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dwarf in his previous life, but an artistic genius in his current life RAW novel - Chapter 152
150화 스완 송 (1)
이른 아침, 출근길.
제일 패션으로 향하는 정민주의 발걸음은 천근만근이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블랙해머에 밀리고 LE에 치였지만 그럭저럭 버틸 만했다.
박옥정 회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박옥정 회장은 그룹의 위기 앞에서 좌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힘을 내서 과거의 영광을 되찾으려 애썼고 직원들도 한마음으로 힘을 합쳤다.
그러나 공들인 컬렉션이 세상의 빛을 보기도 전에 박옥정 회장이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 버렸다.
하지만 아직 희망이 있었다.
며칠 전, 이웅희 회장과 대면하던 황수연을 보며 생긴 믿음이었다.
황수연은 야욕을 드러내는 이웅희 회장 앞에서 전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몇 번을 실패하더라도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뜻을 당당히 밝혔다.
‘어쩌면, 어쩌면 다시 일어서는 게 가능할지도 몰라.’
그러나 정민주가 품었던 희망은 어제저녁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늦은 시간에 죄송해요. 꼭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어제 LE에서 스카웃 제안이 들어왔어요. 거절하긴 했는데 저만 그런 연락을 받은 게 아닌 모양이에요. 몇몇은 면접까지 진행한 것 같아요. 엉뚱한 소문 돌기 전에 무슨 수를 써야 할 것 같은데…….’
디자인 팀장의 전화를 받은 정민주는 속에서 천불이 났다.
황수연이 디자인팀 모두를 불러 모아 박옥정의 마지막 컬렉션을 완성하겠다고 천명한 게 불과 며칠 전이었다.
그런 인력들에 스카웃 제안을 했다니 괘씸했다.
물론 정민주 역시 먹고 먹히는 게 이 바닥의 생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웅희 회장은 넘어선 안 될 선을 넘고 있었다.
정민주는 황수연이 걱정됐다.
만에 하나라도 직원들이 LE 쪽으로 이탈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크게 실망할 게 분명했다.
‘모두 자기 탓이라 생각하겠지.’
그렇게 걱정스러운 마음을 품은 채 정민주가 대표실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대표님?”
정민주가 대표실 문을 열고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책상 위에 엎드린 황수연은 미동조차 없었다.
“수연아!”
정민주가 빽, 소리치자 황수연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이곳에서 밤을 새운 듯 황수연의 두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아, 음…….”
황수연은 잠이 덜 깬 듯 멍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정민주는 가슴을 쓸어내린 뒤 황수연을 타박했다.
“너 정말 이럴래? 깜짝 놀랐잖아!”
“죄송해요. 시안을 고치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네요.”
정민주가 휴, 하고 한숨을 내쉬며 황수연에게 커피와 샌드위치를 건넸다.
“밥도 제대로 안 챙겨 먹고 그러면 탈 난다.”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황수연이 끼니를 때우는 사이, 정민주는 지저분한 책상을 정리했다.
책상 위에는 디자인팀과 함께 작업하던 시안이 잔뜩 널브러져 있었다.
전문 분야가 아닌 만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황수연과 디자인팀 모두 미로 속에서 헤매고 있다는 것만큼은 정민주 또한 느낄 수 있었다.
정민주가 확인차 질문했다.
“작업이 잘 안 풀리는 모양이네?”
“네. 답답하네요. 디자인 팀장님께서 말씀해 주셨는데 할머니는 끝까지 이 컬렉션이 미완성일 거라고 이야기하셨대요. 그런데 아무리 봐도 어디가 미완성인지 모르겠어요.”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책상을 정리하던 정민주의 눈에 뭔가가 띠었다.
바로 정환의 명함이었다.
그 명함을 본 정민주가 황수연에게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수연아. 오해하지 말고 들어. 블랙해머 쪽에 연락해 보는 건 어떨까?”
정민주의 이야기에 황수연이 한 입 베어 물었던 샌드위치를 도로 내려놓았다.
하지만 정민주는 물러나지 않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잘 생각해 봐. 회장님 뜻도 있었잖아. 네가…….”
“저도 생각해 봤어요. 제 개인적인 일이라면 정환이한테 도와 달라고 부탁할 수 있었겠죠. 그런데 이건 그런 일이 아니잖아요. 할머니가 마지막까지 매달리셨던 컬렉션이니까……. 제가 마무리해야 해요.”
정민주는 그 말에 반박하려다가 더 길게 말을 붙이지 않고 서랍을 닫았다.
황수연의 고집이 얼마나 센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다.
황수연과 디자인팀은 박옥정의 마지막 컬렉션을 완성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러나 박옥정의 컬렉션은 도무지 완성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밤을 새워가며 박옥정의 컬렉션을 고치고 또 고치는 황수연은 하루가 다르게 안색이 창백해졌다.
정민주는 잔뜩 야윈 황수연의 얼굴을 지켜보다 결국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책상 위에서 정환의 명함을 집어 든 정민주가 잠들어 있는 황수연을 보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미안해. 너까지 잘못되는 걸 가만히 지켜볼 수 없어.”
***
몇 시간 후.
제일 패션 사옥을 서성거리던 정민주는 로비 앞에 멈춰 선 차로 허둥지둥 뛰어갔다.
차에서 내린 사람은 정환이었다.
정민주는 정환에게 고개 숙여 사과했다.
“바쁘실 텐데 이렇게 연락드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그럴 수 있죠.”
“정말 죄송해요. 수연이가. 아니, 황 대표님이 절대 연락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는데……. 이러다 사람 잡을 것 같아서요.”
“일단 가보죠.”
정환은 정민주와 함께 대표실로 향했다.
문이 반쯤 열린 대표실에서 황수연은 책상 위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정환은 조용히 다가가 작업대 주변을 둘러봤다.
요 며칠 동안 얼마나 작업에 매달렸는지 작업대 주변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정환은 가만히 그 풍경을 살펴보다가 한 장의 시안을 집어 들었다.
“스완 송…….”
정환이 시안 상단에 적힌 컬렉션 제목을 소리 내 읽었다.
“그게 회장님께서 마지막까지 작업하셨던 컬렉션이에요. 생전에 완성하려 애썼지만 결국 미완성으로 남고 말았죠. 지금은 황 대표님과 디자인 팀원들이 그 뜻을 이어가고 있는데 쉽지 않네요.”
정환은 진지한 눈빛으로 박옥정의 컬렉션을 살폈다.
유려한 크로키 선 사이로 진하게 느껴지는 감정이 있었다.
바로 간절함이었다.
정환은 박옥정이 어떤 마음으로 이 컬렉션을 만들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왜 이 컬렉션이 미완성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는지 역시 알 수 있었다.
컬렉션을 모두 확인한 정환이 정민주에게 말했다.
“이 컬렉션은 돌아가신 회장님께서 절대 완성할 수 없는 미완성의 걸작입니다.”
정환의 말을 들은 정민주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이죠? 절대 완성할 수 없는 미완성의 걸작이라뇨?”
“…….”
정환은 침묵했다.
박옥정의 컬렉션은 아름다웠지만 어딘가 이질적인 부분이 있었다.
완벽함을 추구하는 박옥정이 이런 식으로 이질적인 부분을 남겨 둔 이유.
그것은 박옥정이 인챈트 효과를 재현하려 했기 때문이다.
블랙해머 상품에 새겨진 인챈트의 느낌을 살리려다 보니 오히려 디자인에 이질적인 부분이 가미된 것이었다.
“말로 설명해 드리긴 어렵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돌아가신 회장님도, 제일 패션의 디자이너들도 이 걸작을 결코 완성할 수 없어요.”
정환은 다시 한번 박옥정의 컬렉션으로 시선을 옮겼다.
박옥정은 인챈트는커녕 마나의 존재 자체에 대해 아는 게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인챈트의 느낌을 컬렉션에 구현하려 무던히 애쓴 흔적만큼은 역력했다.
정환은 박옥정에게 진심으로 경의를 표했다.
마나를 느낄 수 없는 인간이 노력만으로 그 경지에 닿으려 했다니.
결국 닿지 못했지만 그 과정이 무척이나 숭고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을 정환 한 사람만이 알고 있다는 사실이 무척 안타까웠다.
정환은 벽에 걸린 박옥정의 초상화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생각했다.
‘어쩌면 우리, 꽤 좋은 경쟁자가 될 수도 있었겠네요.’
정민주가 발을 동동 구르며 정환에게 물었다.
“이 컬렉션에 저희 그룹이 달려 있어요. 그렇다면 대표님께선 이 컬렉션을 완성하실 수 있나요?”
“…가능합니다.”
정환은 컬렉션에서 고쳐야 할 부분을 눈으로 체크했다.
이질적인 부분을 덜어내고 인챈트를 새긴다면 컬렉션은 비로소 완벽해질 게 분명했다.
정환이 겉옷을 벗은 후 끝이 뭉툭한 연필을 집어 들었다.
“그럼, 해 보겠습니다.”
***
얼마 후.
황수연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흐릿한 시선 너머, 누군가 작업대에서 컬렉션을 고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뒷모습이 마치 할머니와 비슷하게 느껴졌다.
“할머니?”
황수연이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때, 뒤에서 정민주가 황수연의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수연아. 미안해.”
“네?”
황수연이 손바닥으로 충혈된 두 눈을 비볐다.
다시 보니 작업대에 서 있는 사람은 할머니가 아니라 정환이었다.
“어? 어?”
눈을 동그랗게 뜬 황수연이 정민주에게 물었다.
“실장님이 부르셨어요?”
“수연아. 그게…….”
정민주가 뭐라 설명하기도 전, 벌떡 몸을 일으킨 황수연이 성큼성큼 정환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몇 걸음을 떼지도 못했을 때 정민주가 그 앞을 막아섰다.
“수연아. 할 만큼 했어. 너 벌써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끼니도 걸렀잖아!”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요!”
“그러다 너까지 잘못되면 어쩌려고 그래?”
정민주가 언성을 높였다.
“수연아. 아니, 대표님. 우리는 이미 회장님을 잃었습니다. 그 아픔을 또다시 반복할 순 없어요.”
“…….”
정민주의 진심이 통한 걸까.
황수연이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고는 정환이 할머니의 컬렉션을 수정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작업대에 고개를 박고 선을 긋는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마치 할머니가 다시 돌아온 것 같았다.
그렇게 정환은 창밖이 파랗게 물들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고 작업대를 지켰다.
그리고 마침내 정환이 작업대에서 손을 뗐다.
박옥정의 유작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끄, 끝난 거야?”
황수연이 정환에게 물었다.
“응. 내가 수정한 건 거의 없어. 다만 이 부분은 빼는 게 좋겠더라고.”
황수연은 정환이 수정한 컬렉션 시안을 확인했다.
확실히 변한 건 거의 없었다.
하지만 미완성이라는 느낌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리고 여기에는 황수연이 모르는 뭔가가 더 숨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정환이 새긴 인챈트였다.
그 인챈트를 느낀 걸까.
시안을 쥔 황수연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할머니가 사활을 걸었던 미완성 컬렉션이 드디어 완성됐기 때문이다.
“저 혼자 볼 순 없죠.”
황수연이 인터폰을 눌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무리의 사람들이 대표실로 들어왔다.
제일 패션의 디자이너들이었는데 눈 밑이 퀭한 게 황수연과 비슷하게 밤을 새운 모양이었다.
황수연이 디자이너들에게 컬렉션을 보여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컬렉션, 드디어 완성됐어요.”
“네? 완성됐다고요?”
디자이너들이 벌 떼처럼 완성된 컬렉션에 달라붙었다.
“이 부분이 문제였구나!”
“회장님께서 남겨놓은 이유가 당연히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군요?”
“이야, 이거 그대로 제작하면 진짜 대박 치겠는데요?”
“난 왜 이 생각을 못 했을까…….”
어떤 이는 자책했고 어떤 이는 감탄했다.
정환의 귀에는 황수연과 디자인 팀원들이 갑론을박하는 소리가 마치 합창하는 것처럼 아름답게 들렸다.
정환은 벽에 걸린 박옥정의 초상화를 보며 조용히 말했다.
“진정한 스완 송이네요.”
***
며칠 후.
황수연과 제일 패션 디자인팀의 손을 거쳐 마무리된 스완 송 컬렉션의 일부가 먼저 공개됐다.
박옥정의 유작을 두 눈으로 본 소비자들의 반응은 무척 뜨거웠다.
그런데 출시를 기대하는 소비자들과 정반대의 반응을 보인 곳이 있었다.
바로 LE였다.
이웅희 회장은 출근하자마자 비서에게 버럭, 소리쳤다.
“김효빈 실장, 당장 들어오라고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