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dwarf in his previous life, but an artistic genius in his current life RAW novel - Chapter 195
193화 새로운 그림 (2)
“드리스 반 노튼, 월터 반 베이렌동크, 앤 드뮐레미스터, 마리나 이, 더크 반 세인, 더크 비켐버그.”
단상 위에 선 정환이 여섯 명의 이름을 나열하자 대강당을 빼곡히 메우고 있던 학생들의 눈빛이 반짝였다.
일명 앤트워프 식스라 불리는 이들은 1986년, 런던 무역 박람회에 혜성같이 등장해 패션계 전체를 충격에 빠뜨렸다.
당시만 하더라도 유럽 패션계는 사치스럽고 고급스러운 원단, 그리고 군더더기 없는 디자인으로 획일화되어 있었다.
앤트워프 식스는 누구도 거스를 수 없었던 질서에 과감히 반기를 들었다.
반항아처럼 투박하고 거친 원단을 사용하고 치렁치렁한 오버 사이즈 디자인을 선보이며 기존 유럽 패션이 틀렸다고 외친 것이다.
훗날 ‘급진적 아방가르드’로 불리는 디자인은 고루 하기 짝이 없던 유럽 패션계를 뒤집어 놓았고 후대 디자이너들에게도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오늘 이 이름이 더욱 특별한 이유는 앤트워프 식스가 졸업한 학교가 바로 이곳 벨기에 안트베르펜의 앤트워프 왕립 예술학교인 까닭이었다.
정환은 강당의 앤트워프 재학생들을 보며 이야기했다.
“현대 패션계에서 앤트워프 식스의 영향을 받지 않은 디자이너는 없을 겁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니까요. 그리고 그 앤트워프 식스가 졸업한 학교에서 이렇게 강연할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정환이 특강의 서두를 앤트워프 식스에 대한 헌사로 시작하자 대강당 곳곳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앤트워프 식스는 이들에게 전설과 같은 선배 디자이너였으니까.
그리고 패션계에 새로운 역사를 쓴 정환이 존경하는 선배들을 한껏 치켜세웠으니 후배들은 더욱 뜨거운 환호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정환은 손을 들어 환호하는 학생들에게 인사했다.
천 명 가까이 수용 가능한 대강당이 이미 만석인 것을 보아하니, 재학생뿐만 아니라 대학원생까지 이 특강을 들으러 온 것 같았다.
“먼저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패션이란 무엇일까요? 아니, 그 전에 옷이란 어떤 것일까요?”
정환의 질문에 학생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점심 무렵에 시작된 특강은 해가 저물 무렵까지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정환은 패션 위크나 오뜨 꾸뛰르에 관한 뒷이야기부터 패션 기업을 설립할 때 겪었던 어려움 등 많은 주제를 준비했을뿐더러, 학생들 또한 엄청난 질문을 쏟아낸 까닭이었다.
“탑 클래스 모델들과 함께 일하면 묘한 기 싸움 같은 것도 있을 것 같은데 혹시 싸운 적이 있나요?”
“회화, 패션 등 여러 분야에서 지치지 않고 어마어마한 활약을 보여주셨는데 창작의 원동력이 무엇인가요?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으셨나요?”
장난스러운 질문도 있었고 심도 있는 질문도 있었다.
정환은 이러한 질문을 피하지 않고 진심으로 대답했다.
이렇게 서로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다 보니 특강은 예상 시간보다 더욱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서 가장 난감한 사람은 바로 진행을 맡은 교수였다.
예정된 시간을 훌쩍 넘기자 교수는 안절부절못하며 정환과 눈을 마주쳤다.
학생들의 질문을 더 이상 받기 어려우면 자기에게 이야기하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정환은 그 교수에게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마지막 학생의 질문까지 성심성의껏 대답했다.
이것이 자신의 특강을 들으러 온 학생들에 대한 예의라 생각했다.
마지막 학생이 자리에 앉자 정환은 마이크를 고쳐 잡았다.
이제 길었던 특강을 마무리할 차례였다.
“이번 특강을 마무리하며 앤트워프 식스가 했던 말을 인용코자 합니다. 스승에게 반항하라, 이제 그만이라고 말하지 말라, 유행을 따라가지 마라, 미스터리를 수용하라…….”
정환의 한 마디, 한 마디에 학생들은 눈을 크게 뜨고 집중했다.
익숙한 명언이었지만 정환의 입을 통해 들으니 다시 새롭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필드에서 여러분들을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환이 고개를 꾸벅 숙이자 곳곳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패션 위크에서 받았던 환호와는 색다른 환호였다.
***
앤트워프 왕립 예술학교의 교장, 요한 파스는 손이 붉어지도록 손뼉을 쳤다.
그간 이곳 앤트워프에서 수많은 명사가 특강을 진행했다.
예술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명사도 있었고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명사도 있었다.
그러나 정환처럼 예술성과 상업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은 명사는 처음이었다.
심지어 요한 파스가 요청한 게 아니라 정환이 먼저 제안한 특강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만족스러웠다.
‘미스터 리도 우리 학교를 알아본 거지, 그렇고말고.’
정환이 앤트워프 식스의 명언을 끝으로 단상에서 내려오자 근처 교수들이 눈을 희번들하게 떴다.
특히 몇몇 교수는 손에 각자의 작업물까지 들고 있었는데, 보아 하니 그것을 핑계로 정환과 이야기를 나누려는 속셈 같았다.
‘그건 안 되지.’
요한 파스는 정환이 교수들에게 둘러싸이기 전에 재빨리 끼어들었다.
“미스터 리, 정말 훌륭한 특강이었습니다. 앤트워프 학생들에게 좋은 자극이 됐을 겁니다. 교장실로 가시죠. 제가 좋은 차를 준비해 뒀습니다.”
요한 파스가 새치기하자 순서를 빼앗긴 교수들이 입을 삐죽였다.
나중에 교수들 사이에서 뒷이야기가 나오겠지만 요한 파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학교를 방문한 명사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
이것은 교장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으니까.
교장실로 정환을 안내한 요한 파스는 직접 우린 차를 건넸다.
“이번 특강의 가치는 돈으로도 환산할 수 없을 겁니다.”
“별말씀을요. 저야말로 앤트워프의 강단에 설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요한 파스는 정환과 마주 앉아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패션계의 전망부터 교육자로서의 고민까지, 누구에게도 터놓고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이었다.
요한 파스의 물음에 자신의 견해를 내놓던 정환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사실 교장 선생님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습니다.”
“제 도움이요?”
정환이 가만히 앉아 고개를 끄덕였다.
요한 파스는 특강이 끝나면 정환이 자신에게 어떤 요청을 할 것으로 예상했다.
이렇게 성공한 디자이너가 아무 이유 없이 특강 제안을 꺼내진 않았을 테니까.
그러나 그 의도가 무엇인지는 짐작할 수 없었다.
“말씀하시죠. 제가 도울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돕겠습니다.”
“서울에 디자인 학교를 만들 생각입니다.”
예상치 못한 말에 요한 파스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학교를 설립하시겠다고요?”
놀란 요한 파스와 달리 정환은 담담했다.
디자인 학교를 설립하는 것은 정환이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던 일인 까닭이었다.
서울을 새로운 패션 수도로 만들긴 했지만 여전히 부족한 점이 많았다.
정환이 생각한 가장 치명적인 약점은 바로 기반이었다.
결국 패션은 서울이라는 인식을 굳건히 받칠 기반.
이 기반은 단순히 서울에 여러 패션 브랜드를 가져오고 국제적인 행사를 주최한다고 해서 다질 수 있는 기반이 아니었다.
이 기반을 뿌리부터 단단히 다지기 위해선 학교가 필요했다.
시간은 걸리겠지만 이 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이 훌륭한 디자이너가 되어 활약한다면, 서울은 모두의 머릿속에 명실상부한 패션 수도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요한 파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까우니까요.”
“네?”
“저와 블랙해머 소속 디자이너들이 쌓은 경험은 길어야 몇십 년 안에 사라질 겁니다. 그렇게 사라지게 놔두기엔 너무 아까운 경험이죠. 그래서 이 경험을 체계화시키고 커리큘럼 화해서 후대에 물려줄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미스터 리가 직접 학생들을 가르치겠다는 겁니까?”
“물론입니다. 저와 블랙해머 소속 디자이너들이 학생들을 가르칠 겁니다.”
“하하…….”
요한 파스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정환의 제안을 곱씹었다.
정환은 자기 생각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보통 이렇게 큰 성공을 거둔 인물은 사업에 재투자하기 마련이었다.
사람은 더욱 큰 부와 명예를 갈망하는 법이었으니까.
그리고 이 과정에서 간접적으로 교육과 관련된 사업을 벌이는 것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정환처럼 직접 학교를 설립하는 것도 모자라 자신이 학생들을 가르치겠다고 나선 경우는 처음이었다.
심지어 그 이유가 자신이 쌓은 경험을 후대에 물려주기 위함이라니.
요한 파스는 혀를 내두르며 정환에게 물었다.
“진행 상황은 어떻습니까?”
“부지 선정과 매입은 이미 끝났습니다. 관계 부처와 막바지 협의 중입니다만 1년 안에 공사를 시작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군요. 제가 미스터 리에게 어떤 도움을 드릴 수 있을까요?”
“몇 년 후의 이야기입니다만 우리 학교 학생들이 앤트워프 왕립 예술학교의 학생들과 서로 교류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정환이 벨기에까지 날아온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세계적인 디자인 스쿨과의 교류를 통해 뛰어난 학생들을 교환하고 교수들을 초빙하는 것.
곧 설립될 학교의 질을 더욱더 높이기 위함이었다.
이 제안을 들은 요한 파스는 한 치의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우리 앤트워프가 돕겠습니다.”
요한 파스가 이 제안을 덥석 받아들인 이유.
그것은 블랙해머가 이미 세계 최고의 패션 그룹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2024 서울 패션 위크 이후로 앤트워프 패션 디자인학과는 기존 커리큘럼까지 대폭 수정했다.
세계 패션의 중심이 더 이상 유럽이 아니며 그 주도권이 서울로 넘어갔음을 직감한 까닭이었다.
그리고 누가 뭐라 하더라도 그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은 블랙해머였다.
그러니 정환이 설립할 학교와 독점적으로 교류할 수 있다면 앤트워프 측에도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어쩌면 런던의 센트럴 세인트 마틴, 뉴욕의 파슨스를 아득히 따돌릴 수도 있겠지.’
이번 기회를 잘 이용한다면 앤트워프는 명실상부 최고의 디자인 스쿨로 거듭날 수 있었다.
물론 정환이 세울 학교와 경쟁하긴 하겠지만 그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지금은 현재의 경쟁자를 치우는 것이 더욱 중요했다.
요한 파스가 이러한 계산 끝에 제안을 받아들이자 정환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감사합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우리 블랙해머 디자인 스쿨은 앤트워프 왕립 예술학교를 비롯한 다른 학교와도 협약을…….”
“잠깐, 잠깐만요.”
요한 파스가 손사래를 치더니 정환에게 물었다.
“우리 앤트워프와 독점 교류를 하는 게 아니라 동시에 다른 학교와도 함께 교류하겠다는 뜻입니까?”
요한 파스는 자신이 잘못 이해했길 바라며 정환에게 되물었다.
그러나 정환의 대답은 들은 그대로였다.
“그렇습니다. 런던의 센트럴 세인트 마틴, 그리고 뉴욕의 파슨스와도 교류 협약을 맺을 계획입니다.”
요한 파스의 눈앞이 아찔해졌다.
정환이 세울 학교와 독점적으로 교류해서 눈엣가시 같은 두 학교를 따돌리려 한 계획이 완전히 어그러졌기 때문이다.
“미스터 리, 그건…….”
“이미 런던의 센트럴 세인트 마틴의 교장 선생님과도 미팅 약속을 잡았습니다. 다만, 그쪽에는 앤트워프에 먼저 오겠다고 양해를 구한 상태고요.”
정환이 덧붙인 말에 요한 파스는 숨이 턱 막혔다.
센트럴 세인트 마틴 역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콧대 높은 예술학교인 까닭이었다.
그런 센트럴 세인트 마틴이 미팅 순서를 앤트워프에 양보했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정환은 요한 파스에게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뉴욕의 파슨스는 이미 우리 학교와 교류 협약에 도장을 찍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