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dwarf in his previous life, but an artistic genius in his current life RAW novel - Chapter 168
166화 파슨스로 부른 이유 (1)
라몬을 경악하게 한 것.
그것은 자신을 잡아먹을 것처럼 노려보고 있는 한 남자의 모습이었다.
깜짝 놀라 뒷걸음질 치던 라몬은 그것이 조각상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이고, 이 녀석들. 입구에 이런 걸 두면 사람 놀라니까 옮기라고 했는데…. 미안합니다. 많이 놀라셨죠?”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실기동의 학생들은 라몬과 학장이 들어온 것도 모른 채 각자의 작업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라몬은 숨을 죽였다.
자신이 무심코 낸 소음이 학생들의 팽팽한 집중력을 흩트려 놓을까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학생이 열심히 작업하고 있는 반쯤 완성된 조각상 옆을 지나가던 라몬은 어떤 기시감에 고개를 돌렸다.
“어?”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 생각이 맞았다.
그 조각상은 한때 펩시의 마스코트 캐릭터였던 ‘펩시 맨’이었다.
하지만 펩시 맨은 쫙 펼친 손바닥을 앞으로 내미는 시그니처 포즈 대신 깊은 고민에 빠진 듯 턱을 괴고 앉아 있었다.
“저건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죠.”
라몬이 말끝을 흐리자 학장이 대신 대답했다.
우락부락 근육질의 펩시 맨이 턱을 괸 채 고뇌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라몬은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웃음을 꾹 참으려 했지만 결국 참지 못했다.
고뇌하는 펩시 맨의 발치에 놓인 것들 때문이다.
그곳에는 찌그러진 펩시 캔이 잔뜩 널브러져 있었는데 정작 코카콜라 캔은 따지도 않은 채 놓여 있었다.
로뎅을 흉내 내고 있는 펩시 맨이 펩시만을 편식했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장식.
그 장식을 보고 있자니 펩시와 코카콜라가 광고로 서로를 재치 있게 디스했던 시절을 떠올랐다.
‘재밌는 작품이네.’
흥미를 느낀 라몬의 시선이 자연스레 다음 작품으로 향했다.
남학생이 붙잡고 있는 캔버스 속에는 입체감이나 질감 표현 없이 단순하게 그려진 펩시 캔이 쭉 나열되어 있었다.
익숙한 화풍의 그림.
라몬은 학장의 부연 설명 없이도 이 그림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이건 앤디 워홀의 코카콜라를 오마주한…. 이 녀석 봐라?’
앤디 워홀의 팝아트 하면 모두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었다.
켐벨 수프 캔, 마릴린 먼로의 얼굴, 그리고 코카콜라 병.
라몬이 학생의 그림에 흥미를 느낀 이유는 바로 이 이미지 때문이었다.
코카콜라 병의 이미지가 강력한 팝아트 작품에 발칙하게 펩시 캔을 대신 그려 넣었으니까.
‘학생 시절에만 할 수 있는 상상이지.’
학생들의 작품을 쭉 훑어보던 라몬은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작품 종류는 제각각이었으나 주제가 모두 같았다.
바로 펩시라는 브랜드, 그 자체였다.
학생들의 시선을 통해 다시 해체되고 조합된 펩시는 그야말로 신선했고 충격적이었다.
물론 프로 디자이너의 솜씨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테크닉이 부족했고 펩시의 헤리티지를 강조하는 능력 역시 부족했으니까.
하지만 이런 서투름마저 매력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학생들의 작품은 발칙하고 재밌었다.
‘조금만 다듬으면 펩시와 산학 협력 같은 공동 프로젝트를 진행해도 좋겠는데?’
라몬은 그 자리에서 CEO답게 학생들의 작품을 상업적으로 활용할 방법을 구상했다.
상상의 가지가 쭉쭉 뻗어나가던 그때였다.
뒤쪽에서 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부분 색감이 좀 약한 느낌인데? 채도를 과감하게 올려보는 건 어때?”
“어? 그 생각은 못 했는데요. 한번 바꿔볼게요.”
앳된 목소리로 대답하는 학생 곁에서 팔짱을 끼고 작업물을 피드백하는 여자.
라몬은 그 여자를 알고 있었다.
회사를 오가며 몇 번 마주쳤던 디자인팀의 디자이너였다.
‘응? 저 친구가 왜 여기에 있지?’
그러고 보니 그 디자이너만 여기에 있는 게 아니었다.
본사에서 파견한 다른 디자이너들도 실기실을 누비며 학생들에게 피드백을 주고 있었다.
라몬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두 눈을 좌우로 굴렸다.
그러고 보니 이해할 수 없는 일 천지였다.
왜 파슨스 학생들이 펩시를 주제로 작품을 만들고 있는지.
왜 펩시 디자이너들이 파슨스 학생들에게 피드백을 주는지.
그중 제일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정환이 자신을 여기로 부른 이유였다.
의문은 수십 가지였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조금 전 학장이 자신에게 고맙다고 말한 이유였다.
‘펩시 디자이너들이 공짜로 수업을 해 줘서 고맙다고 한 거였군?’
이것은 분명한 계약 위반이었다.
펩시는 파슨스와 산학 협력을 맺은 게 아니라 블랙해머와 콜라보레이션 계약을 맺었으니까.
만약 회사 법무팀에서 이 광경을 본다면 계약 위반이라며 입에 거품을 물 게 분명했다.
‘학장이 처음 그런 인사를 했을 때 확실히 캐물었어야 했는데, 미스터 리의 연락을 받고 마음이 들뜬 게 문제였어.’
라몬은 이것도 모르고 팔자 좋게 파슨스와 산학 협력을 기획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그리고 그 부끄러움은 이내 분노로 변했다.
정환을 향한 분노였다.
‘플레이어가 된다더니 엉뚱한 판의 플레이어 행세를 하고 있었어?’
라몬을 펩시의 CEO로 만든 것.
그것은 1달러의 손해도 용납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런데 지금, 연봉 15만 달러의 펩시 디자이너들이 단돈 1달러도 받지 않고 공짜로 파슨스 학생들을 케어해 주고 있었다.
그러니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라몬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학장에게 물었다.
“여기에 있다던 미스터 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사실 라몬은 학장에게도 지금 이 사태에 대해 제대로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정환을 만나는 게 우선이었다.
어쨌든 이번 일을 벌인 것은 정환일 테니까.
학장이 손목에 찬 시계를 보더니 라몬에게 말했다.
“아, 미스터 리는 제작실에 있겠네요. 바로 옆입니다.”
***
학장은 라몬을 실기동 옆에 딸린 제작실이라는 장소로 안내했다.
제작실 내부는 마치 위험한 화학 실험실처럼 불투명한 비닐이 곳곳에 장막처럼 처져 있었다.
누군가 물감과 스프레이를 흩뿌려 가며 작업한 듯 비닐 곳곳에 얼룩덜룩한 자국이 가득했다.
그 흔적을 보아하니 여기서 꽤 요란한 작업이 있던 모양이었다.
학장은 입구 옆 선반에서 두꺼운 방진 마스크를 꺼내 라몬에게 건넸다.
“냄새가 꽤 지독하니 쓰시는 게 좋을 겁니다.”
심통이 난 라몬은 학장에게 마스크를 건네받고도 그것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학장이 두꺼운 비닐을 위로 걷어 올리자 진한 페인트 냄새가 라몬의 코를 훅 찔렀고,
“으읍!”
눈앞이 아찔해질 정도의 냄새에 라몬은 허둥지둥 마스크를 써야 했다.
꽤 꼴사나운 모습이었지만 다행히 그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작업실 내부로 들어서자 마스크를 쓴 학생들이 나란히 서 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사이에는 펩시의 디자이너들도 함께 있었다.
라몬은 눈에 불을 켜고 펩시 디자이너들을 노려봤지만 누구도 라몬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모두들 뭔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한쪽 벽만 쳐다보고 있었다.
이윽고 그 벽이 끽, 하고 소리를 내며 열렸다.
벽이 아니라 문이었다.
워낙 그것이 커서 착각했을 뿐.
‘보아하니 부피가 큰 재료나 설비를 옮길 일이 많아 이런 거대한 문을 설치한 모양이군.’
라몬이 생각하는 사이, 활짝 열린 문틈으로 누군가 카트를 밀고 들어왔다.
그 카트에 담긴 것은 사람 키보다 큰 알루미늄 캔이었다.
학장이 조금 흥분한 목소리로 라몬에게 말했다.
“우리가 딱 맞춰 온 모양입니다.”
“딱 맞춰 오다뇨?”
“조금만 기다리시면 알게 될 겁니다.”
라몬이 뭔가 더 물으려고 했지만 학장이 입을 딱 다문 채 알누미늄 캔의 모습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그런 까닭에 라몬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는데 그때 누군가의 모습이 눈에 들었다.
카트를 밀고 온 남자.
바로 정환이었다.
두꺼운 방진 마스크와 반투명한 고글을 쓴 탓에 얼굴이 가려져 있었지만 라몬은 그 사실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미스터 리는 또 왜 저러고 있어?’
라몬이 머릿속에 의문을 떠올리는 동안 정환은 두 손을 탁탁 턴 후 지저분한 작업대 위에 놓인 스프레이 건을 집어 들었다.
그러자 학장이 라몬에게 손짓했다.
“우리 뒤로 조금만 물러날까요?”
“왜죠?”
“스프레이가 옷에 튈 수도 있거든요.”
라몬은 고개를 끄덕이며 얼른 뒤로 물러섰고 그와 동시에 정환은 망설임 없이 민무늬 캔을 향해 스프레이 건을 쐈다.
치익! 경쾌한 소리와 함께 뿜어져 나온 물감은 삽시간에 민무늬 캔을 하얗게 물들였다.
학장이 라몬에게 속삭였다.
“선명한 발색을 위해 미리 밑색을 까는 겁니다.”
“그 정도는 압니다.”
밑색 작업을 마친 정환은 스프레이 건을 무심하게 내려놓더니 이번에는 끝이 둥글둥글한 연필을 쥐고 새하얀 캔 위에 연한 선을 긋기 시작했다.
유려한 곡선과 날이 선 직선을 쉬지 않고 그리는 정환의 뒷모습은 마치 신전 기둥을 조각하는 고대 그리스의 조각가 같았다.
다만 이러한 거침없는 모습과 달리 라몬은 정환이 무엇을 스케치하는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라몬만 그런 게 아니었다.
파슨스 학생들도, 펩시 디자이너들도 그저 정환의 손끝을 정신없이 따라갈 뿐이었다.
‘미스터 리의 눈에만 보이는 설계도로군.’
그렇게 자신만의 설계도를 모두 그린 정환은 자기 역할을 다한 연필을 바닥에 툭 던진 후 다시 스프레이 건을 잡았다.
이번에 스프레이 건에서 뿜어져 나온 색은 펩시의 포인트 컬러인 파란색과 빨간색이었다.
대비되는 색과 색이 겹쳐지면서 누구도 이해하지 못했던 스케치가 비로소 원래의 모습을 찾기 시작했다.
겨우내 앙상하던 거목이 봄비를 맞고 이파리를 펼치는 것처럼 민무늬 캔 위로 새로운 옷이 덧입혀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라몬은 침을 꿀꺽 삼켰다.
긴장해서 삼킨 침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갈증이 나서 삼킨 침이었다.
사실 라몬은 펩시 음료를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펩시의 CEO이면서 펩시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했다.
질리도록 마셨으니까.
역대 펩시 CEO 가운데 펩시를 가장 많이 마셔본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당당히 손을 들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 라몬마저 저 캔에 담긴 펩시를 배가 터질 때까지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캔은 청량감이 넘치는 모습을 띠고 있었다.
색깔 때문일까, 아니면 디자인 때문일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건 역대 최고의 캔 디자인이 자신의 눈앞에 완성됐다는 사실이었다.
마침내 모든 작업이 마무리되자 정환은 얼굴을 갑갑하게 가리고 있던 마스크와 고글을 벗었다.
“미, 미스터 리.”
라몬이 수건으로 땀을 닦고 있는 정환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오셨습니까? 최종 시안 작업을 직접 보셔서 다행입니다.”
라몬은 어마어마한 존재감을 내뿜는 캔을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이게 바로 블랙해머 에디션이군요.”
라몬은 가까이에서 펩시 캔을 다시 한번 살폈다.
자세히 보니 캔 곳곳에 블랙해머의 로고가 숨어 있었다.
한 걸음 떨어져서 봤을 땐 캐치할 수 없었던 디테일이었다.
‘이 캔이 대중성과 고급스러움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 번에 잡은 이유…. 그것은 바로 이러한 디테일 때문이야!’
라몬은 조금 전, 마음속에 품었던 옹졸한 오해를 모두 지워버린 지 오래였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라몬은 언변이 나쁜 편이 아니었다.
오히려 좋은 편에 속했다.
그런데도 도무지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만큼 정환이 선보인 블랙해머 에디션이 압도적이었기 때문이다.
정환은 그런 라몬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충격적인 한마디를 덧붙였다.
“더 있습니다.”
“네? 더 있다뇨?”
“직접 보시죠.”
정환이 곁에 서 있던 펩시 디자이너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 신호에 맞춰 제작실 주변을 꽁꽁 감싸고 있던 불투명 비닐이 동시에 벗겨졌다.
차르륵 소리와 함께 장막이 바닥으로 떨어진 순간, 라몬은 압도되고 말았다.
제작실의 사방을 가득 메운 것.
그것은 각기 다른 디자인의 펩시 캔 수백 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