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Corporate Underling Who Excels at Work RAW novel - Chapter (356)
대기업 말단이 일을 잘함-356화(356/357)
356화. 나이 (1)
태성 화학 사장실.
나재홍은 회의가 끝나자마자 컨벤션센터에서 부리나케 뛰어온 상태였다.
채경준은 회장을 나가더니 혼자 머리를 식히겠다며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고, 뒷정리는 채인하가 맡았다.
뒤는 자기가 맡을 테니 얼른 보고하러 가보라는 채인하의 말에, 잽싸게 차를 몰아 달려온 참이었다.
나재홍은 조금도 옆으로 새지 않았다.
채경준에게서 종이 다발을 받은 직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소중하게 안은 채 사장실까지 왔다.
그리고 나재홍은 있었던 일을 상세히 설명했다.
조금의 과장도 넣지 않았지만 사장은 귀를 의심했다.
“그게 전부 사실이라고요?”
“MSG는 하나도 안 쳤습니다. 있는 그대로 말씀드린 거예요.”
사장은 자신의 책상에 놓인 수십 장의 종이를 보았다.
일정한 양식도 없고 전부 손으로 쓴 것이었지만, 이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품에 넣어 오느라 접힌 자국이 역력한 이 종이 다발은 그야말로 이 사건을 종결지을 결과물이었다.
“법무팀과 검토하고 알아서 처리하랍니다. 자기 역할은 여기까지라고요.”
사장은 종이 한 장을 들어 훑어보았다.
사업체 기본 정보와 원하는 보상 금액, 세부적인 상담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 뒷장에는 중소기업 사장이 직접 그린 듯한 기술 설명도가 있었다.
“이건?”
“채경준 팀장이 요청한 세부 사항 중 하나입니다. 태성 화학과 어떤 기술로 연관되어 있는지 받아 적으라고 했습니다. 부풀려서 보상을 받으려 할 수도 있으니 태성 화학에 있는 자료와 크로스 체크 해보라고요. 경영지원실에서 차출된 직원들이라 문외한이다 보니 사장이 직접 그린 게 꽤 있는 모양입니다.”
일 처리가 깔끔하고 섬세하다.
수기로 쓰였다는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자필이기에 태성 화학 입장에서는 더 좋은 증거가 될 수 있다.
일단 보상이 끝나기만 하면 나중에 딴소리는 못할 테니까.
단순히 이번 일을 모면하려는 행동이 아니었다.
향후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생각하고 계산해서 깔아놓은 안배다.
자신은 떠나면 그만인데도.
이후의 일은 사실 태성 화학이 알아서 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도 채경준은 회사가 움직이기 쉽도록 배려를 해준 것이다.
“정말 멀리 보는 사람이군요. 채경준 팀장은.”
사장이 감탄했다.
내내 딱딱하게 얼굴이 굳어 있던 나재홍의 안색이 조금 밝아졌다.
채경준에게서 중요한 일을 맡았다는 책임감 때문에 긴장하고 있던 것이다.
나재홍 역시 이 종이 쪼가리가 뭘 의미하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오늘 회의의 정수이자 회사의 문제를 깔끔하게 마무리 지을 수 있는 해결책이다.
그런 걸 자신에게 맡겨준 채경준을 생각하면 평소처럼 까불거릴 수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사장의 말을 들으니 조금 안도한 것이다.
사장은 종이를 하나하나 넘겨 보았다.
두 줄로 긋고 다시 쓴 자국과 여러 필체가 섞여 지저분했지만, 그만큼 협상이 처절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상담을 담당한 직원의 이름은 물론이고 금액을 제시한 사장의 친필 사인까지 곁들여 있었다.
완벽했다.
“자신이 떠나고 나서 일어날 일을 예상했군요. 나재홍 씨의 얘기를 들어보건대 회의장에서는 다들 압도당했을 겁니다. 그만한 집중도와 긴장감이 있었겠죠.”
사장이 종이를 한 장 한 장 넘겨보았다.
“하지만 원래 화장실 가기 전과 나온 후는 다른 법입니다. 이것만으로는 깔끔하게 끝나지 않을 거라는 걸 예상했어요. 그래서 억지를 부릴 여지를 차단한 겁니다. 협상 테이블에 앉은 사장들 본인이 직접 금액을 제시하고 사인까지 했으니 이제 명분은 우리 쪽에 있습니다.”
사장은 입이 찢어져라 웃었다.
“해결사로 왔다더니 정말 그렇군요. 더없이 완벽한 해결이에요. 채경준 팀장 말대로 법무팀에서 검토만 마치면 될 것 같습니다. 최대한 이 금액에 맞춰야겠지만.”
“깎으실 줄 알았습니다.”
나재홍의 말에 사장은 나무라는 눈짓을 했다.
“채경준 팀장이 상대에게 꽤 자비를 베푼 건 맞습니다만, 일이 이렇게 됐으니 이 금액을 받아들이는 게 맞습니다. 겨우 몇 푼 깎는다고 이득도 아니고 뒷말이 나올 테니까요. 사실상 입막음 비용치고는 싼 겁니다.”
나재홍은 이런 계산 쪽에는 약했지만 머리가 나쁜 건 아니었다.
금방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재홍 씨도 쫓아다니느라 수고 많았습니다. 내일부터 원래 부서로 복귀하세요.”
“알겠습니다.”
나머지는 사장에게 맡기면 된다.
나재홍은 홀가분한 표정을 지었다.
오랜만에 친구와 만나 즐겁게 일하긴 했지만, 알게 모르게 책임감과 부담감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친구기에 더욱 걱정되기도 했고.
유능하다는 건 연수원 시절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본 어느 누구와도 달랐다.
그 머릿속에서 어디까지 내다보고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친구였다.
능력 있다고 무조건 좋은 건 아니다.
일을 잘하면 그만큼 일을 더 준다.
중요하고 실패하면 안 되는 그런 일들.
채경준이 딱 그랬다.
이번 일만 해도 그렇다.
아까 참석자 하나가 병을 깼을 때 나재홍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안 그래도 부담스러운 일이다.
거기에 폭력 사태까지 일어날 뻔했다.
노련한 사람이라도 저런 상황이면 당황할 텐데, 채경준은 오히려 단상을 내려가 그들 사이로 걸어 들어갔다.
감정이 없는 사람도 아닌데 채경준이라고 떨리지 않았을까.
그런데도 이상하게 무모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채경준이라면 머릿속에 이미 계산을 다 해놨을 것 같았다.
그는 대담한 거지 만용을 부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할 때는 한다.
저러니까 위에서도 인정해 줬나 싶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나재홍이 인사를 하고 나가려고 할 때 사장이 그를 불러세웠다.
“아, 부서 복귀는 내일부터에요. 오늘까지는 하던 일 계속 해줘야겠습니다.”
“네?”
사장이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하며 품속에서 지갑을 꺼냈다.
그리고 카드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중요한 손님을 접대하고 응대하는 게 나재홍 씨 업무입니다. 그 손님들이 오늘 가시잖습니까. 끝까지 챙겨야죠.”
“어, 그러면…….”
나재홍이 눈치를 보자 사장이 확답을 내렸다.
“일찍 퇴근해서 같이 회식하세요. 밥도 좋고 술도 좋고.”
중요한 손님도 맞는 말이고, 가시는 길 끝까지 접대해야 하는 것도 맞는 말이었다.
다만 친구라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다.
원래라면 첫날부터 술 먹이고 시작했을 것이다.
잘 봐달라고 밥 사고 술 사 주는 건 기본이니까.
다만 사장은 중요한 손님이라는 이유만으로 카드를 주는 건 아니었다.
친구끼리 놀 수 있게 시간을 주는 거다.
나재홍이 환호성을 질렀다.
“오마카세 가도 됩니까?”
“마음껏 먹어요. 비싼 데 가도 됩니다. 2차, 3차도 그걸로 긁어요.”
“감사합니다!”
나재홍은 왔을 때처럼 잽싸게 튀어나갔다.
이번엔 카드를 소중히 들고.
그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지는 걸 확인한 사장이 전화를 들었다.
부회장에게 알려줘야 할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 * *
덥다.
건물 밖을 서성이던 나는 나무 그늘 아래의 벤치에 걸터앉았다.
일명 ‘태성 화학 기술 회의’를 마치고 바람도 쐴 겸 나온 것까진 좋았는데 날씨가 너무 더웠다.
바람을 쐬기는 개뿔, 40도에 육박하는 온도 덕분에 숨이 턱턱 막혔다.
회의장의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그리워졌다.
다시 들어갈까?
하지만 회의장은 내게 있어 상징적인 장소다.
내 어린 시절과 아버지를 떠올리게 하는 곳이다.
잠깐, 근데 이미 해결했으니까 괜찮지 않을까?
진지한 고민 끝에 나는 컨벤션센터로 향했다.
건물 안에 들어오자마자 훅 풍기는 냉기가 맛있었다.
살 것 같았다.
중소기업 사장들은 이미 떠났는지 회의장은 의자와 책상 정리하는 소리가 요란했다.
“오셨어요? 정리 다 해 가니까 잠깐만 앉아 계세요.”
앉아 있으랬다고 진짜 앉을 순 없지.
나는 직원들을 도와 의자를 치웠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제 가셔도 됩니다.”
“고생하셨습니다, 팀장님!”
“가보겠습니다!”
차출한 직원들을 돌려보내고 나서 나는 잠시 회의장을 둘러보았다.
모두 돌아가고 내 옆에 남은 것은 언제나 그렇듯이 채인하 한 명이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팀장님.”
“인하 씨도요. 태성 화학에서의 일도 끝났네요.”
“그러게요.”
열흘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시계를 보았다.
4시 50분.
애매한 시간이었다.
오늘은 이만하면 되겠지.
일 하나 해결하고 나면 어쩐지 허전한 느낌이다.
슬슬 집에나 가자고 말하려던 때였다.
나재홍에게서 전화가 왔다.
-지금 어디야?
“왜? 뭐 잘못된 거 있어?”
-내가 지금 잡으러 가게.
“……진짜 뭐 잘못됐어?”
진지하게 묻는데 나재홍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밥 먹으러 가자! 술도 먹으러 가자!
“……뭔 소리야?”
-사장님이 카드 주셨어! 야, 어디로 갈래?
이건 환영이다.
나는 채인하를 흘끗 보았다.
“인하 씨. 오늘 바쁜 일 있어요? 나재홍이 밥 먹자는데.”
“비싼 거 사 준대요?”
이 사람은 재벌집 막내따님인데 왜 이런대.
요즘 평직원들하고 어울려 다니더니 가끔 이렇게 자기 위치를 까먹는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장님이 카드 주셨대요.”
“아싸. 그럼 당당히 뽑아먹을 수 있겠군.”
“……?”
나는 어이가 없어져서 멍하니 채인하를 보았다.
채인하가 전화기에 다 들리도록 소리쳤다.
“소고기 먹으러 가요! 특수 부위!”
-좋은 생각이에요! 저 지금 차 끌고 갈 테니까 채경준 못 가게 붙잡아 두세요! 아, 어디 갈지 한번 찾아봐 주실래요?
“네!”
채인하가 조심스럽게 내 소매 끄트머리를 잡았다.
말은 참 잘 듣는다.
그렇다고 팔을 잡기는 좀 그런가 보다.
나는 얌전히 소매를 잡힌 채 채인하가 핸드폰을 뒤적이는 것을 구경했다.
매우 진지하게 근처 소고기집을 찾고 있었다.
나도 핸드폰을 꺼냈다.
[엄마~ 오늘 저녁 먹고 늦게 들어갈게~ 밥 사 준대]공짜 소고기는 못 참지.
* * *
치이익.
숯불 위에서 고기가 맛있는 소리를 냈다.
집게를 잡은 것은 나였다.
채인하는 당연하게도 고기를 구울 줄 몰랐고, 나재홍은 집게를 잡는 꼴을 보니 어색했다.
비싼 돈 주고 먹는 고기인데 태워먹을 순 없지.
나는 당장에 집게와 가위를 빼앗았다.
겉면이 살짝 익자마자 가위로 석둑석둑 잘랐다.
안쪽의 붉은 기가 조금 가실 때까지 올려뒀다가 함께 나온 버섯을 잘라 그 위에 얹었다.
그리고 나재홍과 채인하 앞에 각각 한 점씩 놔주었다.
둘은 기다렸다는 듯이 냅다 가져가더니 한입에 털어 넣었다.
뜨거울 텐데 잘도 먹는다.
“오, 이 집 맛있네. 인하 씨, 맛집 고르는 솜씨가 상당하시네요.”
“제가 소싯적에 소고기 좀 먹어봤거든요.”
얼씨구, 죽이 딱딱 맞는다.
나도 한 점 집어 들고는 소금을 살짝 찍었다.
원래 나는 쌈장파지만 첫 고기는 소금 인정한다.
처음 느끼는 뜨거움이 지나가고 나자 고기 본연의 기름진 맛이 느껴졌다.
소싯적 얘기하며 자랑한 이유를 알겠다.
고기가 굉장히 부드러웠다.
“와씨, 개맛있네.”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나왔다.
“그쵸? 연예인도 다녀갔다는 유명한 집이더라고요.”
채인하의 말에 나재홍이 크게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소주를 땄다.
입에 기름기가 돌자 절로 숟가락이 된장찌개로 향했다.
살짝 얼큰한 된장찌개를 떠먹자 조금 남아 있던 느끼함이 싹 씻겨 내려갔다.
알코올이 당기는 맛이다.
우리는 서로의 잔에 소주를 채워주었다.
“모두 수고 많으셨습니다.”
건배사 따위 할 시간에 고기 한 점을 더 먹겠다.
나는 인사와 동시에 잔을 부딪혔다.
소주의 독한 향이 목에 들어찰 때쯤 다시 고기를 집어넣었다.
이 집 진짜 잘하네.
정신없이 굽고 주워 먹기를 몇 분.
채인하가 문득 물었다.
예전부터 궁금했는데 이제야 물어보는 눈치다.
“나재홍 씨, 몇 살이에요?”
나는 기겁했다.
“안 돼! 그거 금기예요!!!”
나재홍의 나이는 절대 알아서는 안 되는 판도라의 상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