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dwarf in his previous life, but an artistic genius in his current life RAW novel - Chapter 175
173화 자식 이기는 부모 (2)
베르나르의 폭탄 발언에 기자들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그룹이 위기에 처한 상황인 만큼 기자들 모두 베르나르의 입에서 어느 정도 수위 높은 발언이 나올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이렇게 원색적인 비난은 완전히 예상 밖이었다.
베르나르는 당황한 기자들을 보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제 자식들은 모두 패배자입니다. 그리고 주주 여러분에게 막대한 손해를 끼친 가해자입니다.”
베르나르는 이 사실을 못 박은 후 회견문을 읽기 시작했다.
그것은 회견문이 아니라 일종의 판결문이었다.
판결문 속에는 앙투안과 알렉산더, 그리고 델핀이 저지른 실수와 그로 인해 발생한 주주들의 피해가 소상히 적혀 있었다.
베르나르는 마치 감정 없는 판사처럼 자식들의 잘못을 하나하나 끄집어냈다.
그 과정이 어찌나 신랄한지 독한 질문으로 정평이 난 기자들마저 고개를 저을 정도였다.
“…이 문제의 원인은 자명합니다. 브랜드의 가치를 더욱 드높이고 이익을 주주들과 공유해야 할 의무가 있는 제 자식들은 욕심에 눈이 멀었습니다. 그래서 해야 할 일을 등한시했고 결과적으로 지금과 같은 사태가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베르나르가 무테안경을 벗고 손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얼핏 보기엔 마치 눈물을 닦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회견의 속도를 조절한 베르나르가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한 사람의 아버지이자 경영자로서 그래선 안 된다고 충고했습니다만, 그 충고가 귀에 닿지 않은 모양입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제 책임입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베르나르는 기자들에게 꾸벅 고개 숙였다.
이 모습을 본 기자들은 서로 귓속말을 주고받으며 웅성거렸다.
회견이 예상과 완전히 다르게 시작된 탓에 질문 순서가 엉망진창으로 꼬인 것이다.
특히 앙투안과 알렉산더, 델핀의 실책을 아프게 꼬집으려던 기자들은 크게 당황한 눈치였다.
“이거 기사로 그대로 써도 되는 거야? 수위가 너무 높은데?”
“없는 말을 지어내는 것도 아니잖아. 빨리 다음 질문이나 뽑아! 이러다 우리 질문 하나도 못 하고 회견 끝날 때까지 손가락만 빨겠어.”
기자들이 서로 질문을 조율하며 키보드를 두드리는 사이, 베르나르는 회견문이 띄워져 있던 태블릿을 조작해 주식 앱을 띄웠다.
기자 회견이 시작되기 전까지 하한가를 기록하던 LAMH의 주가는 이제 제자리를 답보하고 있었다.
베르나르의 기자 회견에 시장이 반응한 것이다.
베르나르는 본능적으로 이것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시장은 지금 베르나르의 입에서 나올 해결책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해결책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주가의 방향 역시 결정되리라.
그리고 베르나르의 눈에는 주가의 방향이 어디로 튈 것인지 훤히 보였다.
베르나르는 주식 앱을 그대로 띄워 놓은 채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심어 둔 기자에게 보내는 신호였다.
그 신호에 맞춰 어떤 기자가 베르나르에게 질문했다.
“르 몽드지입니다. 미스터 베르나르, 지금 LAMH는 전무후무한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하신 것처럼 주주들의 피해 역시 절대 적지 않고요. 비록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셨다곤 하나 미스터 베르나르 역시 책임이 없다곤 할 수 없죠. 그래서 묻겠습니다. 미스터 베르나르는 주주들을 위해 무엇을 하실 생각입니까?”
숨을 죽인 기자들의 시선이 베르나르의 입으로 향했다.
그리고 베르나르는 그 어느 때보다 침통한 목소리로 질문에 답변했다.
“주주 여러분이 입은 피해를 생각하면 잠을 이룰 수 없습니다. 저 또한 이렇게 마음이 아픈데, 주주 여러분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그리고 그 피해를 만회하기 위해서 제가 못 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사실상의 경영 복귀 선언이었다.
이 선언이 끝나기 무섭게 플래시가 사방에서 터져 나왔고 기자들은 질문을 쏟아냈다.
“경영 복귀를 확정 지으시는 겁니까? 그런 겁니까?”
“미스터 베르나르! 분명히 말씀해 주십시오!”
베르나르는 이 질문에 정확히 답하지 않았다.
때때로 모호한 답변이 명확한 답보다 더욱 강력한 힘을 지닐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베르나르의 입에서 나온 모호한 답변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계속 답보하던 주가가 위로 치솟은 것이다.
회견이 시작되기 전, 예상했던 목표치마저 아득히 상회하는 모습에 베르나르는 속으로 키득키득 웃었다.
이 짧은 회견 하나로 두 가지 목표를 달성했기 때문이다.
베르나르의 첫 번째 목표는 주가 회복의 신호탄을 쏘아 올려 급한 불을 끄는 것이었다.
그리고 베르나르가 주식 시장에 쏘아 올린 경영 복귀라는 신호탄은 그 어떤 것보다 밝고 붉은 상승선을 그리고 있었다.
이 한 방으로 그간 쌓여 왔던 주주들의 불만이 조금은 잠잠해질 게 분명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두 번째 목표.
그것은 바로 대중에게 한 가지 인식을 심어 주는 것이었다.
‘위기에 봉착한 LAMH를 구원할 유일한 사람은 오직 나뿐이라는 인식이지.’
이 인식을 확실히 심어 주기 위해서 베르나르는 세 자식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그래서 기자들 앞에서 피도 눈물도 없이 자식들의 잘못을 끄집어내 신랄하게 비판했고 이 과정을 전 세계에 송출했다.
사실 이것은 베르나르가 자기 얼굴에 먹칠하는 꼴과 다름없었다.
자식들에게 경영권 일부를 물려준 것은 물론, 이 사태를 그저 관망한 것도 베르나르였으니까.
그러나 베르나르는 기꺼이 그 먹칠을 받아들였다.
아니, 오히려 반겼다.
그 먹칠이 진해질수록 세금을 피하려 귀화를 선택했던 과거는 지워지고 기가 막힌 그림이 완성됐기 때문이다.
자식의 허물을 덮어 주긴커녕, 오히려 낱낱이 드러내고 이것을 반드시 고치겠다고 선언하는 경영자.
그래서 주주들이 더욱 신뢰할 수밖에 없는 경영자.
이것이 베르나르가 회견을 준비하며 그린 초상화였고 동시에 주주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였다.
그리고 이 메시지의 수신자는 LAMH의 주주만이 아니었다.
수신자 목록에는 프랑스 당국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현재 프랑스 내각은 지속된 경기 침체로 지지율이 바닥을 기고 있지. 그런 상황에서 나로 인해 주가가 회복될 기미를 보인다면?’
프랑스 총리는 연금 개혁법 등을 밀어붙이면서 지지율이 꽤 위험한 수준까지 떨어진 상태였다.
경영인의 성적표가 주가라면, 정치인의 성적표는 지지율이다.
빵점이나 마찬가지인 총리의 성적표에 베르나르가 국내 투자 및 고용 확대, 그리고 이름뿐인 복지 재단을 몇 개 설립해서 사회에 이바지하겠다고 적어 준다면 그 성적표는 적어도 빵점은 모면할 수 있게 되었다.
베르나르가 이렇게 숨통을 틔워 준다면 내각은 쌍수 들고 베르나르의 복귀를 환영할 게 분명했다.
그리고 내각이 굳건한 지지를 받게 된 이상 자신에게 엄청난 세금을 부과하려 눈을 부릅뜬 국세청 역시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운이 좋다면 징벌적으로 부과된 세금 역시 은밀히 조율할 수 있겠지.
어쩌면 세금 축소가 아니라 감면 혜택을 받을 수도 있을 거란 생각에 베르나르의 입에서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억지로 그 웃음을 참은 베르나르가 짐짓,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적을 충분히 달성했으니 이 광대 짓을 마무리 지을 시간이었다.
근처에 있던 LAMH 홍보실 직원이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오늘 회견은 여기서 마무리 짓도록 하겠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홍보실과…….”
직원이 말을 마무리 짓기도 전에 기자들이 벌떡 일어났다.
“미스터 베르나르! 마지막으로 다음 행보에 대해 한마디만 부탁드립니다!”
회견장을 빠져나가려던 베르나르가 발을 멈췄다.
안달 난 기자들에게 기삿거리를 하나 더 던져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시장 점검이라 생각합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LAMH는 전과 달라질 겁니다. 현장을 보지 않고 이래라저래라 지시하는 일은 이제 없습니다. 제가 직접 발로 뛰고 눈으로 보면서 시장 상황을 점검할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첫 번째로 향할 곳은…….”
베르나르는 일부러 말끝을 흐렸다.
그러고는 한마디를 남긴 채 회견장을 떠났다.
“아마도 아시아가 되겠군요.”
베르나르가 목적지를 밝힌 순간, 기자들의 눈이 희번들해졌다.
베르나르의 아시아행이 무엇이 의미하는지를 깨달은 것이다.
“서울입니까? 도쿄입니까? 아니면 홍콩?”
구체적인 목적지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그러나 베르나르는 끝내 목적지를 밝히지 않고 회견장을 떠났다.
그러나 기자들은 베르나르가 어디로 갈 것인지 알 것 같았다.
그곳은 서울.
바로 블랙해머의 본진이 있는 곳이었다.
***
같은 시각.
JFK 공항 퍼스트 클래스 라운지.
정성일은 베르나르의 기자 회견이 재방송되는 TV를 끄며 혀를 내둘렀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더니… 옛말이 모두 맞는 건 아닌 모양입니다. 이 부모는 자식을 이기다 못해 아주 잡아먹어 버리네요.”
정성일은 이 속담이 이런 상황에 쓰이는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베르나르의 회견을 보고 떠오르는 말이 달리 이것밖에 없었고 정환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쥐가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무는 것과 마찬가지죠. 사람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진 않습니다. 오히려 동물보다 더욱 잔인한 게 사람이에요.”
정환은 손에 쥐고 있던 잡지를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다행이라뇨?”
“베르나르가 다음 목적지로 아시아를 지목했잖습니까? 도쿄나 홍콩일 리는 없고 당연히 제가 있는 서울로 올 겁니다. 그곳에서 뭔가 보여 줘야 체면을 세울 수 있을 테니까요.”
정환의 말에 정성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TV로 본 베르나르는 한 마리 짐승과 같았다.
자식을 잡아먹고 그 피를 입가에 잔뜩 묻힌 짐승.
그리고 그 짐승은 지금 정환을 향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렇기에 어째서 정환이 다행이라 말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게 어째서 다행입니까?”
정환은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대답했다.
“다행이죠. 동굴 안에 숨은 사냥감을 잡는 건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니까요.”
“아.”
정성일이 감탄하자 정환은 마치 횃불과 칼 한 자루를 들고 동굴에 들어간 사냥꾼처럼 말을 이었다.
“어두컴컴한 동굴 속은 녀석의 집. 언제 녀석이 제 목을 노릴지 모릅니다. 그래서 사냥의 위험성이 배로 증가하죠. 하지만 동굴 밖으로 나온 사냥감은 다릅니다. 보다 손쉽게 사냥하는 게 가능하죠. 녀석의 행동이 전부 보이니까요. 저는 그저 거기에 맞춰 움직이기만 하면 됩니다.”
“…….”
설명을 마친 정환이 몸을 일으켰다.
정환은 그렇게 게이트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다가 멈춰 서더니 여전히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정성일을 향해 한마디 말을 덧붙였다.
“아. 생각해 보니… ‘다행’이 아니라 ‘행운’이라 표현하는 게 더 좋겠네요. 그 사냥감이 제 안마당에 제 발로 들어온 셈이니까요.”
정환이 환하게 미소를 지었고 자못 경쾌하게 다시 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는 서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