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dwarf in his previous life, but an artistic genius in his current life RAW novel - Chapter 194
192화 새로운 그림 (1)
백수정은 잡지꽂이에 꽂힌 12권의 잡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년 전.
잘 다니던 회사를 퇴사하고 퇴직금부터 적금, 대출을 있는 대로 끌어모아 ‘패션 렌즈’라는 이름의 잡지사를 차렸다.
백수정이 이 결정을 내렸을 때 직장 동료뿐만 아니라 수많은 지인이 뜯어말렸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잡지 산업은 사양길에 접어든 지 오래였고 유명 잡지 역시 구독자가 갈수록 줄어든 탓에 긴축 경영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백수정은 주저하지 않았다.
언제까지 윗사람 입맛에 맞는 기사만을 쓸 순 없는 노릇이었다.
손에 쥔 펜대가 완전히 타성에 젖어버리기 전에 자신의 목소리를 낼 창구를 만들어야 했다.
마음의 결정을 굳히니 그다음은 일사천리였다.
백수정은 곧장 허름한 사무실을 얻었고 제일 먼저 싸구려 잡지꽂이를 샀다.
그리고 텅 빈 잡지꽂이를 보며 다짐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1년만 버티자.
어떻게든 버텨서 여기에 패션 렌즈 잡지 12권만 꽂자.
처음에는 말도 안 나올 정도로 힘들었다.
회사는 전쟁터고 회사 밖은 지옥이라더니, 정말이었다.
중견 패션 매거진의 기자라는 배경이 사라지자 백수정은 한 명의 프리랜서에 불과했고 그런 프리랜서 기자를 상대해 주는 브랜드는 거의 없었다.
문전박대를 예상했지만 이것을 실제로 겪으니 마음은 더욱 참담했다.
그러나 백수정은 이를 꽉 물었다.
입에 단내가 나도록 명함을 돌렸고 취잿거리가 있다면 어디든 가리지 않고 달려갔다.
그렇게 패션 렌즈의 커버 모델이 두꺼운 코트를 벗고 반소매 티셔츠를 입을 무렵.
갑갑했던 백수정의 숨통도 틔기 시작했다.
청의정 패션쇼에 관한 기사를 쓴 후, 이것을 영어로 번역해 웹 매거진 형식으로 올렸는데 구독자가 하루아침에 몇천 명 단위로 늘어난 것이었다.
‘그땐 정말 기절할 뻔했지. 해킹이라도 당한 줄 알았으니까.’
구독자가 급증한 원인은 다름 아닌 해외의 대형 패션 커뮤니티에 있었다.
그 무렵, 열렸던 청의정 패션쇼는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큰 관심사였는데 때마침 백수정의 취재 기사가 해외 패션 커뮤니티에 게시되면서 큰 화제를 빚은 것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백수정은 정환을 오래전부터 봐왔기에 그 어떤 매거진의 기자들보다도 블랙해머 디자인을 잘 이해하고 있었으니까.
그 깊은 이해도 덕분에 백수정이 쓴 청의정 패션쇼 기사는 다른 패션 매거진에 비해 훨씬 깊이가 있었고 이것을 알아본 해외 네티즌들이 유료 구독 버튼을 누른 것이었다.
그렇게 하루 만에 폐간 위기에서 벗어났지만 백수정은 방심하지 않았다.
유료 구독자가 짧은 순간에 늘어난 만큼 이들에게 제대로 된 후속 기사를 보여주지 않으면 미련 없이 구독을 해지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백수정은 곧장 청의정 패션쇼에 관한 후속 기사를 써 내려갔고 밤을 꼬박 새워 가며 패션 렌즈를 통해 발행했던 기사들을 모조리 번역했다.
번역된 다른 기사 역시 해외 커뮤니티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고 유료 구독자 수는 날개 돋친 듯이 늘어갔다.
한 평 남짓했던 낡은 사무실은 어느 강남 빌딩의 한 층 전체로 확장됐고 뜻이 맞는 동료들이 빈자리를 가득 메웠다.
그렇게 맞이한 오늘은 무척 특별했다.
12번째 잡지를 발행한 날임과 동시에 창간 1주년 특집 기사를 점검하는 날인 까닭이었다.
백수정이 회의실로 들어가자 다섯 명의 기자들이 모여 있었다.
“바로 확인해 볼까요?”
백수정은 기자들이 준비한 취재 아이템을 쭉 훑었다.
그런데 하나같이 블랙해머와 관련된 것뿐이었다.
“여기도 블랙해머, 저기도 블랙해머. 우리나라에 패션 브랜드가 블랙해머밖에 없어요?”
백수정이 묻자 기자들은 머리만 긁적였다.
2024 서울 패션 위크가 끝난 지 벌써 1년이 지났다.
하지만 패션 브랜드와 관련 업계는 여전히 2024 블랙해머 FW 시즌 컬렉션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수많은 브랜드가 앞다퉈 블랙해머 컬렉션을 카피했고 그것과 유사한 디자인을 뽑아냈으니까.
반면, 블랙해머는 과거의 영광에 취해 있지 않았다.
2024 FW 시즌 컬렉션이 대중성과 작품성을 모두 잡았던 만큼 그것과 비슷한 컬렉션을 또 내놓을 법도 했는데, 블랙해머는 마치 처음부터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완전히 새로운 컬렉션을 선보였다.
그리고 다른 브랜드들은 블랙해머가 선도하는 유행에 뒤따라가기 바빴다.
그러니 기자들의 취재 아이템이 블랙해머 하나에 집중되는 것 역시 당연했다.
백수정의 미간 사이 주름이 깊어졌다.
블랙해머를 중점적으로 다루면서 동시에 다양한 브랜드 또한 대중에게 소개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 까닭이었다.
고민하던 백수정은 문득 뭔가를 떠올렸다.
“이번 패션 위크에서 중소 국내 패션 브랜드들이 많이 치고 올라왔던데 그건 취재했나요?”
백수정의 질문에 후배 기자가 허둥지둥 자료를 꺼냈다.
“눈에 띄는 브랜드 디자이너들의 단독 인터뷰를 땄습니다.”
그런데 후배가 건넨 자료는 블랙해머 취재 자료에 비해 양이 턱없이 적었다.
“왜 이것밖에 없어요?”
후배 기자가 말끝을 흐렸다.
“그게 말입니다…. 읽어보시면 아실 겁니다.”
자료를 받은 백수정이 인터뷰 자료를 빠르게 훑었다.
컬렉션에 담긴 의도가 무엇인지, 주제가 무엇인지 묻는 기자의 질문에 비해 디자이너들의 대답은 단답일색이었다.
인터뷰다운 인터뷰가 나오지 않은 까닭에 후배 기자가 말끝을 흐린 것이었다.
백수정은 인터뷰가 이렇게 꽉 막힌 이유를 단번에 눈치챘다.
인터뷰에 응한 디자이너들 대부분이 신인이거나 무명이었다.
인터뷰는커녕, 카메라 앞에 서본 적도 없을 테니 긴장해서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게 분명했다.
백수정은 인터뷰 자료를 내려놓으며 후배 기자들에게 말했다.
“이건 우리 실수네요. 경험 많은 디자이너들이야 초면인 기자들 앞에서도 막힘 없이 말을 하지만 신인 디자이너들은 그렇지 않거든요.”
“아!”
“이런 경우에는 시간을 충분히 들여야 해요. 먼저 친해지는 거죠. 그냥 친한 친구 만나듯이 밥도 먹고 차도 마시면서요. 그렇게 먼저 그 디자이너가 어떤 사람인지 파악해요. 그러면 자연스럽게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할지 느낌이 올 겁니다.”
백수정은 신인 디자이너와의 인터뷰를 풀어 나가는 방법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이 설명이 끝나고 나니 후배 기자의 눈빛은 한결 밝아져 있었다.
“말씀해 주신 것처럼 다시 인터뷰 진행해 보겠습니다!”
백수정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래요. 1주년 특집 기사는 눈에 띄었던 중소 패션 브랜드를 엮어내는 것으로 합시다. 그럼 회의는 여기까지 하죠.”
백수정이 먼저 몸을 일으키자 후배 기자가 다급히 물었다.
“대표님. 그런데 메인 커버에 들어갈 브랜드는 어떤 걸로…?”
이번 회의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었다.
그 질문에 멈춰 선 백수정이 당연한 걸 묻는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야 당연히 블랙해머죠.”
백수정이 회의실에 들어오던 순간부터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다.
***
인천 국제 공항.
카페에 앉은 이동기는 주문한 아이스 커피가 녹는 것도 깜빡 잊은 채 주변을 오고 가는 이들의 옷을 유심히 살폈다.
처음에는 안목을 키우려 의식적으로 시작한 관찰이었는데 이젠 자연스러운 습관으로 자리 잡았다.
그렇게 본 사람들은 무척 다양한 브랜드의 옷을 입고 있었다.
물론 블랙해머 산하 브랜드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았으나 사람들은 작년에 비해 더욱 다양한 브랜드의 옷을 입고 있었다.
꾸준히 옷을 관찰해 온 이동기는 이 변화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작년, 서울 패션 위크가 성황리에 끝나면서부터였다.
한국에 진출했던 해외 패션 브랜드들은 약속을 지켰다.
신상 컬렉션을 유럽보다 한국 시장에 우선 발매하는가 하면, 정식으로 여러 대학의 패션 디자인 학부와 교류 협약을 맺었다.
몇몇 브랜드는 아예 디자인 개발팀을 한국에 배치하고 인재를 채용하기도 했다.
‘그건 예상치 못했지. 그렇게 적극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으니까.’
물론 이러한 해외 유명 패션 브랜드들의 공격적인 진출을 모두가 두 팔 벌려 환영한 것은 아니었다.
반대하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이들은 해외 브랜드가 물밀듯이 밀려 들어오면 한국의 중소 패션 브랜드가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며 걱정했다.
하지만 이 예상은 정확히 빗나갔다.
한국의 중소 패션 브랜드는 그리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몇 번의 크고 작은 위기가 있었으나 그 위기는 중소 패션 브랜드를 더욱더 강하게 만들었다.
세계적인 브랜드와의 날 선 경쟁이 한국 디자이너들의 눈을 뜨게 만든 것이다.
그래서일까.
몇 달 전에 열렸던 서울 패션 위크에서 도드라진 활약을 보인 중소 패션 브랜드들이 있었다.
지금 카페에 막 들어온 사람들도 그 브랜드의 옷을 입고 있었다.
이것을 본 이동기의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번졌다.
정환이 의도한 대로 자그마했던 서울의 패션 생태계가 조금씩 우거지고 있었다.
블랙해머가 지난 1년 동안 막대한 돈을 벌어들인 것보다 더욱 큰 성과가 바로 이것이었다.
“커피 다 녹았습니다.”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이동기가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짙은 선글라스를 낀 정환이 비행기 티켓을 들고 있었다.
“아, 대표님.”
“비행기에 타지도 않았는데 벌써 힘을 빼면 유럽 지사에서는 어떻게 일하려고 그러십니까?”
정환은 올해 초, 미국과 유럽에 블랙해머 지사를 설립했다.
작년부터 꾸준히 증가한 수요를 더 이상 국내에서 감당하기 어려워 내린 결정이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유럽 지사장 자리에 이동기를 임명했다.
해외 경험으로만 따지자면 회사 내에서 이동기를 능가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동기는 맞은편에 앉은 정환에게 웃으며 말했다.
“보세요. 대표님이 그린 밑그림에 이렇게 다양한 색이 얹어지고 있잖습니까? 이걸 어떻게 놓치겠어요.”
이동기가 말한 것처럼 정환이 오랜 시간 공을 들인 밑그림 위에 다양한 브랜드의 색이 번지고 있었다.
두 사람의 눈에만 보이는 그림은 무척 아름다웠다.
이윽고 탑승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탑승 안내 말씀드리겠습니다. 15시 30분에 파리로 가는…….
이동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완성돼 가는 그림을 더 감상하고 싶었지만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이었다.
“파리와 벨기에는 시차가 없으니 도착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래요. 가서 필요한 게 있으시면 무엇이든 말씀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카페를 나서던 이동기가 발걸음을 멈추고 정환에게 말했다.
“대표님이 새롭게 그릴 그림도 응원하겠습니다. 오래전부터 준비하셨던 그림 아닙니까?”
이동기의 이야기에 정환이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서울 패션 위크보다 더 오래전부터 준비했던 그림을 그릴 차례였다.
그리고 그 재료는 바로 벨기에의 앤트워프 왕립 예술학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