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dwarf in his previous life, but an artistic genius in his current life RAW novel - Chapter 115
113화 샹젤리제 (1)
느릿한 재즈 선율이 흐르는 호텔 라운지 바.
리암은 윌리엄과 옛 추억을 안주 삼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때 기억나? 견습생 6개월 차였나. 공방 청소하다가 자투리 금을 모아 뒀던 봉투를 버렸잖아.”
“아, 맞아. 들키기 전에 수습하려고 그 추운 겨울밤에 밤새도록 쓰레기봉투를 뒤졌지. 그때 생각만 하면 지금도 손가락이 얼얼해.”
리암은 지문이 닳은 손가락을 흔들며 낄낄거렸다.
함께 미소를 짓는 윌리엄의 손가락 지문 역시 똑같이 닳아 있었다.
힘들고 배고픈 견습생 생활을 함께했던 두 사람은 마음만 먹으면 온종일 떠들 수 있을 만큼 추억이 가득했다.
“시간 참 빨라. 벌써 이렇게 나이를 먹었잖아?”
“그러게.”
윌리엄은 얼음이 든 온더록스 잔을 만지작거렸다.
“에테르눔의 주얼리는 잘 봤어. 인정하기 싫은데, 몇 년 동안 본 주얼리 중 최고였어.”
카르티에의 방향을 좌지우지할 만큼 능력이 뛰어난 맹도르의 칭찬을 받은 리암의 어깨가 한껏 높아졌다.
“고마워. 나도 내년 오뜨 꾸뛰르에서 우리가 어떤 작품을 선보일지 기대가 커.”
리암의 목소리에는 묘한 흥분감이 섞여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오뜨 꾸뛰르는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일종의 전쟁터였다.
세계 최고의 하이엔드 브랜드가 각자의 명예를 걸고 만든 컬렉션을 무기 삼아 싸움을 벌이는 전쟁터.
그래서 리암은 기대감이 컸다.
정환이 오뜨 꾸뛰르에서는 어떤 컬렉션으로 자신과 세상을 놀라게 할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본 윌리엄이 물었다.
“…내년 오뜨 꾸뛰르에 정말 컬렉션을 출품할 생각이야?”
리암은 윌리엄이 친구이자 동료로서 신생 브랜드인 에테르눔을 걱정해 주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약간의 엄살을 섞어 대답했다.
“뭐, 미스터 리가 말한 것처럼 자격을 갖추는 게 우선이겠지. 쉽지 않겠지만 기대할 만할 거야.”
윌리엄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
하지만 리암은 그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이 자리에 오기 전, 먼저 술자리를 가진 탓에 취기가 시야를 가려 버린 탓이었다.
“리암. 갓 출시된 신생 브랜드가 오뜨 꾸뛰르를 넘보는 건 너무 오만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뭐?”
“소비자들은 하이엔드 패션 아이템을 살 때 디자인과 품질만 따지는 게 아니야. 브랜드가 쌓아 올린 역사까지 함께 고려하지. 그런 점에서 에테르눔은 오뜨 꾸뛰르에 어울리지 않아.”
윌리엄이 보인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리암은 당황했다.
하지만 이런 당황스러움보다 먼저 고개를 내민 감정은 바로 분노였다.
“윌리엄. 미스터 리는 사라졌던 바덴 프린지 티아라를 완벽히 복원한 장본인이야.”
리암이 가시 돋친 목소리로 말하자 윌리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래. 네가 욕심냈던 그 바덴 프린지 티아라 말이야.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백 년 넘는 헤리티지를 가진 셈이나 마찬가지야. 에테르눔의 헤리티지를 걱정해 주는 건 고마운데, 그럴 필요 없어. 에테르눔은 지금 새로운 변화를 끌어내고 있으니까.”
취기가 오른 탓에 리암은 평소보다 더 공격적으로 윌리엄에게 쏘아붙였다.
사실, 리암 역시 윌리엄에게 바덴 프린지 티아라에 관한 이야기를 꺼낼 생각이 전혀 없었다.
윌리엄 역시 자신처럼 바덴 프린지 티아라 복원을 꿈꿔 왔던 맹도르였으니까.
하지만 자신이 인정한 정환과 에테르눔이 무시당하는 것을 그대로 두고 볼 순 없었다.
“리암. 바로 그게 문제야. 세상 사람 모두가 그 흐름을 반기는 건 아냐.”
윌리엄이 쥔 잔에서 얼음이 녹으며 달그락 소리를 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행히 바에서 흘러나오던 느릿한 재즈가 그 침묵을 메우고 있었다.
“윌리엄. 도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리암이 먼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질문을 받은 윌리엄은 후, 하고 짧게 한숨을 내쉬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오뜨 꾸뛰르는 쳐다도 보지 마. 신생 브랜드가 감히 넘볼 곳이 아니니까. 내가 할 말은 이게 전부야.”
***
비첸차에서 귀국한 정환은 며칠 동안 쉼 없이 움직였다.
에테르눔 매장 오픈을 준비하면서 다른 브랜드의 사업까지 두루 살펴야 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오뜨 꾸뛰르에 출품할 주얼리까지 디자인하려니, 정환은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그나마 이동기를 비롯한 에테르눔 사업부 인원들이 도쿄와 스톡홀름에서 괜찮은 매장을 확보한 것이 다행이라 할 수 있었다.
덕분에 정환은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한 사람의 도움이 더 있었다.
바로 오현준이었다.
알고 보니 오현준 역시 해외 진출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마땅한 건수가 없어서 계속 입맛만 다실 무렵, 정환이 에테르눔 해외 진출 소식이 한국에 알려졌다.
오현준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사무소 내 최고의 인력들을 동원해 전통 한옥과 궁궐의 향기를 담은 매장 시안을 가져온 것이다.
시안을 보아하니 정환이 비첸차 주얼리 페어에서 선보였던 부스 디자인을 참고한 모양이었다.
오현준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서울과 도쿄를 비롯한 해외 매장 전체의 관리와 감독을 모두 맡겨 달라고 부탁했다.
확실히 정환으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는 좋은 제안이었다.
오현준에게 수정된 설계도만 넘겨주면 매장 쪽에는 더 신경 쓸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짬이 생긴 정환은 오뜨 꾸뛰르에 출품할 주얼리 디자인에 집중할 수 있었다.
운전대를 잡은 정성일이 뒷좌석에 앉은 정환에게 물었다.
“대표님. 요즘 해외 출장이 잦으신데, 피곤하지 않으십니까? 비첸차에서 귀국한 지 3주 만에 다시 파리에 가시는 건데.”
정환이 기지개를 쭉 켜자 어깨 관절에서 뚜두둑, 소리와 함께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것이 정환의 대답이었다.
정성일은 조수석에 둔 가방을 뒤져 홍삼 스틱 하나를 건넸다.
“이거라도 드세요. 아무리 젊다고 해도 대표님처럼 일하면 건강 상합니다. 시차에 적응될 만하면 다시 나가고 거기서 적응될 만하면 또다시 돌아오고의 반복이잖습니까?”
정환은 스틱을 뜯어 홍삼 엑기스를 입에 쭉 밀어 넣었다.
“그나마 도쿄, 스톡홀름 출장을 안 가도 돼 다행이죠. 그래도 파리만큼은 제가 직접 봐야 합니다.”
“오뜨 꾸뛰르 때문에 그러시는 거죠?”
“네. 출품 자격을 갖추기 위해선 반드시 매장과 공방을 확보해야 하니까요.”
사실, 정환은 이번 출장에서 파리 매장에만 집중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사업 진행 상황을 보고하던 유보경이 난색을 보였다.
스웨덴에서 파리로 주얼리를 옮길 때 발생하는 비용이 만만찮았기 때문이다.
‘어차피 오뜨 꾸뛰르 참가 조건을 맞추려면 파리 공방이 있어야 한다면서요? 이참에 그냥 공방까지 하나 구하고 스웨덴의 맹도르를 파견 보내는 건 어때요? 파리에서 주얼리를 생산하게 되면 물류비용이 확 줄어들 텐데.’
확실히 유보경의 말에는 틀린 점이 없었다.
어차피 오뜨 꾸뛰르를 노리고 있었으니, 공방을 조금 더 빨리 얻는다고 해서 문제 될 것은 없었다.
‘공방에서 일할 15명의 장인을 뽑아야 하는데….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자.’
생각에 잠겨 있던 정환이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자 정성일은 음악 소리를 천천히 줄였다.
정환이 공항까지 가는 길만이라도 편안히 쉬었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
***
파리를 동서로 가르는 중심축, 샹젤리제 거리.
개선문부터 콩코르드 광장까지 길게 이어진 거리 양옆에 즐비한 명품 매장 본점들은 바로 이곳이 하이엔드 패션의 본진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정성일은 루이비통 매장 앞에 길게 줄 선 관광객들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정말 어마어마하네요. 그거 아세요? 샹젤리제 거리 임대료가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비싸답니다.”
“방문객이 하루 평균 30만 명, 연간 1억 명이 넘으니 그럴 수밖에 없겠죠. 하이엔드 브랜드가 눈에 불을 켜고 샹젤리제에 진출하려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야, 여기 건물주가 누구일지 몰라도 부럽네요. 이런 건물 하나 있으면 정말 소원이 없겠는데.”
샹젤리제 거리를 쭉 둘러본 정환이 물었다.
“중개인은 여기서 만나기로 했나요?”
“아, 그렇습니다. 연락해 보겠습니다.”
정성일은 미리 저장된 연락처에 전화를 걸었다.
“봉쥬르, 마담…. 어? 왓 두유 민?”
통화를 주고받던 정성일의 언성이 높아졌다.
정성일이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자 정환이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하, 그쪽에서 먼저 급한 일정이 생겼다고 저희 약속을 취소했습니다. 제가 그럼 다른 직원이라도 보내라고 따졌는데…….”
정성일의 붉어진 얼굴을 보아하니, 아마 일방적으로 약속을 취소한 모양이었다.
“죄송합니다. 공항에서 약속 확인을 다시 해야 했는데 제 잘못입니다. 다른 업자에게 연락해 보겠습니다.”
정성일은 미리 약속을 잡았던 다른 업체에 쭉 전화를 돌렸다.
하지만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샹젤리제 임대 상가를 소개해 주기로 한 중개인들이 모두 핑계를 대면서 약속을 취소한 것이었다.
심지어 가까이 있는 중개소 한 곳에 직접 찾아간 정성일은 입구에서 문전박대를 당했다.
아예 중개소에 들어가 보지도 못한 것이었다.
정성일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달아올랐다.
“중개업체 열 군데를 섭외했는데, 열 군데 전체가 이렇게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괜찮아요. 흥분하지 말아요.”
정환은 정성일을 토닥인 후 핸드폰을 들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아, 접니다. 통화 가능합니까?”
전화를 받은 사람은 다름 아닌 리암이었다.
정환은 샹젤리제 거리에서 생긴 일을 간략히 요약해 전달했다.
사실 정환은 리암에게 다른 부동산 중개업자를 알아볼 생각이었다.
프랑스에서 오래 활동한 리엄이었으니 아는 사람이 한 명쯤은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반대편에서 갑자기 리암의 격앙된 반응이 터져 나오면서 상황이 다르게 흘러갔다.
“그, 그게 사실입니까? 윌리엄, 이 자식!”
“윌리엄? 카르티에의 맹도르 말입니까?”
리암 역시 며칠 전, 호텔 라운지 바에서 윌리엄과 나눴던 이야기를 짧게 전달했다.
“…윌리엄이 오뜨 꾸뛰르에 출품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전 단순히 윌리엄이 미스터 리를 질투해서 그런 거라 생각했습니다. 잘 모르셨겠지만 윌리엄도 바덴 프린지 티아라 복원을 욕심냈던 녀석이거든요.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이 녀석이 에테르눔을 막으려 그런 치졸한 짓을 벌이다니….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이 개자식을 찾아내서 도대체 무슨 수작을 벌인 건지 직접 확인해 보겠습니다.”
“아뇨. 그럴 필요 없습니다. 이건 윌리엄이 벌인 일이 아니니까.”
“네?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정환은 흥분한 리암에게 핵심을 짚어 줬다.
“윌리엄이 힘 있는 맹도르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카르티에 내에서의 이야기죠. 상식적으로 맹도르 한 명이 샹젤리제 거리의 모든 부동산 중개인들에게 이래라저래라 명령하는 게 가능할까요?”
“그건 말이 안 되죠. 그래 봐야 맹도르일 뿐이니까요.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당분간 윌리엄과는 연락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군요. 제 생각이지만, 윌리엄도 꽤 큰 용기를 냈던 것 같습니다. 제 말 이해하시겠습니까? 그리고 이쪽 일은 제가 알아서 해결하도록 하죠.”
정환의 통화를 가까이서 듣고 있던 정성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방법이 있으십니까?”
“물론이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성일은 정환이 말한 방법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정말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방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