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dwarf in his previous life, but an artistic genius in his current life RAW novel - Chapter 108
106화 왕가의 보물
스톡홀름 시내의 인터콘티넨털 그랜드 호텔.
스위트룸에 들어선 정환은 곧장 푹신한 소파에 몸을 던졌다.
무척 피곤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아마 칼 16세와 함께 마셨던 진한 커피 때문인 것 같았다.
정환은 칼 16세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국왕이 아니라 한 사람의 아들로서 부탁을 한 것이었기 때문에 차마 거절하기가 힘들었다.
‘뭐, 꼭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지만.’
칼 16세가 복원을 부탁한 것은 평범한 주얼리가 아닌 사라진 왕가의 보물이었다.
그것도 백 개가 넘는 다이아몬드로 꾸며진 최고의 보물.
이것을 복원할 기회는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정환은 어쩌면 이것을 통해 예술의 끝에 한 발짝 더 다가갈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
다음 날, 아침.
정환은 호텔 레스토랑에서 간단히 아침을 먹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테이블로 다가와 반갑게 인사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미스터 리.”
왕궁 직원, 벤슨이었다.
‘아. 어제 티아라 복원 일정을 상의하기 위해 만나기로 약속했지.’
그런데 벤슨 옆에는 처음 보는 사람이 있었다.
벤슨은 자신과 동행한 사람을 소개했다.
“아. 이쪽은…….”
“제 티아라를 감정한 맹도르시군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정환이 먼저 알아보고 인사하자 리암은 눈을 크게 떴다.
“혹시 두 분, 구면이십니까?”
벤슨이 묻자 정환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동행하신 분의 목이 굽어 있고 손에는 지문이 하나도 없길래 당연히 주얼리 하우스의 맹도르일 거라 생각했습니다.”
리암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굽은 목을 만졌다.
구부정하게 휜 목, 지문이 완전히 닳아버린 손.
확실히 이것들은 대부분의 맹도르들이 가진 신체적 특징이었다.
‘몇 초 만에 이걸 파악하다니……. 눈썰미가 보통이 아닌데?’
리암이 정환에게 손을 내밀었다.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프랑스 하이 주얼리 브랜드 로메의 수석 맹도르 리암입니다.”
“식사 안 하셨으면 같이하시죠.”
“감사합니다.”
정환은 벤슨, 리암과 함께 식사하면서 티아라 복원과 관련한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저희 아버지가 복원 작업에 참여했습니다. 덕분에 어렸을 적부터 바덴 프린지 티아라와 관련된 많은 이야기를 들었죠.”
“아, 그렇다면 이번 복원에 큰 도움이 되겠네요. 관련된 이야기를 좀 들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리암은 아침을 먹는 동안, 정환에게 사라진 바덴 프린지 티아라에 얽힌 이야기를 쭉 늘어 놓았다.
그리고 정환은 그런 리암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아침 식사가 끝날 무렵, 벤슨이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말했다.
“복원 작업은 리암의 개인 작업실에서 진행될 겁니다. 어지간한 주얼리를 전부 제작할 수 있는 장비가 갖춰져 있으니까요.”
벤슨은 이 내용을 다시 확인하려는 듯 리암과 눈을 마주쳤다.
리암이 고개를 끄덕이자 벤슨이 말을 이어갔다.
“물론, 국립 박물관의 복원 사무소도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는 보는 눈이 많습니다.”
벤슨의 표정을 보아하니 스웨덴 왕가에서는 이 복원과 관련된 이야기가 외부에 새어 나갈 것을 염려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정환은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했다.
복원 작업을 시작도 하기 전에 주변이 괜스레 시끄러워지는 건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아침 식사가 끝난 후 정환은 리암과 호텔 가까운 곳에 있는 스웨덴 왕립 도서관으로 향했다.
사라진 바덴 프린지 티아라의 자료를 모두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도서관 직원은 미리 연락받은 듯 정환과 리암을 곧장 지하 문서 저장고로 안내했다.
“여기 있는 게 관련 자료 전부입니다.”
“고맙습니다.”
정환은 장갑을 끼고 문헌 속 바덴 프린지 티아라의 기록들을 하나씩 훑었다.
확실히 인터넷에 떠도는 자료와는 다른 부분이 많았다.
“이 문헌을 먼저 보길 잘했네요. 인터넷에서 본 것과는 확실히 달라요.”
“다행입니다. 그럼 드로트닝홀름 궁전으로 갈까요?”
“좋습니다.”
도서관에서 자료를 확인한 두 사람은 드로트닝홀름 궁전으로 향했다.
궁전 지하에 보관하고 있는 열화판 티아라를 직접 보기 위해서였다.
정환과 리암은 지하 보관소에 들어갔다.
왕가의 보물이 보관된 곳인 만큼 보안이 무척 삼엄했다.
보관소에 근무하는 직원이 삼중으로 굳게 닫힌 철문을 열었다.
그리고 마침내 정환은 복원에 실패한 열화판 티아라와 대면할 수 있었다.
정환은 그 티아라를 보자마자 맹도르들이 복원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깨달았다.
‘남아 있는 바덴 프린지 티아라의 기록에 너무 의지했기 때문이야.’
이러한 사실을 증명하듯 열화판 바덴 프린지 티아라에는 미학적으로 비어 있는 부분들이 많았다.
‘기록에 없었으니 맹도르들도 이 공백을 그대로 놔둘 수밖에 없었겠지.’
확실히 복원된 티아라에는 정환의 기준에 못 미치는 점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렇게 아쉬운 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맹도르들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는 것이 느껴지는 부분도 있었다.
특히 프린지에 알알이 박힌 다이아몬드의 세공 디테일은 정환 역시 조금 감탄할 정도였다.
정환이 이 티아라를 가만히 지켜보던 그때, 머릿속에 어떤 흐릿한 이미지가 스쳐 갔다.
정환은 곧장 크로키북을 펼치고 연필을 잡았다.
이미 사라진 티아라를 다시 디자인하는 것.
그것은 마치 낚시꾼들이 예민한 물고기를 잡는 것과 같았다.
정환은 낚시꾼이 된 것처럼 머릿속에 찌를 드리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뭔가가 바늘을 톡톡 건드렸다.
머릿속을 간지럽히는 그 움직임을 통해 정환은 바덴 프린지 티아라의 윤곽을 조금씩 잡아가고 있었다.
프로 낚시꾼들이 찌를 건드리는 물고기의 움직임만으로도 어종을 파악할 수 있는 것과 비슷했다.
그렇게 크로키북 위에 스케치가 한 장, 한 장 쌓여갔다.
이 작업을 곁에서 지켜보던 리암은 숨이 멎을 듯했다.
‘세상에.’
리암은 단 한 번도 바덴 프린지 티아라의 실물을 본 적이 없었다.
그저 복원 작업에 참여했던 아버지에게 이야기만 전해 들었을 뿐이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자란 리암은 바덴 프린지 티아라가 어떻게 생겼을 것이란 막연한 상상만 해 왔다.
리암이 수십 년을 하이 주얼리에 몸 바쳐오는 동안 그 상상은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상상 속의 티아라는 항상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했다.
하지만 정환의 스케치를 본 순간, 리암은 티아라 주변에 짙게 끼어 있던 안개가 한순간에 걷히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한 가지 확신이 생겼다.
이번 복원 작업이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이었다.
***
그렇게 완성된 최종 스케치를 토대로 본격적인 복원 작업이 시작됐다.
정환은 제일 먼저 바덴 프린지 티아라의 뼈대를 만들었다.
리암은 정환이 은으로 도금된 와이어를 쓰지 않는 것에 의아해했다.
물론 은이 조금 더 고급스럽긴 하지만 다이아몬드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금세 휘어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정환은 긴 설명을 하지 않고 직접 튼튼한 뼈대를 만들어 리암에게 보여줬다.
“어떻게 이렇게 만든 겁니까?”
정환은 인챈트를 제외한 나머지 제작법을 가감 없이 리암에게 보여줬다.
처음에는 리암이 그럭저럭 따라 할 만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리암은 정환의 손놀림을 따라가기가 어려웠다.
특히 정환이 밴드 부분에 새긴 패턴은 따라할 엄두조차 나질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한 거야?’
정환의 섬세하면서도 과감한 손놀림을 보고 있으니 리암은 입안이 바싹바싹 마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리암은 포기하지 않고 정환의 기술을 어깨 너머로 열심히 따라 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보고 있으면 어떤 장인과 제자를 보는 것 같았다.
그렇게 바덴 프린지 티아라의 뼈대가 전부 완성될 무렵, 두 사람은 가장 큰 문제와 대면했다.
그것은 바로 티아라에 채워 넣을 수많은 다이아몬드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리암은 머리를 긁적였다.
“문헌 기록만 봐도 바덴 프린지 티아라에는 백 개가 넘는 최고급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다죠. 미스터 리가 복원한 스케치만 봐도 그렇고요.”
함께 회의에 참여한 벤슨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는 그만한 다이아몬드를 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겁니다. 왕가 재정으로는 어림도 없고 아마 의회에서도 난감해할 겁니다.”
“파리에 있는 로메 본사에는 다이아몬드가 꽤 있을 겁니다. 들어가서 훔쳐 올까요?”
리암이 농담을 건네자 벤슨은 피식 웃었다.
“그거 좋은 생각인데요? 대신, 프랑스 경찰에게 잡히면 스웨덴 왕실은 모른 척할 겁니다.”
“그거 너무하네요.”
두 사람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함께 고민하고 있던 정환이 입을 열었다.
“잠깐만. 이렇게 하면 되지 않나요?”
리암과 벤슨이 정환을 쳐다봤다.
“지금 왕궁에 보관된 티아라에 박힌 다이아몬드를 재활용하는 거죠. 필요하다면 그때그때 다이아몬드를 옮겨 붙이기만 하면 되잖아요.”
벤슨이 눈을 크게 떴다.
“과연, 그러면 낭비 없이 티아라를 복원할 수 있겠군요. 복원에 실패한 티아라긴 하지만 엄연히 왕가의 보물이므로 완벽히 보존해야 한다는 생각에 갇혀 있었네요. 게다가 미스터 리가 말한 것처럼 필요에 따라 옮겨 붙일 수만 있다면 크게 상관이 없을 것 같고요.”
“그러려면 누구한테 허락을 받아야 하죠?”
리암이 묻자 벤슨이 핸드폰을 흔들었다.
“왕가 소유의 보물이잖습니까? 폐하께 바로 여쭤보겠습니다.”
칼 16세는 정환의 아이디어를 흔쾌히 허락했다.
어차피 티아라 자체의 가치가 훼손되는 일이 아니니 크게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삼엄한 경비 아래, 리암의 작업실로 열화 판 티아라가 옮겨졌다.
튼튼한 유리관에 담긴 티아라를 본 리암은 마음 한쪽이 울적해졌다.
오래전, 리암의 아버지가 복원 작업에 참여해서 만든 것이 바로 이 티아라였기 때문이다.
이 티아라를 보고만 있어도 아버지의 손길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그럼, 복원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정환은 먼저 티아라에 붙은 다이아몬드를 떼어냈다.
정환의 손놀림은 마치 중요한 수술을 집도하는 의사처럼 섬세했다.
그렇게 모든 다이아몬드를 떼어낸 정환은 그것들을 자신이 만든 뼈대에 천천히 옮겨 붙였다.
무척 지루한 반복 작업이었다.
하지만 정환은 몇 시간 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복원 작업에 열중했다.
그런 정환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리암은 전율했다.
마치 오래전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고 있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티아라가 여기서 완성되고 있다.’
그리고 리암은 한 가지 사실을 더 깨달았다.
자신이 정환의 솜씨를 모두 흡수할 수 없을 것이란 사실이었다.
그러자 가슴속에 오기가 생겼다.
‘그렇다면 할 수 있는 데까지 최대한 흡수해 보겠어.’
리암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후 두꺼운 돋보기를 끼고 정환의 작업을 보조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복원된 티아라가 공개된다는 소식이 유럽 전체에 퍼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