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dwarf in his previous life, but an artistic genius in his current life RAW novel - Chapter 14
13화 양손잡이 (2)
수석은 내 차지다.
오현섭은 확신이 있었다.
다른 학생들 모두 ‘죽음’이라는 주제는 뒤로하고 정물 소묘를 하는 데 집중하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자신처럼 꽃을 주제로 살려서 ‘화무십일홍’을 그려내고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었다.
게다가 그의 몸 상태까지 더할 나위 없이 최고였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완벽했다.
하지만 수연의 그림을 보자마자 오현섭은 생각을 고쳐먹을 수밖에 없었다.
‘저건 뭐야?’
평범한 정물 소묘와 달리 수연의 그림은 대비가 강렬했다.
왼쪽 위를 텅 비우고 오른쪽 아래는 복잡한 사물로 구성했다.
그렇게 생긴 대각선은 마치 세계를 반으로 가르는 것처럼 보였다.
거기에 그 대각선과 교차하는 또 다른 대각선.
바로 광원으로 인해 생겨난 대각선이었다.
빛이 왼쪽 위로부터 오른쪽 아래로 비쳐 들어오니, 마치 이승과 저승을 가르는 것처럼 더 극적이고 강렬한 대비가 느껴졌다.
그뿐만 아니라 정물 가운데에는 커다란 해골이 그려져 있었다.
오현섭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저 그림이 ‘화무십일홍’보다 몇 배는 더 뛰어나다는 사실을.
하지만 상관없었다.
차석 자리만 차지해도 어머니는 기뻐하실 테니까.
이번에야말로 에이플 미술 학원에 오현섭이라는 이름이 적힌 현수막을 걸 기회였다.
그런데 뒤에서 그 짜릿한 상상을 깨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각, 사각.
길고 뭉툭한 연필 끝이 종이 위를 가볍게 건드리는 소리였다.
스케치하듯 긴 선을 긋던 소리의 박자가 바뀌었다.
마치 탱크의 궤도 바퀴가 종이 위를 깔고 지나가는 것처럼 묵직하게 밑색을 까는 소리였다.
그러다 박자가 별안간 또 바뀌었다.
조금 전에는 탱크가 평야를 누비는 것처럼 묵직한 소리가 들려왔다면 이번에는 마치 깃털로 아기의 코끝을 간지럽히는 소리였다.
아주 가늘고 긴 연필 끝으로 마치 종이 표면만 가볍게 긁는 소리.
오현섭의 등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그냥 그림 그리는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오현섭의 귀에는 달랐다.
그는 이와 비슷한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엄마가 그림 그릴 때 나던 소리야.’
그의 어머니, 유미연이 학생들에게 소묘 시범을 보여 줄 때 연필 끝에서 나던 소리였다.
평생을 그림에 몸 바친 어머니의 연필에서 나는 소리를 어째서 정환도 똑같이 내는 걸까.
오현섭은 답을 알 수 없었다.
지금이라도 뒤로 가서 그의 그림을 보고 싶었지만 지금은 시험 중.
자신의 그림에 집중해야만 했다.
‘시간 없어. 집중하자!’
30분, 그리고 1시간이 지났다.
하지만 한 번 깨진 집중력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오현섭은 미칠 지경이었다.
그런데 뒤에서 연필 소리가 갑자기 멎었다.
이어진 지우개질 소리.
그림을 마무리하는 게 분명했다.
‘버, 벌써 논술 답안지를 쓴다고?’
오현섭의 손끝이 덜덜 떨리고 눈앞이 새카매졌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흘렀다.
시험이 막바지에 접어들자 시험을 치르는 학생들의 얼굴에 지친 기색이 역력해졌다.
그들은 마치 시합이 끝나기만을 바라는 권투 선수 같아 보였다.
시계를 보던 구철웅이 마이크를 쥐고 외쳤다.
“시험 끝입니다! 시험을 마친 학생들은 그림과 논술 답안지를 뒷면만 보이게 뒤집어서 이젤 위에 올려 두세요.”
***
그날 저녁, 사계절 미술 학원.
박수현 원장은 정환이 그린 재현작을 보며 재차 물었다.
“이렇게 그렸다고? 정말?”
“네.”
“논술은?”
정환은 메모지에 자신이 썼던 논술 답안지를 적어서 보여 줬다.
박수현 원장은 탄식했다.
“논술도 이렇게 썼고?”
“네.”
박수현 원장은 속이 타는 듯 냉수를 연달아 들이켰다.
그는 입가에 묻은 물을 닦지도 않고 정환에게 말했다.
“정환아. 한국예고 교사들은 이 그림을 분명 미완성이라 생각할 거야. 미완성은 탈락이고. 너도 알지?”
“이게 미완성으로 보인다고요?”
“네 의도를 정확히 파악했다면 완성이겠지만 이해를 못 했다면 미완성이겠지. 너무 위험한 그림을 그렸어.”
정환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한국예고 교사들이 이렇게 쉽게 풀이한 그림도 이해 못 하고 미완성으로 분류한다면 나도 다닐 생각이 없어.’
박수현 원장은 원장실 한쪽에 걸어 둔 그림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오래전, 한국 대학교 회화과 신입생 시절에 그렸던 그림이었다.
‘만약 이 그림을 평가해 주셨던 분의 시선으로 본다면 이건 합격이다. 아니, 수석이 될 수도 있어. 하지만 그분이 한국예고에 심사위원으로 올 확률은 내가 이 건물 안에서 벼락을 맞을 확률이나 마찬가지지.’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은 후 멍하니 앉아 있는 정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배고프지 않아? 밥 먹으러 가자. 고기 쏜다.”
“정말요? 저 배 엄청 고픈데.”
그의 말을 들은 박수현 원장이 발을 멈췄다.
정환이 대놓고 배가 고프다고 말했다.
즉, 밥값이 어마어마하게 깨질 거란 소리였다.
“아이고, 머리야.”
박수현 원장은 마치 머리에 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사나이가 한 입으로 두말하던가?
고기를 쏜다고 했으면 쏘는 게 남자다.
박수현 원장이 잠시 고민한 다음, 정환에게 말했다.
“요 앞에 무한 리필도 괜찮지?”
***
며칠 후.
불 켜진 한국예고 강당.
병마총의 석상들처럼 나란히 선 수많은 이젤들.
그 사이로 키 작은 여자가 종횡무진 돌아다니고 있었다.
“20번, 26번 불합격.”
카랑카랑한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미술과 전임 교사, 구철웅이 이젤에서 그림을 뺐다.
그를 체스 말처럼 마음대로 조종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이홍림 교수였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미술과 교사들이 수군거렸다.
“이홍림 교수님 포스 장난 아니네요. 뭐라고 해야 할까, 여기 있는 사람 중에서 제일 작으면서 제일 커 보여요. 철웅 쌤이 무슨 난쟁이처럼 보이네요.”
젊은 미술과 교사가 말했다.
제일 작으면서 제일 커 보인다.
모순되는 표현이었지만 다른 교사들도 모두 공감하고 있었다.
“이빨 빠진 범도 범이야. 지금이야 이홍림 교수님도 정년으로 퇴임하셨지만 별명이 한국대 회화과 호랑이였잖아.”
“이홍림 교수님, 독일에서 무슨 초청을 받았다고 하지 않았어요?”
“함부르크 조형 미술 대학에서 교수님을 초청했다고 하시던데, 나도 자세히는 모르겠네. 그보다 우리 철웅 쌤 불쌍해서 어쩐담? 발이 보이질 않아. 도와드려야 되지 않을까요?”
교사들이 한가하게 수다를 떠는 동안 전임 교사인 구철웅은 말 그대로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냥 이홍림 교수님이 시키신 대로 우리는 가만히 있으면 됩니다.”
“괜찮을까요?”
“괜찮아요. 이홍림 교수님이랑 구철웅 쌤이 사제 간이잖아요. 일부러 오랜만에 만난 제자 괴롭히는 거예요.”
사제 간이라는 말을 들은 젊은 교사의 눈빛이 초롱초롱해졌다.
“아! 철웅 쌤도 한국대 회화과 나오셨죠? 철웅 쌤이 이홍림 교수님 제자셨구나!”
구철웅은 이마에 가득한 땀을 닦았다.
그가 2004년 한국 대학교 회화과에 갓 입학했던 새내기 시절부터 이홍림 교수는 전설 같은 존재였다.
그 전설에게 제출했던 과제를 평가받을 때마다 구철웅은 홍대 앞 포장마차에서 눈물을 흘리며 막걸리를 퍼마시곤 했다.
“교수님. 이건 진짜 합격작인데…….”
구철웅이 이홍림 교수의 눈치를 살피며 말끝을 흐렸다.
보통 시험이 끝나면 전임 교사의 주도로 우선 합격, 불합격작을 걸러 낸다.
그다음은 외부 심사위원의 차례다.
외부 심사위원이 합격작을 한 번 더 점검한 후에 수석, 차석을 결정지었다.
이 과정 중에서 합격, 불합격작이 바뀌는 일은 거의 없다.
한국예고 교사들의 결정을 존중하는 의미였고 지금까지의 관례였다.
그러나 이홍림 교수는 달랐다.
그녀는 이미 분류된 합격, 불합격작을 모조리 섞은 후 처음부터 다시 평가를 진행하고 있었다.
“불합격! 묘사에만 치중했고 공간감이 전혀 안 느껴지잖아.”
이홍림 교수가 으르렁거리자 구철웅은 입을 꾹 다물었다.
전임 교사의 권위가 무너지는 순간이었지만 이홍림 교수 앞에선 손쓸 방법이 없었다.
그는 감히 그림자조차 밟을 수 없는 위대한 스승님이었으니까.
‘눈물이 난다.’
이홍림 교수가 어느 이젤 앞에서 발을 멈췄다.
거기엔 화무십일홍을 주제로 한 오현섭의 그림이 놓여 있었다.
그녀는 팔짱을 끼곤 그림을 삐딱하게 쳐다봤다.
“화무십일홍이라…. 꽃을 보고 이런 생각을 한 건가?”
“그렇게 보입니다. 보시다시피 아이디어도 나쁘지 않고 묘사력부터 공간감까지 전체적으로 평균 이상입니다. 참고로 수석, 차석 후보 중 하나로 보고 있는데…….”
“그건 내가 판단해.”
“넵.”
이홍림 교수는 오현섭의 그림에 한 발짝 다가갔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자만심? 어린 친구가 벌써 이런 마음을 갖고 있네. 그런데 그 자만심도 마지막엔 흔들렸네. 초조함? 불안함? 누가 칼을 들고 뒤에서 쫓아오기라도 했나?”
그녀의 평가는 정확했다.
초반, 중반 흐름은 좋았지만 후반부가 완전히 망가졌다.
겉보기엔 멀쩡하게 정리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엉망인 부분들이 많았다.
이홍림 교수는 말없이 다음 그림으로 넘어갔다.
‘수석, 차석은 아니란 소리군.’
발을 멈춘 이홍림 교수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이건…….”
그녀가 보고 있는 건 수연의 그림이었다.
“바니타스!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서 1장 2절에 나오는 구절이지. 흠, 미술사 공부도 열심히 한 모양이네. ‘인생의 무상함에 대한 알레고리’를 이렇게 응용하다니.”
이홍림 교수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뻔한 입시 소묘의 구도에서 과감히 벗어나서 도전했다는 것만으로도 보기 좋네. 정물 배치도 바니타스를 적극적으로 활용했어. 구철웅!”
“네?”
“이 그림, 네가 직접 설명해 봐. 교사랍시고 목만 뻣뻣해져서 공부를 게을리한 건 아니겠지?”
구철웅은 입술에 침을 묻힌 후 설명을 시작했다.
“우, 우선 눈에 띄는 건 역시 해골입니다. 바니타스의 근간이자 기본이 되는 정물이죠.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올라갔던 골고다 언덕, 골고다는 해골산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책형을 그리던 화가들은 십자가 밑에 해골을 그려 넣곤 했죠. 즉, 죽음을 기억하라는 ‘메멘토 모리’를 환기하기 위함이죠. 바니타스 정물화에서도 같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홍림은 막대기로 바닥을 콩 찍었다.
계속 말하라는 뜻이었다.
“해골 주변에는 저희가 시험에 출제한 정물들이 있습니다. 이 중 수험생이 추가한 화병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화병 곳곳에 금이 가고 깨져 있죠. 이는 인간의 연약함을 뜻할 겁니다.”
멀리서 이를 듣던 한국예고 교사들도 다가왔다.
그들의 수업을 듣기 위해서였다.
“좋아. 마냥 놀기만 한 건 아닌 모양이네.”
“저 열심히 했습니다, 교수님.”
“시끄러워. 다들 알고 있겠지만 이런 바니타스 정물화는 17세기에 주로 그려졌는데, 특별히 많이 생산된 시기는 1650, 60년대입니다. 그사이에 발발했던 30년 전쟁의 영향이 컸죠. 이 유럽 최대의 종교 전쟁은 여러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결국 사람들은 물질과 육체가 지닌 무상함에 대해 사람들은 깊이 고민했을 겁니다. 그 고민의 결과물이 바로 바니타스죠.”
짧고 굵은 수업이 끝났다.
구철웅이 식은땀을 닦자 젊은 교사가 그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구 쌤. 멋있네요.”
“전 죽겠어요.”
이홍림 교수는 수연의 바니타스에 한 발짝 다가갔다.
“잘 그렸는데, 분명히 잘 그렸는데 왜 이렇게 긴장감이 느껴질까? 입시라서? 주제가 죽음이라서? 그건 아닌 것 같은데…….”
그때 구철웅이 조용히 이홍림 교수에게 다가갔다.
“교수님. 이제 수석이랑 차석을 결정하셔야 합니다.”
“…….”
이홍림 교수는 두 눈을 삐딱하게 떴다.
“바니타스는 차석.”
“바니타스는 차석…. 네? 수석이 아니라요?”
구철웅이 이홍림 교수에게 다시 물었다.
“교수님. 수석, 차석을 모두 고르셔야 합니다.”
“나도 알아. 아는데, 여기엔 수석이 없어.”
강당을 가득 메운 그림을 훑어보던 이홍림 교수가 물었다.
“수험생이 총 몇 명이지?”
“120명입니다.”
“내가 심사한 그림은 110장인데 나머지 10장은 어딨어?”
“그 10장은 완전히 조건 미달이라 아예 뒤로 빼놨는데요. 그건 안 봐도 탈락입니다.”
“구철웅!”
이홍림 교수가 벼락처럼 소리치자 구철웅이 펄쩍 뛰었다.
“가, 가져오겠습니다!”
구철웅은 탈락으로 분류했던 열 장의 그림을 가져왔다.
이홍림 교수는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그림들을 한 장씩 넘겼다.
백지 혹은 엉망진창인 낙서들만 가득한 그림이었다.
“거의 다 이런 그림입니다. 교수님께서 굳이 안 보셔도 될 텐데요.”
“그건 내가 판단해.”
구철웅의 예상대로 탈락작 중에서는 이렇다 할 만한 그림이 없었다.
그때, 맨 마지막 그림을 본 이홍림 교수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한동안 그림을 뚫어지게 노려보다 위에 끼워진 논술 답안지로 시선을 옮겼다.
거기엔 아주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구철웅은 곁눈질로 그 답안지를 보곤 코웃음을 쳤다.
보나 마나 성의 없이 대충 적었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 그 답안지를 본 이홍림 교수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웃었어?’
이홍림 교수가 벌떡 일어나 빈 이젤 위에 마지막 그림을 올렸다.
“저 그림…….”
구철웅은 마지막 그림의 주인을 알고 있었다.
시험 시작 전, 오른팔에 깁스하고 왔던 정환의 그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