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dwarf in his previous life, but an artistic genius in his current life RAW novel - Chapter 20
19화 특강 (2)
‘이 녀석이라면 뭔가 해낼지도 모른다.’
이홍림 교수는 강한 직감을 느꼈다.
사실, 그녀는 직감을 신뢰하지 않는 편이었다.
오히려 불신하는 편에 가까웠다.
주변 작가들이 그 직감에 매달리다 슬럼프에 빠지고 결국 붓을 꺾는 것을 수도 없이 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 직감을 믿어야 한다는 강한 느낌이 왔다.
‘어디 한번 지켜보지.’
다시 단상 위로 올라온 이홍림 교수는 팔짱을 낀 채 정환을 주시했다.
그녀의 시선이 날카로워지자 구철웅도 덩달아 정환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마치 한국예고 입학시험을 치를 때처럼 정환은 여전히 흰 종이를 마주 보고 있었다.
그는 불상처럼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채 이홍림 교수가 했던 말을 곱씹고 있었다.
‘자화상은 전생에서도 그려 본 적 있다. 하지만 이홍림 교수가 원하는 건 그런 뻔한 자화상이 아니야. 나 자신을 진솔하게 밝혀야 해.’
남들은 모르지만 정환은 두 번째 인생을 살고 있다.
하나는 지금의 정환이고, 또 하나는 전생의 블랙해머다.
그 두 가지 인생을 한 장의 그림에 표현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정환은 고개를 들어 무작정 선을 긋는 학생들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그런데 이젤의 각도가 제각각이라 그런지 거울에도 실기실의 다양한 모습이 반사되고 있었다.
‘아!’
정환의 머릿속에 한 줄기 섬광이 스쳤다.
아이디어를 잡은 그는 연필을 쥐고 사각, 사각 스케치를 시작했다.
연필 끝이 종이를 스치는 기분 좋은 소리.
이홍림 교수의 귀가 쫑긋 세워졌다.
그녀만큼 경력이 쌓이면 연필 소리만 들어도 그림이 어떻게 그려지는지 대강 알 수 있었다.
‘궁금하다.’
정환의 연필 소리에는 확신과 자신감이 가득 차 있었다.
이홍림 교수는 애써 정환의 그림을 쳐다보지 않았다.
맛있는 밥을 먹으려면 뜸을 들여야 한다.
그걸 못 참고 뚜껑을 열면 밥은 설익게 된다.
그녀는 최고의 순간을 위해 기다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한편, 다른 학생들은 아예 머리를 쥐어뜯으며 끙끙 앓고 있었다.
“아, 망했다.”
“이거 어떻게 그려? 얼굴은 한 번도 그려 본 적 없는데.”
특히 오현섭은 몇 번이나 선을 그었다가 지우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이런 얼굴을 그릴 필요가 있나?’
그는 이젤 옆에 붙은 자그마한 거울을 보는 것도 짜증이 났다.
살이 쪄서 두툼해진 턱, 의자에 앉아 있을 뿐인데도 등을 타고 흐르는 땀, 좀처럼 가라앉질 않는 시뻘건 여드름까지.
이런 얼굴을 자화상으로 남길 이유는 전혀 없었다.
하지만 이홍림 교수의 특강이니 뭐라도 그려야만 했다.
결국 그는 있는 그대로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하지만 선을 그으면서도 가장 콤플렉스인 두툼한 살과 여드름을 조금씩 감췄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홍림 교수가 구철웅에게 물었다.
“저 녀석이지? 화무십일홍을 그렸던 녀석. 수험 번호 24번이었던가?”
구철웅이 출석부를 휙휙 넘겼다.
“아, 맞습니다. 오현섭입니다. 어떻게 아셨어요?”
“딱 보면 알지. 정물 그릴 때 습관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뭘.”
이홍림 교수의 시선이 황수연 쪽으로 넘어갔다.
그녀도 여전히 어색하게 손을 버벅대고 있었는데, 정환과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나 자신을 끄집어내라. 나 자신을 밝혀라.’
손바닥만큼 작은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을 보던 수연은 순간, 할머니 박옥정이 떠올랐다.
어렸을 때부터 자신을 먹여주고 키워줬던 할머니.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박옥정은 그녀의 17년 인생에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저 여학생. 바니타스네. 6번.”
“아, 정확하십니다. 황수연입니다.”
“황수연…….”
이홍림 교수가 눈썹을 치켜떴다.
“저 학생도 싹수가 보이네. 나쁘지 않아.”
“여전히 평가가 박하시네요. 칭찬을 좀 더 많이 하셔도 될 텐데.”
“마음에도 없는 칭찬은 독이야.”
구철웅은 어떻게든 그림 위에 선을 긋는 학생들을 보며 물었다.
“나머지는 아무래도 입시 물을 좀 빼야 할 필요가 있겠죠?”
“너도 잘 알겠지만 난 입시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 이런 말 하면 다른 작가들한테 비난받긴 하겠지?”
“누가 교수님을 뭐라 하겠어요?”
이홍림 교수가 피식, 웃었다.
그녀의 괄괄한 성격은 대한민국 미술계에도 정평이 나 있었다.
“그럴 만한 사람이 딱 한 명 있긴 하지.”
이홍림 교수를 대놓고 비난할 수 있는 사람.
바로 정영주였다.
“엥? 누가요? 그럴 사람이 있나?”
“됐어. 어쨌든 입시는 확실한 기본기를 다듬는 데는 분명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 하지만 어디까지나 기본기일 뿐, 자기 스타일을 못 만든다면 재미가 없겠지.”
그렇게 20분이 지났다.
학생들이 모두 연필을 내려놓자 이홍림 교수가 단상을 내려오며 말했다.
“시간이 부족하니 모든 작품을 크리틱하진 않겠어요.”
“후! 다행이다.”
학생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엉망진창인 그림을 이홍림 교수에게 평가받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수도 있었다.
이홍림 교수는 오현섭의 그림 앞에 섰다.
역시 그림에 기본기는 탄탄했고 칭찬할 만했지만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었다.
“이게 거울을 통해 본 본인의 모습인가요?”
“네…….”
오현섭의 목소리가 바닥을 기었다.
“학생. 때로는 보기 싫은 진실도 마주해야 할 때가 있어요.”
이홍림 교수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녀는 오현섭이 자신의 얼굴의 솔직하게 표현하지 않은 걸 지적하고 있었다.
“물론 자화상에 자신이 바라는 이상적인 모습을 투영해서 그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그런 그림이 아니에요. 그냥 남들의 눈치만 보면서 그린 그림일 뿐입니다.”
오현섭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의 지적이 정확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창피한 듯 시선을 아래로 떨구자 이홍림 교수가 부드럽게 말했다.
“학생. 날 봐요.”
오현섭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이홍림 교수는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켰다.
“독일에 처음 유학 갔을 때 내 별명이 뭐였는지 알아요?”
“글쎄요.”
“아시아에서 온 미친 땅콩이었어요. 그런 내가 자화상을 그릴 때 어땠을 것 같아요? 즐거웠을까요?”
“…….”
“이를 악물고 나 자신을 솔직하게 대면했을 때 또 다른 세상이 열릴 겁니다. 솔직해져야 해요.”
구철웅은 그 모습을 말없이 쳐다봤다.
이홍림 교수의 크리틱은 항상 이랬다.
겉보기엔 매섭게 질책하는 것 같으면서도, 그 속에는 항상 따뜻한 손길이 숨어 있었다.
이홍림 교수는 다시 고개를 떨군 오현섭을 뒤로한 채 발걸음을 옮겼다.
다음 차례는 역시 황수연이었다.
‘가까이서 보니 더 예쁘장하네. 그냥 배우나 모델 시켜도 되겠다. 그런데 그림은…….’
수연이 그린 자화상은 반으로 갈라져 있었다.
왼쪽에는 수연의 지금 얼굴이 그려져 있었고, 오른쪽에는 주름 가득한 할머니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이홍림 교수가 물었다.
“설명 좀 해 줄래요?”
수연은 긴장한 목소리로 자신의 그림을 가리키며 말했다.
“전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가 키워 주셨어요.”
“지금도?”
“네. 할머니는 제 인생의 전부나 마찬가지예요. 어쩌면 제 반쪽이나 마찬가지죠. 그 뜻을 담아서 그려 봤어요.”
“그렇군요.”
이홍림 교수는 그림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수연이 그어 놓은 선을 보니 확실히 기본기뿐만 아니라 기술도 꽤 수준급이었다.
역시 바니타스를 응용해서 그린 것은 요행이 아니었다.
하지만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었다.
얼굴 오른쪽을 차지하고 있는 할머니의 얼굴이었다.
‘오페라의 유령이 쓴 가면처럼 보이는데……. 묘하게 오른쪽 영역이 더 넓어.’
이홍림 교수는 많은 생각이 들었지만 구태여 입을 열지 않았다.
“다음은…….”
그녀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기대되는 그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각, 또각 소리를 내던 그녀의 발이 우뚝 멈췄다.
“하…….”
이홍림 교수가 짧게 탄식했다.
정환의 도화지 속에는 이젤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는 한 남자의 뒷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재킷을 걸친 거로 봐서 교복을 입은 정환이 분명했다.
그림 속 정환은 이젤 옆에 붙은 거울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거울에 반사된 그 모습도 그림 속에 그려져 있었다.
‘이거야!’
이홍림 교수는 마치 시원한 생맥주를 들이켠 것 같은 쾌감에 손을 부르르 떨었다.
구철웅도 마찬가지였다.
‘이 녀석……. 자화상을 그리는 자기 모습을 그렸잖아?’
마치 액자식 구성처럼 그림 속에는 또 다른 그림이 있었다.
짧은 시간에 이런 구상을 하다니.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은……. 뭐야?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그런데 그 남자가 그리고 있는 자화상의 모습과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이 달랐다.
거울 속에 비친 사람은 흐릿하게 보이긴 했지만, 판타지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외모를 갖고 있었다.
“설명 좀 해 주겠니?”
이홍림 교수가 들뜬 기색을 애써 감추며 물었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덤덤하게 설명했다.
“흔히 사춘기는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하잖아요. 감정도 들끓고 어떤 게 내 모습인지도 잘 모르겠고. 그래서 나라는 사람을 한 얼굴로 표현하기보단 여러 내면을 갖고 있다는 걸 보여 주고 싶어서 이렇게 그려 봤어요.”
정환은 일부러 질풍노도라는 단어를 써서 유치해 보이려 노력했다.
그렇지 않으면 사실 제 전생이 이랬습니다, 저랬습니다.
설명해야 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내가 그런 말을 한다고 해서 교수님이 믿을 리도 없겠지만.’
이홍림 교수는 정환의 그림을 말없이 계속 지켜봤다.
스케치 단계에 불과했지만 강약 조절이 완벽한 선, 게다가 내면의 다양성을 보여 주기 위한 아이디어와 순발력까지.
정환은 예술 작가가 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홍림 교수는 그 사실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고 겉으론 덤덤한 척했지만, 속으론 입이 찢어지도록 웃었다.
정환을 수석으로 뽑은 선택이 옳았다는 걸 마치 신에게 확인받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여러분도 모두 자세히 와서 보세요.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로 거울을 활용한 점이 아주 훌륭합니다.”
주변을 서성이던 학생들도 정환의 그림에 가까이 다가왔다.
“와, 이걸 이 짧은 시간에 그렸어?”
“대박이다. 내가 이 생각은 왜 못했지? 우린 그냥 거울로 얼굴만 봤는데, 이걸 초상화 속에 넣었어?”
감탄하는 학생 중 정환의 그림에 다가가지 않은 이는 단 두 명뿐이었다.
수연과 오현섭이었다.
수연은 정환과 자신의 그림을 번갈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너무 단순하게 생각했어. 더 깊이 고민했어야 했는데.’
오현섭도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그는 어떻게든 정환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인생사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니까.
하지만 꼭 대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 있었다.
바로 오현섭은 그림으로 정환을 절대 이길 수 없다는 사실.
고작해야 20분짜리 스케치 하나였지만 오현섭은 정환이 거대한 벽처럼 느껴졌다.
그가 무슨 수를 써도 절대 넘을 수 없는 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