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dwarf in his previous life, but an artistic genius in his current life RAW novel - Chapter 151
149화 인간의 욕심
책상 아래 감춰둔 황수연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할머니가 마지막까지 머물렀던 이곳에서 이웅희 회장은 거리낌 없이 망발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런 이웅희 회장에게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지만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웅희 회장에 대한 공포심, 그리고 이 공포심을 어찌할 수 없다는 무력감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황수연은 어디선가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살짝 돌렸다.
‘아.’
이웅희 회장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 걸린 할머니의 초상화였다.
초상화 속의 박옥정은 황수연에게 따뜻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 눈빛은 마치 지우개처럼 황수연이 마음속에 품었던 공포심과 무력감을 지워 나갔다.
그 감정들이 눈 녹듯이 사라지자 황수연은 다시 한번 이웅희 회장을 쳐다봤다.
이웅희 회장은 애써 점잖은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눈에서는 욕심이 들끓고 있었다.
황수연의 마음속 한쪽에 뜨거운 불씨가 피어올랐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이웅희 회장은 황수연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할 말을 이어 나갔다.
“황 대표님. 당장 결정해야 하는 건 아닙니다. 충분히 시간을 들여서 고민해 보시고…….”
“맞습니다. 회장님 말씀처럼 제가 제일 패션을 잘 일궈 나가는 게 그리 쉽지 않을 겁니다.”
이웅희 회장의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걸렸다.
제일 패션은 박옥정의 마지막 유산이었다.
박옥정의 손녀로서 황수연이 그 유산을 끝까지 지킬 것이라 예상했는데 생각보다 일이 수월하게 풀리고 있었다.
“그건 황 대표 잘못이 아닙니다. 선대 회장님께서 워낙 훌륭하셨기 때문에…….”
“하지만.”
황수연이 이웅희 회장의 말을 잘랐다.
“할 수 있는 데까지 해 보려 합니다.”
이웅희 회장의 미소가 한순간에 어색해졌다.
일이 수월하게 풀리는 게 아니라 꼬이고 있음을 직감한 것이었다.
이웅희 회장이 다급히 황수연에게 말했다.
“황 대표님. 무모한 생각입니다. 지금 아직 시장 상황을 잘 모르셔서 그런…….”
황수연은 이웅희 회장이 말할 틈을 주지 않았다.
“아뇨.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수십, 수백 번 실패할 겁니다. 회사가 휘청거릴 만큼 큰 위기가 찾아올 수도 있겠죠.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황수연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일 패션 직원들이 먼저 제 손을 놓지 않는 한, 제가 그분들의 손을 놓는 일은 없을 겁니다.”
“…….”
“수없이 실패하더라도 할머니는 제가 제일 패션을 지켜 나가길 바라실 겁니다.”
두 눈을 좌우로 굴리던 이웅희 회장이 짐짓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황 대표님. 어떤 마음인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감정적으로 판단하면 안 됩니다. 이성적으로 신중하게 판단하셔야 합니다. 대표님 선택 하나하나에 왔다 갔다 하는 직원들을 생각하셔야 해요.”
이웅희 회장은 계속 직원을 들먹였다.
황수연의 막중한 책임감을 강조해서 제일 패션을 포기하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황수연은 이미 마음을 굳게 먹은 듯 입을 다물었다.
이웅희 회장은 초조해졌다.
다 잡은 물고기를 이렇게 눈앞에서 허무하게 놓칠 순 없었다.
“대표님. 다시 한번 생각…….”
이웅희 회장이 황수연을 설득하려던 그때였다.
뭔가가 눈에 띄었다.
책상 위에 쌓인 원단과 시안 사이에 끼워진 명함이었다.
‘이건…….’
명함 위에는 블랙해머 로고와 함께 이정환이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이웅희 회장은 눈동자를 좌우로 굴려 황수연과 그 명함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러고는 뭔가를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제일 패션을 걱정하는 마음에 드린 말씀이었는데 제가 주제를 넘은 것 같군요. 마음 상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회장님의 조언은 뼈에 새기도록 하겠습니다.”
이웅희 회장은 황수연에게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밖으로 나갔다.
문이 완전히 닫히고 난 후에야 황수연은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하.”
간신히 숨을 고른 황수연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좋게 좋게 가자는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으니 이웅희 회장의 공격이 시작될 게 분명했다.
황수연은 책상 위에 놓인 정환의 명함을 집어 들었다.
지금 정환에게 전화해 할머니의 공개되지 않은 유언장에 관해 이야기한다면 정환은 분명 큰 도움을 줄 게 분명했다.
“아냐.”
황수연은 고개를 저어 그 생각을 지워 버렸다.
이미 정환에게 몇 번이나 큰 도움을 받았다.
또다시 도와 달라고 손을 내밀 순 없었다.
제일 패션의 후계자로서 당당히 싸움에 맞서야 했다.
황수연은 정환의 명함을 서랍 속에 넣은 후 인터폰을 눌렀다.
삐 소리와 함께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정민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대표님.”
“실장님. 디자인팀 전부 소집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
이웅희 회장이 차에서 내린 곳은 바로 블랙해머 사옥 앞이었다.
제일 패션에서 이곳까지 한달음에 달려온 이유.
그것은 조금 전에 있었던 황수연과의 협상에서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기 때문이다.
‘그 눈빛.’
이웅희 회장이 황수연에게 기대했던 반응은 좌절이었다.
본인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서 기인한 좌절.
그 좌절을 건드려 황수연이 스스로 자기에게 회사를 넘기게 할 생각이었다.
그런 모양새가 만들어진다면 이웅희 회장이 제일 패션의 알짜를 털어먹는다 해도 비난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분명 일이 잘 풀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처음엔 좌절감을 내비쳤던 황수연의 눈빛이 어느 순간 변했다.
뜨겁게 타오르는 분노가 가득 담긴 눈빛.
이웅희 회장은 책상 위에 놓인 명함을 본 후에야 그 분노가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깨달았다.
‘두 사람, 동창 사이라고 했지? 아마 블랙해머가 제일 패션의 든든한 뒷배가 되어주겠다고 했을 거야. 그래서 이정환이 사흘 내내 빈소에 머물렀던 거지. 둘 사이에 이야기가 있었으니 황수연도 내게 그렇게 맞설 수 있었던 거고.’
하지만 책상 위에 놓여있던 명함 하나만으로 정환이 제일 패션에 개입했다는 것을 단정 지을 순 없었다.
쉽게 단정 짓고 블랙해머를 적으로 돌리게 된다면 말라 죽는 건 제일 패션이 아니라 LE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애매모호할 땐 직접 확인해 봐야지.’
널찍한 대표실에 들어선 이웅희 회장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정환에게 인사했다.
“이야, 정말 멋진 사옥이군. 우리도 얼른 이렇게 근사한 사옥을 지어야 할 텐데 말이야.”
“곧 그리되실 겁니다.”
“…….”
평소 같았으면 기분 좋게 받아들였을 인사치레였지만 이웅희 회장은 이마저도 아니꼬웠다.
제일 패션을 눈앞에서 놓친 까닭이었다.
하지만 이웅희 회장은 그 감정을 감추고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말이라도 고맙군. 그나저나 이렇게 갑자기 찾아왔는데 반겨줘서 고맙네. 박 회장님 장례식에선 워낙 경황이 없어서 인사도 제대로 못 나눴잖나. 업계 돌아가는 이야기도 좀 듣고 유럽 시장 이야기도 궁금해서 와 봤네.”
“아, 그랬죠. 이쪽에 앉으시죠.”
두 사람이 티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이웅희 회장은 별로 궁금하지도 않던 유럽 패션 이야기를 이어가다 본론을 꺼냈다.
“조금 전, 황수연 대표를 만나고 오는 길이네.”
“그러셨군요.”
정환이 덤덤하게 답했다.
이웅희 회장은 아무렇지 않게 답하는 그 모습이 더욱 거슬렸다.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더군. 제일 패션이 물론 LE의 경쟁 기업이긴 하지만 역사와 전통이 있는 곳 아닌가? 그런 회사가 오너 한 사람의 실수로 무너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이웅희 회장은 일부러 황수연의 능력을 의심하는 투로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 정환이 어떤 반응을 보일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환의 반응은 여전히 덤덤했다.
“회장님 말씀처럼 황 대표는 분명 여러 실수를 저지를 겁니다. 하지만 지켜보시죠. 그 친구, 능력 있습니다. 어쩌면 선대 회장님만큼 회사를 잘 꾸려 나갈 수도 있습니다.”
“흠…….”
듣고 싶은 대답이 아니었다.
이웅희 회장은 손끝으로 티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다 결국 먼저 포문을 열었다.
“황 대표 테이블 위에 자네 명함이 있더군.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네. 이 대표, 혹시 제일 패션 쪽에 관심이 있는 건가?”
“네. 관심 있습니다.”
정환의 짧은 대답에 이웅희 회장은 가슴이 내려앉았다.
황수연의 뒤에 정환이 있다는 의심이 확신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그렇다면 제일 패션을 인수한다거나 황 대표가 먼저 자네에게 이야기를 꺼낸 적이…….”
“아뇨. 그런 생각은 해 본 적도 없고 황 대표 역시 그것과 관련된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
이웅희 회장의 얼굴이 밝아졌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뿐이었다.
“물론 회장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제일 패션의 인재들이 블랙해머와 함께한다면 더할 나위 없겠죠. 하지만 박옥정 회장님께서 타계하신 지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최소한 지켜야 할 예의라는 게 있잖습니까?”
정환이 되묻자 이웅희 회장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래. 그렇지…….”
“그런데 저도 궁금해지네요. 이렇게 말씀하는 것을 보니 회장님께서 제일 패션에 관심이 있으신 것 같은데, 맞습니까?”
예상치 못한 정환의 질문에 이웅희 회장은 버벅거리며 대답했다.
“아, 그게 말이지…….”
이웅희 회장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설사 블랙해머가 황수연 뒤에 있다 하더라도 포기할 수 없었다.
이웅희 회장에게 제일 패션은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할 영광의 트로피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그 속내를 드러낼 순 없었다.
자칫 잘못했다간 블랙해머를 적으로 돌릴 수 있었으니까.
그러니 마음 한쪽에 품은 욕심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이 상황에 적절한 대답을 해야 했다.
“다, 당연히 지켜야 할 회사라고 생각하네. 대한민국 패션계에 한 획을 그은 회사 아닌가? 그런 회사가 이리 허망하게 사라지면 안 되지.”
이웅희 회장이 애써 자신의 흑심을 감추고 대답했다.
그러자 정환은 씩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역시 회장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그래. 우리 생각이 같다는 걸 알았으니 다행이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이만 가봐야겠군. 바쁜 사람의 시간을 뺏어서 미안하네.”
“아닙니다. 살펴 가십시오.”
블랙해머 사옥을 나온 이웅희 회장은 대기하던 차에 올라타자마자 빽 소리쳤다.
“망할 자식. 사람을 갖고 놀아? 뭐? 예의?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분을 삭이던 이웅희 회장이 곧장 비서에게 전화했다.
“제일 패션 디자이너 스카웃 건, 어디까지 진행됐어?”
“명단 작성은 이미 끝났습니다. 이제 스카웃 제안만 하면…….”
“뭐? 벌써 끝났다고? 그럼 뭘 망설이고 있는 거야? 당장 진행해!”
제일 패션을 집어삼키는 방법은 비단 인수합병만 있는 게 아니었다.
제일 패션의 본체라 할 수 있는 디자이너들을 LE로 빼돌리는 것 역시 하나의 방법이었다.
그러면 정환 역시 나설 명분이 없었다.
제일 패션 디자이너들이 자진해서 LE로 이직한 것이라 둘러대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이웅희 회장이 윽박지르자 비서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회장님. 제일 패션 쪽 분위기가 좀 그렇잖습니까? 조금만 기다려 보는 게 도의적으로…….”
“도의? 도의가 네 월급 주냐?”
“…….”
“길게 끌지 말고, 지금부터 당장 스카웃 시작해. 한 사람도 남김없이 모조리 LE로 끌고 와! 제일 패션을 개털로 만들어 버리란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