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Corporate Underling Who Excels at Work RAW novel - Chapter (357)
대기업 말단이 일을 잘함-357화(357/357)
357화. 나이 (2)
나는 나재홍의 나이를 모른다.
박혜나도 모른다.
우리는 일부러 묻지 않았다.
“……금기요?”
채인하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옆에서는 나재홍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가르쳐 줄까, 말까? 줄까, 말까?”
“자꾸 약 올릴래?”
한 대 때리려다가 참았다.
채인하가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새 술병을 까면서 답했다.
“얘는 저랑 박혜나 씨한테 말을 놓거든요.”
“아, 그건 봤어요.”
“저도 얘한테 말을 놔요.”
“아, 맞다.”
채인하도 눈치챈 듯했다.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물어봐서 동갑이면 상관없는데 만약에 나이가 다르면요?”
나재홍이 어리면 동생한테 계속 야, 소리 듣기가 거북해진다.
더 큰 문제는 내가 어릴 경우다.
나는 진지하게 말했다.
“얘한테 형이라고 부르는 건 죽어도 싫어요.”
나재홍한테 형이라고?
맙소사,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나재홍이 약 올리듯 혀를 날름거렸다.
저 미친놈이 취했네.
“혜나 씨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지금이야 편하게 야, 너 하면서 지낼 수 있는데, 나이 알아버리면 신경이 쓰이잖아요. 그래서 우리 셋은 서로 나이 몰라요.”
대충 느낌은 오긴 한다.
하지만 확신은 없다.
기껏 해봐야 한두살 차이일 텐데 외견으로 어떻게 구분하겠는가.
나재홍이 처음 말을 놓고 친구가 된 순간부터 우리는 나이를 암묵적으로 묻어버렸다.
우리 셋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냥 친구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어버렸는데 이젠 그게 편하다.
이제 와서 나이를 안다고 뭘 하겠는가.
채인하는 가만히 이야기를 듣다가 오, 하고 감탄사를 내질렀다.
“우와! 뭔가 로망 있어요. 멋있는데요? 이게 친구 사이라는 건가?”
나는 서둘러 대답했다.
“아뇨. 보통은 안 이렇습니다. 얘가 이상한 거예요, 얘가.”
누가 봐도 알 수 있게 손을 뻗어 나재홍을 가리켜 보이자 나재홍이 씨익 웃었다.
“나도 모든 친구들한테 다 이러는 건 아니야. 나이 모르고 친구 먹은 건 딱 둘밖에 없어. 야, 그 전에 냉면부터 시키자. 뭐 먹을래? 인하 씨도 냉면 먹을 거죠?”
“비냉.”
“물냉이요.”
대표로 후식 냉면을 시킨 나재홍이 고기를 불판 가장자리로 밀었다.
나는 빈자리에 양념갈비를 올렸다.
슬슬 배가 차오는데 이제 2차전 시작이다.
“근데 인하 씨한테는 씨, 자 붙여주네. 너 혹시 인하 씨 나이 알아?”
내가 묻자 나재홍이 젓가락을 물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 몰라. 물어봐도 돼?”
나는 엄격, 근엄, 진지하게 말했다.
“절대 안 돼. 인하 씨도 나이 가르쳐 주지 마세요.”
“어? 저는 왜요? 저도 친구 시켜주시는 거예요?”
채인하가 어쩐지 기대 가득한 눈길로 우리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어, 다른 이유였는데 뭐라 대답하지.
뭔가 친구에 대해 잘못된 예를 보여준 것 같은데.
“에이, 장난이에요. 그렇게 정색하면 제가 더 민망하잖아요. 제 나이 알면 팀장님 나이도 알려질까 봐 그런 거죠?”
정확하다.
채인하와 나는 동갑이었기 때문에, 채인하 나이만 알면 내 나이도 자동적으로 알게 된다.
지글지글 갈비 양념이 끓기 시작하는 걸 보며 나재홍이 입맛을 다셨다.
“저는 친구 해도 상관없는데. 채인하 씨가 기분 나쁘지 않겠어요?”
“저야 좋죠! 신기했거든요. 이게 진짜 친구구나, 하고.”
나는 정색했다.
“절대 아닙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얘가 이상한 거예요.”
채인하 씨도 친구 있잖아요, 하고 말하려다 급히 멈췄다.
우리와는 다른 환경에서 자랐으니 본인이 진짜 친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을 수도 있다.
친구가 있더라도 관계가 다를 수도 있고.
섣불리 물어볼 만한 게 아니었다.
“그럼 말 놓는다?”
나재홍은 거리낌이 없었다.
상대가 누군지 알고 있으면서도 그 배경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건 나재홍의 장점이기도 하다.
다만 아무리 친구 하자고는 했어도 너무나 갑작스러운지 채인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갈비를 뒤집으며 이마를 짚었다.
“원래 저런 녀석이에요.”
“오…… 그럼 저도 말 놔야 돼요?”
“그건 네 마음이지. 박혜나는 동급으로 보이는 것 같아서 싫다고 존댓말 쓰던데.”
박혜나는 나와 나재홍, 둘 다에게 존대를 한다.
친하지 않다기보다는 나재홍 때문이다.
말을 놔버리면 나재홍에게 휩쓸려 들어갈 것 같아서 싫댔다.
연수원에서 나와 나재홍이 티격태격하는 걸 보고서 한 말이다.
나재홍과 엮이면 타락하는 느낌이 든다나.
무슨 소리인지는 알겠다.
나도 한 성격 한다고 생각했는데 얘하고 같이 있으면 평범해지는 느낌이 든다.
나재홍은 위에 서는 게 당연한 부류의 인간이었다.
평생 부족함을 모르고 살았으며 실패를 겪어본 적도 없다.
자신이 잘났다고 생각하며 실제로도 잘난 놈이었다.
너무 당당하게 잘나서 그런지 기분이 나쁘지도 않았다.
실수를 해도 ‘그래서 그게 뭐 어때?’ 하고 넘어가는 성격이었다.
뒤끝도 없고 지난 일을 돌아보며 걱정하지도 않는다.
멘탈이 정말 강철 같은 놈이다.
그래서 처음 나재홍이라는 사람을 접하면 당황하게 마련이지만, 일단 친해지면 얘만큼 편한 놈이 없었다.
“으음…….”
채인하는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결정했어요. 존대할래요.”
“엥? 왜?”
나는 갈비를 먹기 좋게 잘라 각자의 앞에 놔주었다.
먹이를 받아먹는 아기 새인 양 둘이 고기를 집어 먹었다.
이젠 아주 자연스럽다.
“나재홍 씨랑 팀장님이 서로 말 놓는 사이잖아요. 제가 나재홍 씨한테 말을 놔버리면 족보가 꼬여요.”
“에이, 얘는 그런 거 신경 안 쓸 텐데. 박혜나도 비슷한 상황인데 멀쩡하게 대화하거든.”
“저는 팀장님이랑 같이 일하는 사이잖아요. 팀장님을 모시고 있다고요.”
“그건 그렇네?”
직장 생활에 대해서 채인하가 나재홍에게 훈계를 하는 날이 오다니.
참 신기하다.
나는 감회가 새로운 심정으로 갈비를 우적우적 먹었다.
어, 이 집 갈비로 맛있네.
비빔냉면이랑 같이 먹으면 맛있겠다.
나재홍이 뭔가 고민하는 듯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내 얼굴이 환해졌다.
“모르겠다. 나는 그냥 말 놓을래. 너 편한 대로 해.”
“오케이. 협상 끝.”
둘 사이에 협상이 체결된 모양이다.
둘은 약속한 것처럼 서로 잔에 술을 따르더니 동시에 들이켰다.
도원결의네.
연수원 마지막 날이 생각났다.
우리는 회식 때 게다리로 도원결의 했는데.
둘이 신나서 부어라 마셔라 하고 있을 때 후식 냉면이 나왔다.
새로 친해져서 신난 둘은 내버려 두고 나는 비빔냉면과 고기에 집중하기로 했다.
먹기 좋게 면을 가위로 자른 뒤 식초와 겨자를 뿌리고 양념과 잘 비볐다.
이미 배가 어느 정도 찼는데도 매콤하고 상큼한 냄새가 식욕을 자극했다.
미리 뼈를 발라둔 갈비 살코기를 면에 얹고 돌돌 말았다.
입안에 넣자마자 먼저 느껴진 것은 알싸한 향이었다.
겨자를 좀 많이 뿌렸나 보다.
하지만 오히려 좋았다.
그다음으로 달달하고 매운 양념과 고기가 어우러지면서 혀를 자극했다.
익히 아는 맛이다.
맛있는 맛.
“2차는 어디 갈 거야?”
나재홍이 물었다.
슬슬 2차 얘기를 꺼낼 때가 되긴 했지.
채인하가 잽싸게 또다시 핸드폰을 꺼내 주위 맛집을 뒤지기 시작했다.
굉장히 즐거워 보였다.
“저 옛날부터 가보고 싶었던 곳이 있긴 한데요.”
채인하가 수줍게 말을 꺼냈다.
“포장마차 가도 돼요?”
다음 행선지가 정해졌다.
* * *
2차에 이어 3차까지 이어진 술자리는 새벽이 되어서야 끝났다.
채인하는 꼬부라진 목소리로 외쳤다.
“야! 나재홍! 너 사실은 어리지? 딱 봐도 어린 티가 나더라.”
“아니거든? 동안이거든?”
“동안은 개뿔. 아, 철이 안 들면 어려 보인다고는 하더라.”
“야, 취했냐?”
“어. 취했다. 어쩔래.”
존댓말 하겠다던 협상은 어디 가고 둘은 신나게 티격태격하고 있었다.
그래도 진짜 싸우는 건 아니라서 놔뒀다.
사람이 나다니지 않는 길 한복판을 차지하고 둘이 비틀거리는 동안 나는 택시를 잡았다.
당연히 채인하를 먼저 태워 보내야겠지만 어쩐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이렇게 먹어본 적도 없을 것 같은데.
나는 택시 문을 연 채로 나재홍에게 말했다.
“야, 너는 혼자 알아서 잘 갈 수 있지?”
“고럼!”
비틀거리긴 해도 집에 갈 정신은 있어 보였다.
나도 비슷한 상태다.
워낙에 많이 마셔서 택시 잡을 정신만 가까스로 남아 있는 상태였다.
“그럼 우리 먼저 간다? 채인하 씨는 집에 바래다 줘야 할 것 같아서.”
“우와! 팀장님이 바래다 준대!”
채인하가 종종거리며 택시로 다가와 덥석 안에 탔다.
누군가가 문을 잡아주는 게 굉장히 익숙한 몸짓이었다.
채인하는 밖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나재홍 잘 가~ 다음에 보면 존댓말 해줄게~”
“어, 그래. 잘 들어가라~”
둘이 아주 죽이 잘 맞는다.
나도 나재홍에게 손을 흔들어주고는 택시에 올라탔다.
나재홍은 알아서 잘 가겠지, 뭐.
“이태원 OO길 XX번지요.”
채인하네 집은 사실 태성 회장님 댁이다.
나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
다행히 택시 기사는 이 주소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게, 태성 일가가 이태원에 산다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만 정확한 주소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다만 도착하고 나서 조금 감탄하긴 했다.
딱 봐도 부잣집이라 그런가 보다.
나는 차 안에서 반쯤 기절한 채인하를 부축해 내렸다.
혼자 보냈으면 큰일날 뻔했네.
사실 이 골목 자체는 한 번 와본 적이 있다.
채인하의 오빠인 채한익의 저녁 식사 자리에 참석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채한익은 독립하긴 했지만 본가 근처에서 살고 있었다.
정작 그 본가를 오게 될 줄은 몰랐지만.
채인하가 들어가는 것만 보고 얼른 가서 자야지.
딱 봐도 거대한 정문으로 다가가자 당연하게도 경비원이 나왔다.
술 취한 남녀 둘이 다가오자 의아한 모습이다.
“무슨 일로 오셨…… 채인하 아가씨?”
“네. 인하 씨가 많이 취해서요.”
그 후에 벌어진 일은 순식간이었다.
경비원이 경계하며 무전을 치더니 안에서 3명이 더 나왔다.
한 명은 채인하를 업고 집으로 들어갔고, 나머지는 날 에워쌌다.
“밤이 늦어서 저도 가봐야 하는데요.”
“잠시만 기다려 주시죠.”
험상궂은 눈초리였다.
한밤중에 막내 아가씨한테 술을 잔뜩 먹여 데리고 오니 이상하다 이건가.
이해는 하지만 좀 억울하다.
채인하가 신나서 달린 건데.
심지어 우리 중에 제일 즐거워 보였다.
“저 직장 동료인데요. 정확히는 팀장…….”
“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말이 안 통한다.
벽을 보고 얘기하는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나는 경비원들에게 둘러싸인 채 문 앞에 서 있게 되었다.
지나가는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다.
남들에게 이상하게 보일 것 아닌가.
나도 술에 취한 상태라 멍하니 하늘만 올려다보고 있자 안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누군가 나오는 듯했다.
“어머, 채경준 팀장이네.”
중년 여성의 목소리였다.
고개를 내리자 어렴풋한 불빛 사이로 눈에 익은 사람이 보였다.
채인하의 어머니이자 태성 그룹의 안주인, 백화승 사장이었다.
백화승은 경비원들에게 일렀다.
“태성의 중요한 사람이야. 얼굴 잘 기억해 둬. 나중에 혹시라도 실수하지 말고.”
“네, 알겠습니다. 사장님.”
둘러싸고 있던 경비원들이 내게 넙죽 인사하고는 물러났다.
졸지에 태성 회장 댁 프리패스 얼굴이 되어버렸다.
“안녕하십니까, 사장님.”
“응, 오랜만이네.”
인사만 하고 돌아가려 했는데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잠깐 들어와. 그이도 기다려.”
뭐라고?
나는 찬물을 뒤집어쓴 기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