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dwarf in his previous life, but an artistic genius in his current life RAW novel - Chapter 178
176화 빌딩 숲의 하이에나 (3)
돌담길을 뛰어오던 남자는 정환을 흘끗 쳐다보곤 다시 속도를 높여 무심하게 곁을 스쳐 갔다.
정환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손을 꼭 잡은 채 어머니에게 물었다.
“집에 갈까요?”
정환이 주차된 차를 가지러 어머니와 함께 광화문 앞을 지나갈 무렵이었다.
한 무리의 관광객들이 광화문을 배경 삼아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런데 관광객들 가운데 한 남자가 정환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다른 이들보다 큰 키, 어깨에 닿을락 말락 한 머리카락, 투명한 무테안경 뒤에 가려진 형형한 눈빛.
LAMH 그룹의 회장, 베르나르 조르노였다.
꽤 멀리 떨어진 거리였지만 정환은 한눈에 베르나르를 알아볼 수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LAMH 패밀리와 한 번씩 대면한 적 있었기 때문이다.
피가 진하다는 것을 증명하듯 베르나르의 얼굴에는 앙투안, 알렉산더, 그리고 델핀의 얼굴이 조금씩 담겨 있었다.
그래서일까.
정환은 베르나르가 그리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정환의 시선을 느낀 것은 베르나르 또한 마찬가지였다.
베르나르는 역시 정환을 정확히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본능에 이끌린 것처럼 두 사람은 서로를 느끼고 알아보고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부딪혔고 동시에 주변의 소음이 멎었다.
마치 이 공간에 단둘만 있는 것처럼 정환과 베르나르는 서로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러다 베르나르가 먼저 미소를 지었다.
반면 정환의 표정은 처음과 마찬가지로 큰 변화가 없었다.
그때, 어머니가 정환의 팔을 톡 건드리며 물었다.
“아는 사람이라도 있어?”
“…….”
잠시 어머니 쪽을 바라봤던 정환은 다시 고개를 돌려 광화문 앞을 바라봤다.
관광객들은 이미 저마다 뿔뿔이 흩어지고 있었고 베르나르 역시 그 인파 속에 묻혀 어디론가 사라진 듯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정환은 이곳 어딘가에 있을 베르나르를 뒤로한 채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꽤 멀었다.
생각보다 길어진 드라이브와 산책 때문에 어머니는 피곤한 듯 두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나 핸들을 잡은 정환은 두 눈을 평소보다 크게 뜨고 있었다.
조금 전, 베르나르가 보여줬던 그 미소 때문이었다.
대화 한 번 나누지 않았지만 정환은 생생히 느꼈다.
베르나르가 부드럽게 미소 뒤에 숨긴 날카로운 이빨로 수많은 사냥감을 물어뜯어 왔음을.
그리고 지금은 자기 목덜미를 물어뜯으려 하고 있음을.
그러나 정환의 입가에도 작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잠든 어머니가 미처 보지 못한 미소.
그것은 사냥꾼의 미소였다.
***
-브랜드 크리스챤 비오르, 3년간 문화재청 경복궁 복원사업 후원 추진…. 모 여대와 협업한 패션쇼 화제.
-LVMH 대표 베르나르 조르노는 “아름다운 한국의 문화유산을 지키기 위한 약속에 우리 크리스챤 비오르가 함께 할 수 있어 기쁘게 생각한다.”라며…….
-경복궁 근정전에서 크리스챤 비오르의 역대 최대 규모 패션쇼 열려…….
-문화재청은 근정전에서 열릴 패션쇼가 한국의 미를 세계 알리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며…….
보름 후, 베르나르의 패션쇼 소식은 국내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경영 일선에 복귀한 베르나르의 첫 행보가 한국의 경복궁이 된 것에 모두가 놀란 것.
2009년 프라다가 경희궁에서 트랜스포머 전시를 연 적이 있긴 했지만 경복궁 근정전에서 패션쇼가 열렸던 적은 없었기에 반응은 더욱 뜨거웠다.
베르나르는 뉴스를 닫고 경복궁과 근정전 사진을 띄웠다.
보면 볼수록 감탄이 나왔다.
왕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한 기하학적 공간 분할, 자로 잰 것처럼 반듯한 건물 배치, 그리고 숨이 막힐 정도의 대칭 구도까지.
새삼 자신이 왜 경복궁 근정전에 관심을 뒀는지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근정전은 조선 시대에 중요한 행사를 치르고 외국 사신을 맞이하던 장소이자 왕의 위엄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곳이었다.
그런 까닭에 베르나르는 근정전을 처음 봤을 때 직감적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왕좌의 주인을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무대가 바로 여기다.’
그래서 베르나르는 근정전의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비서에게 패션쇼 허가를 받아내라 지시했다.
그러나 허가 과정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허가권을 쥔 문화재청 측에서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난색을 보였던 것.
그중 문화재청이 난색을 보인 가장 큰 이유는 외국 기업이 타국의 법궁에서 패션쇼를 연다는 것에 대한 국민적 거부감이었다.
확실히 이것은 2009년, 경희궁에서 열린 프라다의 패션쇼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경희궁은 아무래도 조선 4대 궁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프라다의 패션쇼는 규모가 그리 큰 편이 아니었다.
그런 까닭에 조선 왕조 제일의 법궁에서 외국계 기업이 최대 규모의 패션쇼를 연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베르나르는 반드시 경복궁이 필요하다 여겼고 패션쇼 규모 역시 축소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베르나르는 문화재청 청장과 직접 만나 담판을 지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경복궁 복원사업 후원이라는 선물을 쾌척했다.
이 선물의 의미는 명확했다.
비록 자신이 외국인일지라도 한국의 문화를 누구보다 깊이 존중한다는 의사를 보인 것이었다.
그리고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문화재청 또한 국민적 거부감이라는 부담감에서 일정 부분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베르나르가 LAMH의 수많은 브랜드 중 크리스챤 비오르를 선택한 이유 또한 바로 여기에 있었다.
크리스챤 비오르는 몇 년 전부터 한국의 모 여대와 협업해 패션쇼를 개최하는 등 한국에 무척 친화적인 행보를 보였기 때문이다.
베르나르는 이 두 가지 사실을 잘 버무려 언론에 우호적으로 보도한다면 문화재청 역시 허가를 내줄 것으로 예상했다.
그리고 그 예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바로 오늘 문화재청으로부터 경복궁 패션쇼 허가가 나온 것이었다.
경복궁과 근정전 사진을 한 장씩 뒤로 넘기던 베르나르는 문득 광화문 앞에서 마주쳤던 정환의 모습을 떠올랐다.
‘하필 거기서 만날 줄이야.’
정환과 눈이 마주쳤을 때 베르나르는 내심 당황했다.
예상치 못한 만남이어서?
그게 아니었다.
마주친 장소가 광화문이라는 게 문제였다.
경복궁의 남문이자 정문인 광화문.
그러니 베르나르가 이곳을 패션쇼 개최 장소로 낙점했다는 것 정도는 정환 역시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전략이 반쯤 노출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
그러나 베르나르는 당황한 티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된 것 정환을 과감히 떠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정환에게 여유로운 미소를 보냈다.
날카롭게 벼린 이빨을 감춘 미소였다.
베르나르가 이런 미소를 보였을 때 상대방은 대개 두 가지 반응을 보였다.
꼬리를 말고 시선을 피하거나, 어떻게든 눈을 부릅뜨고 맞서거나.
이 반응을 통해 베르나르는 상대방의 성향과 약점을 파악하고 어디를 어떻게 물어뜯을지 즐겁게 고민하곤 했다.
‘그런데…….’
베르나르는 정환의 표정에서 그 무엇도 읽지 못했다.
정환은 베르나르의 시선을 피하지도, 맞서지도 않고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베르나르는 그 시선에 담긴 의미를 파악하려 애썼지만 결국 헛수고였다.
그리고 이런 사람이 처음이었기에 베르나르는 더욱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정환에 대해서 생각하던 베르나르가 상념을 지우기 위해 고개를 저었다.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 그냥 너무 놀라 얼어붙은 것뿐일 테니까.’
어찌 보면 자기 안방에 한 마리 맹수가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꼴과 같았다.
그러니 정환은 자신보다 더욱 당황해 아무 표정도 짓지 못한 게 분명했다.
베르나르가 이런 식으로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을 때였다.
때마침 비서가 문을 두드렸다.
“회장님, 준비됐습니다.”
“들여보내.”
비서가 문을 열자 유럽과 한국에서 가장 핫한 모델들이 줄지어 들어왔다.
그 모델들은 파리의 크리스챤 비오르 디자이너들이 베르나르의 주문대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다.
베르나르는 눈을 가늘게 뜨고 옷을 차례대로 훑었다.
“흐음….”
베르나르는 웬만한 프로 디자이너보다 패션에 대해서 잘 안다고 자부했다.
자신의 안목은 한나 윈투어에 비견될 정도니까.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안목에 불과할 뿐, 실제로 베르나르의 옷을 제작하는 실력은 디자이너는커녕 학생 수준에도 미치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베르나르의 임무는 전선에 뛰어드는 게 아니라, 한 발짝 물러서서 전황을 파악하고 적절한 지시를 내리는 것이니까.
그러나 이번 경복궁 패션쇼에서 베르나르는 처음으로 두 팔 걷어붙이고 직접 전선에 뛰어들었다.
자신의 제작 실력이 프로 디자이너 수준에 미치지 못함을 알면서도 나선 이유.
그것은 베르나르에게 일종의 성공 공식이 있기 때문이다.
대중성 60, 신선함 20, 아방가르드 20.
이것은 베르나르가 수십 년간의 경험을 통해 쌓은 패션쇼의 성공 공식이자 일종의 황금 비율이었다.
사실 LAMH 디자이너들도 이 공식을 패션쇼에 적용했지만 베르나르의 것처럼 완벽하지 않았다.
그리고 베르나르는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제아무리 프로 디자이너라고 해도 이 비율을 완벽히 맞추는 건 절대 쉽지 않지. 디자이너에게 자기가 직접 만든 옷이란 자식과 같으니까.’
디자이너는 옷을 만들 때 자기 자식을 키울 때보다 더욱 큰 애정을 쏟아붓는 법이었다.
그래서 이 비율에 맞춰 냉정하게 더하고 덜어내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베르나르는 이러한 디자이너의 감정 이입에 크게 공감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것을 프로답지 못하다며 한심스럽게 여겼다.
피를 물려받은 자식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앞길에 방해가 된다면 과감히 쳐내야 한다는 게 베르나르의 지론이었으니까.
그래서 베르나르는 이번 경복궁 패션쇼에 자신이 있었다.
다들 알면서도 못 지키는 성공 공식을 베르나르는 칼같이 지킬 자신이 있었으니까.
그러나 이 공식을 완성하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베르나르는 보름 내내 직접 초크와 가위를 들고 그 비율에 맞춰 디자이너들이 보낸 시안을 끊임없이 수정했다.
그리고 파리의 디자이너들은 작업실에서 24시간 대기하며 수정안에 맞춰 옷을 바로바로 제작하고 베르나르에게 보냈다.
지금 모델들이 입고 있는 옷이 바로 그 강행군의 결과물이었다.
“이대로 픽스하시겠습니까?”
비서가 조심스레 질문했다.
그러나 베르나르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수십 번이나 수정했지만 여전히 만족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정환의 두꺼운 목덜미를 확실히 물어뜯으려면 이빨이 더욱 날카로워야 했다.
“조금만 더 고치지. 여기 이 부분…….”
베르나르가 수정 사항을 말하자 비서는 펜을 들고 그것을 메모했다.
옷을 위아래로 살피던 베르나르와 눈을 마주친 모델들이 시선을 피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들 앞에는 한 마리 하이에나가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