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dwarf in his previous life, but an artistic genius in his current life RAW novel - Chapter 202
200화 예술의 끝 (5)
블랙해머 디자인 학교 대강당.
나란히 펼쳐진 수백 개의 이젤 위에 수험생들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정환은 그사이를 오가며 수험생들의 그림을 유심히 살폈다.
“흠…….”
그림을 보며 고민하던 정환이 그림 귀퉁이에 C+를 적은 후 발걸음을 옮겼다.
정환은 지금 수험생들의 그림 수백 장을 하나씩 평가하고 있었다.
일반적인 학교에서는 수험생들의 그림 전체를 바닥에 깔아놓고 채에 거르듯 미완성작을 빼고 남은 완성작 가운데서 합격작을 고른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이것은 무척 번거로운 과정이었다.
하지만 정환은 이런 번거로움에도 불구하고 직접 채점을 고집했다.
그 이유는 블랙해머 디자인 학교의 합격 기준이 완성, 미완성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미완성이라고 할지라도 그림 속에 창의적인 답이 숨어 있을 수 있었다.
그래서 정환은 모든 작품을 두 눈으로 하나하나 확인했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었으나 이 과정 중에서 뛰어난 작품을 고른 적도 많았기에 정환은 이것을 기꺼이 감내했다.
그러다 보니 이렇게 시험이 끝나는 날이면 정환의 퇴근은 자연스레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예상했던 것처럼 비슷한 그림밖에 없군.’
완벽한 동그라미라는 문제에 얽매인 까닭인지 대강당에 깔린 그림들은 모두 틀에 박힌 것처럼 엇비슷했다.
물론 그렇지 않은 그린 학생들도 있었으나 그리 설득력 있는 그림은 아니었다.
그렇게 강당을 한 바퀴 돌던 정환이 어느 그림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처음 평가를 시작했을 때부터 유독 눈에 밟히던 그림이었다.
시간에 쫓긴 걸까, 휘갈긴 그림 속에서는 동그라미가 하나도 그려져 있지 않았다.
심지어 동그라미는 고사하고 삼각형, 사각형, 마름모 같은 도형들만 가득할 뿐이었다.
정환은 한 발짝 떨어져서 그림을 자세히 살폈다.
이 그림이 자신의 눈길을 사로잡은 이유가 분명히 있으리라 생각한 까닭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환은 그 이유를 알아차렸다.
‘이 녀석 봐라.’
이 수험생은 동그라미를 그리지 않은 게 아니었다.
분명히 동그라미를 그렸다.
그것도 가장 완벽한 동그라미를.
그 동그라미는 바로 그림 속 여백에 있었다.
각종 도형을 그리고 남긴 새하얀 여백.
그 여백은 정환이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완벽한 동그라미 모양을 띠고 있었다.
‘동그라미를 그리지 않고 동그라미를 그리다니 역설적이군.’
사실, 여백으로 그린 동그라미는 완벽한 동그라미라 할 수 없었다.
여백을 만들기 위해 그린 각종 도형의 선은 거칠었고 형태 역시 들쭉날쭉했으니까.
그런데도 이 동그라미가 완벽해 보인 이유.
그것은 동그라미를 그리지 않고 동그라미를 그렸다는 역설 그 자체에 있었다.
‘코끼리를 상상하지 말라는 말을 들은 순간, 사람은 코끼리를 상상할 수밖에 없지. 이것 역시 마찬가지다. 여백을 보는 순간, 가장 완벽한 동그라미가 계속 떠오른다. 지워버릴 수 없을 정도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 그림.
이것이 정환이 유아림에게 강조했던 완벽한 디자인이었다.
A+를 받을 자격이 충분했지만 정환은 손을 움직이지 않았다.
‘잠깐만, 이 그림체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정환은 이 그림체의 주인을 알고 있었다.
유아림이 호들갑을 떨며 한번 보라고 했던 그 수험생이었다.
‘함정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줄 알았는데.’
그 수험생이 그렸던 그림은 확실히 유아림이 요란을 떨 만큼 나쁘지 않았다.
흙에서 태어나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는 주제 의식 역시 괜찮은 편이었다.
하지만 정환은 그 그림을 좋게 평가하지 않았다.
그림 속에서 수험생의 자만심이 진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다른 수험생들과 달리 자신은 함정에 빠지지 않았다는 자만심.
그 자만심은 또 다른 함정이었다.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의 자만심이 판 함정이었기에 정환은 그 수험생이 쉽게 빠져나오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
어쩌면 시험이 끝날 때까지 자신이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모를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자신의 자만심을 깨닫는다면 괜찮은 그림을 그릴 수도 있었다.
그래서 정환은 안 교수와 면접 순서를 바꿨다.
수험생 한 명에게 이런 기대감을 품었다는 것 자체로 공정한 심사가 이뤄지지 않을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럴 필요가 없었군. 결국 자만심이란 깊은 함정에서 훌륭히 빠져나왔으니까.’
정환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정환이 그 그림 귀퉁이에 적은 것은 A+가 아니라 F였다.
‘끝까지 몰랐다면 A+를 줬겠지만……. 공정한 심사를 위해선 어쩔 수 없어.’
한 차례 심사를 마친 정환은 간이 의자에 기대앉았다.
학교와 회사를 동시에 운영하려니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특히 오늘처럼 학생들의 그림을 세밀하게 채점해야 하는 날에는 그 피로감이 더욱 지독했다.
자리에 앉은 정환의 두 눈이 서서히 감기기 시작했다.
얼마나 졸았을까.
인기척에 잠에서 깬 정환이 두 눈을 부릅떴다.
바로 옆에 누군가 서 있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정환은 곁에 선 사람을 한눈에 알아봤다.
깊은 산 속에서 굶어 죽어가던 자신에게 새로운 삶을 선물했던 자.
바로 예술의 신, 카로트였다.
카로트는 처음 만났던 그때처럼 화려하게 치장된 옷을 입고 있었다.
“…….”
카로트와 눈을 마주친 정환은 무슨 말을 꺼내야 할까 고민하다 먼저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런가?”
정환은 자신이 미련한 질문을 던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작 백 년 남짓 사는 인간이다.
신에게 몇십 년의 세월은 그야말로 찰나의 순간에 불과할 테니.
카로트는 강당 가득한 그림들을 보며 정환에게 물었다.
“그래. 예술의 끝을 봤나?”
카로트를 뒤따라 걷던 정환이 반문했다.
“그러고 보니 제가 가장 중요한 걸 안 여쭤봤더군요. 만약 예술의 끝을 보지 못했다면……. 전 어떻게 됩니까?”
카로트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네가 현생에서 이룬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닌 허무로 돌아가겠지. 마치 죽기 직전에 꾼 달콤한 꿈처럼.”
카로트가 딱, 소리를 내며 손가락을 튕기자 이젤 위 그림들이 마법처럼 바뀌었다.
정환이 병실에서 그렸던 영심 할머니의 초상화, 한국 예고 입학시험에서 그렸던 그림, 첫 번째 패션쇼에서 선보였던 옷, 블랙해머를 설립하던 순간과 베르나르의 대결에서 선보였던 컬렉션까지.
카로트는 그 장면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네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예술의 끝이 바로 이것들인가?”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만큼 예술사에 한 획을 그은 장면들이었다.
그러나 정환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카로트가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정환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꽤 오랜 시간을 준 것 같은데 결국 답을 찾지 못했다는 뜻인가?”
“…….”
“내가 네게 새로운 삶을 준 이유가 뭔지 아나? 금은보화를 지천에 깔아 두고도 예술의 끝을 찾다 굶어 죽은 놈이라면, 신만이 알고 있는 답을 찾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네.”
카로트의 시선이 정환에게 향했다.
“하지만 결국 너는 답을 찾지 못했군. 시간 낭비는 아니었어. 곁에서 지켜보는 재미가 있었거든.”
카로트가 손을 위로 치켜들었다.
“네가 예술의 끝을 찾지 못했으니 이제 모든 것이 허무로 돌아갈 시간이다. 그런데…….”
정환을 보던 카로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기껏 이룬 모든 것이 사라질 판국인데도 정환은 계속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말을 못 알아들은 건가? 예술의 신이 네 앞에 강림해서 모든 것을 허무로 돌려보내겠다고 하는데 도대체 넌 어딜 보는 거냐?”
정환의 시선을 따라간 카로트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 끝에는 그림 한 점이 이젤 위에 걸려 있었다.
손가락을 튕기려던 카로트는 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그 그림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고 보니 내가 처음 강림했을 때도 자네는 검을 바라보고 있었지. 이 그림이 자네에게 그 검과 같은 모양이군.”
그림을 양손에 쥔 카로트가 조소했다.
삐뚤빼뚤한 그림은 그때의 검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엉망진창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왜인지 모르게 그 그림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어째서…….’
그림을 뚫어지게 노려보던 카로트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눈이 어찌나 커졌는지 그 속에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감정을 하나하나 읽을 수 있을 정도였다.
처음 드러난 감정은 충격이었다.
그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거대한 환희와 기쁨이 카로트의 눈을 뒤덮었다.
카로트는 그렇게 말없이 제자리에 서서 그림을 가만히 감상했다.
“동그라미를 그리지 않음으로써 가장 완벽한 동그라미를 그렸다? 역설적이군. 아주 재밌어.”
“이것이…….”
정환은 강당을 빼곡히 메운 그림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것이 제가 찾은 답입니다.”
카로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정환이 본 미소 중 가장 환하고 아름다운 미소였다.
“축하하네. 자네는 답을 찾았어.”
카로트가 손을 위로 치켜들었다.
손끝에서 울려 퍼진 딱, 소리와 함께 정환은 의자에서 두 눈을 번쩍 떴다.
얼마나 졸았는지 깜깜했던 창밖은 어느새 푸른 새벽이 와 있었다.
‘꿈인가?’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 생생했다.
정환은 벌떡 몸을 일으켜 조금 전까지 카로트가 서 있던 곳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정환이 그림 한 점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그림에는 마치 누군가 꼭 쥐었던 것처럼 손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
***
몇 달 후, 블랙해머 디자인 학교 입학식 당일.
“다음은 전체 수석 입학생에 대한 시상식이 진행되겠습니다. 수석 입학생 박정호 군은 단상 위로 올라와 주시길 바랍니다.”
이름이 호명되자 박정호는 몸을 일으켰다.
동시에 강당을 빼곡히 메운 학생들의 시선이 박정호에게 향했다.
“시험 종료 20분 전에 새로 그렸다던데 진짜 대박이다.”
“그게 정말이었어?”
“대박이다. 그 짧은 시간에 그리고도 수석이라니…….”
사방에서 쏟아지는 시선이 민망한 듯 박정호는 머리를 긁적이며 단상으로 걸어 올라왔다.
단상에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렸다.
주변 시선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었다.
자신에게 패션 디자이너라는 꿈을 심어준 사람과 드디어 마주하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박정호는 단상을 사이에 두고 정환과 마주 섰다.
하지만 너무 떨리는 마음에 도무지 정환과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아주 훌륭한 그림이었습니다. 앞으로도 모두의 허를 찌르는 작품을 보여주세요.”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정환이었다.
“가, 감사합니다. 그런데…….”
말끝을 흐리던 박정호가 처음으로 고개를 들었다.
“저, 저도 그렇게 훌륭한 디자이너가 될 수 있을까요?”
박정호가 더듬거리며 정환에게 물었다.
언젠가 정환을 만나게 된다면 꼭 물어봐야지, 하고 품어뒀던 질문이었다.
이런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질문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지금이 아니면 물어보지 못할 것 같았다.
“…그거 압니까? 사실 저는 학생 작품에 F를 줬습니다.”
“네?”
“하지만 박정호 군은 전체 수석을 거머쥐었죠. 아마 대학 생활을 무난히 마친다면 꽤 훌륭한 디자이너가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거기서 만족합니까?”
정환의 질문에 박정호의 순하던 눈빛이 한순간에 변했다.
정환은 그 눈빛을 잘 알고 있었다.
예술의 끝을 찾아 헤매던 자신과 무척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아뇨. 저는 예술의 끝을 보고 싶습니다.”
박정호는 자신이 뱉은 답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동경하던 사람 앞에서 예술의 끝을 보고 싶다는 당돌한 대답을 내놓았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겉치레라도 거짓말을 하고 싶진 않았다.
예술의 끝을 보고 싶다는 건 진심이었으니까.
그 대답을 들은 정환의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걸렸다.
“그래요. 그거면 됐습니다. 그 자세라면 박정호 군도 답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정환이 먼저 손을 내밀었고 박정호는 그 손을 맞잡았다.
“건투를 빕니다.”
두 사람이 손을 맞잡자 그것을 축하하듯 사방에서 박수가 쏟아졌다.
악수를 마친 박정호는 뜨거운 환호를 보내는 사람들에게 꾸벅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 정환 역시 박정호의 뒷모습을 보며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그토록 찾아 헤맸던 예술의 끝.
그 답이 지금 바로 눈앞에 있었다.
‘예술의 끝, 그것은 바로 사람에게 있어.’
완결
^직^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