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dwarf in his previous life, but an artistic genius in his current life RAW novel - Chapter 147
145화 뜻밖의 소식
“싫습니다.”
흐르는 물도 자를 수 있을 듯 단호한 거절이었다.
그러나 델핀은 입가의 환한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죄송해요. 이렇게 보는 앞에서 거절당하니 목이 마르네요.”
델핀은 가까운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와인 잔을 집어 들었다.
와인 잔을 빙글빙글 돌리자 붉은 와인에서 달콤한 향기가 터져 나왔다.
‘헝부이에에 들른 보람이 있네.’
델핀은 이 자리에 오기 전 헝부이에의 양조장에서 두 동생을 만났다.
비록 처참하게 패배하긴 했지만 앙투안과 알렉산더는 정환과 한번 겨뤄 본 사이였다.
그러니 정환에 관해선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게 분명했다.
‘미스터 리, 어때?’
델핀의 질문에 앙투안과 알렉산더는 썩은 와인 냄새를 풀풀 풍기며 똑같은 대답을 내놓았다.
‘예측할 수 없는 인물이야.’
델핀은 동생들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크게 코웃음 쳤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델핀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예측하지 못했던 인물은 단 한 사람, 아버지뿐이었으니까.
사람 보는 눈 하나는 확실하다고 자부하는 델핀이었지만 아버지의 판단을 맞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델핀은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의 욕심은 그 누구도 가늠하지 못할 정도로 거대했기 때문이다.
델핀은 와인을 마시며 눈앞의 정환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이렇게 보니 아버지와 정환은 닮은 부분이 있었다.
아무리 봐도 그 속내를 짐작할 수 없다는 점이 그러했다.
‘아버지처럼 욕심이 많은 건가? 아냐, 풍기는 분위기가 달라.’
델핀은 추측을 멈췄다.
어차피 여기서 고민해 봐야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였다.
지금 중요한 건 정환이 쥐고 있는 지분을 돌려받는 것이었다.
그래야만 LAMH의 제대로 된 후계자로 인정받을 수 있으니까.
정환이 한 차례 거절하긴 했지만 델핀에겐 아직 손에 쥔 패가 많았다.
그리고 이것이 델핀의 강점이었다.
자신이 상대방보다 우위에 있음에도 방심하지 않고 수십 가지 경우의 수를 생각하는 것.
어릴 때부터 목에 힘만 들어간 동생들이 손에 넣지 못한 델핀만의 무기였다.
델핀은 와인 잔을 내려놓고 장난 섞인 목소리로 정환에게 물었다.
“그거 아세요? 지분으로만 따지면 미스터 리가 워블로 IWB, 로메의 대주주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두 브랜드의 경영에 참여하셔도 전혀 이상할 게 없죠. 물론, 미스터 리가 그렇게 하신다면 전 환영입니다. 땅에 떨어진 브랜드 평판이 다시 좋아질 테니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죠. 그런데…….”
델핀이 말을 멈췄다.
그러고는 장난기를 쏙 뺀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그 지분을 별다른 이유 없이 계속 쥐고 계신다면 미스터 리의 의중과는 다른 소문이 퍼질 수도 있어요. 가령, 블랙해머가 LAMH 산하에 편입되길 원한다는 뉴스 기사가 날 수도 있겠네요.”
“…….”
델핀이 다시 장난스럽게 목소리를 바꿨다.
“확실히 억지스럽죠? 그래요. 누가 이런 삼류 소설 같은 이야기를 믿겠어요? 그런데 세상엔 이런 이야기를 설득력 있게 풀어 줄 기자나 애널리스트들이 널려 있답니다.”
지분을 넘기지 않으면 악의적인 소문을 퍼뜨리겠다는 협박이었다.
정환은 그런 델핀을 보며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델핀 씨는 동생들과 조금 다르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역시 피는 못 속이나 봅니다.”
그러나 델핀은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했다.
“어쨌든 한 배에서 나왔으니까요. 그래도 동생들과 비교하진 말아 주세요. 능력 면에선 제가 더 뛰어나거든요. 미스터 리, 우리 이쯤에서 솔직하게 이야기해 보죠. 앞으로도 계속 부딪힐 텐데 고작 이런 지분 문제로 서로 얼굴 붉힐 필요는 없지 않나요? 그러니까 깔끔하게 정리하는 게 어때요?”
델핀이 다시 한번 지분 매각을 제안했다.
조금 전과 달리 한 차례 가벼운 협박이 있었으니 이번에는 마음이 흔들릴 게 분명했다.
그러나 정환은 여전히 흥미가 없어 보였다.
델핀은 짧은 한숨을 내쉰 후 정환에게 말했다.
“미스터 리. 만약 워블로 IWB와 로메가 블랙해머 산하에 들어간다고 가정해 보죠. 그렇다면 아우룸루스와 에테르눔이 두 브랜드를 관리해야 할 텐데 그럴 만한 여력이 되나요?”
델핀이 고개를 저었다.
“물론 아우룸루스와 에테르눔은 훌륭한 브랜드예요. 이걸 부정할 순 없죠. 그렇지만 하루아침에 세계 곳곳에 흩뿌려진 수십, 수백 개의 지점과 인력을 컨트롤하기엔 턱없이 부족해요. 아마 소비자들이 먼저 그 부족함을 느낄 겁니다. 소비자들의 실망감이 누적된다면 블랙해머가 지금까지 이뤄 온 모든 것이 신기루처럼 사라질 수도 있어요.”
델핀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는데 진심으로 블랙해머의 미래를 걱정하는 것 같았다.
“미스터 리. 이건 협박이나 회유가 아녜요. 동종 업계에 있는 사람으로서 진심으로 건네는 우려입니다. 앞날이 창창한 브랜드가 감당하지 못할 걸 삼켰다가 탈이 나는 꼴을 허다하게 봐왔어요. 블랙해머가 그리되는 건 정말 보고 싶지 않습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니 마지막으로 제안하겠습니다. 제게 지분을 넘기세요. 그렇게 하신다면 아우룸루스, 에테르눔과 사업 영역이 겹치지 않게 상품 라인업을 조절하겠습니다. 원하신다면 사업 지역까지도요.”
델핀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제안이었다.
정환은 그 제안을 듣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렇게 하셨다간 손해가 막심하실 것 같은데 아버님께서 거기에 동의하겠습니까?”
“이미 두 브랜드의 전권은 제게 넘어온 상태예요. 제 결정에 달린 거죠. 그리고 두 동생이 미스터 리에게 큰 결례를 저질렀잖아요? 사과하려면 이 정도 손해는 감수해야죠.”
물론 거짓말이었다.
델핀은 이 약속을 끝까지 지킬 생각이 전혀 없었다.
짧으면 반년, 길어야 1년 안에 이 약속을 깰 생각이었다.
1년 동안 LAMH에서 충분한 투자만 받아 낸다면 에테르눔과 아우룸루스를 집어삼킬 자신이 있었다.
‘그건 시작일 뿐이지. 다음 차례는 블랙해머 브랜드 전체가 될 테니까.’
델핀은 정환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정환은 다시 한번 델핀의 제안을 거절했다.
“제안해 주신 건 감사합니다. 하지만 지분을 넘길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군요.”
델핀은 창가 옆 넓은 홀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코르누의 신상 신발들이 예술 작품처럼 진열되어 있었고 수많은 사람이 그 앞에 서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미스터 리는 이미 마음을 굳게 먹은 모양이군요. 그래도 사람 마음은 시시각각 변하는 법이잖아요? 한 입으로 두말하는 거, 그리 부끄러운 일 아닙니다. 그러니 그 생각이 바뀌시면 언제든지 연락해 주세요. 민망해하실 필요 없으니까.”
델핀은 정환에게 눈인사를 보낸 후 우아한 발걸음으로 공연장을 빠져나갔다.
리카싱은 델핀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물었다.
“델핀이 뭐랍니까?”
정환은 조금 전 델핀과 나눴던 대화를 짧게 요약해서 전달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리카싱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블랙해머와 겹치지 않게 사업 영역, 지역을 조절하겠다? 이건 확실히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네요.”
물론 리카싱 역시 델핀이 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리란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동안 블랙해머가 얻을 이득을 생각해 본다면 델핀의 제안은 그리 나쁘지 않아 보였다.
“델핀은 워블로 IWB와 로메를 정상화하려 안간힘을 쓸 겁니다. 최소한 1년 정도는 걸리겠죠? 그사이에 아우룸루스와 에테르눔이 신제품을 출시하며 시장을 장악한다면 그 격차는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벌어질 겁니다.”
리카싱의 낙관에 정환은 고개를 저었다.
“반대로 생각해야죠. 델핀이 그 사실을 모를까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이만한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델핀이 두 브랜드 지분을 돌려받으려는 이유가 뭘까요? 결국 그것을 통해 얻는 이득이 손해보다 더 크기 때문이에요.”
정환이 이야기를 들은 리카싱이 아! 하고 소리를 냈다.
“우리가 그 이득에 안주하는 사이, 델핀은 LAMH의 무사히 정식 후계자가 될 겁니다. 그럼 자연스럽게 LAMH에선 델핀에게 어마어마한 돈을 쏟아붓겠죠. 후계자 지위를 더욱 공고하게 다져야 하니까요. 1년 후, 델핀이 다시 한번 싸움을 걸어온다면 그땐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렇죠. LAMH가 작정하고 추잡한 싸움을 걸어올 테니까요.”
리카싱이 혀를 내둘렀다.
“미스터 리에게 델핀을 조심하라고 한 사람이 바로 저인데, 제가 그 유혹에 넘어가 버렸군요. 부끄럽습니다.”
“아닙니다. 리카싱 씨가 아니라 누가 들었어도 혹할 제안입니다.”
“그나저나 델핀도 정말 대단하네요. 아무리 미래에 얻을 이득이 크다고 해도 당장의 이득을 크게 포기하는 제안을 꺼내긴 쉽지 않을 텐데요.”
“네. 확실히 동생들과 결이 달라 보이긴 하더군요.”
10분 남짓한 대화였지만 정환은 델핀이 형제들과 다르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앙투안과 알렉산더는 본인들의 욕망을 통제하지 못하는 인물들이었다.
반면, 델핀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자기가 품은 욕망을 드러내고 감추는 것에 무척 능숙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도드라졌던 점은 바로 손에 쥐고 있는 패가 많음에도 절대 방심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었다.
‘델핀이 진짜 원하는 게 뭘까? LAMH의 진짜 후계자라는 타이틀? 그게 꼭 워블로 IWB와 로메의 지분이 있어야 가능한 일일까?’
정환은 어쩌면 델핀이 진짜 원하는 것은 다른 곳에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스터 리. 그래도 델핀이 지적한 것처럼 규모가 커진 브랜드를 관리할 만한 사람은 꼭 필요해 보입니다. 조금 전까지 계속 괜찮은 사람을 고민해 봤는데 도무지 떠오르질 않네요.”
정환은 자기 일처럼 걱정해 주는 리카싱에게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괜찮습니다. 정답은 늘 가까운 곳에 숨어 있는 법이니까요.”
때마침 2부 공연이 시작된다는 알림이 울려 퍼졌다.
정환이 리카싱과 함께 공연장으로 돌아가려 할 때 주머니 속 핸드폰이 윙 소리를 내며 울렸다.
전화를 건 사람은 바로 이동기였다.
“그러잖아도 연락드리려 했는데 일은 괜찮습니까?”
이동기가 앓는 소리를 냈다.
“중국 시장에는 겨우 적응했는데 동남아 쪽은 또 입맛이 다르네요. 정신을 못 차리겠어요.”
“인력을 충원해 드리겠습니다. 조금만 버텨 주세요.”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그런데 대표님, 아직 한국 소식 못 들으셨죠?”
“왜요? 무슨 일 있습니까?”
“그게 말입니다…….”
이동기는 평소보다 낮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정환에게 이야기했다.
“…알겠습니다.”
정환은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던 리카싱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2부 공연은 못 보겠네요.”
“일이 생기셨습니까?”
정환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에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