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dwarf in his previous life, but an artistic genius in his current life RAW novel - Chapter 170
168화 파슨스로 부른 이유 (3)
“미스터 리. 소원이 뭡니까?”
라몬이 맥 빠진 목소리로 정환에게 물었다.
“벌써 포기하시는 겁니까?”
라몬은 손바닥으로 두 눈가를 문지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한 시간 동안 눈이 아플 정도로 학생들의 작품을 확인했지만 결국 정환의 작품을 찾아내지 못한 것이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처음부터 결과가 정해진 내기라고 생각했습니다. 블랙해머의 브랜드는 물론이고, 미스터 리의 개인전 작품까지 모두 감상했으니까요. 그런 제가 미스터 리의 작품을 맞추지 못하는 게 더 말이 안 되는 일이죠.”
라몬의 시선이 체스 말처럼 길게 늘어선 작품들로 향했다.
어떤 부분에선 학생다운 풋풋함이, 어떤 부분에선 학생답지 않은 노련함이 묻어 있었다.
그래서 라몬은 첫 작품이 단상 위로 올라왔을 때 자신의 승리를 100% 확신했다.
지난 뉴욕 패션 위크에서 정환이 입었던 정장이 단번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격식과 편안함이라는 상반되는 요소를 조화시킨 정장은 라몬의 뇌리에 선명히 남아 있었다.
그리고 단상 위에 올라온 작품처럼 상반되는 요소의 완벽한 조화는 오로지 정환만이 해낼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라몬의 착각이었다.
두 번째 작품에도, 세 번째 작품에도 정환의 터치가 진하게 묻어 있었다.
라몬이 결국 답을 맞히지 못한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확신이 있었는데 정말 모르겠군요. 여기 있는 작품이 전부 미스터 리의 작품처럼 보입니다. 분명 학생들의 작품인데도 말이죠. 아마 제 눈은 옹이구멍인 모양입니다. 소원을 말씀하시죠. 단, LAMH를 인수해 달라는 소원만 아니면 좋겠습니다.”
“아뇨.”
정환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스터 라몬의 눈은 옹이구멍이 아닙니다.”
옹이구멍이라 자책했던 라몬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미안합니다. 사실 저기에 제 작품은 없습니다.”
정환은 말을 잇지 못하는 라몬을 뒤로한 채 단상 위로 올라갔다.
정환의 작품이 없었음에도 라몬이 그것을 몰랐던 이유.
그것은 정환이 학생들의 작품 전체에 인챈트를 새겼기 때문이다.
라몬은 인챈트의 존재를 까맣게 몰랐기에 정답을 맞히지 못한 것이다.
학장은 자연스레 마이크를 정환에게 넘겼고 정환의 크리틱이 시작됐다.
“첫 번째 작품부터 함께 보도록 하죠. 팝아트군요. 코카콜라 병의 이미지를 깨고 펩시 캔을 대입한 시도는 좋았습니다. 아시다시피 콜라병은 1915년 이후로 디자인이 거의 바뀌지 않았으니까요. 그리고 선명하게 각인된 이미지를 깬 시도는 칭찬할 부분입니다. 다만 펩시 캔의 이미지를 그대로 사용했다는 점은 조금 아쉽네요. 만약 저였다면…….”
정환은 각 작품의 훌륭한 점과 아쉬운 점, 그리고 자신이었다면 어떻게 고쳤을지를 상세히 설명했다.
학생들은 고개를 쭉 내민 채 정환의 설명에 집중했다.
학생뿐만이 아니었다.
파슨스의 교수와 강사는 물론이고, 펩시 디자이너까지 그 설명을 놓치지 않으려 눈에 불을 켰다.
라몬은 이 모습을 보며 자신이 정환에게 속았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미스터 리의 작품이 애초에 없었다니.’
헛웃음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애초에 말도 안 되는 내기였다.
보기 좋게 속았지만 그렇게 화가 나지 않았다.
작품을 감상하면서 어떤 학생을 펩시로 스카우트해야 할지, 그리고 스카우트된 학생이 펩시에서 어떤 성과를 보일지 상상했고 그 과정이 무척 즐거웠기 때문이다.
“음, 역시 이렇게 마무리 짓긴 아쉽네요.”
평가를 마친 정환이 라몬을 지목했다.
“미스터 라몬, 잠깐 올라와 주시죠.”
“네?”
정환은 자리에 앉은 학생들에게 말했다.
“모두 알고 있겠지만 미스터 라몬은 펩시의 CEO입니다. 즉, 여러분이 언젠가 훌륭한 디자이너로 성장했을 때 맞닥뜨려야 할 최종 보스죠. 이 최종 보스는 여러분의 디자인을 반려하고 또 반려하면서 더욱 참신한 걸 가져오라고 괴롭힐 겁니다.”
펩시 디자이너들이 몸서리쳤다.
라몬이 디자인 면에서 얼마나 깐깐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들의 미래를 살짝 들여다본 파슨스 학생들 역시 긴장한 듯 침을 삼켰다.
“이러한 최종 보스가 여러분의 작품을 코멘트해 준다면 앞으로 큰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정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학생들이 우렁찬 박수를 보냈다.
결국 라몬은 환호를 받으며 단상 위로 올라왔다.
“미스터 리. 절 속인 것도 모자라 또 난감하게 만드시네요. 제가 학생들의 작품을 어떻게 평가하겠습니까?”
“간단한 코멘트만 해 주시면 됩니다. 있는 그대로. 가감 없이.”
마이크를 쥔 라몬은 강당을 빼곡히 메운 학생들을 바라봤다.
즉석에서 이뤄진 강연인지라 당황스러울 법했지만 라몬은 편하게 입을 열었다.
대중 앞에 서는 것은 질리도록 해온 일이었으니까.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제가 설마 여러분을 잡아먹기야 하겠습니까?”
그렇게 라몬이 먼저 농담을 던졌고 학생들이 작게 소리를 내 웃었다.
간단하게 분위기를 환기한 라몬의 입에서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우선 펩시라는 브랜드를 이렇게 멋지게 재해석해 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미리 받은 기분이네요. 디자인 전문가도 아닌 제가 여러분의 작품에 대해 입을 대려니 참 민망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오늘 제가 감상한 작품 모두 굉장히 수준이 높았습니다.”
평가가 긍정적이었기 때문에 학생들은 라몬의 이야기에 환호했다.
다만 그 속에 담겨 있는 내용은 사실 상당히 상투적인 편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이후로도 두드러졌다.
굳이 라몬이 아니어도 할 수 있는 이야기의 연속이었던 것.
심지어 라몬 역시 자기 이야기가 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어쩔 수 없었다.
상대방은 학생이니 그 수준에 맞는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라몬과 학생 모두가 약간의 지루함을 느끼고 있을 무렵.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정환이 입을 열었다.
“미스터 라몬, 질문이 있습니다. 만약 여기 있는 작품을 상품화한다면 어떨까요? 잘 팔릴까요?”
정환의 질문에 늘어지던 강당 분위기가 다시금 팽팽해졌다.
그만큼 정환의 질문이 흥미로웠다.
라몬은 생각지도 못한 흐름에 당황하다가 정환의 눈빛을 확인했다.
정환의 눈빛은 처음과 같았다.
‘있는 그대로…. 그리고 솔직하게.’
라몬은 정환이 원하는 바를 깨닫고 단단히 마이크를 잡으며 입을 열었다.
“어려운 질문이군요.”
아까보다 한 톤이 낮아진 라몬의 목소리.
평소 라몬이 익숙한 펩시의 디자이너들은 강연장의 분위기가 바뀔 것을 직감했다.
아니나 다를까, 라몬이 말을 이었다.
“제가 예언자는 아닙니다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디자인은 절대 팔리지 않을 거라는 것.”
조금 전까지 듣기 좋은 이야기만 하던 라몬의 혹평에 파슨스 학생들의 눈이 커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내로라하는 파슨스의 교수와 강사에게 받는 강도 높은 크리틱도 이렇게 노골적이지는 않았으니까.
반면, 펩시 디자이너와 파슨스 강사진은 이러한 일이 익숙하다는 듯 무덤덤했다.
라몬이 왜 이렇게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했는지 이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여러분의 작품은 수백만, 수천만의 입맛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디자인을 전공하지도 않은 사람이 그걸 어떻게 아냐고요? 알 수 있습니다. 디자인과 경영은 수백만, 수천만을 만족시키면서 동시에 새로움을 보여줘야 하는 지랄 같은 일이니까요. 자, 눈을 크게 뜨고 다시 작품을 보십시오. 무엇이 보이십니까? 제 눈에는 풋내 나는 디자인 철학을 담아 만든 뭔가로밖에 보이질 않습니다. 이걸 과연 몇 명이나 돈을 주고 구입할까요? 아마 전 세계를 뒤져보면 한두 명 정도는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런 형편없는 디자이너를 고용할 회사는 세상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라몬의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강당 분위기는 무거워졌다.
그만큼 라몬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이야기에는 학교에서 배울 수 없는 현장의 현실을 담겨 있었다.
“그러나.”
이제 결론을 지을 차례였다.
그러나 라몬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가 아니었다.
학생들에게 솔직한 코멘트를 하면서 한 가지를 깨달은 것이다.
그것은 바로 정환이 자신을 파슨스로 부른 진짜 이유였다.
정환이 파슨스에서 진행한 프로젝트.
그것은 단순히 파슨스 학생들을 가르치고 콜라보레이션 아이템을 제작하는 게 목적이 아니었다.
정환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라몬에게, 그리고 펩시 디자이너들에게 펩시의 브랜딩 방향을 제시하고 있었다.
라몬은 고개를 들어 펩시 디자이너들과 눈을 마주쳤다.
디자이너들 역시 정환의 의도를 깨달은 듯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라몬은 학생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저 역시 여러분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얄팍하고 풋내 나는 경영 철학을 가졌었고 그 때문에 수도 없이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풋내 나는 철학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 철학이 저를 특별하게 만들어 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보시다시피 제 믿음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지독한 실패와 고난이 있었지만 이 과정 덕분에 풋내나던 제 경영 철학은 완성됐고 이렇게 저는 펩시의 CEO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포기하지 마십시오. 풋내 나는 디자인 철학은 세찬 비바람을 맞으며 더욱 성숙해질 테고 여러분을 최고의 디자이너로 만들어 줄 테니까요.”
라몬이 마이크를 내려놓았다.
학생들은 박수나 환호 대신 라몬이 했던 진심 어린 충고를 곱씹었다.
이윽고, 몇몇 학생들의 박수를 시작으로 사방에서 뜨거운 환호가 쏟아졌다.
하지만 라몬은 고개를 떨궜다.
처음 세웠던 마음가짐을 망각했던 자신이 학생들에게 그것을 강조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그때 옆에서 짝짝! 커다란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정환이었다.
정환은 라몬의 성찰과 깨달음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있었다.
라몬은 그제야 고개를 들고 학생들의 환호에 화답했다.
환호가 잠잠해질 때쯤 라몬이 학생들에게 말했다.
“듣자 하니, 이번 프로젝트 결과에 블랙해머 인턴십 자리가 걸려 있다고 들었습니다. 맞습니까?”
“네!”
“이렇게 멋진 선물을 받았는데 제가 가만히 있을 순 없죠.”
학생들이 기대하는 표정을 지었다.
따끔한 회초리 다음에는 언제나 맛있는 간식이 있는 법이니까.
그리고 그 회초리가 따끔할수록 간식은 더욱더 맛있어지는 법이니까.
라몬은 학생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여러분이 동의하신다면, 오늘 이 자리의 작품들을 정리해서 파슨스 에디션을 출시하겠습니다. 물론 그 에디션에는 학생 여러분의 이름이 새겨질 겁니다.”
조금 전보다 더욱 큰 환호가 강당에 울려 퍼졌다.
각자의 이름이 새겨진 에디션이 출시된다는 것.
그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경험이니까.
“아직 환호하기엔 이릅니다. 선물이 하나 더 남아 있으니까요. 이번 겨울, 여러분에게 펩시 디자이너 인턴이 될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에겐 충분한 자격이 있습니다.”
라몬은 이 말을 마치자마자 마이크 전원을 껐다.
학생들의 환호가 너무 커서 스피커가 터질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학장이 학생들을 진정시키는 사이, 라몬은 곁에 선 정환에게 향했다.
“정말 짓궂으시네요.”
“미안합니다. 미스터 라몬을 속이고 난감하게 만들었으니 소원을 꼭 이뤄드리겠습니다. 코카콜라를 원하십니까?”
라몬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럴 필요 없습니다. 제 소원은 이뤄졌으니까요.”
이번 강연을 통해 파슨스 학생들을 얻었고 자신을 돌아봤다.
어찌 보면 라몬은 가장 큰 선물을 받은 사람이었다.
“어쨌든 제가 미스터 리의 작품을 맞추지 못한 것도 사실이죠. 그러니까 저도 미스터 리의 소원을 들어드려야겠죠. 미스터 리의 소원은 뭡니까? LAMH입니까?”
정환은 기뻐하는 파슨스 학생들을 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제 소원 역시 벌써 이뤄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