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dwarf in his previous life, but an artistic genius in his current life RAW novel - Chapter 161
159화 진짜 뉴요커
며칠 후.
스튜디오로 출근하는 델핀의 발걸음은 천근만근이었다.
패션 위크가 끝난 후 셀럽들과 계속 파티를 즐긴 탓이었다.
사실 델핀은 술을 그리 즐기는 편이 아니었다.
마음만 먹으면 어지간한 남자보다 더 잘 마시긴 했지만 평소에는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았다.
아버지 베르나르의 악취미 때문이었다.
크고 작은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아버지의 양조장에 끌려가서 끔찍한 꼴을 봤으니까.
그래서 불가피하게 마셔야 할 일이 있다면 잔을 들고 마시는 시늉만 했다.
그러나 요 며칠은 어쩔 수 없이 셀럽들과 어울려 술을 마셨다.
‘역겨운 놈들.’
델핀은 파티장에서 셀럽들이 자신에게 보낸 눈빛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델핀의 곁에 붙어 있으면 엠버서더 자리 같은 큼지막한 콩고물이 떨어질 거라 기대하는 탐욕스러운 눈빛이었다.
델핀은 이들의 속내가 역겨웠지만 이것을 모른 척했다.
언젠가 LAMH의 주인이 되기 위해선 이들과의 친분이 큰 재산이 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스튜디오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던 비서가 델핀을 보고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좋은 아침입니다.”
비서가 인사와 함께 갈색 가죽으로 마감된 서류철을 내밀었다.
그 모습을 본 델핀이 한숨을 내쉬었다.
“중요한 게 아니라면 나중에 보죠. 지금은 머리가 너무 아프네요.”
그러나 비서는 다시 한번 서류철을 내밀었다.
“죄송합니다. 최대한 빨리 확인하셔야 할 것 같아서요.”
“도대체 뭐길래 그래요?”
델핀은 얼굴을 찡그리며 서류철을 넘겼다.
그 위에는 익숙한 붉은색 로고가 박혀 있었다.
“코카콜라?”
“네. 코카콜라 측에서 콜라보레이션 제안을 보내왔습니다. 보시다시피 요즘은 관계없는 브랜드 간의 콜라보레이션이 유행입니다. 소비자들의 반응도 좋은 편이고요. 특히 코카콜라 쪽에서 먼저 제안했다는 것이…….”
델핀은 비서의 말을 싹둑 잘랐다.
“됐습니다. 거절하세요.”
“네?”
비서는 델핀의 지시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모두 쉬쉬하고 있지만 델핀은 뉴욕 패션 위크에서 엄청난 돈을 쏟아붓고도 브랜드 이미지를 크게 부각하지 못했다.
여기서 이미지가 더 바닥으로 가라앉기 전에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했다.
그리고 코카콜라의 콜라보레이션 제안은 지푸라기 같은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튼튼한 동아줄이었다.
그러나 델핀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LAMH입니다. 콜라보레이션을 하더라도 격에 맞는 상대와 해야죠. 베르사체와 앤디 워홀의 콜라보. 아니면, 구찌와 코코 카피탄의 콜라보처럼요.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겠어요?”
“아, 네…….”
“잡지는?”
“책상 위에 올려뒀습니다!”
델핀은 비서를 뒤로한 채 사무실로 걸어 들어갔다.
“멍청하긴.”
델핀 역시 브랜드 이미지를 쇄신하기 위해서 코카콜라와 콜라보레이션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제안을 넙죽 받아들일 순 없었다.
시점이 너무 이상했기 때문이다.
브랜드 이미지가 떨어진 시점에서 코카콜라가 굳이 이런 제안을 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델핀은 코카콜라가 콜라보레이션 제안을 왜 꺼냈는지 금방 알아차렸다.
‘아버지다.’
아버지는 절대 손해 보는 사람이 아니었다.
델핀의 패션쇼 때문에 자신의 브랜드 가치가 하락했으니 이것을 만회하려 코카콜라 쪽에 먼저 이야기를 꺼낸 게 분명했다.
아버지와 코카콜라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아버지가 자식과 밑지는 거래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지금 델핀이 코카콜라의 콜라보레이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이것은 언젠가 델핀이 LAMH를 물려받을 때 큰 약점으로 작용할 게 분명했다.
‘아마 LAMH의 껍데기만 물려주겠지. 그러면 나는 왕국이 없는 왕이 될 테고. 그렇게 되면 무슨 소용이야?’
델핀은 코카콜라의 콜라보레이션 제안을 머릿속에서 깨끗하게 지웠다.
검은 대리석 책상 위에는 비서가 말한 보그 잡지가 놓여 있었다.
델핀은 시원한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켠 후 의자에 앉았다.
집지 표지에는 런웨이 위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정환의 사진이 큼지막하게 박혀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델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쳇.”
델핀은 한나 윈투어가 자신의 패션쇼 대신 블랙 라벨 패션쇼를 보러 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블랙 라벨 패션쇼에서 한나 윈투어가 환하게 미소 짓는 사진이 온갖 웹사이트에 대문짝만하게 실렸으니까.
‘이렇게 표지에 실릴 정도니 분명히 블랙 라벨에 후한 평가를 줬겠지. 괜찮아. 그 정도는 각오하고 있어.’
결국 한나 윈투어의 미소를 얻지 못했지만 델핀은 믿는 구석이 있었다.
스프링 스튜디오에서 자신이 선보였던 패션쇼 역시 그리 나쁘지 않았다는 믿음이었다.
‘한나 윈투어는 내 패션쇼에서 얼굴을 찌푸리지 않았어. 그러니 혹평은 없겠지.’
델핀은 혹평만 없어도 본전이라는 생각을 하며 잡지를 넘겼다.
한 장, 한 장 페이지가 넘어가자 익숙한 드레스를 걸친 모델 사진이 보였다.
델핀이 주도해서 만든 이브닝드레스였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한나 윈투어가 직접 쓴 평가가 있었다.
한나 윈투어의 평가를 읽은 델핀의 눈이 서서히 경악으로 물들었다.
-스프링 스튜디오에서 LAMH 브랜드 패션쇼가 진행됐다.
이 한 줄이 전부였다.
칭찬은커녕 혹평조차 없었다.
그저 스프링 스튜디오에서 패션쇼가 진행됐다는 사실만이 건조하게 나열되어 있을 뿐이었다.
델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마, 말도 안 돼.”
델핀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페이지를 뒤로 넘겼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봐도 그게 끝이었다.
델핀의 패션쇼가 달랑 한 줄밖에 없었던 것과 달리 블랙 라벨은 아예 특집 기사가 마련되어 있었다.
-뉴요커보다 더욱 뉴요커다웠던 패션쇼.
델핀의 패션쇼 사진이 고작 한 장뿐이었던 것에 비해 이 헤드라인 아래에는 블랙 라벨 패션쇼 현장의 사진 수십 장이 실려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사진 옆에는 한나 윈투어의 감상평이 적혀 있었는데 말 그대로 호평 일색이었다.
잡지를 쥔 델핀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감상평을 읽으려 해도 화가 너무 나서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게다가 더욱 화가 나는 것은 한나 윈투어가 정환과 인터뷰를 가졌다는 사실이었다.
‘빌어먹을. 나는 제대로 된 말도 못 섞어 봤는데.’
델핀은 이를 빠득 갈며 페이지를 넘겼다.
두 사람이 서로 무슨 소리를 지껄였는지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Q. 미스터 리, 참 인터뷰하기 어려운 분이시네요. 인터뷰가 성사되기까지 1년이나 걸렸는데 오랫동안 기다려 주신 구독자 여러분에게 먼저 인사 한번 해 주시죠.
A. 안녕하십니까. 블랙해머의 대표, 이정환입니다. 오래 기다리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Q. 구독자들이 만족할 수 있을 만큼 알찬 인터뷰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블랙 라벨에 관해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이걸 여쭤보고 싶네요. 장르를 가리지 않고 왕성한 활동을 해 오고 있는데 그 원동력이 뭡니까?
A. 집착입니다.
Q. 집착? 재밌는 답변이네요.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A. 뭐랄까, 창조에 대한 집착이 더욱 정확한 표현이겠네요. 저는 뭔가를 만들지 않으면 좀이 쑤셔서 견딜 수 없는 사람이거든요. 사실 지금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많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바로 작업실로 뛰어가고 싶을 정도입니다.
Q. (웃음)인터뷰가 끝나지 않았으니 조금만 참아 주세요. 미스터 리의 원동력이 집착이라. 조금은 이해가 됩니다. 저 역시 패션에 집착하고 있으니까요. 이런 부분에서 공통점이 있군요.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죠. 블랙 라벨은 옷의 본질이 무엇인지 보여준 브랜드라 생각됩니다. 제 생각이 맞습니까?
A. 그렇습니다. 아시다시피 본질이라는 것은 아주 순수한 녀석입니다. 하지만 거기에 불필요한 장식을 덧대면서 본질이 탁하게 흐려지죠. 그래서 저는 본질에 다시 한번 집중하고 싶었습니다.
Q. 본질이라. 놓치기 쉬운 부분을 잘 짚으셨네요. 그렇다면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블랙 라벨 패션쇼 무대로 결정한 것 역시 그러한 이유 때문인가요? 다른 빌딩도 많이 돌아보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A. 그렇습니다. 저는 뉴욕의 본질이 야경이라 생각했습니다. 해가 저물고 칠흑 같은 어둠이 찾아와도 뉴욕은 낮보다 밝으니까요. 그런데 가만 살펴보니 많은 사람이 이 야경의 아름다움을 놓치는 것 같더군요.
Q. 마치 우리가 옷의 본질을 놓친 것처럼요?
A. 정확합니다. 그래서 블랙 라벨 패션쇼에서 이 야경을 여러분들에게 보여드리려 했습니다. JFK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여러 빌딩 옥상을 둘러봤죠. 그리고 그 많은 빌딩 중에서 진짜 뉴욕의 야경을 보여주는 곳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뿐이더군요.
Q. 이미 지난 일입니다만,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고른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그런데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대관하는 과정이 그리 쉽지 않았을 텐데 누군가의 도움이 있었나요?
A. (웃음) 그건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이 대목에서 델핀은 결국 잡지를 집어 던졌다.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나 윈투어야. 한나 윈투어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대관할 수 있게 도와준 거였어!’
델핀은 바닥을 나뒹구는 잡지를 구둣발로 짓이겼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러나 끓어오르는 속은 도무지 가라앉질 않았다.
한나 윈투어의 질문에는 정환에 관한 진한 애정이 담겨 있었다.
이것은 뉴욕 패션 위크를 뒤흔들었던 천재 디자이너들조차 닿지 못했던 영역이었다.
그런데 정환은 보란 듯이 그것을 해냈다.
델핀이 진짜 화가 난 이유는 자신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결코 그렇게 되지 못할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델핀은 여기서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자신은 누가 뭐라 해도 캐시미어를 걸친 늑대의 딸이니까.
그리고 곧 자신 역시 늑대가 될 테니까.
델핀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깨달았다.
정환을 상대하기 위해선 독이 든 성배라 하더라도 망설임 없이 들이켜야 했다.
언젠가 그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뉴요커보다 더욱 뉴요커다운 패션쇼라.”
델핀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겼다.
그러고는 인터폰을 눌러 비서를 호출했다.
“부르셨습니까?”
사무실로 들어온 비서는 바닥을 나뒹구는 잡지를 힐끗 쳐다봤다.
잡지는 엉망으로 구겨져 있었고 델핀은 콧김을 씩씩 내뿜고 있었다.
비서는 이 두 가지만 보더라도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것만 같았다.
델핀은 상기된 얼굴로 비서에게 지시했다.
“코카콜라 쪽과 미팅을 잡으세요. 오늘이라도 좋으니 최대한 빨리!”
비서는 델핀의 변덕에 당황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델핀은 바닥에 떨어진 잡지를 보며 중얼거렸다.
“진짜 뉴요커다운 게 뭔지 똑똑히 보여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