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dwarf in his previous life, but an artistic genius in his current life RAW novel - Chapter 199
197화 예술의 끝 (2)
-우리 열차는 잠시 후, 종착역인 서울역에 도착하겠습니다. 손님 여러분께서는 차 내에 두고 내리는 물건이 없도록…….
기차 안내음과 함께 사람들이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가운데 교복을 입은 박정호의 얼굴은 유독 상기되어 있었다.
그동안 막연하게 키워왔던 패션 디자이너라는 꿈에 한 발짝 다가가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박정호는 어릴 적, 우연히 유튜브에서 본 패션쇼 라이브 영상을 계기로 패션 디자이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비록 조그만 화면이었지만 콘서트장을 방불케 하는 런웨이, 멋지고 아름다운 옷을 걸친 모델들의 워킹, 그리고 그 사이에서 주인공처럼 등장한 정환의 모습은 어린 박정호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박정호는 부모님 몰래 이불을 뒤집어쓰고 날이 새도록 패션쇼 라이브를 몇 번이나 돌려봤다.
그리고 그때부터 박정호의 교과서 귀퉁이에는 낙서 대신 패션 크로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삐뚤빼뚤했던 크로키가 그럴싸한 모양을 갖출 무렵, 박정호는 연필을 내려놓고 주방 가위를 집어 들었다.
부모님 옷을 몰래 자르고 테이프로 붙이며 자기만의 컬렉션을 만들다 걸려 혼난 적도 있었다.
‘어머니가 아끼는 옷을 잘랐을 때에는 눈물 쏙 빠지게 혼이 났었지.’
그렇게 박정호는 어설프지만 성실하게 패션 디자이너라는 꿈을 키워 나갔다.
하지만 가난하지도, 풍족하지도 않았던 집안 형편이 박정호의 꿈을 깨웠다.
돈이 많이 드는 입시 미술을 시작했다간 겨우 균형을 맞추고 있던 집안 형편이 어느 쪽으로 기울어질지는 불 보듯 뻔했던 것.
그래서 박정호는 부모님에게 미술 학원에 다니고 싶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꿈을 놓은 것은 아니었다.
남들보다 조금 더 돌아가더라도 포기하지 않으면 꿈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으니까.
그렇게 꿈을 잠시 접어둔 박정호가 고등학교 2학년이 됐을 때 믿을 수 없는 소식이 들려왔다.
소문만 무성하던 블랙해머 디자인 학교가 마침내 서울에 개교를 한 것이었다.
하지만 박정호는 이때까지만 블랙해머 디자인 학교의 입학을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입시 미술을 배우지 않으면 입학시험을 치를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렇다 하더라도 블랙해머 디자인 학교가 어떤 곳인지 호기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고 박정호는 큰 기대감 없이 블랙해머 디자인 학교의 입시 합격작을 살펴봤다.
그러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좋게 표현하자면 기존 입시 미술의 문법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나쁘게 표현하자면 엉망진창인 그림이 눈앞으로 연속해서 펼쳐졌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러한 합격작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그 공통점은 바로 합격작들이 모두 놀라울 정도의 참신함을 담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합격작이 공개되자 사람들은 블랙해머 디자인 학교의 합격 기준을 두고 갑론을박을 벌였다.
명색이 디자인 학교라면 최소한의 실기력을 갖춰야 한다는 의견이 절반이었고 그것보다 창의력이 더욱 중요하다는 의견이 절반이었다.
하지만 정환이 언론을 통해 평가 기준을 밝히며 이 논쟁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시험 방식과 주제는 창의력을 확인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학생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학생 개개인의 창의력입니다.’
이 인터뷰를 본 박정호는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서랍 깊숙한 곳에 박아뒀던 크로키북을 다시 꺼냈다.
실기력이 아니라 오롯이 창의력만을 평가하는 시험이라면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박정호는 블랙해머 디자인 학교에 제출할 포트폴리오를 한 장씩 그려 나갔다.
공들여 완성한 포트폴리오를 제출했을 때는 초조한 마음에 며칠 동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1차 전형에서 떨어질 수도 있을 거란 불안한 마음이 든 까닭이었다.
그러나 행운의 여신은 박정호의 손을 들어줬다.
포트폴리오가 통과되면서 블랙해머 디자인 학교 입학시험에 응시할 자격을 거머줬던 것이다.
***
서서히 속도를 줄이던 기차가 마침내 끽소리와 함께 서울역에 멈춰 섰다.
어느 유명 래퍼의 노래 가사처럼 박정호의 꿈은 기차로 단 두 시간 거리에 있었다.
기차에서 내린 박정호는 가방에 넣어둔 지갑을 꺼냈다.
지갑 속에는 어머니가 쓰라며 주신 만 원짜리 몇 장과 누가 가져갈세라 고이 접어둔 수험표가 있었다.
박정호는 왠지 모를 힘을 얻으며 지갑을 다시 가방 깊숙한 곳에 넣고 발걸음을 옮겼다.
지하철 환승역에서 몇 번 헤매는 바람에 생각보다 늦어졌지만 그래도 여유 있게 출발한 덕분에 제시간에 학교 근처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횡단보도를 건너서 오른쪽으로 쭉 걸어가면…….’
남은 시간을 가늠하며 길을 살피던 박정호의 눈에 뭔가 띄었다.
그것은 지저분한 고물을 가득 싣고 위태위태하게 도로 가장자리를 지나가던 한 할아버지였다.
리어카가 너무 무거운 걸까.
할아버지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박정호와 함께 나란히 횡단보도 앞에 섰다.
보행자 신호가 파란불로 바뀌었고 기다리던 사람들이 빠르게 길을 건넜다.
하지만 리어카를 끄는 할아버지의 발걸음은 여전히 느릿느릿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흘끗 쳐다보긴 했지만 리어카가 워낙 지저분한 탓에 도와줄 엄두가 나지 않는 것 같았다.
먼저 앞서갔던 박정호가 결국 발걸음을 돌렸다.
천근만근이던 리어카가 갑자기 가벼워지자 할아버지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아이고, 학생. 그냥 가도 되는데…….”
“아녜요. 저기 앞까지만 밀어 드릴게요.”
박정호는 다리에 힘을 주며 손목에 찬 시계를 봤다.
입실 마감까지 남은 시간은 30분, 횡단보도를 함께 건너는 것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리어카가 횡단보도 끄트머리 턱에 걸리고 말았다.
박정호가 있는 힘껏 리어카를 밀었지만 온갖 고물이 잔뜩 쌓인 까닭에 좀처럼 턱을 넘을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보행자 신호까지 바뀌는 바람에 차들이 위험천만하게 박정호의 곁을 스쳐 갔다.
그러자 리어카를 끌던 할아버지가 박정호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학생, 괜찮아요. 여기서부터는 내가 할 테니까 얼른 가 봐요. 그러다 다치겠어.”
“그럼…….”
박정호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발길을 돌렸다.
하지만 낮은 턱과 싸우고 있는 할아버지를 두고 가자니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박정호는 가방을 단단히 멘 후 다시 할아버지의 리어카를 붙잡았다.
이대로 그냥 지나쳐 갔다간 시험 내내 신경이 쓰일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만 도와드리고 학교까지 이 악물고 뛰면 제때 도착할 수 있어.’
박정호가 다시 한번 리어카와 씨름을 벌였다.
그 모습을 본 행인들도 한 사람씩 손을 보탰지만 무거운 리어카는 제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속절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박정호는 조금씩 초조해졌다.
지금이라도 이 손을 놓고 학교로 달려갈까 고민하던 그때.
어디선가 나타난 두툼한 손이 리어카를 꽉 붙잡았다.
그 손의 주인공은 험상궂게 생긴 남자였다.
“하나, 둘!”
남자의 구령에 맞춰 힘을 주자 제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던 리어카가 마침내 횡단보도 턱을 넘었다.
“보기보다 꽤 무겁네.”
험상궂게 생긴 남자가 두 손을 탁탁 털며 교복 차림의 박정호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이 주변 학교 교복이 아닌데? 입시 치르러 멀리서 온 학생인 모양인가?”
남자가 말한 것처럼 박정호는 교복을 입고 있었다.
입학시험에 면접까지 포함되어 있는데 입을 만한 옷이 교복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박정호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자신을 도와준 남자에게 물었다.
“어, 지방에서 오긴 했는데…. 어떻게 아셨어요?”
“이 근처 학교 교복은 내가 빠삭하게 알고 있지. 그게 내 일이거든.”
무척 수상하게 들리는 대답이었다.
그사이 보행자 신호가 다시 파란 불로 바뀌었다.
“바빠 보이는데 먼저 가요. 여기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박정호의 등을 떠민 남자가 겉옷을 훌렁 벗었다.
험상궂게 생긴 남자는 할아버지를 끝까지 도울 생각인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본 박정호는 자신을 도와준 남자에게 고개를 꾸벅 숙인 후 정신없이 학교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
남자가 할아버지를 돕고 나서 다시 횡단보도가 있는 큰길로 나오니 박정호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음…. 꽤 괜찮은 페이스였는데 전화번호라도 물어볼 걸 그랬나?’
남자가 생각하는 사이,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염 이사님!”
그 목소리에 염석봉이 고개를 돌리자 근처에 차를 세워둔 부하 직원이 자신을 향해 종종걸음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여기 계셨네요? 반대편에서 한참 찾았어요.”
“아, 미안합니다. 이쪽에 잠깐 볼일이 생겨서요.”
“아닙니다. 회의에 늦기 전에 얼른 가시죠.”
부하 직원이 발걸음을 재촉했지만 염석봉은 발을 떼지 못했다.
염석봉의 시선이 다시 한번 박정호가 사라진 쪽으로 향했기 때문이다.
딱히 특별할 것이 없어 보이는 큰길을 바라보고 있는 염석봉을 지켜보며 부하 직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사님, 왜 그러세요? 아는 사람이라도 보셨어요?”
부하 직원의 질문에 염석봉은 뒤늦게 입가에 작은 미소를 띠었다.
“아니, 그냥 옛날 생각이 나서요. 다음 스케줄이 뭐였죠?”
“슈퍼엑스 10주년 콘서트 회의가 있고, 그다음에는…….”
***
그사이 박정호는 이를 꽉 깨물고 달렸다.
태어나서 이렇게 쉬지 않고 빠르게 달려본 적은 처음이었다.
간신히 정문을 통과해 강의실에 들어서니 다리가 후들거리고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헉, 헉…….”
박정호의 요란한 등장에 기다리고 있던 수험생들이 따가운 눈길을 보냈다.
중요한 시험을 목전에 두고 한껏 마음을 가다듬고 있었는데 박정호 때문에 그 집중력이 흐트러진 모양이었다.
“신분증이랑 수험표 보여주세요.”
시험 감독의 요청에 박정호는 가방 깊숙이 넣어둔 지갑을 꺼냈다.
시험 감독은 수험표와 신분증, 그리고 박정호의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곧 시험이 시작되니 자리에 앉아 주세요.”
“네!”
박정호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며 풀썩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한숨을 돌리고 나자 수험장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인터넷에서 본 것처럼 시험을 치르러 온 수험생들은 국적과 연령대가 무척이나 다양했다.
‘외국에서도 블랙해머 디자인 학교로 유학하러 온다더니 그게 진짜였네.’
박정호가 주변 풍경을 눈에 담는 사이, 시험 감독이 황색 봉투를 학생들에게 차례대로 배부했다.
합격자 수기를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은 까닭에 박정호는 황색 봉투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봉투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문제지와 4절지, 그리고 논술 답안지. 세 시간 안에 그림을 완성하고 한 시간 동안 논술 답안을 작성한 다음 면접을 보면 시험이 끝난다.’
공정한 시험을 위해 그림을 그리는 데 필요한 4B 연필과 지우개 또한 황색 봉투 안에 들어 있었다.
박정호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마침내 시계가 정각을 가리키자 시험 감독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시험 시작하겠습니다.”
일사불란하게 봉투를 연 수험생들이 문제지를 꺼냈다.
그런데 이들의 예상과 달리 문제지에는 단 한 줄의 문제만이 적혀 있었다.
-가장 완벽한 동그라미를 그리시오. 그리고 이것이 왜 가장 완벽한 동그라미인지 서술하시오.
이 문제를 확인한 수험생들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보다 거창한 문제가 있을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 한 사람, 박정호의 눈빛은 달랐다.
문제를 본 순간, 박정호의 머릿속에는 정답이 떠올라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