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dwarf in his previous life, but an artistic genius in his current life RAW novel - Chapter 155
153화 뉴욕으로
한 달 후, 인천 국제 공항.
공항 카페에 들어간 김효빈은 캐리어를 한쪽에 세워 둔 후 커피를 주문했다.
거울 속 모습은 한 달 전과 달리 꽤 초췌했다.
하지만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밝게 반짝이고 있었다.
이것은 비단 김효빈만 그런 게 아니었다.
뒤이어 도착한 다른 디자이너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들 일찍 오셨네요. 커피 한잔하시죠? 제가 살게요.”
“좋습니다.”
“잘 마실게요!”
시원한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켠 최성원이 김효빈에게 얘기했다.
“시간 참 빨리 갑니다. 블랙해머에서 연수 시작했던 날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한 달이 지났어요.”
“그렇네요.”
“궁금한 게 있었는데 왜 정환 대표님 작업실을 코덱스 레스터라고 불렀어요?”
최성원의 질문에 김효빈이 웃으며 반문했다.
“세계에서 제일 비싼 책이 뭔지 아세요?”
“글쎄요.”
“2017년에 500년 된 낡은 고문서가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3,500만 달러에 팔렸어요. 그 책이 바로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작성한 친필 노트를 묶은 코덱스 레스터죠.”
3,500만 달러.
한화로 450억을 훌쩍 넘기는 금액이었다.
예상을 뛰어넘는 금액에 최성원이 혀를 내둘렀다.
“3,500만 달러요? 하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다빈치의 친필 노트면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래서 실장님이 그 작업실을 코덱스 레스터라고 부른 거군요? 작업실 벽면부터 바닥까지 정환 대표님의 메모와 스케치로 가득했으니까.”
“맞습니다. 뭐랄까, 이게 정환 대표님의 코덱스 레스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김효빈은 정환의 작업실을 처음 보고 느꼈던 전율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머릿속에 맴도는 아이디어를 그대로 옮겨 놓은 메모와 스케치, 그리고 당장 상품으로 출시해도 될 만큼 뛰어난 시제품까지.
최성원도 공감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 작업실에 처음 들어갔을 때는 저도 정말 놀랐습니다. 딥 윈드부터 코르누까지, 블랙해머 산하 브랜드의 청사진이 완벽하게 그려져 있었으니까요.”
최성원이 말한 것처럼 정환의 스케치에는 각 브랜드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 그리고 출시해야 할 상품 아이디어가 가득 담겨 있었다.
두 사람 사이의 대화를 듣던 김형태가 슬쩍 끼어들었다.
“전 솔직히 정환 대표님이 모든 브랜드를 세세히 챙길 수 없을 거라 생각했어요. 대표님 능력이 괴물 같긴 하지만 그래도 사람이잖아요. 뭔가 소홀한 지점이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스케치를 보고 두 손 두 발 다 들었어요. 솔직히 말해서 누가 그 정도 디자인 큐만 잡아 주면 우리 일이 몇 배는 수월해지잖아요.”
“당연한 말씀.”
“저 빼놓고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밌게 하세요?”
비행기 티켓을 발권해 온 하은영이 물었다.
“왔어요? 커피 한잔해요.”
“고맙습니다.”
한숨을 돌린 하은영이 얼굴을 구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정환 대표님이 제게 코르누를 맡길 줄은 몰랐어요. 신발에 관심이 있긴 했지만 디자인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요. 코르누 가서도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하은영이 앓는 소리를 하자 김형태가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저었다.
“에이, 그런 사람치고 하 디자이너님이 연수 막바지에 뽑아낸 구두 컬렉션은 너무 좋던데요? 정환 대표님도 만족하셨고.”
김형태가 편을 들어주자 하은영은 입가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저도 그게 그렇게 나올지 몰랐어요. 하다 보니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마법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결과가 생각 이상으로 좋더라고요. 어쩌면 코르누에 가서도 즐겁게 일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아, 그러고 보니 저도 그랬어요. 정환 대표님이 저더러 아우룸루스를 맡아 달라고 했을 때는 하늘이 깜깜했거든요? 그런데 하다 보니 막 결과가 자꾸 나오는 느낌이더라고요. 맞아, 형태 디자이너님도 정환 대표님이 에테르눔을 맡겼을 때 퇴사 고민했었죠?”
최성원이 김형태를 가리키며 말하자 하은영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정말 그랬어요? 저는 전혀 몰랐는데?”
지목당한 김형태는 딱히 이를 부정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원래 그는 주얼리 디자인에 문외한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형태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생각보다 빨리 주얼리 디자인에 적응했다.
패션 디자인보다 주얼리 디자인에 소질이 있던 게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
“새로운 도전을 하려니 덜컥, 두려움이 몰려오더라고요. 아마 정환 대표님이 옆에서 하나하나 가르쳐 주시지 않았더라면 정말 퇴사를 했을 겁니다. 그보다 퇴사 고민은 성원 디자이너님도 같이하지 않았나요? 이러다 죽겠다면서 저보다 더 적극적으로 퇴사를 고민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김형태의 폭로에 최성원은 이를 애써 무시하며 화제를 전환했다.
“그런데 정환 대표님은 정말 귀신 같지 않아요? 생각해 보면 한 달 동안 우리 모두 새로운 전공을 터득한 셈이잖아요. 아무리 우리가 디자이너 경력이 있다 하더라도 이렇게 가르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그러게요. 정환 대표님도 사실 알고 보면 사업이 아니라 교육에 재능이 있는 거 아닐까요?”
“이러다 나중에 학교 세우는 거 아닌지 몰라.”
이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김효빈이 입을 열었다.
“제 생각입니다만 우리가 새 디자인을 빨리 습득할 수 있었던 큰 이유는 바로 코덱스 레스터 때문일 겁니다. 거기에는 정환 대표님이 미리 잡아 둔 브랜드 디자인 큐가 가득했잖아요.”
“아, 그렇네요. 그 디자인 큐를 토대로 아이디어를 짜고 공부했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하은영이 뭔가 생각난 듯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정환 대표님이 우리 첫 번째 시안 확인했을 때 기억나세요? 저 정말 학부생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어요. 교수님한테 처음 크리틱 받을 때처럼 손이 덜덜 떨리는 게…….”
최성원도 혀를 내두르며 하은영의 말을 받았다.
“어휴, 말도 말아요. 저도 시계 시안 보여 드렸을 때 등에서 식은땀이 났다니까. 나름대로 경력 있는 프로 디자이너라 어지간한 건 전부 해낼 수 있을 거라 믿었는데 쉽지 않았어요.”
이들이 말한 것처럼 정환은 디자이너들에게 각각의 브랜드를 지정해 준 후 그에 맞춰 혹독한 트레이닝을 진행했다.
정환이 이렇게 트레이닝을 진행한 이유.
그것은 블랙해머의 약점이라 할 수 있는 디자이너층을 더욱 단단히 하기 위해서였다.
김효빈을 비롯한 디자이너들 역시 각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기에 군말 없이 이 트레이닝을 받았다.
“연수 덕분인가? 전 지금이 전성기인 것 같아요. 가만히 있어도 머리에 아이디어가 막 떠오르는 게 정말 뭐든 한번 해 볼 만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뒤에 정환 대표님이 있어서 그런가?”
최성원이 자신 있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김형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성원 디자이너님 뒤통수에 눈이 있나요? 대표님 뒤에 서 계신 건 어떻게 아셨어요?”
“어?”
최성원이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정환이 서 있었다.
“아이고, 깜짝이야!”
“왜 이렇게 놀라세요? 혹시 제 욕이라도 하셨습니까?”
“욕은 무슨. 칭찬했습니다, 칭찬.”
정환은 환하게 웃으며 디자이너들과 인사를 나눴다.
“다들 일찍 오셨네요. 한 달 동안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해야 할 일은 많은데 시간이 촉박해서 여러분들을 몰아붙였습니다. 쉽지 않았을 텐데 잘 따라와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정환이 꾸벅 고개를 숙이자 최성원이 손을 휘휘 저었다.
“아이, 뭐 그게 고생한 겁니까?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거죠. 괜찮습니다. 우리 모두 프로잖아요? 안 그래요?”
제일 엄살을 부리던 최성원이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고 번지르르하게 말을 늘어놓자 하은영이 헛웃음을 지었다.
“못 살아, 정말.”
정환은 들고 온 가방에서 조그만 선물 상자를 꺼냈다.
“고생하신 여러분들에게 드리는 작은 선물입니다. 부담 없이 받아 주세요.”
“선물? 지금 뜯어봐도 됩니까?”
“물론이죠.”
제일 먼저 포장을 뜯은 최성원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그 상자에 담긴 것은 다름 아닌 은색 반지였다.
“야, 이거 디자인 장난 아니네요. 저희 연수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셨을 텐데 언제 이런 걸 만드셨어요?”
“시간 날 때마다 틈틈이 만들었습니다. 마음에 드세요?”
“그럼요. 그런데 기분 탓인가? 이걸 끼니까 마음이 좀 편안해지는 것 같은데, 저만 그래요?”
최성원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디자이너들에게 물었다.
다른 디자이너들 역시 대답은 없었지만 표정을 보아하니 모두 같은 것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정환은 손가락에 반지를 낀 디자이너들을 보며 작게 미소를 지었다.
최성원이 느낀 것처럼 정환은 이 반지에 4성급 피로 회복 인챈트를 새겼다.
앞으로 해외에서 고생할 디자이너들을 위해서였다.
“여러분들 덕분에 블랙해머의 유일한 단점이 단단히 보강됐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다만, 이제부터 쉽지 않을 겁니다. 곧 곳곳에서 공격이 들어올 테니까요. 그 공격은 여러분들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매섭고 지저분할 겁니다.”
정환의 경고에 디자이너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한 달 동안 정환에게 연수를 받으며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그중에는 LAMH 패밀리의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었기에 디자이너들은 정환이 말한 지저분한 공격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었다.
“우리가 LAMH 패밀리에 맞선다…….”
김형태가 반지를 낀 주먹을 꽉 쥐며 정환에게 자신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만 그래도 부딪혀 봐야죠.”
“그래요! 제까짓 게 해 봐야 뭘 얼마나 하겠습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절대 지지 않을 테니까. 그래도 하다 안 되면 대표님한테 연락할 겁니다. 전화 받아 주실 거죠?”
최성원이 너스레를 떨며 묻자 정환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언제든지 연락하셔도 됩니다.”
정환을 비롯한 디자이너들은 카페에 앉아 한동안 이야기꽃을 피웠다.
이제 이렇게 뿔뿔이 해외로 흩어지고 나면 최소 몇 년간 다시 만나기가 힘들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티켓을 쥔 디자이너들이 하나둘씩 길을 떠났다.
마지막으로 남은 디자이너는 파리로 향하는 김효빈이었다.
“같이 가시죠. 배웅해 드리겠습니다.”
한동안 말없이 정환과 동행하던 김효빈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훌륭한 디자이너는 아니더라도 괜찮은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 꿈을 이루지 못 할 뻔했는데…. 대표님 덕분에 다시 한번 꿈을 꾸게 됐네요. 정말 고맙습니다.”
“별말씀을요. 오히려 실장님에게 디자인팀 총괄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어 드린 것 같아 죄송할 따름입니다.”
정환이 김효빈에게 맡긴 것은 다름 아닌 디자인 총괄직이었다.
각 브랜드에서 올라오는 디자인을 최종적으로 검수해 정환에게 보고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였다.
김효빈의 얼굴이 유독 초췌했던 이유 역시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각 브랜드의 디자인을 최종적으로 검수해야 하는 만큼 모든 디자인 언어에 능통해야 했기 때문이다.
“별말씀을요. 오히려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물론 힘들긴 했지만 덕분에 디자인을 보는 시야가 달라졌어요.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맡겨 주십시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김 실장님이라면 잘해 내실 거라 믿습니다.”
“믿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입국장에 들어가려던 김효빈이 발을 멈췄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정환에게 말했다.
“아, 뉴욕 패션 위크가 곧 시작이죠? 파리에서 응원하겠습니다.”
정환은 입국장을 통과하는 김효빈의 등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그때, 비서 정성일이 조용히 다가와 정환에게 말했다.
“대표님. 이제 저희도 탑승할 시간입니다.”
정성일의 손에는 뉴욕행 티켓 두 장이 쥐어져 있었다.
정환은 정성일을 보며 밝게 미소를 지었다.
“좋습니다. 그럼 가 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