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dwarf in his previous life, but an artistic genius in his current life RAW novel - Chapter 164
162화 펩시, 코카콜라
“미스터 라몬?”
정환이 먼저 이름을 말하자 라몬 아구아르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절 기억하시는군요?”
“물론입니다. 패션쇼에서 잠깐 뵀었잖습니까.”
정확히 표현하자면 정환은 라몬이라는 남자를 기억한 게 아니었다.
라몬 특유의 패션 감각을 기억하고 있었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서 패션쇼가 열렸던 날.
라몬은 딱딱한 정장을 입은 CEO들과 달리 통이 헐렁한 청바지와 감색 체크무늬 재킷을 꽤 센스 있게 매치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라몬은 오리진에서 출시한 노란색 반소매 티셔츠에 나일론 바지를 입고 있었다.
티셔츠 목은 조금 늘어나 있었는데 꽤 즐겨 입은 모양이었다.
가벼운 옷차림과 달리 손목에 찬 얇은 팔찌와 새하얀 운동화는 꽤 값이 나가 보였다.
“이렇게 멋지게 옷을 입으시는데 제가 어떻게 잊겠습니까?”
“이거, 미스터 리에게 패션 칭찬을 받으니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네요. 부끄럽습니다.”
“별말씀을요. 그나저나 펩시를 고르면 정말 사 주시는 겁니까?”
“물론입니다. 제 옷을 칭찬해 주셨으니 두 개까지 드셔도 됩니다. 더 사 드리고 싶지만 지금은 20달러밖에 없거든요. 지갑을 차에 두고 오는 바람에.”
“그건 아쉽네요.”
핫도그를 손에 든 두 사람이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파란색 펩시 캔을 쥔 정환과 달리 라몬은 빨간색 코카콜라 캔을 쥐고 있었다.
꽤 묘한 그림이라 생각한 정환이 라몬에게 물었다.
“당연히 펩시를 드실 거로 생각했는데 코카콜라를 드시네요?”
칙! 소리를 내며 코카콜라 캔을 뜯은 라몬이 미소를 지었다.
“적을 알아야 이기는 법이죠.”
라몬은 콜라를 마시려다 말고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덧붙였다.
“물론 펩시가 코카콜라에게 지고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물론입니다. 그럼 잘 먹겠습니다.”
정환은 김이 피어오르는 핫도그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다들 CEO라고 하면 매일 저녁 미슐랭 레스토랑에서 멋지게 차려입고 스테이크를 썰며 와인을 마시는 줄 압니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죠. 어떻게 보면 학생 때보다 더욱 배고픈 것 같아요. 끝없는 회의에 쫓기다 햄버거나 핫도그, 때로는 누가 먹다 남긴 도넛을 먹기 일쑤거든요. 그나마 최근에 제일 잘 차려 먹은 것이 기내식이었습니다.”
“저도 작업에 매진하다 보면 끼니를 대충 때우곤 합니다. 그래서 한국에 돌아갈 때마다 부모님께서 뼈밖에 안 남았다고 잔소리를 하시죠.”
라몬은 정환의 이야기에 공감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편한 옷을 입고 벤치에 앉아 핫도그를 먹는 라몬은 고루한 격식을 고집하는 인물 같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라몬의 행동에는 어딘가 모르게 어색한 부분이 있었다.
거대 그룹의 CEO답게 그런 어색함을 잘 감추고 있었지만 정환은 라몬이 뭔가 의식하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정환은 이 부분을 굳이 짚지 않았다.
지금 라몬에게 캐묻지 않아도 자기 입으로 먼저 말할 것임을 예감했고 무엇보다 지금은 배가 너무 고팠다.
정환은 핫도그를 한 입 더 베어 물었다.
이렇게 정환이 별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핫도그만 먹자 라몬은 조금씩 애가 탔다.
당연한 일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펩시의 CEO가 직접 센트럴 파크까지 찾아왔는데 정환은 핫도그에만 집중하고 있었으니까.
‘왜 자기를 찾아왔냐고 물을 법도 한데…….’
라몬은 정환의 눈치를 살폈다.
이미 정환은 핫도그를 절반이나 먹은 상태였다.
길어야 1분 안에 정환은 핫도그를 모두 먹어 치우고 휘적휘적 자리를 떠날 게 분명했다.
결국 애간장이 탄 라몬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일 때문에 근처에 있었는데 때마침 미스터 리가 파슨스에서 특강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정환은 속으로 빙그레 웃었다.
예상한 것처럼 제풀에 지친 라몬이 먼저 입을 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펩시의 CEO답지 않게 그 타이밍이 너무 빨랐다.
‘마음이 급한 모양이군.’
정환은 모르는 척하며 라몬의 이야기에 맞장구쳤다.
“그래요? 제 특강을 외부에 알리지 말아 달라고 파슨스 학장님에게 단단히 부탁했는데.”
라몬은 핸드폰을 정환에게 보여 줬다.
화면 속에는 파슨스에서 특강을 진행하는 정환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좋은 세상입니다. 이렇게 앉은 자리에서도 미스터 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알 수 있으니까요.”
“제게는 무척 무서운 세상이네요.”
“미스터 리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아니면 센트럴 파크에 자주 가신다는 것 역시 SNS를 통해 접했습니다. 오늘은 날씨가 좋아서 왠지 이곳에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운이 좋았군요.”
이번에는 정환이 맞장구를 치지 않았다.
다시 한번 핫도그를 한 입 베어 물뿐이었다.
반면 라몬은 핫도그를 먹지 않았다.
기껏 꺼낸 이야기가 더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때마침 한 무리의 사람들이 벤치 주변을 스쳐 갔다.
라몬은 그 사람들의 옷차림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눈을 크게 떴다.
적당한 이야깃거리가 생각난 것이었다.
라몬이 손을 들어 지나가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정환에게 말했다.
“재밌네요. 블랙 라벨 패션쇼에서 미스터 리는 수많은 셀럽에게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조금 전, 파슨스에서도 마찬가지였죠. 뉴욕을 들썩이게 만든 만큼 사람들이 먼저 알아볼 거로 여겼는데 꼭 그렇지 않네요.”
정환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절 너무 높게 평가해 주시는군요. 전 그렇게 유명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저, 이쪽 업계에서 얼굴이 조금 알려졌을 뿐이죠. 연예인처럼 얼굴을 가릴 필요도 없습니다.”
정환은 펩시 캔을 든 손으로 라몬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런데 그건 미스터 라몬 역시 마찬가지 아닙니까? 명색이 펩시의 CEO인데 알아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잖습니까?”
“하긴, 제가 바보 같은 소리를 했네요. 잡지나 뉴스에서 본 사람이 이렇게 한가하게 공원에서 핫도그를 먹고 있을 거라 생각하기는 솔직히 어렵죠.”
라몬은 핫도그를 베어 물었다.
때마침 네다섯 명의 사람들이 벤치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라몬의 눈에 익은 옷이었다.
그 옷을 어디서 봤는지 기억해 낸 라몬이 정환에게 물었다.
“블랙 라벨 옷의 카피가 벌써 시장에 풀렸군요. 공들여 만든 옷인데 이런 걸 보면 기분이 썩 좋지 않으시겠습니다. 어떻게 보면 미스터 리와 회사 직원들의 노력을 도둑질당한 거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라몬의 질문에 정환은 다시 한번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질문은 제각각이었지만 그 의도는 똑같았다.
지금 라몬은 정환이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려 애쓰고 있었다.
‘보아하니 사업상 중요하고 급한 이야기를 내게 꺼내고 싶은 모양인데.’
정환은 문득 오늘 아침, 정성일이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코카콜라와 펩시에 관련된 것이었는데 특강 때문에 서두르느라 오후에 다시 이야기하기로 했다.
정환은 우선 라몬의 이야기에 맞장구치기로 했다.
어차피 마음이 급한 건 라몬이었으니까.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전 그리 생각하지 않습니다.”
“네?”
“명품 패션쇼를 허영, 허세의 극치라고 하죠? 물론 부정할 순 없습니다. 이 업계에 일하고 있는 저 역시 가끔은 도를 지나친다는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으니까요.”
하늘을 떠다니던 하얀 구름이 태양을 살짝 가리자 벤치 앞에 시원한 그늘이 생겼다.
햇볕이 내리쬐는 양지와 구름으로 가려진 음지는 마치 자로 대고 그은 것처럼 선명하게 나뉘어 있었다.
정환은 손가락으로 음지를 가리켰다.
“하지만 그것은 나쁜 면만 지나치게 강조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때로는 고개를 들어 일부터 밝은 면을 봐야 할 필요도 있는 법이거든요.”
라몬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햇볕이 내리쬐는 양지로 향했다.
“밝은 면이라?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해 주실 수 있습니까?”
반문하는 라몬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이제야 자신의 의도대로 일이 풀린 거라 생각한 것 같았다.
정환은 자신이 걸친 블랙 라벨 재킷을 가리키며 말했다.
“가령, 블랙 라벨의 패션 아이템 하나가 유행한다고 가정해 보죠. 처음에는 최대한 비슷하게 카피할 겁니다. 그러다 조금씩 반응이 시들해지면 디자이너들은 그 아이템을 대중의 입맛에 맞게 각색하고 또 각색하겠죠. 자연스럽게 원단과 부자재 주문량이 늘고 크고 작은 의류 공장의 일감도 많아질 겁니다. 즉, 제가 만든 옷 한 벌이 수많은 일자리를 창출하는 셈입니다. 이것만으로도 꽤 멋진 일 아닙니까?”
가벼운 바람이 불어왔다.
그 바람에 태양을 가리던 구름이 흩어지면서 라몬이 물끄러미 보고 있던 음지와 양지 사이의 경계도 옅어졌다.
라몬은 뒤통수를 한 방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제가 또 한 번 멍청한 소리를 했군요. 명색이 CEO라는 사람이…. 당연히 나름의 시장 생태계가 있을 텐데 제가 패션 쪽에 꽤 편협한 시각을 갖고 있던 모양입니다.”
라몬이 머리를 긁적이자 정환은 손을 휘휘 저었다.
“아닙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제 의견일 뿐입니다. 오히려 개똥철학에 가깝죠. 무분별한 카피 때문에 피해를 보는 디자이너들도 꽤 많이 있으니까요. 저 역시 그런 부분에선 저작권이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네. 무슨 말씀이신지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결이 다를 뿐, 음료 업계에서도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거든요.”
라몬은 남은 음료를 마시는 정환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 자리에 오기 전 정환은 물론이고, 블랙해머에 관한 시시콜콜한 정보까지 모두 파악했다.
그래서 현재 블랙해머의 사업은 이동기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도맡아 진행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동기의 역할이 꽤 컸기에 라몬은 정환이 경영 면에서만큼은 큰 능력이 없을 거라 여겼다.
확실히 정환에게 경영 쪽으로 타고난 재능은 없어 보였다.
다만, 묘한 부분이 있었다.
고작해야 이십 대 중반인 정환은 세월이 켜켜이 쌓여야만 비로소 깨달을 수 있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라몬 역시 아직 가지지 못한 종류의 능력이었다.
‘경영 능력이 없는 게 아니라 굳이 보여 줄 필요가 없었던 것이었군. 그래야 창작 활동에만 100% 전념할 수 있을 테니까.’
라몬은 정환을 떠보려 던진 질문들이 모두 공허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 정환과의 만남이 그렇게 영양가 없는 일은 아니었다.
라몬에겐 나름의 수확이 있었다.
조금 전에 정환과 나눴던 대화를 통해 한 가지 확신이 생긴 것이었다.
라몬은 핫도그를 벤치 한쪽으로 치운 후 정환에게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미스터 리에게 꼭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 여기까지 따라왔습니다. 이걸 말할까, 말까 망설였는데 이제야 확신이 생겼습니다.”
정환은 라몬이 어떤 말을 꺼내려 했음을 이미 짐작했기에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말씀하시죠.”
잠시 망설이던 라몬이 입을 열었다.
“미스터 리. 우리 펩시와 콜라보레이션을 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