걸 듣는 순간 채경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로 확신을 얻었다.
양정훈의 대응이 그 증거다.
“깔끔하게 가르쳐 주시죠. 나중에 밝혀지는 것보다야 낫잖습니까.”
채경준의 말은 일견 타당했다.
나중에 들킬 바에는 지금 자수해서 광명 찾자는 것이다.
그러나 양정훈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맹렬하게 머리가 돌아가는 중이었다.
‘지금 나더러 이실직고하라고? 나중에 들키나 지금 말하나 똑같은데?’
분식회계다.
들키면 당연히 해임이다.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징역까지 살아야 하는 문제다.
지금 자수해 봤자 정상참작이 조금 되는 것뿐.
이미 분식회계는 해버렸고 돌이킬 수 없다.
한 번 장부가 마감되면 끝이므로.
되돌아갈 수 없는데 이제 와서 말한다고 뭐가 달라지겠는가.
양정훈은 피식 웃었다.
“제 결론은 변하지 않습니다.”
채경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처음으로 드리우는 음영이었다.
양정훈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파악한 것이다.
“정말 그렇게까지 하셔야겠습니까?”
끝까지 입을 다물겠다.
게다가 이젠 설득의 여지마저 남지 않았다.
회장까지 들먹였는데 꺾지 않는다는 것은 의지가 확고하다는 것을 뜻했다.
그리고 또 하나.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신 거군요.”
윗선에 보고하는 것조차 어려울 정도의 대형 사고다.
그렇게밖에 생각이 들지 않았다.
채경준은 일어서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 이후에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도 잘 알고 계시겠죠?”
양정훈은 이를 악물었다.
알지만 끝까지 간다.
버틸 것이다.
만일의 가능성에 걸어보겠다.
회장과 권태호가 심증만 있고 물증은 없다는 가능성.
“그럼 준비를 하고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그때는 사장님의 진심을 들을 수 있으면 좋겠네요.”
채경준과 채인하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사장실을 나갔다.
홀로 남은 양정훈은 주먹을 쥐고는 연신 팔걸이를 내리쳤다.
퉁, 퉁.
한 번씩 소리가 울릴 때마다 양정훈의 얼굴도 천천히 일그러져 갔다.
마치 때려 부수기라도 하는 것처럼.
“확증은 없어. 내부 자료라도 보지 않는 이상 모를 거야. 아무리 권태호라고 해도 확증도 없이 계열사를 뒤집을 순 없어. 이대로 버티면 돼. 아무도 몰라, 모를 거야.”
마지막은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 되어 있었다.
* * *
양정훈은 일부러 보안팀에게 연락을 해서 두 손님이 빠져나가는 것까지 확인했다.
내부에 들어온 김에 혹시라도 무슨 수작을 부리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둘은 곧바로 건물을 빠져나갔다.
손님이 떠나자마자 양정훈은 재무관리실장을 불렀다.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듣자마자 실장은 먼저 두 가지를 물었다.
“유관 부서에 들르지 않고 바로 나갔다는 말씀이시죠?”
“그래요.”
“왜 바로 갔을까요? 그 팀장이라는 친구가 정말 똑똑한 사람이라면 이 기회를 놓칠 리가 없을 텐데요.”
“나도 그게 의아하긴 했습니다.”
부서에 쳐들어간다고 해서 내부 문건을 볼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채경준은 권태호의 비서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다.
겁먹은 관계자 하나가 모르고 말실수를 하거나 자료를 보여줄 수도 있는 법이다.
충분히 찔러볼 가치는 있다.
사장실에 쳐들어와 떠보고 갈 정도의 담력과 명석함을 가졌다면 더더욱 그렇다.
밑져야 본전이고 찔렀다가 수확이라도 있으면 이득이다.
나중에 다시 찾아온다 해서 방문이 가능할 거란 보장도 없다.
왜냐하면 오늘부터 사장은 둘의 대화 요청을 거절할 테니까.
회사 내부에 한 발짝도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분명히 예상했을 텐데요. 그냥 갔다는 게 마음에 좀 걸립니다.”
실장이 턱을 쓰다듬으며 흐린 표정을 했다.
“그리고 또 하나, 확신을 얻어갔다는 게 좀 껄끄럽군요.”
“그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분명 사장은 마음의 준비를 하고 만났다.
소문을 들었기에 철저하게 경계했다.
얕보지도 않았고 방심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이런 결과가 나온 건 지금 생각해도 허탈했다.
“저로서는 사장님이 당하셨다는 게 상상이 안 갑니다.”
채경준을 직접 만나본 적이 없는 실장으로서는 당연한 의문이었다.
사장도 답답했다.
그 상황과 분위기를 말로 설명할 수가 없었다.
분명 치열하게 싸웠는데.
말이 아닌 무형의 뭔가가 오고 갔는데.
사장이 머리를 감싸 쥐자 실장이 굳은 얼굴로 위로했다.
“모를 겁니다. 아니, 알아도 상관없습니다. 제가 말씀드렸죠? 회색지대라고. 전문가의 검토도 마쳤습니다. 회계법인 감사도 통과했습니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분명 그랬다.
하지만 사장은 전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채경준 때문일까.
“별문제 없을 겁니다. 사장님, 우리가 이길 수밖에 없는 싸움입니다.”
실장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다음 날.
왜 채경준이 아무 곳도 들르지 않고 바로 돌아갔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태성 물산 본사가 들이닥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