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dwarf in his previous life, but an artistic genius in his current life RAW novel - Chapter 13
12화 양손잡이 (1)
학교 앞, 정형외과.
엑스레이를 살펴보던 의사가 정환에게 물었다.
“교통사고 난 적 있어요?”
“예전에요.”
“그렇군요. 뭐, 부러지거나 금이 간 건 아니고 근육이 좀 놀란 것 같습니다.”
초조하게 서 있던 교사가 의사에게 물었다.
“저, 선생님. 그러면 이 학생이 그림을 그리는 건 어렵겠죠?”
“물론이죠. 한 번 다쳤던 손이니 조심해야 합니다.”
의사의 진단이 내려지자 교사는 정환에게 말했다.
“너도 들었지? 어쩔 수 없다. 일단 시험이 끝날 때까지 나랑…….”
하지만 정환은 교사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왼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선생님. 저 양손잡이인데요. 왼손은 안 다쳤어요.”
“어?”
“야, 양손잡이라고?”
교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세히 보니 그의 왼 손가락 중지에는 딱딱한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그림을 그릴 때 연필이 맞닿는 부분이었다.
‘혹시 몰라서 왼손도 연습했지.’
왼손 연습을 시작한 건 정환이 사계절 미술 학원에 막 등록했을 무렵이었다.
그림을 너무 그리고 싶었지만 다친 오른손으론 그림을 그릴 수 없었기에 찾아낸 무식한 방법이었다.
운 좋게도 박수현 원장도 왼손잡이였다.
그는 정환에게 왼손으로 그림 그리는 테크닉을 알려 줬다.
여기에 정환의 피나는 노력까지 더해지면서 그는 왼손 사용법을 자연스럽게 터득할 수 있었다.
의사는 안경을 고쳐 썼다.
“뭐, 왼손잡이라면 괜찮죠. 오른손에 반깁스만 차면 괜찮을 겁니다.”
“저, 정말요?”
“네.”
교사는 정환에게 물었다.
“너 진짜 왼손으로 그림 그릴 수 있겠어?”
그는 정환이 양손잡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실례할게요.”
정환은 왼손으로 테이블 위에 있던 볼펜을 쥐고 메모지 위에 뭔가를 빠르게 그리기 시작했다.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완성된 건 바로 안경을 낀 의사의 캐리커처였다.
그림을 본 의사가 박장대소했다.
“어? 이거 나야? 나네? 으하핫!”
희끗희끗한 흰 머리, 네모난 안경, 미간에 푹 팬 주름과 동글동글한 얼굴형까지.
그의 특징을 모두 캐치한 캐리커처였다.
의사는 웃고 있었지만 뒤에 서 있던 교사는 마냥 웃을 수 없었다.
‘이 녀석…….’
의사 눈에는 단순한 캐리커처처럼 보였지만 미술 교사의 눈에는 다른 게 보였다.
정환은 몇 분만에 처음 보는 사람의 얼굴 특징을 정확하게 잡아서 만화로 표현했다.
게다가 엉성하게 그린 것도 아니다.
기가 막히게 잘 그렸다.
만화, 애니 입시를 준비한 게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
교사는 궁금한 게 많았지만 남은 시간이 별로 없었다.
“선생님. 그럼 일단 반깁스만 빨리 부탁드립니다.”
잠시 후.
텅 빈 진료실에서 의사는 정환의 캐리커처를 모니터 옆에 붙이며 다시 웃었다.
“으핫, 으하하핫!”
진료실에서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자 밖에 있던 간호사가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왜 그렇게 웃으세요?”
“아냐. 아까 진료를 받은 학생이 내 얼굴 그려 줬는데 너무 재밌네.”
“저도 좀 보여 주세요.”
캐리커처를 본 간호사도 빵 터졌다.
그녀가 눈물까지 닦아 가며 웃자 의사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점점 사라졌다.
“최 간, 이게 그렇게 웃겨?”
“아, 아…….”
“진료 시작하지.”
“넵.”
***
한편, 수연은 초조하게 강당 입구를 힐끔힐끔 쳐다봤다.
곧 시험이 시작될 것 같은데 아직도 정환은 보이질 않았다.
‘설마 손목이 부러진 건 아니겠지? 그러면 시험을 못 치를 텐데.’
오만가지 생각을 하던 그때.
미술 교사와 정환이 강당으로 들어왔다.
수연은 반깁스한 정환을 보곤 두 눈을 크게 떴다.
깁스를 한 걸 보니 아마 크게 다친 게 분명해 보였다.
‘설마? 집에 가기 전에 짐 가지러 온 거야?’
수연은 가슴을 졸이며 정환을 지켜봤다.
다행히 그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자리에 털썩 앉았고 함께 온 교사도 별말이 없었다.
수연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내 걱정이 다시 밀려왔다.
‘오른손이 저래선 그림을 그리기 어려울 텐데.’
정환을 아니꼽게 보던 오현섭이 다시 손을 들었다.
“선생님!”
“학생, 시험과 관계없는 내용은 질문하지 마세요.”
구철웅이 오현섭의 질문을 칼같이 잘랐다.
그가 무슨 마음을 품고 있는지 뻔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쳇.”
오현섭은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그는 감정을 감출 마음도 없는 듯 씩씩 소리를 내며 콧방귀를 뀌었다.
‘상관없어. 어차피 반깁스까지 했으면 제대로 된 그림을 한 장도 못 그릴 테니까.’
최고의 몸 상태로 시험을 쳐도 합격은 미지수다.
그런데 저렇게 오른손에 깁스까지 찼으니 정환의 합격은 이미 물 건너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 아! 모두 주목해 주세요. 정물을 공개하겠습니다.”
교사들이 정물대 위를 가리고 있던 천을 벗겼다.
두루마리 휴지, 항아리, 유리컵 등 여러 미대나 예고 입시에서 출제되는 정물들이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정물대 위에 유난히 흐드러지게 핀 꽃이 많다는 점이었다.
학생들이 작은 목소리로 수군거렸다.
“학원에서 그려 본 정물들인데?”
“그러게. 꽃 종류가 다양한 거 빼면 어려운 게 없는데…….”
몇몇 학생들은 여유 있는 미소까지 지었다.
하지만 교사들은 이런 반응 역시 예상한 것처럼 보였다.
“시험 시간은 총 4시간입니다. 학생들은 정물 소묘를 진행하면 됩니다.”
수연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렇게 쉬운 정물로 시험을 치른다고?
한국예고 입시가 이렇게 만만할 리 없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하나가 남았다.
바로 ‘주제’였다.
‘주제가 뭘까?’
수연을 비롯한 학생들이 불안한 표정으로 마이크를 쥔 교사를 쳐다봤다.
“시험 주제는 ‘죽음’입니다.”
교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학생들이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죽음이 주제라니? 예고 입시에서 나오기엔 너무 심오한 주제였다.
“학생들은 그림 속에 각자가 생각하는 ‘죽음’을 표현하면 됩니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죽음과 관련된 정물을 상상해서 그려도 됩니다.”
학생 하나가 손을 들었다.
“그러니까 정물대에 없는 칼이나 총 같은 걸 그려도 된다는 뜻이죠?”
“네. 자유롭게 그려도 됩니다. 단, 논술 답안지에 왜 그 정물을 그렸는지 충분히 설명해야 합니다. 지금부터 학생들 간의 잡담은 금지합니다. 질문이 있다면 근처에 있는 선생님들에게 하세요. 재료는 2B, 4B, 지우개, 칼만 허용됩니다. 나머지는 전부 가방이나 화구 상자 안에 넣으세요.”
***
입시 미술을 하는 학생들에겐 반드시 지켜야 할 시간표가 있다.
시험 시간은 한정되어 있기에 구도, 스케치, 톤, 명암, 묘사, 마무리에 몇 분을 쓸지 정확히 배분해 놓은 시간표였다.
만약 스케치나 톤에서 시간을 어기게 되면 명암, 묘사, 마무리에 쓸 시간이 줄어든다.
그러면 완성도는 떨어지고 이는 탈락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렇기에 시간표는 칼같이 지켜야만 했다.
하지만 시험이 시작된 지 5분이 지나도록 누구 하나 선뜻 연필을 쥐지 않았다.
그만큼 ‘죽음’이라는 주제가 어렵다는 뜻이었다.
오현섭은 두툼한 손가락에 가득한 굳은살을 만졌다.
‘죽음이라.’
이래 봬도 그의 어머니는 입시 미술 학원 원장이다.
그것도 대학 잘 보내기로 유명한 에이플 미술 학원.
덕분에 그는 어렸을 때부터 연필과 붓을 잡았고 어머니에게 혹독하게 그림을 배웠다.
그에겐 합격이 문제가 아니었다.
유명 미술 학원을 운영하는 어머니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선 수석, 최소한 차석으로 합격해야만 했다.
한참 동안 고민하던 그의 머릿속에 아이디어가 번뜩였다.
‘화무십일홍!’
아무리 화려한 꽃이라도 10일이 지나면 모두 시든다.
젊음은 찰나이며,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교과서에서 읽었던 기억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정물대 위에는 유독 흐드러지게 핀 꽃이 많았다.
방금 꺾은 것처럼 아직도 향기를 내뿜고 있는 꽃들.
이는 화무십일홍이 정답이라는 힌트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리를 고쳐 앉는 척하며 정환을 슬쩍 쳐다봤다.
오현섭이 이렇게까지 정환을 견제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올해 초에 있었던 전국 중학 미술 대회 때문이었다.
그는 그 대회에서 대상, 못 해도 금상을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우수상에 그쳤다.
금상은 바로 뒤에 앉은 정환의 차지였다.
‘저 자식만 아니었어도…….’
그가 우수상을 받았을 때 학원 망신이라며 어머니가 얼마나 한숨을 내쉬었던가.
오현섭은 다시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환은 팔짱을 낀 채 두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있었다.
평범한 사람이 저런 표정을 짓고 있으면 이상해 보일 테지만 정환이 저러고 있으니 그야말로 조각상이 따로 없었다.
‘저렇게 잘생긴 놈은 고민 같은 것도 없겠지.’
무의식중에 그가 잘생겼다고 인정해 버린 오현섭은 순간 열이 뻗쳤다.
‘이거나 먹어라.’
그는 의자를 살짝 옮겨 정환의 시야를 가렸다.
만약 교사들이 뭐라고 해도 덩치 탓에 어쩔 수 없다고 둘러대면 그만이었다.
***
학생들의 그림을 모두 지켜보고 있던 미술과 교사들은 쯧쯧, 소리를 내며 혀를 찼다.
“다들 학원에서 배운 정물 소묘만 하네요. 꽃만 죽어라 그리고 주제에 대한 해석이나 고민은 전혀 보이질 않아요. 저기 보이세요? 칼이나 핏방울처럼 그리기 쉽고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는 정물만 추가하고 있어요.”
“어쩔 수 없지. 대학 입시도 아니고 예고 입시잖아. 기껏해야 다들 중학생인데, 뭐. 꽃을 많이 깔아 뒀더니 거기에 낚인 거야.”
“어? 잠깐만. 저기 6번 그림 보이세요?”
6번. 수연의 자리였다.
교사들이 고개를 쭉 내밀었다.
그녀는 언뜻 보기에도 섬뜩한 해골을 그리고 있었다.
“저 구도 어디서 봤는데? 인생의 무상함에 대한 무슨 알레르기였나? 그거랑 느낌이 비슷한데요?”
“알레르기가 아니라 알레고리. 해골 그린 걸 보니 바니타스를 주제로 잡았네.”
바니타스.
17세기 무렵 유행한 정물화로서 부와 소유를 상징하는 소라 껍데기, 지식을 상징하는 책, 죽음을 상징하는 해골 등 여러 요소를 배치해 인생무상을 표현한 작품이었다.
“괜찮은데요? 제시된 정물들과 바니타스에 필요한 요소를 잘 섞어 놨어요. 꽃병은 금이 갔고 바닥에 깔아 놓은 뻣뻣한 천을 비싼 비단처럼 부드럽게 표현했어요. 게다가 광원 배치도 의도가 확실하네요. 죽음의 그림자가 모두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메시지가 잘 보여요.”
“아주 영리해. 바니타스를 응용했지만 과장하진 않았어. 제시된 정물도 잘 활용했고. 실수만 안 하면 수석이 될 수도 있겠는데?”
고고한 학처럼 허리를 곧게 세운 수연은 마치 이정표를 따라가듯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차곡차곡 선을 쌓아 가고 있었다.
다른 학생들을 이리저리 훑어보던 젊은 교사가 눈을 크게 떴다.
“선생님. 24번 좀 보세요. 화무십일홍을 주제로 잡은 모양인데요. 괜찮아 보여요.”
24번. 오현섭이었다.
다른 교사도 그 그림을 보곤 두 눈가를 살짝 찌푸렸다.
“그래. 꽃을 살린 아이디어는 좋은데 저 녀석, 주의를 좀 줘야겠는데? 일부러 뒷자리 학생이 정물대를 못 보게 하려고 가린 것 같지 않아?”
“내려가 볼까요?”
“조금 더 지켜보자고. 그런데 24번 뒤에 있는 25번은 포기한 건가? 아직도 백지네.”
교사들이 말하고 있는 학생은 바로 정환이었다.
“아까 병원 갔다 온 학생 아니에요? 아직도 팔이 아픈가? 아니면 주제가 어려워서 포기한 건가? 눈까지 감았어요.”
“글쎄. 포기한 것 같진 않은데. 다른 애들이랑 분위기가 다르잖아.”
그림을 포기한 학생들은 이미 공황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정환은 그들과 달리 마치 깊은 명상에 잠긴 것처럼 보였다.
“그것참. 모델 같네. 잘생겨서 좋겠다.”
“배우가 연기하는 것 같지 않아요?”
“얼굴이 저러니 가만히 있어도 노림수가 있는 것처럼 보여요.”
“어? 눈 떴다.”
정환은 게슴츠레하게 눈을 떴다.
눈꺼풀이 커다란 눈의 반을 가리고 있었지만 안광은 그 어느 때보다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죽음과 조금이라도 관계된 정물들을 억지로 구도 안에 쑤셔 넣는 학생들을 보며 생각했다.
‘죽음과 관계된 정물을 그려도 된다? 이건 함정이다.’
죽음에 대해 막연히 상상만 해야 하는 남들과 달리 그는 이미 죽음을 경험했다.
한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고민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었다.
어떻게 해야 자신이 경험했던 죽음을 다른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게 그릴까?
정환은 마침내 한 가지 결론을 내렸고 연필을 손에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