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dwarf in his previous life, but an artistic genius in his current life RAW novel - Chapter 190
188화 승자는 혼자다
늦은 저녁, 블랙해머 사옥 작업실.
컬렉션 마무리에 박차를 가하던 정환은 문자 메시지 알림음에 겨우 숨을 돌렸다.
-선물 전달 완료.
양민준의 메시지에는 패션 위크 티켓을 받고 뛸 듯이 기뻐하는 유어드림 후배들의 모습과 오현섭의 가게에서 다 같이 모여 거하게 식사하는 장면이 사진으로 첨부되어 있었다.
병아리 같은 후배들을 보고 있으니 정환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이렇게 정환이 후배들에게 따로 티켓을 챙겨준 이유.
그것은 단순히 동아리 후배라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유어드림의 명맥을 끊지 않고 이어가 준 후배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있던 까닭이었다.
사실 정환은 졸업하면서 내심 걱정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정환을 비롯한 1기 부원들이 이룬 큰 성과가 후배들에게 자칫 부담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민준 선배도 후배들이 느낄 부담을 걱정했지. 특히 유어드림은 역사가 짧으니 후배들이 그걸 이겨내지 못하면 와해하는 것도 순식간일 수 있다고.’
그러나 정환과 양민준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후배들은 예상한 것보다 더욱 훌륭히 부담감을 이겨냈다.
유어드림 후배들은 전국 고등학생 패션 디자인 대회에서 연달아 대상을 차지했고 이렇게 쌓은 경력을 바탕 삼아 그린 미스틱과 블랙해머에 입사하기도 했으니까.
그래서 정환은 직접 후배들을 만나 티켓을 선물하고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었다.
하지만 패션쇼 마무리 준비 때문에 도저히 짬이 나지 않아 양민준에게 이것을 대신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정환이 사진을 한 장씩 넘기며 숨을 돌리는 사이, 함께 야근하던 유아림이 옷 한 벌을 들고 다가왔다.
“대표님. 이 부분이 조금 애매한데 확인 좀…. 어머, 민준 디자이너네요? 그 옆에는 재철 디자이너랑 유리 디자이너도 있고. 잠깐만, 교복 입은 친구들은 누구예요?”
유아림은 정환의 핸드폰 속 사진을 보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저 친구들이 지금 유어드림 부원들인 모양이구나! 어라, 저기 주방에 있는 사람 낯이 익은데 설마 현섭이에요? 셰프가 되겠다고 퇴사하더니 정말 꿈을 이뤘구나!”
정환은 사진을 유아림에게 보여주며 선후배 간의 만남이 어떻게 열린 것인지 이야기했다.
유아림 또한 유어드림 부원들이 꾸준히 좋은 성과를 내왔다는 것을 듣고 마치 자기 일처럼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유아림 역시 지금의 유어드림을 있게 만든 사람 중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
“…이번 패션 위크 티켓을 다들 못 구해서 난리잖아요. 졸업한 후배들이야 성인이니까 어떻게든 표를 구하겠지만 고등학생들이 그러긴 힘들 것 같아서 민준 선배한테 티켓을 대신 전해 달라고 부탁했어요.”
유아림이 혀를 내둘렀다.
“하긴, 티켓 경쟁률이 어마어마하긴 했죠. 오늘 3차 티켓팅에서도 예약 앱이 다운됐다고 하던데 운영위원회 전화는 또 불이 났겠네요.”
유아림의 예상한 것처럼 서울 패션 위크 운영위원회는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사실 조금은 억울한 면도 있는 것이, 운영위원회에서는 폭증한 수요를 예상하고 패션쇼가 열리는 아트홀을 확장하는 등 전년도보다 더욱 많은 인원을 충분히 수용하려 조처한 상태였다.
특히 1차, 2차 티켓 구매 과정에서 서버가 한 번 다운 된 적이 있었기에 예약 구매 앱 측에도 서버 관리를 철저히 해달라며 부탁했다.
그러나 예상 이상으로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엄청난 트래픽에 결국 서버는 먹통이 되고 말았다.
항상 예매가 여유로웠던 지난 서울 패션 위크를 생각해 보면 이것은 무척 이례적인 일이었다.
유아림은 다시 핸드폰을 정환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이거, 모델들이 런웨이에 서기 직전까지 긴장을 늦출 수 없겠는데요? 파릇파릇한 후배들뿐만 아니라 다른 분들도 대표님에게 이렇게 많은 응원을 보내고 있잖아요.”
유아림이 말한 것처럼 양민준이 보낸 문자 메시지 뒤에는 수많은 사람의 메시지가 있었다.
끼니 거르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는 부모님부터 매니저로 시작해 TN의 이사가 된 염석봉, 대산의 회장이 된 이한용, 자기 이름을 건 잡지사를 차린 백수정 기자, 은퇴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가방을 만들고 있는 본리츠의 파비오, 스웨덴의 빅토리아 공주와 맹도르 리암, 보그의 한나 윈투어와 펩시 CEO 라몬까지.
이 외에도 정환이 연을 맺었던 수많은 사람이 응원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이것을 확인한 정환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번졌다.
비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바로 곁에서 따스한 격려를 보내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정환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고맙다는 답장을 보내려다 핸드폰을 내려놓고 다시 바늘을 집어 들었다.
자신이 여기까지 올 수 있도록 응원해 준 이들에게 보답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
완벽한 패션쇼를 선보이는 것뿐이니까.
***
침대에서 뒤척이던 베르나르는 결국 잠을 이루지 못하고 거실로 나왔다.
컬렉션 마무리 작업에 매달리느라 진이 빠져 금방 곯아떨어질 줄 알았는데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디자이너들과 비서들로 가득했던 스위트룸 거실은 어색할 정도로 적막했다.
“…….”
베르나르는 미니 바에서 조그마한 양주 하나를 꺼내 크리스탈 잔에 가득 따랐다.
큰 행사가 있는 날에는 술을 마시지 않는 게 오랜 철칙이었지만 오늘은 꼭 한잔해야 잠이 올 것 같았다.
‘비서라도 부를까.’
베르나르는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원치 않는 술자리에 불려 온 비서는 자기 눈치만 살필 것이 분명했고 그런 분위기에선 술이 곱게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을 테니까.
잔을 들고 소파에 털썩 앉은 베르나르는 컬렉션이 걸린 마네킹을 안주 삼아 술을 마셨다.
그렇게 한 잔, 두 잔을 넘기다 보니 문득 세 자식의 얼굴이 떠올랐다.
막내답게 세상 물정 모르고 까불기만 하던 앙투안.
늘 동생과 누나에게 치여 살던 알렉산더.
그리고 자신을 가장 많이 닮은 델핀까지.
베르나르는 경영 일선에 복귀한 이후 자식들과 단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심지어 지금 자식들이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물론 베르나르는 자식들과 살갑게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가 아니었다.
어쩌다 한 번 연락하면 베르나르는 자식들의 안부를 묻기보다 실수를 지적했으니까.
‘앙투안. 워블로 IWB의 매출이 또 하락했더구나. 도대체 브랜드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냐?’
‘알렉산더. 시답잖은 사업가 놀이는 그만하라고 몇 번이나 경고했을 텐데.’
‘델핀. 장녀라고 해서 네가 모든 걸 가질 수 있을 거란 착각은 하지 말아라.’
베르나르가 이렇게 불호령을 내릴 때면 자식들은 항상 변명하기에 급급했다.
그래서일까?
자식들은 성인이 되자마자 자신의 곁을 멀리 떠나갔다.
사업을 확장하겠다, 미국 시장을 공략하겠다는 둥 갖가지 핑계를 댔지만 이런 잔소리가 싫어 곁을 떠난 게 분명했다.
베르나르 역시 이것을 그리 섭섭하게 여기지 않았다.
마뜩잖은 자식들이 곁에 있어 봐야 좋은 소리는 하나도 나오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베르나르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핸드폰을 확인했다.
임원들이 LAMH 주가 변동과 관련해 보낸 문자 메시지 몇 통만이 있을 뿐, 자식들의 연락은 없었다.
핸드폰을 내려놓은 베르나르는 허공을 응시했다.
그러고 보니 자식들의 얼굴도 가물가물했다.
‘마지막으로 얼굴을 본 게 언제더라…….’
헝부이에의 양조장에서 앙투안과 알렉산더를 혼쭐낸 게 마지막이었다.
심지어 델핀은 얼굴조차 보지 못했다.
뉴욕 패션 위크와 코카콜라 콜라보레이션 건을 망친 다음 파리로 귀국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그때는 경영 복귀 준비에 바빠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실패한 자식들을 격려하기는커녕, 거세게 다그치기만 했으니 서운한 마음에 먼저 연락하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아니지. 서운함이 아니라 원망에 더욱 가깝겠지.’
베르나르는 자식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자식들을 도구로만 보고 있으니 자식들로선 원망하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자식들이 자기 핏줄을 이어받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 제국을 물려받는 것은 원치 않았으니까.
베르나르는 자식들이 스스로 왕좌를 거머쥘 자격을 증명하고 떳떳이 그것을 가져가길 바랐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들이 도구가 아니라 도구를 쓸 사람임을 증명하길 바랐다.
하지만 실망스럽게도 자식들은 결국 자격을 증명하지 못했다.
베르나르는 그 실망감을 술과 함께 넘겨 버렸다.
하지만 뭔가 턱 걸리는 게 있었다.
그 이물감의 정체는 다름 아닌 어떤 사람이었다.
난데없이 나타나 LAMH 패션 제국의 기둥을 뿌리째 뒤흔든 녀석.
세 자식에게 쓰라린 패배를 안겨주고 자신의 턱밑까지 쫓아온 녀석.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왕좌를 거머쥘 자격이 있음을 유일하게 증명하고 있는 녀석.
그 사람은 바로 블랙해머의 정환이었다.
그래서 베르나르는 이번 승부에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자기 핏줄도 아닌 녀석에게 이 왕좌를 내어줄 마음은 추호도 없었으니까.
‘그럴 바엔 차라리 LAMH 자체를 누구도 가질 수 없게 부숴버리고 말지.’
생각은 이랬지만 못내 아쉬운 것도 사실이었다.
만약 정환이 LAMH에 입사했더라면 세계 패션의 역사가 완전히 바뀌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까닭이었다.
그랬더라면 LAMH는 지금과 같은 위기를 맞이하지 않았을 것이다.
제국을 넘어서서 세계 패션 자체를 완전히 휘어잡았을 수도 있었다.
한동안 이랬으면 어땠을까, 저랬으면 어땠을까 감상에 푹 빠져 있던 베르나르의 시선이 맞은편 유리창으로 향했다.
반사된 자기 모습을 본 베르나르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곳에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술잔을 든 채 외로이 앉아 있었으니까.
그 모습을 놀란 눈으로 쳐다보던 베르나르가 헛웃음을 지었다.
“하하…….”
그 웃음은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커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캐시미어를 걸친 하이에나가 감상에 빠져 자식들의 연락이나 기다리다니.
게다가 잘근잘근 씹어먹어야 할 적을 인정하고 있다니.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어찌나 크게 웃었는지 주름진 눈가에는 눈물까지 맺혀 있었다.
웃음을 뚝 그친 베르나르가 다시 유리창을 바라봤다.
백발 성성한 노인은 온데간데없었고 대신 한 마리의 하이에나가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베르나르는 핸드폰을 덮고 다시 얼굴 없는 마네킹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직 늦여름이 가시지 않았지만 뼈가 시릴 정도로 고독했다.
그러나 베르나르에게 이 고독은 유일한 친구였다.
승자는 혼자라는 말처럼 정점은 한 사람밖에 허락하지 않으니까.
그리고 베르나르는 이 정점을 다른 사람에게 양보할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그렇게 베르나르는 동이 틀 무렵까지 고독과 얼굴 없는 마네킹을 안주 삼아 술을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