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dwarf in his previous life, but an artistic genius in his current life RAW novel - Chapter 186
184화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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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열한 시쯤 받은 이 문자 메시지 한 통에 박소희는 종일 업무에 집중하지 못했다.
택배 알림에 가슴에 설레는 건 모두가 같았지만 오늘 박소희가 받은 택배의 존재는 평소보다 더욱 특별했기 때문이다.
유독 느리게 가던 시곗바늘이 마침내 퇴근 시간을 가리켰고 박소희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들어가 보겠습니다!”
“벌써? 술 한잔하고 가.”
“미안. 나 급한 일이 있어서. 다음에 먹자.”
박소희는 한잔하자는 직장 동료의 제안도 거절하고 집으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익숙하게 지옥철을 견디고 도착한 문 앞에는 박소희가 애타게 기다렸던 택배 상자가 놓여 있었다.
택배 상자를 조심스레 열자 그 안에는 여러 겹의 포장지에 곱게 싸여 있는 옷 한 벌이 보였다.
박소희는 행여나 다칠세라 조심스럽게 옷을 꺼내 옷걸이에 걸었다.
‘드디어 도착했구나……!’
군데군데 찢어진 데님 재킷을 바라보며 박소희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렇게 갖고 싶어 했던 청의정 컬렉션 재킷이 드디어 손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박소희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블랙해머 브랜드 옷으로 가득 찬 옷장으로 향했고 그와 동시에 오래된 자신의 역사가 떠올랐다.
***
박소희가 이정환이라는 패션 디자이너를 알게 된 것은 고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이었다.
당시 정환은 LE의 콘템포러리 브랜드 지오미아의 수석 디자이너로 한창 두각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남들과 다른 패션을 원하던 사춘기 소녀 소희는 지오미아의 패션쇼를 보고 한눈에 반해 버렸다.
런웨이에서 모델들이 착장한 옷을 너무 갖고 싶었지만 고등학생이었던 박소희에게 콘템포러리 브랜드 제품은 너무 비쌌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비슷한 스타일의 카피 제품을 사거나 용돈을 모아 중고를 구했고 그렇게 소희의 옷장은 정환이 만든 옷으로 차곡차곡 채워졌다.
가끔은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쇼핑을 갈 때도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박소희는 빈손으로 돌아왔다.
다른 브랜드의 옷들로는 이미 정환에게 푹 빠져버린 박소희의 마음을 돌리기에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너무 심하지 않냐?’
친구들은 항상 정환이 만든 옷만 고집스레 입는 박소희를 짓궂게 놀렸다.
그런데도 박소희는 꿋꿋이 같은 옷만 입었다.
단순히 옷이 예뻐서?
아니었다.
정환이 만든 옷에는 다른 브랜드에서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함이 담겨 있었다.
입으면 입을수록 몸과 마음이 편안해지는 옷.
그래서 계속 입고 싶은 옷.
박소희는 이런 특별함을 친구들에게 입 아프게 설명하지 않았다.
입어 보기 전까지는 모르는 것이니까.
박소희의 팬심은 정환이 블랙해머를 설립하고 여러 브랜드를 런칭하면서 더욱 진해졌다.
용돈이 부족한 대학생 시절에는 오리진 제품을 입었고 취업 준비를 할 때는 부모님이 사주신 코르누의 구두를 신었다.
이렇게 박소희가 학생 티를 벗고 사회에 발을 들일 무렵에는 블랙해머 역시 세계적인 기업이 되어 있었다.
어엿한 직장인이 되었지만 박소희는 여전히 블랙해머의 지독한 팬이었다.
월급날이면 그린 미스틱과 블랙해머 공식 홈페이지를 뒤적이며 뭘 살까 고민하는 게 박소희의 큰 즐거움이었다.
이런 식으로 일상이 흘러가는 와중 박소희는 뜻밖의 선물을 받았다.
블랙해머 측에서 공식적으로 박소희에게 청의정 패션쇼의 초대장을 보낸 것이었다.
‘이거 잘못 보낸 거 아냐?’
박소희는 당연히 초대장이 오발송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패션쇼 초대장은 비싼 제품을 턱턱 사는 VVIP들이나 받는 것이었으니까.
물론 박소희가 블랙해머 제품을 꾸준히 사 온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얄팍한 지갑 사정 때문에 값나가는 것은 거의 살 수 없었다.
큰맘 먹고 그린 미스틱의 레드 라벨 제품을 두어 번 산 게 전부였다.
결국 박소희는 고심 끝에 고객 센터에 패션쇼 초대장에 관해 문의했고 놀라운 답변을 받았다.
‘오발송이 아닙니다. 박소희 고객님은 블랙해머의 VVIP가 맞습니다.’
‘제, 제가요? 전 그렇게 비싼 제품을 사지도 않았는데요?’
‘그것과 관계없이 블랙해머의 제품을 꾸준히 구매하고 응원해 주신 고객님께 드리는 작은 선물입니다. 부디 받아주세요.’
상담원의 따스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박소희는 눈물이 핑 도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그동안의 팬심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받는 기분이 들었던 까닭이었다.
그렇게 박소희는 부푼 마음을 안고 청의정 패션쇼에 참석했다.
그동안 정환이 국내에서 연출한 패션쇼는 하나도 놓치지 않고 꾸준히 봐왔지만 이렇게 좋은 자리에서 감상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리고 청의정 패션쇼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박소희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이 컬렉션….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사야 해!’
청의정 컬렉션.
그것은 지금까지 정환이 선보였던 것과 차원이 다른 컬렉션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것이 시작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박소희는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간신히 예약 구매에 성공했고 그게 방금 전의 일이었다.
그렇게 잠시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혀 있던 박소희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박스를 정리할 때였다.
핸드폰이 윙 소리를 내며 진동했다.
친구가 보낸 문자 메시지였다.
-강남역 1번 출구. 늦지 마.
“아. 깜빡할 뻔했네.”
택배에 정신이 팔려 친구와의 약속을 까맣게 잊고 있던 박소희가 옷장 앞에 다시 섰다.
그리고 고민했다.
블랙해머 브랜드 옷을 입고 나갔다가 또 한 번 친구들의 놀림을 받을 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고민하던 박소희는 옷걸이에 걸려 있던 청의정 컬렉션 재킷의 비닐 커버를 과감히 뜯었다.
‘몰라. 비웃을 테면 비웃으라지.’
하지만 막상 약속 장소에서 웃음을 지어 보인 것은 친구들이 아닌 박소희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 자리에 모인 친구들 모두 청의정 컬렉션을 카피한 브랜드의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거 정말 청의정 컬렉션이야?”
“대박! 대체 어떻게 샀어?”
친구들이 박소희를 향해 부러운 눈빛을 보내며 질문했고 박소희는 그 모습을 보며 깨달았다.
자신의 팬심을 인정하는 것이 블랙해머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 정답은 블랙해머였다.
***
며칠 후.
정환의 작업실로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중국 및 동남아 사업을 완전히 궤도에 올려놓고 귀국한 이동기였다.
이동기는 쉴 틈 없이 정환을 만나자마자 곧장 청의정 패션쇼의 이야기를 꺼냈다.
“청의정 패션쇼의 임팩트가 꽤 컸던 모양입니다. 인천 공항에서부터 여기 서울까지, 모두 청의정 컬렉션과 비슷한 스타일의 옷을 입고 있더군요.”
이동기는 정환과 함께 블랙해머를 설립한 시점부터 사람들의 옷차림에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옷을 보면 유행을 보이고 그 유행을 읽으면 다음에 어떤 옷을 선보여야 할지 자연스레 알게 됐기 때문이다.
이동기는 중국을 비롯한 해외를 바쁘게 오가면서 사람들의 패션을 꾸준히 관찰하고 공부했다.
덕분에 패션 유행을 읽고 예측하는 일종의 심미안을 얻을 수 있었다.
비록 정환의 수준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이동기는 자신의 눈이 꽤 정확한 편이라 믿고 있었다.
“물론 모두가 블랙해머 브랜드 제품을 입는 것은 아닙니다. 청의정 컬렉션이 발표되자마자 국내외 패션 브랜드에서 발 빠르게 흉내 낸 카피 제품을 입은 사람들도 많더군요. 그래도 국내는 양심이 있는 편입니다. 중국 소식을 들어보니 그곳에선 이미 99% 유사한 짝퉁까지 나온 모양입니다. 물론 품질은 수준 이하일 테지만요.”
이동기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정환이 가만히 물었다.
“크리스챤 비오르는 어떻습니까?”
“아, 크리스챤 비오르 컬렉션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도 꽤 있더군요. 비행기에서도 몇 사람 봤습니다. 그 컬렉션이 너무 화려하고 불편해서 선호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지만 오히려 그것이 특별하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입니다. 뭐랄까, 일종의 마니아 문화라고 할까요? 정확히 집계하긴 어렵겠지만 체감하기에 대략 7 대 3 정도의 비율입니다. 당연히 블랙해머가 7이고요.”
“그렇군요.”
정환은 가만히 앉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렸다는 말처럼 패션에 옳고 그름은 없었다.
유행이 지나 옷장 깊숙이 넣어뒀던 옷이 복고나 레트로라는 이름으로 다시 유행하니까.
지금은 크게 유행하지 않더라도 언젠가 크리스챤 비오르가 선보인 컬렉션이 모두의 옷장을 뒤덮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럴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는 점에서 크리스챤 비오르는 꽤 까다로운 적이라 할 수 있었다.
타국에서 성공적인 패션쇼를 열었고 그 한 번의 패션쇼로 나름의 마니아층까지 형성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정환은 우연히 마주쳤던 베르나르의 얼굴을 떠올렸다.
과연 베르나르가 자식들처럼 자만하는 모습을 보일까?
정환은 그럴 리 없다고 확신했다.
베르나르가 LAMH라는 제국을 세우고 그 정점에 설 수 있었던 이유는 최고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자만하지 않았기 때문이니까.
그리고 그것이 베르나르와 세 자식 간의 차이였다.
오히려 베르나르라면 두 팔을 걷어붙이고 구슬땀을 흘리며 다음 패션쇼를 준비하고 있으리라.
‘베르나르는 이번 대결에서 완전히 패배했다고 생각하지 않을 거야. 그저 불의의 일격을 당했다고 생각하고 다음 판을 준비하겠지.’
정환이 생각할 때였다.
정환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동기가 질문했다.
“확실히 그쪽이 좀 신경 쓰이시죠?”
확신이 담겨 있는 질문.
이동기가 이러한 확신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정환보다 오래 해외에 체류하면서 LAMH의 영향력이 얼마나 막강한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최근 블랙해머가 LAMH의 축을 뒤흔들어 놓은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완전히 승기를 잡았다고는 볼 수 없었다.
게다가 최근 들려온 소식에 의하면 LAMH의 핵심 디자이너들도 속속 한국에 입국한 모양이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
그것은 지금도 베르나르가 정환을 사냥할 이빨을 날카롭게 다듬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정환으로선 청의정 패션쇼를 성공시켰다 하더라도 지금 같은 상황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정환이 자신의 말에 대답하기 위해 말끝을 살짝 흐렸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그와 동시에 이동기가 표정을 굳혔다.
조금은 심각한 이야기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무척이나 의외였다.
“전혀 신경 쓰이지 않습니다.”
“네? LAMH이 턱밑까지 따라왔는데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다고요?”
이동기가 놀라며 묻는 말에 정환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확실히 베르나르는 까다로운 상대입니다. 패션 센스도 탁월하고 더욱이 그 센스를 발휘할 재력과 인력까지 어마어마하게 갖추고 있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가 상대에게 위축되거나 상대의 움직임에 하나하나 반응할 필요는 없습니다.”
정환의 대답에 이동기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베르나르를 아예 신경 쓰지 않는다는 말이 이해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말씀하신 것처럼 상대가 상대잖습니까? 위축되진 않더라도 베르나르가 뭘 할 것인지 예상하고…….”
“지금 꽤 피곤하시죠?”
뜬금없는 질문에 이동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차 때문에 피곤하긴 합니다만…….”
정환이 손을 휘휘 저었다.
“아뇨. 그런 거 말고요. 눈이 피곤하지 않으십니까? 비행기에서도, 공항에서도 계속 사람들의 옷을 관찰하셨잖아요. 누가 크리스챤 비오르 옷을 입었고 누가 블랙해머 옷을 입었을까 하나하나 보면서.”
이동기가 그런 같다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정환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작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겁니다. 그게 베르나르가 우리에게 바라는 거예요. 상대방이 자신의 움직임을 분석하고 예측하다 지쳐 힘이 빠지길 기다리는 것.”
“아.”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어깨에 힘을 빼야 합니다. 평소 그랬던 것처럼 우리가 해야 할 일만 성실히 하면 되는 거예요.”
이동기는 그제야 자신이 무엇을 놓쳤는지 깨달았다.
확실히 정환이 말한 것처럼 사람들의 패션에 계속 집중하다 보니 눈이 피곤했다.
특히 경복궁 패션쇼 후, 사람들이 크리스챤 비오르 컬렉션을 얼마나 어떻게 입었는지 관찰하면서 그 피로감은 더욱 심해졌다.
이쪽 업계에 있는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는데 베르나르가 이것을 의도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동기는 베르나르의 노림수에 놀랐고 정환이 이것을 읽었음에 다시 한번 놀랐다.
‘과연…….’
이동기는 가슴속에 품었던 약간의 불안감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작게 남아있던 빈틈마저 정환의 존재로 완벽히 메꿔졌으니 베르나르가 파고들 틈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때, 정성일이 문을 똑똑 두드렸다.
“대표님. 이동하셔야 할 시간입니다.”
“아, 벌써 그렇게 됐습니까?”
정성일의 이야기를 들은 정환이 가볍게 몸을 일으켰다.
그런 뒤 이동기에게 물었다.
“그럼 다음 패션쇼를 준비해 보러 가실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