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dwarf in his previous life, but an artistic genius in his current life RAW novel - Chapter 188
186화 예상할 수 없는
베르나르가 호텔 방에 박혀 작업에 매달리던 한 달 동안, 정환은 의외의 행보를 이어갔다.
그것은 각기 다른 해외 유명 패션 브랜드 대표들과의 연이은 만남이었다.
일본의 유명 스트릿 패션 브랜드부터 이탈리아의 명품 양복 브랜드까지.
정환은 국적과 장르를 가리지 않고 서울에서 폭넓은 만남을 가졌다.
그리고 정환의 연락을 받은 대표들은 한달음에 서울로 달려왔다.
그도 그럴 것이, 정환의 연락을 받은 해외 패션 브랜드 대표들 모두 한국 시장을 눈여겨보며 진출 여부를 고민하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리저리 재고 있던 상황에서 한국 패션계를 주름잡고 있는 정환의 제안.
대표들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고 정환은 이들과 만나 간단한 티타임을 갖기도 하고 때로는 술을 동반한 저녁 식사도 하며 패션 업계 전반에 관한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 브랜드가 이탈리아반도에 갇혀 낡은 이미지로 굳어지는 것에 대한 고민이 컸는데 이곳 서울에서 답을 찾을 줄 몰랐습니다.”
어느 날 저녁에는 이탈리아 명품 양복 브랜드 대표, 안토니오가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는 커피 잔을 들어 정환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정환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였다.
“별말씀을요. 결국 고민이 해결된 것은 귀사가 백 년 넘게 쌓아온 헤리티지 덕분이죠.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아시아인의 체형에 맞춘 양복을 개발하는 게 쉽지 않겠지만 성공한다면 시장의 규모가 몇 배는 확장될 겁니다.”
이러한 정환의 조언은 다른 날, 영국 아방가르드 패션 브랜드의 대표인 토미와의 점심 식사에서도 이어졌다.
“우리 브랜드 옷이 무척 실험적이라 대중의 진입 장벽이 높은 편이었는데, 패스트패션 브랜드인 오리진과의 콜라보레이션으로 그 허들을 낮출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미처 못 했습니다.”
“오리진 디자이너들도 귀사와의 협업으로 좋은 경험을 하게 될 겁니다. 아방가르드 패션과 패스트패션의 조화는 쉽게 느낄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이렇듯 정환은 자리에 참석한 이들과 패션 업계에 관한 이야기만 나누지 않았다.
고민을 해결해 주고 적극적으로 나서서 콜라보레이션 약속까지 잡았다.
이것은 체면치레로 하는 약속 같은 것이 아니었다.
정환은 자리에 참석한 대표들의 브랜드를 치밀하게 분석하고 블랙해머 산하 브랜드와 어떻게 콜라보레이션했을 때 큰 시너지를 낼 수 있을지에 대한 구체적인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해외 브랜드 대표들은 정환이 먼저 적극적으로 콜라보레이션 제안을 했다는 것에 한 번, 거절할 수 없을 정도의 치밀한 준비를 했다는 것에 또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
그렇게 정환이 바쁘게 다양한 브랜드의 대표를 만나고 다니던 어느 날 저녁의 일이었다.
토미는 정환이 얼마 전 제안했던 콜라보레이션 계획을 검토를 마친 후 호텔 라운지로 향했다.
그곳에는 안토니오를 비롯한 여러 해외 패션 브랜드 대표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누군가는 동종 업계 경쟁자들이 뭐 하러 이렇게 한자리에 모이나 의구심을 갖겠지만 오히려 이런 만남은 자주 있는 편이었다.
한 회사의 대표로서 비슷한 고민을 하고 비슷한 방향성으로 대화할 수 있는 상대를 만난다는 게 쉽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토미 또한 생각을 나누고 정보도 얻을 겸 이런 자리가 생겨날 때마다 되도록 참석하는 편이었다.
살짝 약속 시간에 늦은 토미가 자리에 앉으며 자리에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이번에 진행하게 된 콜라보레이션 제안이 하나 있는데 심도 있게 검토를 하다 보니 조금 늦었네요.”
안토니오가 그런 토미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약속 시간에 여간해서는 늦지 않는 자네가 웬일인가? 꽤 규모 있는 콜라보레이션인가 보지?”
“네. 그런 셈이죠. 블랙해머 쪽의 제안이거든요.”
토미가 블랙해머와 함께 작업을 하게 된 것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하지만 안토니오의 반응이 뜻밖이었다.
“허? 그쪽도?”
그제야 안토니오 또한 콜라보레이션 제안을 받았다는 걸 알게 된 토미가 깜짝 놀랐다.
심지어 안토니오만이 아니었다.
“뭐예요? 나만 콜라보레이션 제안을 받은 게 아니었어?”
“응? 나도 받았는데…. 뭐지? 블랙해머가 그걸 다 소화할 여력이 되나?”
“하하. 괜히 블랙해머 콜라보레이션 제안을 받고 기뻐했군. 나만 받은 것도 아닌데.”
그렇게 자리가 한바탕 블랙해머와의 콜라보레이션 소식으로 가득해졌다.
그리고 이야기 주제는 자연스럽게 블랙해머가 과연 이 콜라보레이션을 모두 소화할 수 있는가 하는 것으로 연결됐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미스터 리에게는 그만한 여유가 없을 테니까…….’
베르나르가 이번 서울 패션 위크에 사활을 걸었다는 것은 패션 브랜드 대표들이라면 모두 아는 이야기였다.
게다가 풍문으로는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던 컬렉션을 다시 뒤집어엎고 한 달 가까이 호텔에 칩거하고 있다는 말까지 돌고 있었다.
패션 위크를 고작 한 달 앞두고 컬렉션을 완전히 새롭게 만든다는 것.
그것은 콧대 높은 베르나르가 말 그대로 배수진을 치고 이번 서울 패션 위크에 모든 것을 걸었다는 뜻과 같았다.
그러니 정환 역시 지지 않으려면 마찬가지로 뼈를 깎는 노력을 하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
정환은 그런 노력을 기울이긴커녕, 오히려 사람들을 만나며 술잔만 기울였다.
거기에 콜라보레이션 제안을 남발하는 등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도저히 어려운 대결을 앞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경복궁과 청의정에서 펼쳐졌던 1라운드 대결에서 승리해서 그런 걸까요?”
대표 중 누군가가 이야기를 꺼냈다.
만약 그런 것이라면 정환은 너무 이른 축배를 든 것이었다.
1라운드 대결이 정환의 승리로 끝나긴 했지만 그것은 판정승에 가까웠으니까.
서울 패션 위크에서 승기를 완전히 굳히려면 정환은 술자리에서 사업 이야기를 할 게 아니라 컬렉션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어야 했다.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안토니오가 뭔가 떠오르는 게 있는 듯 아, 하고 감탄사를 내뱉더니 중얼거렸다.
“파리의 하이에나 다음은 서울의 호랑이인 건가…….”
안토니오의 혼잣말에 다른 패션 브랜드 대표들 또한 정환의 생각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미스터 리가 베르나르와는 다른 사람일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군요.”
하지만 토미는 아직 감이 잡히지 않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미스터 리가 베르나르와 다르지 않다니…. 그게 무슨 말이죠?”
안토니오가 토미의 순진한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자네는 미스터 리가 왜 즐기지도 않는 술자리에 참석하고 콜라보레이션 제안을 꺼낸 것 같나?”
“그야…. 당연히 사업 확장 때문이죠. 생각해 보면 서로 좋은 일 아닙니까? 제 브랜드를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저는 폭넓은 고객층을 확보할 수 있어서 좋고 오리진은 패스트패션의 한계를 벗어날 수 좋으니까요.”
안토니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
“그렇게만 단순히 바라볼 문제가 아니네. 이건 내 생각이지만 아마 미스터 리는 청의정 패션쇼 다음으로 서울 패션 위크에 선보일 아이템이 마땅하지 않을 거야.”
“…그걸 그렇게 확신할 수 있나요?”
“그게 아니라면 미스터 리가 이렇게 필사적으로 업계 사람들을 만나며 아군을 만들 필요가 없을 테니까.”
“아군…….”
생각지도 못한 단어의 등장에 토미가 입을 떡 벌렸다.
중요한 대결을 앞두고 왜 정환이 바쁘게 밖을 나돌아 다녔는지 설명이 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확실히 청의정 패션쇼는 1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걸작이었다.
그리고 제아무리 정환이라 할지라도 그런 걸작을 몇 개월 단위로 뽑아내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토미의 생각이 점점 안토니오 쪽으로 기울었고 안토니오는 여기에 쐐기를 박았다.
“아이템도 마땅히 없는 상황에서 베르나르가 이를 갈고 있으니 홀로 싸우기 어렵다고 판단한 걸 거야. 그래서 최대한 많은 브랜드와 접촉하고 좋은 이야기를 꺼내서 같은 편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지.”
“아…….”
“그러니 콜라보레이션 제안을 받은 것도 잘 생각해 보게. 서울 패션 위크가 끝나고 블랙해머가 몰락하기 시작하면 콜라보레이션을 진행하기로 한 기업에도 타격이 갈 테니.”
충격에 빠져 있던 토미가 말을 더듬으며 안토니오에게 물었다.
“그, 그렇다면 안토니오 씨도 블랙해머와 콜레보레이션을 하지 않을 건가요?”
안토니오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대답했다.
“당연히 그래야지. 나로서는 아쉬울 게 없는 선택이네. 미스터 리와 어울리면서 한국 시장에 관한 정보를 얻고 브랜드 방향성에 관한 힌트까지 얻었으니까. 오히려 득을 봤지.”
안토니오가 술잔을 들었다.
그러다 너무 많은 말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작별 인사를 건넸다.
“어쨌든 나는 이쯤에서 일어나야겠네. 안 그래도 한국 시장 진출을 위해 준비할 것이 많거든.”
안토니오만이 아니라 다른 대표들도 하나둘 작별을 고하고 자리를 떠났다.
하지만 블랙해머와의 콜라보레이션에 큰 기대를 품고 있던 토미만은 그럴 수 없었다.
‘내가 미스터 리의 콜라보레이션 제안을 너무 쉽게 생각한 건가?’
그나마 다행이라면 아직 콜라보레이션 서류에 서명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막상 이것을 무효화하려니 뭔가 아쉬웠다.
그만큼 정환의 콜라보레이션 제안이 매력적이었던 까닭이었다.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하나 고민이 깊어지던 때.
토미의 머릿속에 언뜻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잠깐만…….’
토미가 떠올린 것.
그것은 정환이 그동안 누구의 예상대로 움직인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어쩌면 안토니오와 다른 패션 브랜드 대표들이 완전히 잘못 짚었을지도 몰랐다.
‘일이 어떻게 될는지 모르겠군…….’
토미는 콜라보레이션 제안에 관한 답변을 최대한 미뤄야겠다고 생각하며 남은 술을 비웠다.
***
같은 시각.
홀로 불이 밝혀진 블랙해머 사옥 꼭대기.
오러 연공법 수련을 마친 정환은 마른 수건으로 이마에 뚝뚝 떨어지는 땀을 닦았다.
땀과 함께 나쁜 기운이 모조리 빠져나가 정신이 그 어느 때보다 맑았다.
‘누가 내 이야기를 하나?’
정환은 간지러운 귀를 긁으며 작업대 옆 마네킹으로 시선을 옮겼다.
거기에는 낮 동안 유아림과 동료 디자이너들이 작업한 서울 패션 위크 컬렉션의 재킷 시안이 가득 걸려 있었다.
정환은 분홍색 초크를 손에 든 채 시안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몇 군데 수정할 부분이 있었지만 그것을 체크하는 정환의 입가에는 작은 미소가 걸렸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초크 자국으로 시안이 남아나질 않았는데…….’
실전만 한 경험이 없다는 말처럼 블랙해머 디자이너들은 청의정 패션쇼를 거치고 이번 서울 패션 위크를 준비하면서 블랙해머의 새로운 방향성에 잘 적응하고 있었다.
시안에서 자신이 손댈 부분이 점점 줄어들다 보니 이것이 조금 아쉽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렇게 다른 디자이너들의 시안까지 빠짐없이 체크한 정환이 재봉틀 앞에 앉아 쭉 기지개를 켰다.
그 뒤로는 이미 완성된 서울 패션 위크 컬렉션 수십 벌이 마네킹에 걸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