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dwarf in his previous life, but an artistic genius in his current life RAW novel - Chapter 172
170화 모래 위에 지은 성 (2)
VVIP와 델핀의 사이는 꽤 가까운 편이었다.
VVIP의 가족과 함께 지중해 요트 투어를 다녀오거나 조용히 술잔을 기울이며 개인적인 이야기를 몇 번이나 나눴으니까.
그래서 델핀은 차갑게 돌변한 VVIP의 태도가 무척 당황스러웠다.
동일인이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런 까닭에 델핀의 입에서는 이런 물음이 튀어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인지…….”
하지만 VVIP는 델핀의 감정 따위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듯 이렇게 질문을 던졌다.
“제가 5번가 스토어에 가지 않은 이유가 고작해야 남들의 시선 때문인 것 같아요?”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지만 정곡을 찔린 델핀의 입에서는 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VVIP가 스토어에 방문하지 않은 이유가 정말 남들의 시선 때문이라 생각했으니까.
델핀이 대답을 망설이자 VVIP는 그 의미를 깨닫고 헛웃음을 지었다.
“그럴 줄 알았어요. 제가 그토록 기다렸던 한정판 가방. 그 가방을 이번 콜라보레이션에 포함하셨더군요. 미스 델핀, 제가 그 가방을 몇 년이나 기다렸는지 아세요? 자그마치 2년이에요, 2년!”
델핀의 시선이 수첩으로 향했다.
VVIP의 이름 옆에는 언급된 가방의 모델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현재 그 가방은 코카콜라 로고가 큼지막하게 박힌 채 스토어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델핀은 그제야 자신이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음을 깨달았다.
하필 다른 아이템도 아니고 VVIP가 목을 빼고 기다리던 아이템을 누구나 살 수 있는 콜라보레이션에 넣다니.
“물론 미스 델핀에게 가방을 구해 달라고 부탁할 수도 있었죠. 하지만 그러지 않았어요. 왜? 돈과 인맥만으로 살 수 없는 아이템이니까. 참고 기다려야만 손에 넣을 수 있어 가치가 있는 아이템이니까.”
“…….”
“그렇게 애를 태우며 기다린 가방이었는데, 뉴스를 보니 같잖은 셀럽들이 그걸 들고 유치한 연극을 벌이더군요. 그걸 본 제 기분이 어땠을 것 같아요? 2년의 기다림이 한순간에 허무해질 것 같지 않나요?”
“그, 그건….”
“심지어 그 아름다운 가방에 코카콜라 로고를 턱 박아 놓고선 한정판의 한정판? 그렇게 떠들면 내가 좋다고 그 가방을 살 줄 알았나요?”
델핀이 변명을 늘어놓을 틈조차 없이 VVIP가 작정한 듯 매섭게 쏘아붙였다.
“그래서 내가 스토어에 방문하지 않은 겁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 부담스러워서가 아니라 미스 델핀이 나를 지금껏 어떻게 바라봤는지 이제야 깨달았던 거죠.”
핸드폰을 쥔 델핀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VVIP에게 자신의 생각을 들켰다는 부끄러움 때문에 손을 떠는 것이 아니었다.
분노.
그랬다.
지금까지 살면서 아버지를 제외한 누군가에게 이런 비난을 들어본 적이 없는 델핀은 지금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델핀 또한 VVIP 이상으로 자존심이 강한 인물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당장 입 닥치라며 고래고래 소리치고 핸드폰을 던져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참아야 했다.
델핀의 수첩 속에서 가장 값비싼 인물이 바로 이 VVIP였으니니까.
이 VVIP는 델핀에게 또 다른 한나 윈투어였다.
한나 윈투어가 칭찬한 옷이 유행하는 것처럼 VVIP가 입고 걸친 모든 아이템이 VIP들의 세계에서 유행했다.
그러니 델핀으로서는 VVIP에게 화를 낼 수 없었다.
오히려 이런 모욕을 견디고서라도 VVIP와 가깝게 지내야 했다.
그룹 전체에 돈을 퍼부어 주는 VVIP가 델핀의 곁에 있다는 것.
그것은 델핀이 LAMH의 왕좌에 앉을 자격을 증명하는 것과 다름없으니까.
그랬기 때문에 델핀은 끝끝내 화를 참았다.
물론 이렇게 된 데에는 갑작스럽게 떠오른 아버지의 탐욕스러운 얼굴이 크게 도움이 됐다.
‘아버지라면 VVIP에게 화를 낸 일을 그냥 넘어가지 않을 테니까.’
분명 기다렸다는 듯이 이번 콜라보레이션의 실패와 VVIP의 이탈로 인한 손해를 침소봉대할 것이다.
‘그러고는 내가 셀럽을 통해 진행했던 연극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연극을 언론에 올리겠지.’
분하지만 거대한 여론을 움직이는 일은 델핀보다 아버지의 능력의 우수했다.
그러니 델핀으로서는 절대 이런 부분에서 아버지에게 여지를 주어서는 안 됐다.
델핀이 빈틈을 보이는 순간, 캐시미어를 걸친 하이에나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낼 테니까.
그 이빨이 자신의 목을 향하는 것만큼은 막아야 했다.
그렇게 델핀은 어떻게든 상황을 수습하려 VVIP에게 이야기했다.
“어떤 기분인지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리고 전적으로 이 일은 제 잘못입니다. 그러니 제가 사과의 의미로…….”
델핀의 입에서는 이 시간부로 VVIP가 얻게 될 혜택이 줄줄 흘러나왔다.
하나같이 파격적이었고 어딜 가서 과시하기에 좋은 것뿐이었다.
그러나 델핀의 이러한 제안에도 VVIP의 마음은 달라지지 않았다.
완전히 마음이 돌아섰음을 증명하려는 듯 VVIP는 조금 전보다 더욱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미스 델핀은 끝까지 저를 실망하게 하는군요. 제가 거지입니까? 그딴 달콤한 말 몇 마디에 좋다고 손을 내밀게?”
“…아.”
델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지금 통화하는 VVIP는 델핀의 수첩 속 명단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었다.
즉, 델핀이 언급한 혜택은 VVIP에게 있으나 마나 한 것과 다름없었다.
실수를 깨달은 델핀이 말을 잇지 못하자 VVIP가 차갑게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정말 후회되네요. 미스 델핀의 성공을 믿고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등진 채 LAMH 패션쇼에 참여한 것이. 이제 더 이상 미스 델핀이 제 번호로 전화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끝이에요.”
델핀은 전화가 끊겨 뚜, 소리가 울려 퍼지는 핸드폰을 내려놓은 채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지금까지 VVIP와 수십 번의 통화를 하면서 항상 전화를 먼저 끊은 쪽은 델핀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VVIP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
명백히 델핀을 무시한 것이었다.
이윽고, 델핀의 속에서 뜨거운 불이 끓어올랐다.
꼴사납게 VVIP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지다 무시당해서도 아니었고 손에 닿을 듯 가까워졌던 왕좌가 한순간에 멀어져서도 아니었다.
VVIP가 통화 마지막에 언급한 블랙해머 때문이었다.
-정말 후회되네요. 미스 델핀의 성공을 믿고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등진 채 LAMH 패션쇼에 참여한 것이.
델핀의 머릿속에서는 VVIP가 했던 말이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하지만 델핀은 천천히 심호흡하며 타오르는 분노를 간신히 잠재웠다.
그런 뒤 생각했다.
‘그래. 지금은 감정을 앞세울 때가 아니야. 내가 잃은 것은 한 명의 VVIP뿐이니까.’
이 VVIP 한 명의 영향력이 막강하긴 했지만 무소불위의 권력이냐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았다.
다른 VVIP 모두를 설득한다면 상황이 충분히 달라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완전히 머리를 숙이는 거야. 그렇게 다른 VVIP 모두를 설득하는 데 성공하면 떠났던 VVIP의 마음 또한 돌아설 거야.’
그렇게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깨달은 델핀은 재빨리 수첩을 펼쳤다.
그러고는 수첩에 적힌 VVIP들에게 차례대로 전화를 돌렸다.
모든 것이 오해며, 만나서 일을 바로잡고 싶다고 이야기하기 위함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먼저 꺼낸다는 것 자체가 자존심이 크게 상하는 일이었지만 일이 더 커지는 걸 막으려면 다른 방법이 없었다.
-전화를 받지 않아 음성 사서함으로….
그러나 VVIP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그 누구도 델핀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델핀은 수첩에 남은 마지막 VVIP에게 전화를 건 후 그 이유를 깨달았다.
‘이미 다 소문이 났구나…….’
VVIP들의 네트워크는 생각 이상으로 긴밀했다.
그리고 이 네트워크를 통해 VVIP는 델핀과 나눴던 이야기를 전달한 게 분명했다.
델핀은 순간 머리가 아찔해짐을 느꼈다.
문득 바닥을 내려다보니 벼랑 끝이었다는 걸 깨달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제 정말 추락하는 일만이 남은 상황.
델핀은 몸이 쑥 꺼지는 느낌을 받다가 한 가지 생각이 떠올라 메모지 한 장을 뜯고 VVIP가 애타게 기다렸던 가방의 모델 이름을 휘갈겨 썼다.
그런 뒤 소리쳤다.
“거기! 아무도 없어?”
델핀의 호출에 비서가 문을 열고 나타났다.
비서는 델핀과 VVIP 사이의 통화를 엿들은 듯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가방, 두 시간 안에 내 책상 위에 올려놓으세요. 그리고 VVIP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알아내세요.”
델핀이 건넨 메모를 확인한 비서가 조심스레 이야기했다.
“이 모델은 지금 유럽 공방에서 제작 중이라 이쪽으로 넘어오려면 당장 비행기를 띄운다고 해도 한참 걸릴 겁니다. 게다가 우리 측에서 콜라보레이션 물량을 무리하게 선공급 받았잖습니까? 이미 한 차례 먼저 공급을 받았는데 이것을 또 무시하고 또 요청하면 내부적으로 큰 반발이…….”
비서가 이야기를 늘어놓자 결국 델핀의 화가 터지고 말았다.
“그건 모르겠고! 뉴욕 바닥 전체를 뒤져서라도 이 가방을 가져오라고!”
델핀의 고성에 비서는 후다닥 밖으로 뛰어나갔다.
***
그렇게 두 시간 후.
비서가 숨을 헐떡이며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다.
비서의 손에는 잘 포장된 가방 상자가 들려 있었다.
델핀은 그 가방 상자를 휙 낚아챈 뒤 꼼꼼히 살폈다.
다행히 가방은 물론, 상자에조차 흠집 하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의심의 끈을 놓지 않고 질문했다.
“S급 중고나 이미테이션은 아니겠죠?”
“아, 아닙니다! 삭스 백화점을 이 잡듯이 뒤졌습니다. 매니저가 몰래 빼놓은 걸 간신히 찾아내서…….”
델핀은 비서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방이 진품이라는 게 확인됐으니 이제 VVIP에게 달려갈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VVIP의 위치는?”
“63번지…….”
델핀은 비서에게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 없이 곧장 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비서가 미리 일러둔 것인지 기사는 차에 시동을 걸어둔 상태였다.
허겁지겁 델핀을 뒤따라온 비서가 조수석에 올라타 기사에게 목적지를 말했다.
차가 뉴욕 시내를 가로지르는 사이 델핀은 곱게 포장된 가방을 매만지며 생각했다.
‘어떻게든 이 가방을 VVIP에게 선물하고 오해를 풀어야 해. 그러지 않으면 나 또한 동생들처럼 양조장에 처박힐 테니까.’
이제 델핀의 머릿속에는 왕좌에 앉겠다는 욕심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남은 것은 오로지 생존 욕구.
이뿐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혹시 VVIP가 이 가방을 내팽개치고 내 사과를 받아주지 않으면 어쩌지? 정말 이대로 끝인 건가?’
델핀은 살면서 처음으로 간절함이라는 감정을 느끼며 목적지로 향해가는 시간을 견뎌냈다.
그렇게 잠시 후, 델핀이 탄 차가 63번지 5번가에 멈춰 섰다.
바로 파슨스 디자인 스쿨이 있는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