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dwarf in his previous life, but an artistic genius in his current life RAW novel - Chapter 132
130화 협상의 승리자
반짝반짝 광이 나는 엘리베이터 문에 리카싱의 얼굴이 비쳤다.
오늘 하루 너무 큰 기대와 실망을 반복한 탓일까.
조금 전보다 몇 배는 더 피곤해 보였다.
뜨거운 욕조에 몸을 뉘어 피로를 풀어야겠다고 생각할 무렵,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문이 열리고 리카싱 근처에 서 있던 다른 손님들이 엘리베이터에 탔다.
하지만 리카싱은 장승처럼 제자리에 서 있었다.
“…안 타십니까?”
먼저 탑승한 손님들이 멀뚱멀뚱 서 있던 리카싱에게 물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리카싱이 기다리던 손님들에게 사과했다.
“아, 미안합니다. 저는 다음 엘리베이터를 타겠습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리카싱은 레스토랑으로 발길을 돌렸다.
조금 전, 음식을 서빙한 직원이 차고 있던 시계가 자꾸 아른거렸기 때문이다.
어지간한 명품 브랜드의 제품을 모두 외우고 있는 리카싱조차 처음 보는 시계였다.
그러니 다른 백화점에서 선수 치기 전 반드시 SKA 클래식에 입점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카싱은 홀 한쪽에서 잠깐 쉬고 있던 그 직원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저, 실례합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직원이 반듯한 자세로 물었다.
“지금 차고 계신 시계 말입니다.”
하얀 셔츠 소매에 반쯤 가려진 시계 실루엣을 본 리카싱은 목이 타는 기분이었다.
“어느 브랜드의 시계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다소 엉뚱한 질문이었지만 직원은 당황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 질문을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대답했다.
“아우룸루스입니다.”
아우룸루스?
생소한 이름이었다.
그러나 분명히 어디선가 들어 본 적이 있었다.
“잠깐만요. 아우룸루스라고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리카싱은 그 이름을 어디서 들었는지 기억해냈다.
바로 정환이 런칭한다고 했던 시계 브랜드의 이름이었다.
“서, 설마…….”
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손님과 같은 방에 계셨던 분에게 선물을 받은 시계입니다.”
그렇게 리카싱은 직원과 함께 다시 룸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었다.
자초지종을 파악한 리카싱이 손바닥으로 이마를 탁! 치며 웃었다.
“이거, 제대로 속았네요.”
“하하…….”
보아하니 장 페이 역시 정환에게 속은 듯 넋 빠진 표정으로 헛웃음을 짓고 있었다.
리카싱은 동행한 직원에게 넉넉한 팁을 건넸다.
팁치고는 꽤 큰 금액이었다.
그러나 리카싱은 그 돈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오늘 여기서 진짜 행운을 거머쥔 사람은 직원이 아닌 자신이었으니까.
직원이 나간 후 리카싱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미스터 리. 어떤 연출이 숨어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이런 이벤트는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정환이 사과하자 리카싱은 손사래를 쳤다.
“아뇨. 아닙니다. 덕분에 피로감이 싹 가시는 기분입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진짜 시제품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정환은 정사각형의 시계 케이스 두 개를 꺼냈다.
첫 번째 케이스 안에는 가죽 밴드 시계가 두 번째 케이스 안에는 메탈 밴드 시계가 들어 있었다.
두 시계는 재질뿐만 아니라 페이스 디자인도 조금 달랐다.
리카싱은 먼저 가죽 밴드 시계를 손에 쥐고 초침 소리를 들었다.
째깍, 째깍.
묵직한 시계 몸통에서 들려오는 초침 소리는 맑고 청아했다.
그렇게 크로노 버튼을 여러 번 눌러 보는 등 몇 가지 과정을 거쳐 시계의 기본기가 탄탄함을 확인한 리카싱은 침을 꿀꺽 삼켰다.
시계 디자인을 본격적으로 탐닉할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래, 이거야.’
리카싱은 드디어 갈증이 풀리는 것 같았다.
뾰족한 은백색의 시곗바늘, 아이보리 컬러의 유광으로 마감된 다이얼, 그 전체를 감싸고 있는 바디까지.
하나하나를 세밀하게 관찰하던 리카싱은 문득 정환이 앞서 했던 장황한 설명을 떠올렸다.
그때는 분명 과하다고 생각했던 미사여구였지만 이제 보니 전혀 그렇지 않았다.
리카싱은 그만한 미사여구 없이는 절대 이 디자인을 설명하지 못할 것이라 확신했다.
“물론 이건 시제품입니다.”
정환이 유독 시제품이라는 뜻을 강조하자 리카싱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미스터 리, 잠깐만요. 그렇다면 이 시계가 아직 미완성이라는 뜻입니까?”
“네. 100% 완벽한 제품은 아닙니다. 30% 정도 더 보강할 부분이 있어요. 완벽한 제품을 보여 드리지 못해 미안합니다.”
“하…….”
리카싱은 혀를 내둘렀다.
당장 출시해도 될 만큼 흠잡을 곳 없이 완벽한 시계였다.
그런데도 이렇게 냉정하게 평가하다니.
리카싱은 조금 불만족스러운 눈으로 시제품을 확인하는 정환을 보며 깨달았다.
한국의 신생 브랜드였던 블랙해머를 명품의 반열까지 올려놓을 수 있었던 것.
그것은 저런 말도 안 되는 정환의 재능에 집념까지 더해진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왕 여사님도 그걸 알아보고 내게 귀띔을 해 준 거군.’
리카싱은 욕심이 생겼고 욕심보다 더 큰 확신이 생겼다.
그것은 LAMH가 주도하는 명품 시장 판도를 정환이 완전히 뒤바꿔 놓을 것이라는 확신이었다.
리카싱이 살짝 감아쥔 주먹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이거, 오늘 그냥 넘어갈 수 없겠는데요.”
오늘을 기념할 수 있는 좋은 술을 주문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리카싱에게 팁을 넉넉하게 받았던 그 직원이었다.
그런데 그 직원은 언뜻 보기에도 값비싸 보이는 와인을 조심스레 들고 있었다.
“손님들에게 너무 큰 선물을 받아서 뭔가 보답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 보니 뭔가 기념하기 좋은 날처럼 보이더군요. 그래서 이 와인을 준비해 봤습니다. 아! 제가 사는 것이니 부담 없이 즐겨 주세요.”
리카싱이 정환과 장 페이에게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 모두 고개를 끄덕이자 리카싱이 그 직원에게 미소를 보였다.
“그럼 코르크를 열겠습니다.”
직원이 코르크 마개를 따자 마치 폭죽처럼 터진 짙은 포도 향이 룸을 가득 메웠다.
세 사람의 잔이 선 분홍빛 와인으로 가득 채워지자 리카싱이 잔을 번쩍 치켜들었다.
“아우룸루스의 SKA 클래식 입점을 기념하며.”
***
다음 날, 점심.
SKA 클래식 라운지에서 앙투안은 리카싱을 기다리고 있었다.
밤사이, 비서가 제대로 된 정보를 물어 온 덕분에 앙투안은 리카싱을 공략할 최적의 전략을 짤 수 있었다.
리카싱과 간단한 인사를 주고받은 앙투안이 먼저 본론을 꺼냈다.
“리카싱 대표님. 워치 플로어 리모델링 공사를 노바 디자인 컴퍼니에 맡기셨죠?”
리카싱이 어젯밤의 숙취를 감추려는 듯 물을 쭉 들이켜며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소문이 난 모양이군요.”
“대표님께서 난감해할 만합니다. 노바 디자인 컴퍼니는 최근 실적이 부진한 편이거든요. 그쪽보다는 파리의 루시앙 에르미타주 컴퍼니에 맡겨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루시앙도 알아봤지만 실력에 비해 너무 큰 비용을 요구하던데요.”
앙투안이 손을 저었다.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어제 제가 루시앙 측과 접선했고 좋은 결과를 얻었으니까요. 리카싱 대표님! 루시앙 에르미타주의 컨설팅 비용부터 리모델링 비용까지, 워치 플로어에서 발생하는 모든 비용을 우리 워블로 IWB에서 부담하겠습니다.”
앙투안이 호기롭게 선언했다.
그러나 리카싱은 앙투안을 보지 않고 고개를 살짝 숙여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고 있었다.
어제 정환, 장 페이와 과음을 한 탓에 숙취가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앙투안은 그 모습을 보고 리카싱이 지금 자신의 제안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것이라 착각했다.
‘좋아!’
첫 번째가 먹혔으니 이제 두 번째를 보여 줄 차례였다.
앙투안이 리카싱에게 살며시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여기에 워치 플로어 공사 중단으로 인해 입은 피해 금액까지 모두 우리 쪽에서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앙투안은 이미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리카싱의 가려운 부분을 자기가 대신 긁어 주고 있으니까.
상대적으로 정보력이 빈약한 정환은 엄두조차 못 낼 일이었다.
마침내 리카싱이 고개를 들었다.
앙투안은 리카싱이 밝은 표정을 지을 거라 생각했지만 리카싱의 표정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눈썹을 살짝 찌푸린 채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거,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모르겠네요. 미스터 앙투안.”
“네. 대표님.”
“제가 그렇게…. 가난하고 힘들어 보입니까?”
“네?”
“그깟 리모델링, 컨설팅 비용에 절절맬 정도로 가난해 보이냐는 말입니다.”
리카싱의 목소리가 점점 싸늘해지면서 라운지의 공기까지 얼어붙었다.
앙투안은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니까 제 말은…….”
“지금 워치 플로어 리모델링 건을 어떻게든 요리해서 워블로 IWB의 입점과 연결 지으려 하시는 것 같은데, 그 두 가지는 엄연히 별개의 문제입니다. 알고 계시죠?”
“…….”
소파에 앉아 있던 리카싱이 몸을 일으켰다.
“어제 보여 주신 워블로 IWB의 디자인은 무척 실망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거기서 조금이라도 발전된 컨셉을 보여 줄 것이라 기대했는데, 역시였네요.”
“자, 잠깐만요!”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앙투안이 사색이 된 표정으로 리카싱을 붙잡았다.
블랙해머와 정환을 지나치게 의식한 바람에 시계 디자인을 발전시키는 게 먼저라는 가장 기본적인 것을 놓친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미스터 앙투안. 저와 이렇게 추잡한 방식으로 거래하려 하다니 정말 실망스럽…….”
“브, 블랙해머에서도 이것과 같은 조건을 걸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워치 플로어에서 이야기를 나눈 것 아닙니까?”
앙투안이 발악하며 블랙해머를 붙잡고 늘어졌다.
그 순간, 리카싱은 앙투안에게 남아 있던 조그마한 연민의 정이 모두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미스터 앙투안. 미스터 리의 브랜드는 이미 SKA 클래식에 입점 계약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이러한 추잡한 일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즐거운 이벤트가 있었죠. 미스터 리의 시계 역시 완벽했고요.”
자기 생각이 완전히 틀렸다는 것.
그리고 눈엣가시 같은 정환의 시계가 완벽했다는 설명까지 듣자 앙투안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변했다.
“…….”
“그래서 오늘 미스터 앙투안이 발전된 워블로 IWB의 시계 컨셉과 디자인을 가져오면 SKA 오리지널에 입점시킬 생각을 가졌어요.”
SKA 클래식이 명품 중의 명품을 총망라한 곳이라면, SKA 오리지널은 상대적으로 한 단계 급이 떨어지는 명품 브랜드를 모아 둔 곳이었다.
다만, 어디까지나 SKA 클래식에 비교해서 급이 떨어지는 것뿐이었다.
그러므로 워블로 IWB가 SKA 오리지널에서 괜찮은 성적을 올린다면, 이를 발판 삼아 SKA 클래식에 입성하는 것 역시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미스터 앙투안이 가진 재능을 발휘한다면 늦어도 1년 안에는 SKA 클래식에 다시 발을 들일 수 있을 거라 믿었는데…. 안타깝네요.”
앙투안의 입에서 아, 하는 탄성 소리가 흘러나왔다.
SKA 클래식에 이어 SKA 오리지널까지 눈 앞에서 날려 버렸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초췌해진 앙투안을 두고 그대로 나가려던 리카싱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진심으로 안타까운 마음을 담아 충고했다.
“미스터 앙투안. 왜 잘하는 것을 하지 않고 못하는 것을 하려 합니까?”
그 말을 들은 앙투안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리카싱이 방금 했던 말.
그것은 헝부이에에서 알렉산더가 자기에게 했던 말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그, 그걸 어떻게…….”
하지만 앙투안에게 대답할 사람은 없었다.
라운지 유리창에는 홀로 남은 앙투안의 모습이 비쳤다.
그곳에 있는 건 캐시미어를 걸친 하이에나가 아니었다.
추잡스럽게 밑바닥을 보인 별 볼 일 없는 사람만이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