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dwarf in his previous life, but an artistic genius in his current life RAW novel - Chapter 113
111화 비첸차 주얼리 페어 (2)
비첸차 주얼리 페어가 열리기 이틀 전.
정환은 정성일과 함께 이탈리아 비첸차로 향했다.
인천 국제공항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 국제공항까지는 비행기로 12시간 30분이 걸렸다.
장시간의 비행이었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주얼리 페어가 열리는 비첸차까지 가려면 3시간 30분짜리 비행이 아직 남아 있었다.
정환과 정성일은 비행에 지친 몸을 이끌고 터미널 카페로 향했다.
공항 커피라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이탈리아의 명성에 맞게 커피 맛이 훌륭했다.
에스프레소를 마시던 정환이 정성일에게 농담을 건넸다.
“여기에 얼음을 넣어 달라고 하면 어떻게 될까요?”
“운이 좋으면 추방되고 운이 나쁘면 카페 주인이 마피아처럼 대표님에게 총을 쏘지 않을까요?”
정환은 수염이 덥수룩한 터미널 카페 주인장에게 커피잔을 들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주인장은 넉살 좋은 웃음을 지었다.
두 사람이 탄 비행기가 베로나 공항을 향해 날아올랐다.
정환은 조그마한 창문 너머로 빠르게 스쳐 가는 풍경을 바라봤다.
이탈리아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아펜니노산맥의 장엄한 풍경이 정환을 반기고 있었다.
아펜니노산맥을 지나자 끝도 없이 넓은 포도밭들이 펼쳐졌다.
비행기가 베로나 공항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게이트를 빠져나온 정성일이 정환에게 말했다.
“렌트한 차를 가져오겠습니다.”
정성일이 예약한 차는 커다란 독일제 SUV였다.
운전석에 앉은 정성일은 내비게이션에 비첸차 박람회장을 찍었다.
“도착까지는 40분 정도 걸릴 것 같습니다. 일부러 큰 차로 빌렸으니 그때까지 편하게 누워 계십시오.”
“괜찮습니다. 피곤하면 말씀하세요. 제가 운전할 테니까.”
정성일은 그럴 일 없다는 듯 부드럽게 핸들을 돌리며 출발했다.
비첸차 박람회장은 고속도로 가까이에 있었다.
한 가지 인상적인 것은 박람회장이 킨텍스 같은 곳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넓다는 점이었다.
주차장에 차를 주차한 정성일이 박람회장을 보며 감탄했다.
“박람회장이 1층이네요.”
“땅이 넓으니 층을 높일 필요가 없었겠죠. 아, 리암!”
박람회장 입구에는 먼저 도착한 리암이 정환을 기다리고 있었다.
“미스터 리! 비행은 괜찮았습니까?”
“네. 편하게 왔습니다. 리암은 어땠습니까?”
“스톡홀름에서 베로나까지는 고작해야 3시간 30분밖에 안 걸리는데요, 뭘. 미스터 정도 반가워요.”
리암은 정성일과도 짧게 인사를 나눴다.
간단히 안부를 나눈 세 사람은 박람회장으로 향했다.
귀금속이 전시되는 박람회장답게 입구에는 여러 경비원이 삼엄하게 지키고 있었다.
정환은 자신을 막아선 경비원들에게 목에 찬 이름표를 들어 보였다.
관계자라는 것을 확인한 경비원이 길을 텄다.
박람회장 내부에는 몇몇 인부들이 막바지 부스 공사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저희 에테르눔 부스는 A-15 구역에 있습니다.”
정환은 일행과 함께 A-15 구역으로 향했다.
에테르눔 부스는 굳이 애써 찾을 필요가 없었다.
이미 그 존재 자체만으로 다른 브랜드 부스에 비해 확연히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다른 브랜드 부스는 마치 암컷에게 구애하기 위해 털을 잔뜩 부풀린 수컷 새를 보는 것 같았다.
투명한 유리를 잔뜩 깔고 그 위에 화려한 주얼리를 넘칠 것처럼 전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했다.
반면 에테르눔의 부스는 고즈넉한 돌담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얼핏 보기엔 주얼리를 전시하고자 하는 마음마저 없어 보였는데, 이런 점이 오히려 호기심을 크게 자극하고 있었다.
리암이 부스 입구 위에 붙은 에테르눔 로고를 가리켰다.
“이 로고, 누가 디자인한 겁니까? 대표님이 하셨어요?”
“아뇨. 회사 직원이 했습니다.”
“이야. 이거 무한대 기호를 에테르눔 로고에 녹여 낼 줄은 미처 몰랐네요. 덕분에 영원함이라는 의미가 더욱 강조된 것 같아요.”
정환은 돌담 부스를 손끝으로 가볍게 만졌다.
사실 여기 오기 전까지 정환은 조금 걱정하고 있었다.
조선 궁궐의 전통적인 돌담을 비첸차 현지 인부가 잘 살려 냈을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환이 행사 이틀 전에 미리 온 이유가 여기 있었다.
설치된 부스가 마음에 안 들면 자신이 전부 뜯어고칠 생각을 했던 것이다.
다행히 돌담은 정환의 마음에 충분히 들 만큼 전통적인 분위기를 물씬 뿜어내고 있었다.
이 돌담을 보며 연신 감탄하던 리암이 정환에게 말했다.
“다음에 서울에 오면 꼭 경복궁을 산책해 봐야겠네요.”
“기회가 된다면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그럼 들어가 볼까요?”
정환과 일행은 에테르눔 부스를 한 바퀴 돌면서 어떤 주얼리를 어디에 배치할지 논의했다.
이미 큰 틀은 잡혀 있었지만 현장을 보면서 다시 한번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박람회장 밖으로 나온 리암이 말했다.
“주얼리 디스플레이는 오늘 오후부터 진행될 겁니다. 출출한데, 뭐라도 먹으러 갈까요?”
“좋죠. 가까운 곳이면 좋겠는데요.”
그때 정환이 두 사람에게 말했다.
“아! 죄송하지만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정환이 몸을 빙글 돌리자 정성일이 물었다.
“필요하신 게 있으십니까?”
“괜찮습니다. 잠깐 확인할 게 있어요.”
정환은 홀로 에테르눔 부스로 다시 돌아갔다.
에테르눔 부스 전체에 인챈트를 새기기 위해서였다.
정환이 선택한 인챈트는 바로 4성 환상계 인챈트인 공간 왜곡이었다.
공간 왜곡 인챈트는 아크 메이지들이 미로 함정을 만들 때 자주 쓰던 인챈트였다.
‘이 인챈트가 새겨진 공간에 들어서면 좁은 곳도 무척 넓게 느껴지게 할 수 있지. 마음만 먹으면 한 평 남짓한 공간에서도 종일 헤매게 할 수 있을 정도니까.’
하지만 정환은 부스를 구경하러 온 관계자들을 미아로 만들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관람객의 동선에 맞춰 공간 왜곡 인챈트의 수위를 적절히 조절했다.
정환이 인챈트를 완벽히 마치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대략 20분 정도였다.
‘4성급인데 20분이라…. 나쁘지 않아.’
시간을 확인한 정환은 몇 가지 인챈트를 더 새긴 후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입구 주변에서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렸다.
목에 단 이름표를 보아하니 다른 브랜드의 직원들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그냥 지나쳤겠지만 ‘에테르눔’이라는 단어가 들리자 정환은 발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에테르눔 부스 봤어?”
“딱 보면 알지. 전형적인 아시안 브랜드 같아 보이던데?”
“외관에서 힘을 다 뺀 걸 보아하니 분명 알맹이는 보잘것없을 거야.”
“그런데 부스를 그런 식으로 만들어도 되는 거야? 규정에 어긋나지 않아?”
“절묘하게 규정에 맞췄더라고. 어차피 망할 게 분명해. 신생 브랜드면 당연히 주얼리를 드러내야지 바보같이 꼭꼭 숨겨 놓으면 누가 와서 보겠어?”
사실 정환은 여러 언어가 뒤섞인 이들의 말을 모두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들의 뉘앙스와 표정을 통해 어떤 내용인지는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그때 리암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미스터 리. 우리 시뇨리 광장으로 가서 식사할까요? 괜찮은 노천 식당을 알고 있습니다. 지금 출발하면 딱 해가 지겠네요. 노을을 보면서 와인이나 한잔하시죠.”
“좋죠.”
정환은 리암이 에테르눔을 험담하던 사람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 것을 보고 피식 웃었다.
리암 역시 오픈 당일이 되면 저런 가치 없는 험담이 쏙 들어갈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
비첸차 주얼리 페어가 열렸다.
유럽 최고의 주얼리 페어라는 명성에 걸맞게 수천 명의 사람이 박람회장을 빼곡히 채웠다.
그리고 이 박람회를 심드렁한 눈빛으로 보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
하이 주얼리 브랜드의 관계자들과 맹도르들이었다.
사실 이들은 이런 박람회나 신생 브랜드의 런칭 행사에는 잘 참석하지 않았다.
이름난 잔치에 먹을 게 없다는 말처럼 겉만 화려한 신생 브랜드 런칭 행사는 딱히 볼만한 게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얼리 브랜드 관계자들은 마치 약속한 것처럼 에테르눔 부스 앞으로 모였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 에테르눔을 런칭한 것이 바로 정환이었기 때문이다.
몇몇 관계자들이 이를 두고 투덜거렸다.
“아무리 미스터 리가 바덴 프린지 티아라를 복원했다 하더라도 굳이 우리가 에테르눔 부스를 볼 필요가 있나?”
“그것만으로도 와 볼 이유가 충분하죠. 너무 고깝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심지어 윌리엄까지 왔으니까요.”
“윌리엄? 카르티에의 맹도르 윌리엄?”
모두의 시선이 윌리엄이라 불린 남자에게 향했다.
그들과 눈이 마주친 윌리엄이 까딱,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윌리엄이 왔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이들이 이렇게 윌리엄을 인정하는 이유.
그것은 윌리엄의 탁월한 세공술 때문이었다.
다른 브랜드의 맹도르조차 한 수. 아니, 두 수는 접고 들어가야 할 만큼 윌리엄의 기술은 뛰어났다.
게다가 디자인 센스 역시 탁월했다.
그래서인지 윌리엄의 주얼리 디자인이 카르티에 전체의 분위기를 만든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런데 윌리엄 표정이 안 좋은데?”
“윌리엄도 사라진 티아라를 복원하고 싶어 했잖아요. 선수를 빼앗겼으니 기분이 좋을 수 없겠죠.”
이들의 말대로 윌리엄은 기분이 그리 좋지 않았다.
사라진 티아라를 누구보다 훌륭히 복원해 낼 자신이 있었는데, 정환이 이것을 먼저 성공시켜버렸기 때문이다.
윌리엄에게 정환의 존재는 마치 목 안에 낀 가시와 같았다.
그래서 윌리엄은 에테르눔을 누구보다 먼저 확인하러 왔다.
에테르눔이 견제해야 할 브랜드라면 더 크기 전에 빨리 짓밟아 버려야 하니까.
반면 다른 관계자들은 여전히 에테르눔을 보며 코웃음을 치고 있었다.
정환이 지금까지 무슨 일을 해 왔든 하이 주얼리는 쉽게 손댈 수 없는 영역이라는 생각이 확고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에테르눔 부스가 열렸다.
윌리엄은 망설이는 관계자들을 뒤로한 채 제일 먼저 부스에 입장했다.
목에 낀 가시를 빨리 뽑아 버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부스에 입장한 윌리엄의 눈에 먼저 들어온 것은 고즈넉하게 뻗은 돌담들이었다.
그런데 돌담 위에 얹어진 기왓장의 재질이 남달랐다.
‘기왓장을 도자기처럼 하나하나 구워 만든 건가? 느낌 있네. 뻔한 아시아풍으로 꾸몄을 줄 알았는데.’
돌담 위를 장식한 기왓장들은 하나하나가 작품이라 여겨도 될 만큼 만듦새가 훌륭했다.
윌리엄은 한동안 산책하듯 돌담 사이를 거닐었다.
박람회장을 돌아다니며 답답했던 마음이 조금씩 트이더니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해졌다.
우선, 주변이 너무 고요했다.
분명 박람회장 주변은 수많은 사람으로 인해 귀가 아플 정도로 왁자지껄했다.
그런데 그 소음은 윌리엄이 에테르눔 부스에 들어서자마자 완전히 사라졌다.
부스 내부에는 윌리엄의 발소리만이 고요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보다 더 이상한 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 돌담길이 아무리 걸어도 끝이 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윌리엄은 마치 미로에 들어온 것만 같았다.
‘분명히 5분 정도는 걸은 것 같은데? 이 정도 규모면 박람회장 전체를 쓴 거 아냐?’
에테르눔의 부스 크기는 다른 브랜드와 크게 다를 게 없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오히려 훨씬 작은 편에 속했다.
그때 코너를 꺾어 들어간 윌리엄은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뱉었다.
돌담 내부에 자리 잡은 조그마한 쇼룸.
그 안에 담긴 것은 윌리엄이 태어나서 처음 보는 주얼리였다.
차분한 색감을 지닌 굵은 실로 아름답게 매어진 매듭.
그리고 그 매듭마다 매어진 금실과 아래에 매달린 화려한 나비 문양.
비취를 세밀하게 깎아 만든 나비 문양의 날개에는 다이아몬드, 루비와 같은 귀금속들이 알알이 박혀 있었다.
‘전통 장신구를 이런 방식으로 재해석하다니.’
윌리엄 역시 아키모토에서 시도했던 전통 장신구의 재해석이 어떻게 실패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전통을 강조했지만 결국 유럽 주얼리의 분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삼작노리개는 그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넘어서서 유럽풍이 만연한 주얼리 업계에 새로운 정답을 보여 주고 있었다.
유럽 주얼리 업계가 들썩일 만큼 발칙한 도전이었다.
하지만 평생을 유럽 주얼리에 몸을 던져 온 윌리엄도 인정할 수밖에 없을 만큼 훌륭한 정답이기도 했다.
“오! 세상에…….”
윌리엄은 뒤에서 들린 탄성에 고개를 돌렸다.
에테르눔의 실패를 점쳤던 다른 관계자들 역시 노리개와 같은 주얼리에 완전히 매료되어 있었다.
놀라움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한 번 더 코너를 꺾자 등장한 금빛으로 번쩍이는 금관과 금관모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오밀조밀하게 새겨진 패턴이나 조그마한 장식은 비첸차 그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금 세공품이었다.
그리고 이것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바로 이 금관이 뿜어내는 압도적인 분위기였다.
금관과 대면한 윌리엄은 마치 왕을 알현한 평민처럼 허리를 깊숙이 숙여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동안 금관과 금관모를 멍하니 감상하던 윌리엄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에테르눔은 윌리엄이 짓밟을 수 있는 새싹이 아니었다.
‘이미 거대하게 자라 버린 거목이야.’
그렇게 에테르눔 부스를 나온 윌리엄은 아쉬운 마음에 뒤를 돌아봤다.
잠시 갈등하던 윌리엄이 다시 에테르눔 부스에 들어갔다.
에테르눔 부스에서 느꼈던 그 감각을 다시 한번 느껴 보고 싶어서였다.
아직까지 에테르눔 부스에 들어가지 않았던 관계자들이 그 모습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위, 윌리엄이 다시 들어간 거야?”
그 덕분에 자연스럽게 다른 관계자들 또한 에테르눔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생각지도 못한 결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