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dwarf in his previous life, but an artistic genius in his current life RAW novel - Chapter 156
154화 뉴욕 패션 위크 (1)
8월은 정환에게 유독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달이었다.
제일 패션 인수를 마무리 지었고 새롭게 합류한 디자이너들을 블랙해머의 수준에 걸맞게 트레이닝시켰다.
그렇게 한국에서의 숙제를 끝낸 정환은 숨 돌릴 틈도 없이 뉴욕으로 향하고 있었다.
정환이 눈 깜짝할 사이에 기내식을 먹어 치우고 다시 태블릿에 집중하자 옆자리의 정성일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대표님. 곧 도착인데 그때까지라도 좀 주무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블랙 라벨 프로젝트 때문에 한국에서도 거의 못 쉬고 일만 하셨잖습니까.”
블랙 라벨 프로젝트.
정환의 8월이 평소보다 바빴던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정환은 유럽 시장에서의 성공에 만족하지 않았다.
더욱 새롭고 더욱 아름다운 것을 만들고 싶다는 갈증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정환의 타는 듯한 갈증을 해소하기에 적합한 시장이 있었다.
자그마치 600억 달러 규모의 명품 시장을 보유한 미국 시장이었다.
하지만 정환은 성급하게 미국 시장 진출을 결정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국은 유럽보다 더욱 상업적인 성향이 강한 시장이었기 때문이다.
예술적인 성향이 강했던 유럽과 색이 다른 미국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선보였던 것과 차별화되는 새로운 아이템이 필요했다.
정환은 이러한 아이템에 대한 답을 ‘가성비’라는 키워드에서 찾았다.
그렇게 블랙해머 브랜드의 프리미엄 라인인 레드 라벨보다 한 단계 수준을 더 높인 블랙 라벨을 런칭하기로 마음먹었다.
정환이 생각하는 가성비란, 높은 예술적 가치를 합리적인 가격에 소비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정환은 레드 라벨과 큰 차이가 없는 가격으로 훨씬 더 예술적 가치가 훌륭한 블랙 라벨을 런칭할 계획이었다.
뉴욕 패션 위크가 다른 패션 위크에 비해 상업적인 부분을 중시하는 만큼 정환은 블랙 라벨이 큰 성공을 거둘 거란 확신이 있었다.
정성일은 그런 정환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가방에 넣어뒀던 태블릿을 꺼냈다.
태블릿에는 며칠 전, 정환이 조사하라고 지시했던 자료가 담겨 있었다.
몇 번이나 확인한 자료였지만 정성일은 다시 한번 그 자료를 검토했다.
맡은 일을 확실히 마무리 짓는 것이 정환을 돕는 방법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비행기 창밖으로 지상이 가까워지자 기장의 안내음이 들려왔다.
“승객 여러분. 저희는 곧 JFK 공항에 도착합니다. 벨트를 착용하시고…….”
비행기가 굉음을 내며 활주로에 착륙했다.
입국 심사를 마치고 뒤따라오던 정성일이 정환에게 말했다.
“유 디자이너님이 마중 나와 계실 겁니다.”
유아림은 정환보다 보름 먼저 뉴욕으로 출국했다.
블랙 라벨 패션쇼에 더욱 만전을 기울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입국장에 들어선 두 사람을 반긴 것은 유아림이 아니라 무수한 플래시 세례였다.
“안녕하십니까, 미스터 리! 아메리칸 패션에서 나왔습니다! 블랙 라벨 프로젝트에 관해 한 말씀만 해 주시죠!”
“패셔니스트 뉴욕입니다! 블랙 라벨에 관한 관심이 무척 뜨거운데요! 어떤 옷을 선보일 것인지 알 수 있을까요?”
기자들이 카메라와 마이크를 들이밀며 질문을 퍼부었다.
공항 관계자들이 막아섰지만 먹잇감을 발견한 기자들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기자들의 질문에 정성일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인터뷰는 사전에 약속되지 않았으므로…….”
정성일이 기자들에게 양해를 구했지만 기자들은 이를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기자들을 막아선 공항 관계자들이 틈 사이로 한 여자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입국장에서 기다리기로 한 유아림이었다.
“대표님! 성일 씨!”
유아림을 알아본 정환이 공항 관계자들에게 얘기했다.
“우리 직원입니다.”
정환이 신원을 확인해 주자 관계자들은 유아림이 지나갈 수 있도록 틈을 살짝 벌려줬다.
정환은 그 틈을 빠져나온 유아림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패션 매거진에서 나온 에디터들인데 몇 시간 전부터 대표님 인터뷰를 따겠다고 대기하고 있었어요. 이 사람들, 쉽게 물러나지 않을 거예요. 우리 작업실 위치를 어떻게 알았는지 카메라를 들고 기웃거리더라고요. 아주 지독해요.”
유아림은 벌 떼처럼 몰려든 기자들을 보며 몸서리쳤다.
보름 동안 이들에게 꽤 시달렸던 모양이었다.
“혹시 블랙 라벨 디자인이나 컨셉이 유출되진 않았습니까?”
“아뇨. 현지 스태프가 먼저 기자들을 눈치채고 커튼을 단단히 쳤어요. 그래서 외부에 알려진 건 없어요.”
“다행이군요.”
한편, 정성일은 기자들을 막아서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유창하던 영어마저 더듬거리고 있었는데 정환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곳의 기자, 에디터들은 정성일이 그간 응대했던 유럽 기자들보다 훨씬 저돌적이었다.
인터뷰가 어렵다며 양해를 구해도 전혀 물러나지 않고 카메라를 들이대니 정성일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정환은 그런 정성일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은 후 대신 앞으로 나섰다.
“여러분, 우선 블랙해머에 보내 주신 높은 관심에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정환이 입을 열자 기자들의 눈빛이 초롱초롱하게 변했다.
곧 정환의 인터뷰가 시작되리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우리 비서가 말씀드렸다시피 사전에 조율되지 않은 인터뷰는 진행하지 않습니다. 인터뷰는 여러분들에게 최고의 패션쇼를 선보인 후 진행하겠습니다.”
정환이 정중하면서도 단호하게 기자들의 인터뷰를 거절했다.
그러자 기자들은 아까와 다르게 순순히 다음을 기약하며 걸음을 물렸다.
정환의 존재감에 압도당한 것이었다.
정성일과 유아림이 급변한 상황에 조금 놀란 듯했지만 빠르게 정신을 차렸다.
그렇게 정환은 유아림을 따라서 준비된 차량에 오를 수 있었다.
차량 안에서 유아림이 이마에 가득한 땀을 닦으며 이야기했다.
“그래도 영 사람들이 보는 눈이 없지는 않나 보네요. 대표님 이야기에는 순순히 물러나는 걸 보면.”
정환이 미소를 지으며 유아림을 위로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러자 유아림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확실히 정신이 좀 없네요. 제가 혼자 일할 때는 이런 일이 없었으니까. 그래도 이렇게 반응이 있으니 앞으로의 일이 기대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보다 식사는 하셨나요? 보아하니 기내에서도 한숨도 자지 않고 일만 하신 것 같은데 제가 아는 레스토랑에 들렀다가 호텔로 가실래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보다 먼저 확인해 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요.”
“확인해 보고 싶은 거요?”
“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이 근처의 빌딩으로 데려다주세요. 주소는 성일 씨가 알고 있을 겁니다.”
***
차가 멈춰 선 곳은 센트럴 파크의 동쪽 경계에 있는 10층짜리 건물이었다.
건물 앞에는 미리 연락을 받은 관리인이 정환을 기다리고 있었다.
관리인이 굳게 잠긴 옥상 문을 열어주며 정환에게 말했다.
“센트럴 파크가 보이는 것 외에는 별거 없는 곳인데 굳이 왜 보겠다는 건지 모르겠네요.”
정환은 관리인에게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꼭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요. 끝나면 말해 주세요.”
정환은 옥상에 서서 눈앞에 펼쳐진 뉴욕의 풍경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마치 아름다운 피사체를 찾는 작가처럼 옥상 곳곳을 향하던 정환의 눈빛은 금세 시들해졌다.
뭔가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다.
정환이 정성일에게 이야기했다.
“다음 장소로 이동하죠.”
“네.”
정성일은 곧장 우버 앱에 다음 장소의 주소를 입력했다.
정성일이 비행기에서 다시 한번 점검했던 것.
그것은 지금 정환이 둘러본 곳처럼 넓은 옥상을 가진 건물의 주소 목록이었다.
그렇게 정환은 다음 건물의 옥상에 도착해서도 특별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저 아까 전처럼 뭔가를 확인하듯 옥상에서 주변 풍경을 확인할 뿐이었다.
시간은 이런 식으로 일주일이 흘렀고 유아림은 정환이 일주일째 작업실에 들르지 않고 뉴욕 곳곳의 빌딩만 돌아다니자 정환을 찾아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대표님. 저희 일은 언제 해요? 회의는요?”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직원이라니.
정환은 유아림의 행동이 내심 미소를 지었다.
그와 동시에 어째서 유아림이 일 이야기를 꺼냈는지 깨달았다.
확실히 지금은 블랙 라벨 준비에 심혈을 기울여야 할 시기였다.
그런데 작업실은 들리지 않고 엉뚱한 건물 옥상만 돌아다니고 있으니 유아림으로서는 걱정스러운 게 당연했다.
정환은 자신이 왜 옥상을 돌아다니고 있는지 설명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백문이 불여일견.
이것은 정환이 이 세계로 넘어와 가장 좋아하게 된 속담이었다.
오늘은 예감이 좋았으니 이 속담이 통하는 장소를 발견할 수도 있었다.
‘만약 발견하지 못하면 그때 왜 옥상을 돌아다니고 있는지 설명해 주기로 하자.’
정환은 생각하며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역으로 진입하는 지하철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따라오세요. 일단 따라와 보시면 제가 왜 이러고 있는지 이유를 아실 겁니다.”
그렇게 정환, 정성일, 유아림 세 사람이 지하철에 올랐다.
***
34번가의 해럴드 스퀘어 역을 빠져나오자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바로 엄청난 교통 체증이었다.
도로 위에 길게 늘어선 차들은 마치 굼벵이처럼 느리게 기어가고 있었고 신경질적인 경적이 곳곳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본 정성일이 혀를 내둘렀다.
“대표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지하철을 타고 오길 잘했네요. 평소처럼 우버를 잡았다면 내일까지 이 도로 위에 갇혀 있을 뻔했습니다.”
“번화가니까요. 아무래도 대중교통이 훨씬 낫죠.”
그렇게 세 사람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바로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었다.
빌딩 입구에는 수많은 관광객이 길게 줄을 서고 있었다.
다행히 익스프레스 티켓을 미리 구매한 덕분에 정환은 이들보다 빨리 목적지인 86층 전망대로 갈 수 있었다.
86층 전망대에 도착한 정환은 다른 건물 옥상을 구경했을 때처럼 천천히 주변을 살폈다.
“음…….”
전망대를 한 바퀴 돈 정환의 얼굴은 그리 밝지 않았다.
머릿속에 그린 그림과 비슷하긴 했지만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그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여긴 안 되겠네요. 102층으로 가죠.”
“네.”
정환이 추가 티켓을 구매한 후 다시 엘리베이터에 탔다.
102층에서 내린 정환을 반긴 것은 커다란 통유리 너머 보이는 뉴욕 시내의 광경이었다.
한눈에 담기지 않을 정도로 광활한 뉴욕의 풍경은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유아림 또한 이러한 풍경이 마음에 든 듯 넋을 놓고 뉴욕 시내를 눈에 담았다.
그렇게 정신없이 구경을 하고 있으니 금방 해가 저물었다.
마침내 해가 완전히 떨어진 뉴욕 풍경은 또 다른 느낌이었다.
사방이 어두워지자 뉴욕 시내의 가로등이 하나둘씩 켜졌기 때문이다.
그 불빛들은 멀리 보이는 이스트 리버의 검은 물결 위로 떨어져 은하수처럼 반짝였고 그와 동시에 정환의 입가에는 작은 미소가 걸렸다.
‘여기다.’
그렇게 확신을 얻은 정환은 곁을 지키고 있던 유아림에게 물었다.
“어떻습니까? 제가 왜 옥상을 보러 다녔는지 알 것 같습니까?”
유아림이 반쯤 입을 벌리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대충은요. 이럴 때가 아닌 것 같네요. 제가 이곳의 담당자를 호출하겠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아림의 호출을 받은 담당자가 전망대에 도착했다.
정환은 갈색 정장을 입은 담당자에게 물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블랙해머의 디자이너 이정환이라고 합니다. 제가 이 옥상에서 패션쇼를 열고자 하는데 실례가 안 된다면 대관 절차를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정환이 담당자에게 정중히 요청했다.
하지만 요청을 들은 담당자의 표정은 별로 탐탁지 않아 보였다.
블랙해머라는 회사를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로 정환을 한참 훑어보다가 입을 열었다.
“선생님께서 이 장소가 무척 마음에 드셨다니 영광입니다. 하지만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옥상은 쉽게 빌릴 수 있는 공간이 아닙니다. 잘 모르시겠지만 대관료가 무. 척. 비싸거든요.”
담당자의 거절에 유아림은 물론, 정성일의 얼굴까지 붉게 달아올랐다.
단순히 대관 요청을 거절당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요청을 거절하는 담당자의 태도 때문이었다.
겉보기엔 무척 정중해 보였지만 담당자의 말투에는 다분히 인종차별적인 뉘앙스가 담겨 있었다.
유아림은 끓어오르는 화를 꾹 참으며 담당자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이, 이봐요! 당신, 지금…….”
흥분한 유아림이 말을 더듬으며 따지려던 그때였다.
뒤에서 한 여자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스터. 눈앞에 계신 분에게 당장 사과하고 이곳의 대관을 허가하세요.”
그 목소리에 정환, 정성일, 유아림 세 사람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그곳에는 옅은 크림색 정장을 어깨 위에 걸친 한 여자가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는데 담당자를 노려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네?”
“길게 따지지 말고 제가 말한 대로 하세요. 그게 여러모로 당신 신상에 좋을 겁니다.”
여자의 매서운 경고에 담당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실례지만 누구십니까? 이분과 일행이십니까?”
담당자의 질문에 여자는 천천히 선글라스를 벗었다.
커다란 선글라스 뒤에 가려져 있던 얼굴이 환하게 드러나자 유아림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선글라스를 한 손에 쥔 채 담당자를 노려보는 여자.
그 여자는 바로 유명 패션 매거진 보그의 편집장인 ‘한나 윈투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