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dwarf in his previous life, but an artistic genius in his current life RAW novel - Chapter 187
185화 마스터피스
“노, 노. 잇츠 임파서블. 그 시간은 안 된다니까…….”
서울 패션 위크의 준비위원회 소속으로 업무를 처리 중이던 직원은 전화기를 잠시 내려놓고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패션 위크 일정을 두고 유럽 패션 브랜드의 담당자와 지루한 입씨름을 벌인 지 벌써 30분.
영어가 서투른 데다 고집스럽기까지 한 유럽 패션 브랜드 담당자는 패션 위크에서 가장 좋은 시간을 달라며 억지를 부리고 있었다.
이게 유럽인들의 특성인 걸까.
그것이 불가능한 이유를 몇 번이나 설명했지만 도무지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지루한 줄다리기가 길어지자 결국 참다못한 직원이 한마디 했다.
“댓 타임, 온리 블랙해머 타임. 오케이?”
직원의 입에서 블랙해머라는 단어가 나오자 억지를 부리던 해외 담당자는 금세 태도가 바뀌었다.
“아, 블랙해머….”라고 읊조리더니 응대해 줘서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바로 끊은 것이다.
겨우 통화를 마친 직원이 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동료 직원들 대부분이 해외 각지의 패션 브랜드 담당자들과 통화를 나누고 있었다.
우리 말이 아니라 영어로 해외의 담당자들과 패션 위크 일정을 조율하는 것.
이것은 무척 낯선 광경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서울 패션 위크는 해외 브랜드에게 큰 주목을 받던 행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2012년에 시작된 서울 패션 위크는 뉴욕이나 파리 패션 위크에 비해 역사가 무척 짧았고 그런 까닭에 해외 유명 패션 브랜드들은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준비위원회에서 서울 패션 위크에 참여해 달라는 장문의 메일을 보내며 읍소하기도 했지만 전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굳이 시간과 공을 들여가며 영향력 적은 패션 위크에 참석할 이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올해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그렇게 콧대 높던 유명 패션 브랜드들이 이번에는 너 나 할 것 없이 서울 패션 위크에 신청서를 제출하고 좋은 시간을 달라며 매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직원의 시선이 모니터로 향했다.
출근하자마자 수십 번이나 고친 타임 테이블이 띄워져 있었는데 거기에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수정되지 않은 두 브랜드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블랙해머, 크리스챤 비오르…….’
두 브랜드가 나란히 서울 패션 위크에 참가 신청서를 냈던 날.
준비위원회 사무실은 사실 여부를 묻는 기자들의 전화로 온종일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미 블랙해머와 크리스챤 비오르는 청의정 패션쇼, 그리고 경복궁 패션쇼로 한 차례 격돌하며 패션계의 세계적인 관심을 끌어모았으니까.
물론 그 대결의 승자는 판정승을 거둔 블랙해머였으나 승부가 완전히 끝났냐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고 단언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두 브랜드의 다음 대결 무대가 서울 패션 위크로 결정됐으니 전 세계가 관심을 두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성사된 세기의 대결 덕분에 서울 패션 위크의 수준과 규모가 작년에 비해 몇 배나 커져 버렸고 준비위원회 직원들은 이미 행사가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직원이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따르릉, 전화벨 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이 전화를 받으면 또 해외 패션 브랜드 담당자와 지루한 입씨름을 벌여야겠지?’
패션 위크가 열리는 10월까지 이 짓을 반복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직원은 눈앞이 캄캄해졌지만….
‘이게 묘하게 즐겁다니 나도 미친놈이지…….’
직원의 입가에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떠올랐다.
지금껏 큰 주목을 받지 못했던 서울 패션 위크가 이번에 어마어마한 성과를 낼 수 있을 거란 강렬한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사이 따르릉, 하고 벨 소리가 한 번 더 울려 퍼졌고 직원은 힘차게 전화를 받았다.
“헬로, 디스 이즈 서울 패션 위크 …….”
***
똑똑.
노크 소리에 베르나르는 충혈된 눈을 떴다.
비서가 룸서비스를 놓고 간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식사를 한 게 언제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베르나르는 식사 대신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하며 졸음을 쫓았다.
거울을 보니 덥수룩하게 자란 새하얀 수염이 입가를 뒤덮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말끔히 면도를 했겠지만 베르나르는 물기만 대충 닦고 다시 의자에 앉았다.
커다란 책상 위에는 구겨진 종이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후…….’
청의정 패션쇼가 있던 그날 밤.
베르나르는 도통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였다.
눈을 감아도 청의정 패션쇼의 장면들이 계속 떠올랐기 때문이다.
상대방을 의식할 필요 없다고, 무시해야 한다고 수없이 다짐했지만 한 번 떠오른 강렬한 이미지는 도무지 지워지지 않았다.
결국 베르나르는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TV로 청의정 패션쇼의 라이브 영상을 틀었다.
30분 분량의 패션쇼를 몇 번이나 반복해서 보고 나니 시커멓던 창밖은 이미 새벽이 찾아와 파랗게 물들어 있었다.
그렇게 밤이 새도록 청의정 패션쇼를 뚫어지게 본 베르나르는 그제야 자신이 잠자리에 들지 못했던 이유를 깨달았다.
‘내 컬렉션은 완벽하지 않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정환의 청의정 컬렉션은 그야말로 완벽했다.
자그마한 흠결이라도 찾아보겠다며 밤이 새도록 눈에 불을 켜고 봤는데도 청의정 컬렉션에는 어떠한 단점도 없었다.
반면, 경복궁 컬렉션은 그렇지 않았다.
분명히 완벽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보니 크고 작은 단점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 단점들은 청의정 컬렉션과 비교하면서 더욱 선명해졌다.
베르나르가 잠들지 못한 이유 역시 이 단점을 무의식중에 깨달은 탓이었다.
하지만 짜증이 나거나 화가 나진 않았다.
오히려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베르나르는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컬렉션을 냉정히 검토했고 한 가지 결단을 내렸다.
이미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던 컬렉션을 모조리 폐기하기로 한 것이었다.
베르나르의 일방적인 폐기 통보에 함께 컬렉션을 준비한 디자이너들은 무척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베르나르가 폐기 명령을 내린 컬렉션은 당장 오뜨 꾸뛰르에 올려도 손색이 없을 만큼 완성도가 높았기 때문이다.
‘회장님. 외람되지만 이대로 폐기하기엔 너무 아까운 아이템입니다. 차라리 다른 산하의 다른 브랜드에 넘기는 게 어떻겠습니까?’
‘제 생각도 같습니다. 여기에 들어간 비용만 자그마치 몇백만 유로 아닙니까? 이대로 폐기하면 너무 큰 손해입니다.’
몇몇 디자이너들이 조심스레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확실히 일리가 있는 의견이었지만 베르나르는 결정을 번복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완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완벽하지 않은 컬렉션은 LAMH에 둘 필요가 없었다.
설령 그것이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것이라 해도.
베르나르는 그날부터 한 달 가까이 호텔에 칩거하며 작업에 몰두했다.
이 작업은 무척 지리멸렬했다.
끼니도 걸러 가며 완벽함에 집착하는 베르나르의 히스테리에 수발을 들던 비서들은 물론이고, 본사에서 온 디자이너들도 지쳐 버렸다.
그러나 베르나르는 마치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손에서 연필을 놓지 않았다.
경복궁 컬렉션에서 보였던 단점을 깨끗하게 지우고 청의정 컬렉션의 장점을 원래 자기 것이었던 것처럼 흡수했다.
그리고 여기에 자신의 칼 같은 성공 공식을 적용해 컬렉션을 다듬었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백지상태에서 완벽한 컬렉션을 창조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베르나르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약한 마음이 들 때면 정환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를 꽉 깨물고 버텼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 노력과 집착이 크로키북 안에서 열매를 맺었다.
그 열매는 베르나르가 지금까지 봐왔던 그 어떤 것보다 크고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이거다.’
베르나르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 내 크로키북 위에 컬렉션의 제목을 휘갈긴 후 문을 열고 나갔다.
자그마치 한 달 만에 베르나르가 모습을 보이자 소파에 앉아 있던 비서들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회, 회장님!”
베르나르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비서에게 지시했다.
“디자이너들 전부 오라고 해요.”
옆방에서 대기하던 디자이너들이 한달음에 달려왔다.
디자이너들 역시 지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베르나르가 언제 디자인 큐를 줄지 몰라 항상 극도의 긴장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던 까닭이었다.
“나온 겁니까?”
수석 디자이너의 질문에 베르나르는 크로키북을 내미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디자이너들은 한자리에 모여 크로키북을 한 장씩 넘겼다.
그렇게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디자이너들의 표정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이, 이건…….”
비록 선은 형편없이 거칠었고 패션 문법에 맞지 않는 것들이 가득한 크로키였지만 그런 것은 조금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정도로 완벽한 컬렉션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스트리트웨어의 특유의 볼륨감을 강조하여 몸을 편하게 감싸는 오버사이즈 가죽점퍼부터 비오르 로고가 과감히 박힌 울 스웨터와 만다린 칼라가 돋보이는 크롭 재킷까지.
눈앞이 아찔해질 정도로 완벽한 옷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놀라운 점은 따로 있었다.
경복궁 패션쇼에서 베르나르가 보여줬던 칼 같은 성공 공식, 그리고 청의정 패션쇼에서 정환이 보여줬던 참신한 접근 방식.
이 두 가지가 완벽에 가까운 비율로 믹스되어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이뿐만이 아니었다.
여기에는 베르나르가 직접 보고 느낀 모든 패션쇼 경험이 총집합되어 있었다.
이 사실을 누구보다 빨리 읽어낸 수석 디자이너가 베르나르와 눈을 마주쳤다.
‘세상에…….’
한 달 전, 베르나르가 컬렉션을 완전히 폐기하고 컬렉션을 직접 수정하겠다고 밝혔을 때 수석 디자이너는 그리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패션 브랜드 회장이나 대표들이 현장 디자이너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자기 의견을 밀어붙이는 건 꽤 흔한 일이니까.
그래서 다른 디자이너들이 불만을 토로하고 지독하게 시달릴 때도 수석 디자이너는 말을 아꼈다.
어차피 베르나르의 시도는 실패할 것이며 결국 폐기한 컬렉션을 다시 들고 올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베르나르는 더 이상 자신이 알던 사람이 아니었다.
거만하게 자리에 앉아 이래라저래라 말도 안 되는 지시를 내리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한 사람의 패션 디자이너였다.
수석 디자이너는 조심스레 크로키북을 덮었다.
그 위에는 ‘마스터피스’라는 컬렉션 제목이 적혀 있었다.
수석 디자이너가 크로키북을 다시 베르나르에게 건네며 존경심을 담아 말했다.
“그야말로 마스터피스입니다.”
수석 디자이너를 시작으로 다른 디자이너들도 연신 감탄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베르나르는 이 모습을 보며 내심 정환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서울 패션 위크에서 펼쳐질 두 번째 라운드의 승리자가 이미 눈앞에 또렷이 보였기 때문이다.
링 위에 쓰러져 있을 사람은 정환이었고 그 위에 당당히 서 있을 사람은 바로 자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