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dwarf in his previous life, but an artistic genius in his current life RAW novel - Chapter 125
123화 오뜨 꾸뛰르 (2)
파리의 겨울은 무척 매서웠다.
그러나 차가운 칼바람보다 오뜨 꾸뛰르에 대한 기대감이 더욱 뜨거웠다.
이 뜨거운 기대감을 가장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은 역시 샹젤리제와 몽테뉴 거리였다.
명품 매장들은 오뜨 꾸뛰르 컨셉에 맞춰 새롭게 내·외관을 단장했다.
그리고 각 브랜드의 수석 디자이너들은 패션 잡지사의 기자들과 오뜨 꾸뛰르 관련 인터뷰를 진행하며 이러한 기대감을 더욱 고조시켰다.
그런데 이 인터뷰에서 한 가지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
이번 오뜨 꾸뛰르에서 가장 기대되는 브랜드가 무엇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대다수의 수석 디자이너들은 이렇게 답했다.
“당연히 에테르눔입니다.”
“글쎄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에테르눔이죠.”
“어느 때보다 에테르눔에 거는 기대가 큽니다.”
기자들은 여기에 대해 의아한 반응을 보였다.
디자이너들이 에르메스나 샤넬과 같은 유명 패션 브랜드가 아니라 신생 주얼리 브랜드를 언급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한술 더 떠서 모 브랜드의 수석 디자이너는 에테르눔을 선택한 이유를 길게 설명했다.
“에테르눔은 유럽 주얼리가 주도해 왔던 질서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줬습니다. 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쩌면 저 역시 과거의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가 복제만을 해 왔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두가 이렇게 호의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아니었다.
몇몇 이들은 블랙해머와 에테르눔의 행보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유럽 브랜드가 지금까지 이룩해 온 것을 전혀 존중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며 블랙해머와 에테르눔을 비판했다.
사실 이들이 이렇게 예민하게 반응한 이유가 따로 있었다.
바로 얼마 전, 르 몽드지에 실린 기사 때문이었다.
자크마르 미술관과 겨울 정원의 역사를 다룬 기사였는데, 이 기사에서 독자들의 시선을 강렬하게 끈 대목이 있었다.
바로 겨울 정원의 독특한 이력이었다.
겨울 정원이 수많은 명품 브랜드의 구애를 거절해 왔던 이유와 함께 에테르눔이 최초로 그 장벽을 넘어서 오뜨 꾸뛰르를 개최한다는 내용은 대중의 호기심을 크게 자극했다.
겨울 정원에 발을 들이지 못했던 브랜드들은 당연히 도끼눈을 뜨고 에테르눔을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인터뷰 자리에서 수석 디자이너들이 에테르눔을 계속 언급하자 기자들은 예정에 없던 에테르눔을 취재하러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패션 브랜드가 아니라 엉뚱한 주얼리 브랜드를 취재하면 위에서 뭐라 하지 않을까요?”
“디자이너들이 저렇게까지 이야기했으면 분명 뭔가 있다는 거야. 무조건 취재해야 해.”
한편 이 소식을 뒤늦게 접한 로메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오뜨 꾸뛰르가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도 전부터 에테르눔이 뜨거운 바람을 불러일으켰으니, 지지 않으려면 맞대응을 해야 했다.
그렇게 앙투안이 선택한 방법은 바로 언론 홍보였다.
[로메, 유럽 주얼리의 정수를 선보일 것이라 선언….] [로메의 오뜨 꾸뛰르가 기대되는 다섯 가지 이유.] [당신의 겨울을 빛나게 만들 로메의 오뜨 꾸뛰르 컬렉션 미리 알아보기.]각종 언론을 통해 홍보성 기사가 쏟아졌지만 대중은 놀라우리만치 별 관심을 주지 않았다.
결국 조급해진 앙투안은 내부 직원들의 숱한 반대를 무릅쓰고 승부수를 띄웠다.
에테르눔과 겹치는 시간에 오뜨 꾸뛰르 쇼를 잡은 것이었다.
앙투안은 마지막까지 반대하는 직원들에게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두고 봐! 결과가 증명할 테니까.”
***
마침내 에테르눔의 오뜨 꾸뛰르 당일이 밝았다.
쇼의 시작은 오후 2시부터였지만 자크마르 미술관 앞은 이른 아침부터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파리의 명배우 카린 드뇌브부터 여러 K팝 스타들이 에테르눔이 발송한 초청장을 SNS에 인증했기 때문이다.
기자들은 사진 찍기 좋은 자리를 잡으려 서로 신경전을 벌였고 여기에 파리 시민들까지 더해지자 미술관 앞은 완전히 아수라장이었다.
다행히 블랙해머 본사에서 파견된 노련한 직원들이 상황 정리에 나서면서 혼란은 빠르게 수습됐다.
그렇게 유명 인사들과 업계 관계자들이 자크마르 미술관에 입장했다.
이들 가운데에는 카르티에의 맹도르인 윌리엄도 포함되어 있었다.
겨울 정원에 자리를 잡은 윌리엄과 업계 관계자들은 자연스레 에테르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나저나 에테르눔의 첫 번째 오뜨 꾸뛰르잖아요. 어떻게 연출할 것 같아요?”
“미스터 리는 디자인, 제작뿐만 아니라 연출에도 능한 사람 아닙니까? 제 생각입니다만 분명 유럽 주얼리의 전통을 부수는 연출을 보여 줄 겁니다. 그리고 에테르눔이 새로운 질서라고 선언할 거예요.”
“너무 도발적이지 않아요?”
“에테르눔이라면 그럴 수 있지 않을까요?”
윌리엄은 팔짱을 낀 채 아무 의견도 내지 않았다.
‘예상해 봐야 소용없어. 전부 빗나갈 테니까.’
윌리엄이 생각하는 사이 스피커에서는 오뜨 꾸뛰르의 시작을 알리는 음악이 흘러나왔다.
천장에 매달린 핀 조명들이 스테이지 끝을 비췄고 환한 빛이 한 점으로 모인 그곳에서 모델이 등장했다.
모델이 가까이 걸어오자 관람객들은 조금씩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모델이 걸친 드레스와 목걸이와 반지, 티아라는 모두 완벽한 유럽식이었기 때문이다.
“이상하네요. 지금껏 에테르눔은 전통과의 융합을 통해 새로운 모습을 보여 주지 않았나요? 그런데 지금 저 주얼리는 완전히 정통 유럽식이네요.”
“결국 오뜨 꾸뛰르의 압박감에서 벗어나지 못한 걸까요? 컬렉션의 전체적인 방향이 이렇다면 정말 실망이네요.”
“그래도 주얼리의 퀄리티 하나는 기가 막히네요. 누가 보면 에테르눔이 오리지널 정통 유럽 브랜드라고 착각할 정도예요.”
“흥. 그러면 뭐 해요. 밑천이 드러났는데. 결국 어떤 주얼리 브랜드도 유럽이라는 거대한 질서를 따라갈 수밖에 없는 겁니다.”
“맞아요. 저도 그 의견에 동의합니다.”
에테르눔을 호의적으로 봤던 업계 관계자들은 의아한 반응을 보였고 부정적으로 봤던 관계자들은 대놓고 조소했다.
윌리엄이 이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말하려던 그때, 반대편 런웨이에서 또 다른 모델들이 차례대로 등장했다.
“음? 뭘 보여 주려는 거지?”
그런데 그렇게 등장한 모델들은 뭔가가 이상했다.
마치 과거에서 온 것처럼 촌스러운 드레스와 주얼리를 착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련된 오뜨 꾸뛰르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양새였기에 관계자들은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관계자 중 하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잠깐만. 저건 18세기 풍의 드레스잖아요?”
“어? 그렇네. 주얼리도 딱 18세기 풍이네요. 와, 기가 막히게 재현했네요.”
“바덴 프린지 티아라를 복원한 게 운이 아니라 실력이었군요. 그런데 도대체 뭘 보여 주고 싶은 거죠?”
모두의 의문이 커지고 있었고 그와 동시에 서로 다른 옷을 입은 모델들이 런웨이 가운데에서 마주 섰다.
순간, 천장에 설치된 조명이 깜빡거렸다.
그것을 기점으로 모델들은 서로가 걸어왔던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조명이 일정한 간격으로 깜빡거리자 모델들이 서로를 겹쳐 가며 워킹하는 모습은 마치 프레임이 뚝뚝 끊어지는 셀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처럼 보였다.
이를 유심히 지켜보던 윌리엄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어? 설마?’
그러다 어느 순간 조명이 점멸을 멈추면서 런웨이가 환하게 밝아졌다.
많았던 모델들은 어느새 자취를 감췄고 단 한 명의 모델만이 런웨이를 지키고 있었다.
그 모델은 과거, 현재의 유행이 완전히 뒤섞인 드레스와 주얼리를 걸치고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믹스된 드레스와 주얼리는 전혀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처음부터 그런 모습을 염두에 두고 디자인된 것만 같았다.
“아!”
뒤늦게 이 짧은 쇼의 의도를 깨달은 윌리엄이 탄성을 뱉었다.
“과거와 현재가 만나 미래를 그린다…….”
“아!”
윌리엄의 짧은 해석을 들은 다른 관계자들이 무릎을 탁! 쳤다.
“그런 뜻이 담겨 있었군요!”
“과연…. 우리 예상이 전부 빗나갔네요. 에테르눔은 유럽 주얼리를 비웃거나 멸시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유럽 주얼리가 지금까지 이뤄 온 것에 대한 진심 어린 존중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맞아요. 기록조차 제대로 남아 있지 않던 과거의 유럽식 주얼리를 완벽히 재현했고 현대의 유럽식 주얼리까지 완벽히 만들어 냈다는 면에서 더욱 그렇게 보입니다.”
관계자들의 감탄이 이어지자 에테르눔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이들도 삐딱하던 자세를 고쳐 앉았다.
에테르눔의 오뜨 꾸뛰르를 보다 진지하게 감상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본격적으로 주얼리 쇼가 시작되면서 런웨이 위로 모델들이 등장했다.
그와 동시에 관람객들의 작은 탄성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와!”
“저거 한국 드라마에서 본 것 같아.”
“맞아. 한국 사극에서 자주 나왔던 액세서리야. 그게 이렇게 예뻤나?”
모델들이 머리에 끼운 반짝이는 첩지와 비녀는 단번에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특히 밝은 조명 아래에서 모델들이 포즈를 취하자 첩지와 비녀는 그 존재감을 더욱더 강하게 내뿜었다.
순도 높은 은과 옥을 세공해 만든 둥글둥글한 첩지.
그 위에 매달린 다이아몬드들은 빛을 받아 사방으로 영롱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윌리엄은 깊은 바닷속에서 심해어의 반짝이는 불빛을 본 것처럼 에테르눔의 주얼리에서 도저히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간신히 거기서 눈을 돌리자 금으로 만든 비녀를 꽂은 모델이 보였다.
정교한 패턴이 새겨진 금비녀에는 붉은색으로 빛나는 루비가 아름답게 세공돼 알알이 박혀 있었다.
윌리엄과 관람객들은 역시 만화 영화에 빠진 꼬마들처럼 입을 반쯤 벌리고 쇼에 집중했다.
모니터로 이 상황을 지켜보던 정환은 입가에 작은 미소를 지었다.
사실 관람객들이 이렇게까지 주얼리에 집중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바로 인챈트가 있었다.
정환은 주얼리뿐만 아니라 겨울 정원 곳곳에 공들여 인챈트를 새겼다.
관람객들이 주얼리 쇼와 겨울 정원을 쾌적하게 관람할 수 있도록 공간 왜곡 인챈트를 새겼고 집중력을 높이기 위해 소음 차단 인챈트까지 새겼다.
이러한 인챈트들이 효과를 톡톡히 발휘한 덕분에 관람객들은 주얼리 쇼에서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었다.
하지만 단 한 사람, 윌리엄은 쇼를 끝까지 보지 않고 먼저 밖으로 나와 버렸다.
쇼가 이어질수록 카르티에의 오뜨 꾸뛰르 컬렉션이 형편없다는 생각에 화가 나 참을 수 없던 것이다.
찬바람을 맞으며 간신히 속을 가라앉힌 윌리엄은 리암이 있을 자크마르 미술관을 보며 생각했다.
‘훌륭한 쇼였다, 리암. 7월 오뜨 꾸뛰르에서 다시 보자. 그땐 이렇게 지지 않을 거다.’
***
같은 시각, 로메의 오뜨 꾸뛰르 쇼 현장은 무척 한산했다.
언뜻 보기엔 오뜨 꾸뛰르 쇼가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이미 주얼리 모델들은 철수한 지 오래였고 토르소 위의 주얼리들만 쓸쓸한 빛을 내며 제자리에서 회전하고 있었다.
홀로 자리를 지키고 있던 앙투안이 비서에게 물었다.
“우리 맹도르들은? 그 사람들은 다 어디 갔어?”
비서는 참담한 표정으로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었다.
“전부…. 에테르눔의 오뜨 꾸뛰르를 보러 갔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