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dwarf in his previous life, but an artistic genius in his current life RAW novel - Chapter 166
164화 체스 말
콜라보레이션 관련 서류를 검토하는 델핀의 미간 주름이 깊어졌다.
아무리 살펴봐도 이번 콜라보레이션은 말 그대로 빛 좋은 개살구였다.
음료 업계와 패션 업계의 두 공룡이 힘을 합친 콜라보레이션임에도 델핀의 손에 떨어지는 것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숫자만 놓고 봤을 땐 손해에 가까웠다.
그도 그럴 것이 콜라보레이션을 통해 발생한 수익 대부분이 라이센스 명목으로 코카콜라 측에 넘어가도록 판이 짜여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코카콜라에 지급하는 라이센스 비용은 업계 평균을 아득히 뛰어넘을 정도로 높게 책정되어 있었다.
문제는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델핀은 빨간 펜으로 계약서에 계속 등장하는 회사 이름을 동그라미 쳤다.
델핀은 이 회사를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 베르나르가 비자금을 모으기 위해 차명으로 모나코에 설립한 회사였다.
그리고 콜라보레이션을 통해 발생한 쥐꼬리만 한 수익금 역시 전부 이 회사로 입금되게 설계되어 있었다.
‘입금된 수익금은 이곳저곳을 거쳐 깨끗하게 세탁된 다음, 아버지의 비자금이 되겠지.’
델핀은 아버지의 돈세탁을 도운 적이 몇 번 있었기에 이 과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계약서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델핀은 결국 인상을 팍 구겼다.
이번 콜라보레이션은 성공해도 본전이었고 실패하면 양조장에 처박힌 동생들과 같은 꼴을 면할 수 없다는 걸 다시금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델핀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동생들처럼 썩은 와인 내가 풍기는 양조장에 처박힐 마음은 추호도 없었으니까.
차라리 아버지의 구린 곳을 닦더라도 햇볕이 내리쬐는 곳에서 떵떵거리는 게 몇 배는 나았다.
‘내가 버티면 이기는 게임이야. 아버지가 나보다 오래 살 리는 없잖아? 끝까지 버티면 기회는 온다.’
델핀이 전의를 다질 무렵이었다.
사무실로 들어온 비서가 델핀에게 태블릿을 건넸다.
“코카콜라 측에서 콜라보레이션할 상품을 선정해 달랍니다.”
태블릿에는 루이비통과 지방시 등 LAMH 브랜드의 핫한 아이템 사진이 가득했다.
델핀은 그 아이템을 쭉 훑어본 후 가방과 재킷 하나를 골랐다.
“이 정도면 충분할 겁니다. 이대로 진행하도록 해요.”
“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뭐죠?”
“코카콜라 쪽에서 우리 디자이너들도…. 코카콜라 본사 디자인팀으로 보내 달랍니다.”
델핀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뭐라고요? 우리 디자이너를 왜 그쪽으로 보냅니까?”
“그게 말입니다, 디자인이 외부에 유출될 우려가 있다고…….”
델핀은 어이가 없었다.
분명 동등한 협업 관계이건만 코카콜라는 마치 델핀을 아랫사람처럼 부리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코카콜라는 자신을 쓰고 버리는 체스 말로 보고 있으니까.
아버지의 그늘에 있는 한 이런 푸대접은 계속될 게 분명했다.
델핀의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고 그 불똥은 엉뚱한 곳으로 튀었다.
“태블릿 다시 줘 봐요.”
델핀은 비서의 손에 있는 태블릿을 휙 낚아챘다.
그러고는 태블릿에 없는 완전히 새로운 아이템들을 선정했다.
값비싼 가방부터 재킷까지.
언젠가 이런 날이 오면 써먹으려 생각해 둔 아이템들이었다.
“여기 있는 아이템으로 진행하세요.”
태블릿을 돌려받은 비서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문제 있습니까?”
“그, 그게 말입니다.”
비서는 태블릿을 만지작거리며 델핀의 눈치를 살폈다.
명품 브랜드 콜라보레이션 상품은 가짓수가 그리 많은 편이 아니었다.
가령 루이비통과 제프 쿤스의 가방이나 구찌와 엘튼 존의 토트백처럼 잘나가는 아이템 한두 개로 구성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델핀이 고른 아이템은 무려 열 개가 넘었다.
게다가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인기 좋은 아이템까지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비서가 조심스레 델핀에게 물었다.
“외람되지만 이 아이템들은 LAMH 본사에서 물량을 의도적으로 조절하고 있는 상품입니다. VVIP들도 번호표를 끊어 가며 대기하고 있잖습니까? 만약 이 상품들을 콜라보레이션으로 먼저 풀어 버리면 VVIP들이 반발할 겁니다.”
비서가 앞서 말한 것처럼 델핀이 고른 상품들은 LAMH 본사에서 의도적으로 물량을 조절하고 있는 상품이었다.
그렇기에 유명 셀럽들도 협찬은커녕 1년이고 2년이고 기다려야만 살 수 있었다.
그런 희귀한 아이템을 콜라보레이션 상품으로 푼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델핀은 의아한 표정을 짓는 비서에게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요.”
“네?”
“그러니까 이 아이템으로 콜라보레이션을 진행해야 한다고요.”
비서가 이해를 못 한 듯 눈만 멀뚱멀뚱 뜨자 델핀이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쉬울 게 없는 부자, 셀럽들부터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까지 명품을 선망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합니까?”
“그야…….”
비서는 말끝을 흐렸다.
여기서 무슨 대답을 하더라도 델핀을 만족시키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희귀한 아이템을 몸에 지니면, 나란 사람의 가치도 희귀해진다는 착각을 하기 때문이에요.”
“…….”
“생각해 보세요. 그러잖아도 희귀한 아이템이 콜라보레이션을 통해 더욱 희귀해진다면 어떤 현상이 발생하겠습니까?”
“셀럽들도 매장 앞에 줄을 서겠죠.”
“맞아요. 이건 저 혼자만의 망상이 아닙니다. 수많은 명품 브랜드 콜라보레이션 역사가 이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델핀은 확신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두고 보세요. 물량을 풀었다고 불평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겁니다. 오히려 제발 팔아 달라고 애원하는, 그런 히트 상품이 될 겁니다.”
***
한편, 정환은 정성일에게 코카콜라와 LAMH 콜라보 소식을 자세히 들으려 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누구보다 먼저 접하고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이동기였다.
“중국에 계신 분이 뉴욕 소식을 더 훤하게 알고 계신 것 같습니다.”
정환의 말에 모니터 속의 이동기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얼마 전에 광둥성에서 명품 브랜드 OEM 업체를 크게 운영하시던 분과 술자리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LAMH와 코카콜라가 콜라보레이션을 진행한다지 뭡니까. 그래서 바로 대표님에게 말씀드린 겁니다.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군요.”
“큰 도움이 됐습니다. 미리 귀띔해 주지 않으셨다면 라몬의 제안을 너무 쉽게 받아들일 뻔했거든요.”
“LAMH와 코카콜라의 콜라보레이션이라…. 뭔가 급한 느낌이 드는데요. 이걸 불쏘시개 삼아 뉴욕 패션 위크의 참패를 덮으려는 걸까요?”
이동기의 추측은 꽤 합리적이었고 정환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화제는 화제로 덮는 법이니까요. 코카콜라와의 콜라보레이션 정도면 충분한 화젯거리가 될 겁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데요. 델핀은 이미 뉴욕 패션 위크에서 한 번 실패했잖습니까? 베르나르가 실패한 자식에게 한 번 더 일을 맡길까요? 그러다 델핀이 또 실패하면요? 델핀이 이번 콜라보레이션마저 실패한다면 패션 위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후유증을 겪을 텐데요.”
이동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이동기 역시 베르나르가 결코 손해 보는 장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점으로 미뤄 봤을 때 베르나르가 굳이 델핀에게 중요한 일을 맡길 이유가 없었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베르나르에겐 크게 상관없을 겁니다. 아니, 어쩌면 델핀이 실패하길 누구보다 간절히 바라고 있을 수도 있어요.”
“네? 실패하길 바란다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동기가 다시 한번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아시다시피 베르나르는 10여 년 전에 탈세 문제로 곤욕을 치렀잖습니까? 은퇴를 시사하며 자식들에게 브랜드 몇 개를 내어 줬고요.”
“아, 기억납니다. 그때 베르나르가 벨기에로 귀화한다는 이야기까지 꺼내서 생긴 일이었죠? 그 일 때문에 프랑스 정부에 더욱 단단히 찍혔고요.”
2012년. 프랑스 대통령 프랑수아 올랑드는 고소득자의 세율을 75%까지 올리는 이른바 ‘부자 증세’를 검토했다.
당시 410억 달러의 재산을 갖고 있던 베르나르는 이 정책에 격렬히 반발했고 세금 폭탄을 피하려 벨기에 귀화를 신청했다.
벨기에의 세율이 프랑스보다 훨씬 낮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귀화 시도가 외부에 새어 나가면서 베르나르는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비난 여론이 걷잡을 수 없이 거세지자 베르나르는 공식 성명을 통해 ‘벨기에 국적 신청은 사업 확장과 고용 창출을 위한 것이며 조세 피난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라고 밝히며 귀화를 철회했다.
그런데도 비난 여론이 가라앉지 않자 베르나르는 자식들에게 브랜드 몇 개를 떼어 주며 경영에서 손을 떼겠다는 뜻을 밝혔다.
“베르나르가 귀화를 철회할 수밖에 없었던 진짜 이유는 루이비통을 비롯한 LAMH 브랜드 전체의 주가가 수직으로 하락했기 때문입니다. 제아무리 캐시미어를 걸친 하이에나라고 해도 손해 입은 대주주들 앞에선 꼼짝할 수 없었던 거죠. 뭐, 귀화를 철회한 이후 주가는 다시 원래대로 회복됐고요.”
정환의 설명을 들은 이동기가 아! 탄성을 뱉었다.
“무슨 말씀인지 알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이번 콜라보레이션이 실패한다면 주주들은 그 원인을 델핀이라 여길 거고 자연스레 베르나르가 다시 나설 수밖에 없는 그림이 그려지겠군요. 성공해도 베르나르로서는 딱히 아쉬울 게 없는 상황이고요.”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그럴 겁니다. 일이 어떻게 풀리든 베르나르로서는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이 되겠죠.”
이동기가 혀를 내둘렀다.
“그래도 피붙이인데 베르나르가 그렇게까지 할까요? 경영 일선에 복귀하겠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책임을 자식에게 전가하는 꼴이잖습니까?”
“베르나르는 돈 앞에서 혈육을 따지지 않는 사람입니다. 비난 여론을 피하려 자식들에게 브랜드 몇 개를 떼어 줬을 때 베르나르는 아마 칼로 생살을 도려내는 기분이었을 겁니다. 그 고통을 감내하며 다짐했겠죠. 언젠가 전부 돌려받을 거라고. 델핀 역시 베르나르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겁니다. 그래서 더욱더 필사적이겠죠. 마지막 기회를 놓친다면 동생들과 똑같은 꼴을 당할 테니까.”
정환은 지금쯤 프랑스 어딘가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베르나르의 모습을 상상했다.
캐시미어를 걸친 하이에나는 자식의 먹잇감을 챙겨 주긴커녕 오히려 목덜미를 물어뜯으려 하고 있었다.
홀로 남은 새끼 하이에나가 아비를 향해 이를 드러냈지만 그 새끼 하이에나에게 승산은 없어 보였다.
“어쨌든 델핀은 이번에 제대로 칼을 갈겠네요. 말 그대로 사지에 몰린 처지 아닙니까?”
이동기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델핀이 날카롭게 벼린 칼이 혹여나 정환에게 생채기를 낼까 봐 그런 것이었다.
정환은 그런 이동기에게 오히려 여유 있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실력 없는 대장장이가 벼린 칼에는 베여도 피 한 방울 안 나는 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