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dwarf in his previous life, but an artistic genius in his current life RAW novel - Chapter 149
147화 인간의 도리
“변해도 어떻게 그리 변할 수 있는지, 참.”
김효빈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근처를 지나가던 사람들의 발소리였다.
김효빈은 고개를 살짝 내밀어 불안한 표정으로 바깥 상황을 몇 번이나 확인했다.
정환과 대화를 나누는 게 혹시나 다른 사람의 귀에 들어갈까 봐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김효빈은 인기척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이웅희 회장이 절 만나러 영국까지 왔을 때의 모습이 아직도 선합니다. 그때 이웅희 회장이 가슴속에 품고 있던 호승심은 참 순수했습니다. 어떻게든 제일 패션을 꺾어보겠다는 그 의지에 저 역시 끌렸던 거고요.”
정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김효빈이 말했던 의지를 정환 역시 엿본 적이 있었으니까.
‘그런 마음이 있었기에 고등학생에 불과했던 날 영입한다는 과감한 승부수를 둘 수 있었던 거겠지.’
정환이 생각하는 사이 김효빈이 맥 빠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때의 이웅희 회장은 이제 없습니다. 누구보다 도전 정신이 뛰어났던 사람이 지금은 입만 열면 돈 이야기뿐이에요. 게다가 언론 노출은 왜 그리 즐기는지 아까 빈소에서 기자들 줄 세워놓는 모습 보셨죠?”
“네. 봤습니다. 그리고 읽히더군요. 이웅희 회장의 탐욕이.”
정환의 대답에 김효빈이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환 씨도 그걸 느꼈나요?”
“네. 박옥정 회장 빈소에 들어서서 영정을 쳐다보는데 눈빛이 전과 확연히 다르더라고요.”
정환의 대답에 납득이 간다는 듯 김효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정환 씨는 눈썰미가 좋은 편이니 눈치채는 게 당연하겠군요.”
“언제부터 그렇게 변했습니까?”
“2년 전쯤이죠.”
김효빈은 망설임 없이 대답한 뒤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박옥정 회장이 신년사에서 LE를 꺾겠다고 공표한 적이 있습니다. 이웅희 회장은 이 신년사를 듣고 제자리에서 춤을 췄죠. 그럴 수밖에요. 제일 패션이 LE보다 아래라는 것을 박옥정 회장이 직접 인정한 셈이니까. 그리고 그때부터였습니다. 이웅희라는 사람이 조금씩 이상해지기 시작한 게.”
김효빈의 이야기를 듣던 정환은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기억 속의 김효빈은 이웅희 회장과 자주 독대하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 실장님 정도면 이웅희 회장에게 직언할 수 있었을 텐데요.”
“네. 시도했습니다. 처음엔 제 말을 귀담아듣는 것 같았어요. 그런데 갈수록 절 피하더군요. 이유야 뻔하죠. 제가 듣기 싫은 소리만 늘어놓으니까. 그러다 최근에는 사이가 완전히 틀어졌습니다.”
“이웅희 회장에게 직언해서 그런 겁니까?”
“아뇨. 뭐, 그것도 관련이 있지만…….”
김효빈은 얼굴을 붉히더니 한참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사실은 부끄럽게도 제가 최근 1년 동안 컬렉션에 한 작품도 내지 못했습니다.”
“정말요?”
정환이 김효빈의 대답을 듣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정환이 기억하는 김효빈은 매년 왕성하게 컬렉션을 발표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열정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런 김효빈이 컬렉션에 한 작품도 내지 못했다는 것은 꽤 심각한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김형태 디자이너가 말하려 했던 게 이거였나 보군.’
정환이 표정을 굳히고는 김효빈에게 질문했다.
“혹시… 매너리즘에 빠지신 겁니까?”
“글쎄요. 매너리즘이라면 매너리즘이겠죠.”
김효빈은 후, 하고 길게 한숨을 내쉰 뒤 말을 이었다.
“사실은 이웅희 회장에게 직언한 이후부터 제 컬렉션 디자인이 좀처럼 통과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 원인이 제 실력 부족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계속 같은 일이 반복되니 점차 다른 생각이 들더군요. 정환 씨가 보기에는 어떻습니까? 이게 우연 같습니까?”
“전혀요. 이웅희 회장이 감정적으로 대응하고 있네요. 회사 내에서 김 실장님의 발언권이 점점 더 약해지고 있다는 게 그 증거 아니겠습니까?”
정환의 이야기에 김효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정환 씨도 저랑 같은 생각이군요. 후…. 이럴 줄 알았으면 사표를 걸고서라도 이웅희 회장에게 더 쓴소리를 해야 했는데….”
김효빈이 자책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정환은 그런 김효빈이 안타까웠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김효빈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었으니까.
‘이웅희 회장이 매너리즘의 빌미를 제공한 거야. 아니, 애초에 김 실장님은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았을지도 몰라.’
정환이 이런 식으로 생각을 정리하며 이야기를 꺼내려고 할 때였다.
뒤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디자이너님 잘못이 아니잖아요!”
낯선 목소리에 김효빈이 고개를 휙 돌렸다.
거기엔 김형태를 비롯한 LE의 디자이너들이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아, 어떻게…….”
“이웅희 회장이 그렇게 된 게 어째서 실장님 잘못이죠? 실장님은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요!”
“형태 씨.”
김형태가 눈썹을 찡그린 채 김효빈에게 소리쳤다.
“실장님이 회의에서 발표했던 지난 컬렉션, 솔직히 괜찮았어요. 이 양반, 몇 달 빌빌거리더니 이번에는 대형 사고 한 번 제대로 치겠구나 싶었다고요. 그런데 이웅희 회장이 실장님 컬렉션 시안을 보자마자 뭐라고 했죠?”
“…….”
김효빈이 침묵하자 옆에서 지켜보던 최성원이 거들었다.
“그 시안이 돈이 되겠냐? 이렇게 말했죠? 참나,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립니까? 맛 가기 일보 직전이던 LE를 기사회생시킨 장본인한테? 그리고 그 시안을 김 실장님이 어렵게 수정해서 다시 올렸는데 이웅희 회장은 그걸 제대로 보지도 않고 반려했죠?”
“…….”
최성원은 그런 김효빈을 보며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형태 씨 말이 맞아요. 사실 김 실장님만 그렇게 물 먹은 게 아니에요. 저랑 하은영 디자이너님, 김형태 디자이너님도 지난 컬렉션 전부 빠꾸 먹었어요. 그래놓고 어떤 컬렉션이 통과되었는지 아세요?”
하은영이 최성원의 말을 받았다.
“작년에 유행했던 디자인의 원가를 절감한 컬렉션. 그 컬렉션이 통과됐죠. 더 웃긴 건 제작 공장에서도 이건 아니라고 할 정도로 원가 절감의 정도가 심했단 거예요. 두고 보세요. 그 옷이 시장에 판매되는 순간, 분명 소비자들이 먼저 불만을 터뜨릴 겁니다. 그리고 그 화살은 전부 우리에게 돌아올 거예요.”
“젠장, 더러워서 못 해 먹겠네. 사고는 그쪽에서 쳐놓고 우리더러 욕받이 하라는 거 아닙니까!”
김형태가 씩씩거리며 그간 쌓였던 감정을 성토했다.
그러자 최성원 또한 동감한다는 듯 이야기를 꺼냈다.
“이거, 마음만 같아선 확 제일 패션으로 이직하고 싶어요. 내 새끼 같은 브랜드 두고 가는 게 가슴 아프긴 하지만 이웅희 회장 하는 짓을 도저히 못 봐주겠어요.”
“그것도 쉽지 않을 겁니다.”
김효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최성원의 이야기에 대꾸했다.
“저 역시 이직을 고려하고 있었습니다. LE에 계속 머물렀다간 제 커리어가 완전히 엉망진창이 될 게 뻔하니까요. 제일 패션 쪽도 눈여겨보고 있던 것은 그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제 입장에서 제일 패션만 한 선택지가 없죠. 그쪽이라면 적어도 이웅희 회장처럼 절 대하진 않을 테고 저 역시 원하는 디자인을 만들어 낼 수 있을 테니. 그런데 며칠 전 회장님 비서가 제게 넌지시 말해 주더군요. 박옥정 회장님의 소식을 듣자마자 이웅희 회장이 제일 패션을 어떻게 뜯어 먹을지 계획을 세우라 지시했다고. 아마 지금쯤이면 벌써 결론이 나왔을 겁니다. 그러니 제일 패션으로 이직해 봐야 별 차이 없겠죠.”
“에이, 설마 그렇게까지 하겠어요?”
김형태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현실을 부정했다.
하지만 김효빈은 확신에 찬 표정으로 김형태에게 되물었다.
“정말 이웅희 회장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을까요?”
“그야…….”
“아뇨. 그렇게 할 겁니다. 이웅희 회장이 보기에 제일 패션은 딱 털어먹기 좋은 상태일 테니까요. 물론 제일 패션의 명성이 예전 같지 않은 건 사실입니다. 그래도 제일 패션은 제일 패션이에요. 가장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디자인, 제작 인력은 여전히 알짜죠. 그 인력들의 실력만 놓고 본다면 당장 LE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겁니다. 제가 제일 패션 쪽으로 이직을 고려했던 것도 바로 그것 때문이고요.”
하은영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
“맞아요. 박옥정 회장이 마지막까지 사활을 걸었던 이유도 그 인력들 때문이에요. 그 사람들이 있다면 제일 패션이 충분히 재기할 수 있을 거라 믿었던 거죠. 하지만 실장님의 말씀을 들어보니 그것도 이제 끝이겠네요. 이웅희 회장은 제일 패션에서 돈 되는 건 모조리 빼먹고 껍데기만 남겨놓을 테니까요. 그 과정 역시 절대 깨끗하지 않을 거고요.”
답이 나오질 않자 LE 디자이너들은 동시에 허! 한숨을 내쉬었다.
가장 격한 반응을 보인 것은 이 바닥에서 가장 오래 활동한 최성원이었다.
“아니, 이게 말이 돼요? 물론 저도 압니다. 약하면 잡아먹히는 건 시장의 지극히 당연한 논리라는 걸. 하지만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닌가요? 지금은 상중이잖아요. 한때는 대한민국의 패션을 이끌었던 사람에게 최소한의 예의는 갖추지 못할망정 잡아먹을 생각이나 하다니…….”
최성원은 몇 번이나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마지막 말을 이었다.
“더 이상 못 참겠네요. 정말 이제 더 다니고 싶지 않아요, 이 회사.”
최성원이 마음속 깊이 담아놓고 있던 말을 꺼내자 다른 디자이너들이 침묵으로 긍정을 표했다.
그와 동시에 네 사람의 시선이 정환에게 향했다.
정환은 그 시선에서 어떠한 열망을 읽어냈지만 고개를 저었다.
그런 뒤 입을 열었다.
“여러분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겠습니다. 이웅희 회장의 생각도 알았고요. 하지만 일단은 먼저 빈소로 돌아가 보는 게 좋겠어요.”
“저, 정환 씨.”
정환은 자기를 붙잡는 김효빈에게 짧게 대답했다.
“조금만 시간을 주세요. 지금은 최성원 디자이너님이 말씀해 주신 대로 고인을 위로하는 게 우선이니까요.”
그렇게 정환이 자리를 떠났고 정환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남은 사람들의 표정에는 복잡한 감정이 떠올랐다.
***
다음 날, 새벽.
조용한 빈소에서 황수연은 할머니의 영정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사진 속, 박옥정은 인자한 미소를 띤 채 수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황수연은 그런 할머니를 보며 몸을 가볍게 떨었다.
‘할머니. 나 무서워…….’
황수연은 어제저녁, 이웅희 회장의 탐욕스러운 눈빛을 읽었다.
그 눈빛은 분명 할머니의 유산을 탐내는 눈빛이었다.
그 역겨운 눈빛을 보자마자 당장 여기서 나가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황수연은 그러지 못했다.
겁이 나서 입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겁이 나는 것은 비단 이웅희 회장뿐만이 아니었다.
이제 제일 패션을 책임져야 한다는 무거운 중압감이 황수연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냥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도망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할머니가 남긴 소중한 유산을 지킬 사람은 자기뿐이니까.
황수연이 홀로 눈물을 삼킬 무렵, 누군가가 빈소로 들어왔다.
“수연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