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dwarf in his previous life, but an artistic genius in his current life RAW novel - Chapter 114
112화 비첸차 주얼리 페어 (3)
정환의 전략은 정확히 먹혀들어 갔다.
업계 관계자들의 입소문을 타고 에테르눔이라는 브랜드가 비첸차 전체에 퍼진 것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지간해서는 신생 브랜드 부스를 살펴보지 않는 하이 주얼리 브랜드 관계자와 맹도르들이 모두 에테르눔 부스 앞에 모여들었으니까.
특히 콧대 높은 카르티에의 맹도르인 윌리엄이 몇 번이나 에테르눔 부스에 재입장했다는 사실은 이 흥행에 큰 영향을 미쳤다.
에테르눔을 아예 모르던 업계 사람들부터 일반 관람객까지 모두 에테르눔 부스 앞으로 모여든 것이었다.
짧았던 줄이 점점 길어지면서 결국 박람회장 밖까지 이어졌다.
비첸차 주얼리 페어 역사상 최단기간에 최다 관람객을 끌어모았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이로 인해 에테르눔은 마케팅이 전혀 없었음에도 업계 관계자와 소비자들에게 확실히 이름을 알릴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소식은 곧장 비첸차 주얼리 박람회 운영위원회의 귀로 흘러 들어갔다.
***
다음 날, 아침.
정환은 호텔 옷장에서 정장 한 벌을 꺼냈다.
정장 안감에는 블랙해머 로고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이 정장으로 옷을 갈아입은 정환은 곧장 호텔 로비로 향했다.
정성일과 리암이 로비에서 정환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들 역시 정환과 마찬가지로 블랙해머 정장을 입고 있었다.
특히 리암은 구두를 얼마나 열심히 닦았는지 번쩍번쩍 광이 나고 있었다.
이들이 이렇게 차려입은 이유.
오늘은 박람회장에서 에테르눔의 공식 런칭 행사가 열리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해외 언론을 통해 에테르눔이 처음 공개되는 자리인 만큼 단정하게 입을 필요가 있었다.
리암이 정장을 입은 정환을 보며 손뼉을 쳤다.
“미스터 리! 턱시도도 잘 어울렸는데, 정장도 참 멋지네요. 모델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리암도 멋진데요?”
“미스터 리가 멋있게 만들어 준 덕분이죠. 정장은 불편해서 잘 안 입는데, 이 정장은 희한하게 몸에 착 달라붙는 것 같습니다. 입을 때마다 기분도 좋고요.”
그렇게 리암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던 정성일은 전화를 끊자마자 정환에게 보고했다.
“대표님. 방금 비첸차 주얼리 박람회 운영위원회 측에서 에테르눔 런칭 행사 장소를 변경할 수 있겠냐고 연락이 왔습니다.”
“장소를 바꾼다고요?”
“네. 원래 소형 컨퍼런스 룸에서 진행하기로 했었잖습니까? 그런데 대형 컨퍼런스 룸으로 바꿔서 행사를 진행해 줬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뉘앙스가 희한하네요. 마치 부탁하는 것 같아요. 저자세랄까?”
정성일은 조금 놀란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대형 컨퍼런스 룸은 반 클리프 에이펠이나 카르티에 같은 하이 주얼리 브랜드에서 독점해 왔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신생 브랜드는 소형 컨퍼런스 룸이나 부스 앞에서 초라하게 런칭 행사를 진행해 오고 있었다.
그리고 에테르눔 역시 이런 분위기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분명 중형 컨퍼런스 룸을 신청했는데, 그냥 부스 앞에서 행사를 진행하라는 통보를 받은 것이었다.
이 통보에 이동기와 정성일은 열심히 운영위원회에 전화를 돌려 컨퍼런스 룸의 필요성을 어필했고 겨우 소형 컨퍼런스 룸 하나를 얻을 수 있었다.
그렇게 콧대 높던 운영위원회에서 먼저 대형 컨퍼런스 룸에서 런칭 행사를 진행해 주면 안 되겠냐는 부탁을 하니, 정성일로서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리암은 그리 놀라지 않았다.
“지인에게 들었는데 비첸차의 주얼리 매거진 기자들이 전부 에테르눔 부스로 몰려들었답니다. 그 많은 기자, 업계 관계자를 전부 수용하려면 대형 컨퍼런스 룸을 쓸 수밖에 없죠. 소형 컨퍼런스 룸에서 행사를 진행했다간 비첸차 주얼리 박람회가 에테르눔이란 브랜드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소문이 날 수도 있잖습니까?”
정성일은 그제야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자칫, 박람회의 위상이 떨어질 수도 있으니 그런 말이 나오기 전에 운영위원회 측에서 먼저 우리를 대우하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태도가 조금 고깝긴 하지만 거절할 이유는 없어 보입니다.”
“대표님. 그렇다면 프레젠테이션 내용을 조금 수정하는 건 어떨까요?”
정성일이 손목에 찬 시계를 보며 물었다.
“조금 빠듯하긴 하겠지만 지금이라면 충분히 수정 가능할 것 같은데요.”
정성일은 예상보다 기자들이 더 많이 모인 만큼 내용을 조금 더 추가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환의 생각은 달랐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프레젠테이션 내용보다는 제 입에서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더 궁금해할 겁니다. 운영위원회 측에 그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말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박람회장에 도착한 정환은 주머니에 넣은 소지품을 미리 꺼냈다.
경비원들이 박람회장을 출입하는 인원들에게 이름표 확인부터 소지품 검사까지, 무척 강도 높은 몸수색을 진행하기 때문이다.
몇천만 원에서 몇십억 원을 호가하는 주얼리들이 박람회장에 전시되어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정환과 그 일행은 이런 까다로운 수색을 받지 않았다.
그저 이름표 확인과 간단한 금속 탐지기 검사가 전부였다.
경비원들은 정환의 뒤를 따라오던 이들에겐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엄격한 검사 절차를 밟았다.
리암은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VIP 대접을 이렇게 받아 보네요.”
“그러게요.”
미리 대기하고 있던 박람회장 직원이 정환을 안내했다.
“행사 시작까지 편하게 기다릴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곳으로 안내해 드릴까요?”
“지금 기자들이 기다리고 있죠?”
“네. 그렇습니다.”
“기다리게 할 필요 없죠. 바로 런칭 행사를 시작하겠습니다.”
직원은 귀에 꽂은 무전기로 짧은 교신을 주고받은 후 정환을 곧장 컨퍼런스 룸으로 안내했다.
그러고는 마치 성문처럼 커다란 컨퍼런스 룸의 문을 활짝 열었다.
과장 좀 보태서 작은 초등학교 운동장만큼이나 넓은 컨퍼런스 룸이었다.
기자들이 정신없이 플래시를 터뜨리며 단상으로 향하는 정환의 사진을 찍었다.
단상 위로 올라간 정환은 이들 틈에 섞여 있는 하이 주얼리 브랜드 관계자들을 금세 알아볼 수 있었다.
목에 걸고 있는 이름표 때문이 아니었다.
취재 열기를 띤 기자들과 달리 이들의 눈빛은 마치 정환을 해부하려는 것처럼 날카로웠기 때문이다.
리암 역시 거기에 앉아 있는 사람 중 한 명을 알아보곤 눈인사를 건넸다.
“아는 사람입니까?”
“네. 윌리엄이라고 카르티에의 맹도르입니다. 오랜만에 보네요.”
카르티에의 맹도르까지 왔다니, 조금 의외였다.
정환은 기자들에게 인사를 건넨 후 에테르눔을 소개하는 PPT를 발표했다.
10분짜리 발표였다.
하지만 기자들은 이 짧은 발표에 만족할 수 없는 듯 손을 번쩍 들어 질문을 쏟아 냈다.
“에테르눔을 기획하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빅토리아 공주와의 인연은 어떻게 맺었습니까? 혹시 에테르눔 출시와 관계가 있습니까?”
“에테르눔의 전체적인 디자인이 유럽풍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으로 보이던데,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유럽풍의 주얼리 디자인은 틀렸다, 새로운 정답을 보여 주겠다는 의도입니까?”
정환은 쏟아지는 질문에 당황하지 않고 차례대로 답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리암이 정성일에게 속삭였다.
“미스터 리는 긴장도 안 되나 봅니다.”
“그러게요. 새삼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기자들의 질문이 사그라들 무렵, 누군가 큰 소리로 물었다.
“에테르눔의 오프라인 매장 오픈 계획은 어떻게 됩니까?”
“좋은 질문입니다. 후보지는 정해졌습니다. 서울과 도쿄, 스톡홀름, 그리고…….”
정환은 일부러 뜸을 들인 후 마지막 오프라인 매장의 위치를 밝혔다.
“파리가 될 겁니다.”
정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브랜드 관계자들이 곧장 핸드폰을 쥐고 문자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에테르눔의 매장 오픈 계획을 최대한 빨리 본사에 알리기 위해서였다.
사실 이들은 지금까지 다른 브랜드의 매장 오픈 계획에 이렇게 예민하게 반응한 적이 없었다.
그것들 모두 자신들의 입지를 위협할 만한 브랜드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에테르눔은 달랐다.
앞선 기자들의 질문처럼 에테르눔은 유럽 주얼리가 지금까지 공고히 쌓아 왔던 질서를 뒤엎고 새로운 바람을 불어올 가능성이 컸다.
물론 다들 이것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지만, 동시에 문자를 보내는 모습에서 같은 마음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특히 에테르눔 매장이 파리에 오픈한다는 소식은 하이 주얼리 브랜드 관계자들을 더욱 긴장하게 했다.
파리라는 도시가 상징하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파리? 그렇다면 에테르눔이 내년 1월에 열릴 오뜨 꾸뛰르에 컬렉션을 출품하겠다는 뜻인가?”
“설마, 그럴 리가.”
오뜨 꾸뛰르.
파리 의상 조합(federation francaise de la couture)에서 지정한 기준에 맞는 규모 및 조건을 충족한 패션 하우스들만 참가하는 컬렉션 주간을 뜻했다.
오뜨 꾸뛰르가 유명한 이유는 여기에 출품되는 컬렉션에 정해진 가격이나 수량의 제한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롯이 하이엔드 시장을 정조준하는 컬렉션인 만큼 어마어마한 가격대의 컬렉션이 등장하곤 했다.
무엇보다 오뜨 꾸뛰르가 명성을 거머쥘 수 있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것은 바로 오뜨 꾸뛰르에는 참가하려면 자격을 갖춰야 한다는 점이었다.
기본적으로 제작소가 파리에 있어야 하며 15명 이상의 장인을 고용하고 있어야 하는 등 평범한 브랜드는 쉽게 맞추기 어려운 자격이었다.
그래서 이 자리의 브랜드 관계자 절반 정도는 당연히 에테르눔이 오뜨 꾸뛰르에 참여하지 않으리라고 여겼다.
이유는 간단했다.
에테르눔에겐 충분한 시간이 없었다.
내년 오뜨 꾸뛰르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해야 4개월.
4개월 안에 오프라인 매장을 준비하고 오뜨 꾸뛰르에 참여할 자격을 갖춘 뒤 새 컬렉션까지 만드는 것은 불가능이나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세계적인 디자이너들조차 오뜨 꾸뛰르를 하나만을 위해 만사를 제쳐 놓고 몇 달 동안 심혈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테르눔이 오뜨 꾸뛰르에 참여한다면, 하이엔드 패션계 전체의 지각 변동을 불러올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이 흐름을 읽은 기자가 정환에게 직접 질문했다.
“미스터 리. 혹시 내년 1월에 열릴 오뜨 꾸뛰르에 주얼리를 출품하실 생각이십니까?”
이 질문에 모든 브랜드 관계자와 맹도르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러고는 정환의 입만 쳐다봤다.
정환은 그 시선을 읽고 일부러 더 길게 뜸을 들였다.
자신의 대답이 불러올 파급력을 더욱 극대화하기 위함이었다.
“상황에 따라 달라질 겁니다.”
불확실한 대답을 들은 기자들이 다소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반면, 브랜드 관계자들의 얼굴에는 약간의 여유가 생겼다.
확실히 오뜨 꾸뛰르는 아무나 도전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이어진 정환의 대답은 이들의 얼굴에 생긴 여유를 한순간에 지워 버렸다.
“에테르눔이 오뜨 꾸뛰르에 출품할 자격을 갖추는 게 우선이겠죠?”
이것은 조건만 갖춘다면 오뜨 꾸뛰르에 컬렉션을 출품하겠다는 선전 포고였다.
그런 까닭에 정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시 한번 관계자들이 동시에 메시지를 보냈다.
이번에는 조금 전보다 손을 움직이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심지어 몇몇은 답답한 듯 아예 핸드폰을 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고 있었다.
“내 말 못 알아들어? 오뜨 꾸뛰르를 대비해서 미리 만들었던 디자인을 모두 갈아엎어야 한다고!”
***
그날 저녁.
리암은 비틀거리며 푹신한 침대에 몸을 던졌다.
성공적이었던 에테르눔의 런칭 행사를 기념하며 정환과 함께 와인을 한 잔 마셨기 때문이다.
리암이 기분 좋게 잠자리에 들려던 그때, 누군가의 전화가 걸려 왔다.
“여보세요?”
“리암?”
익숙한 목소리에 리암은 반쯤 감았던 눈을 떴다.
“윌리엄?”
“나 지금 네가 묵고 있는 호텔 라운지에 있어. 잠깐 이야기 좀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