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dwarf in his previous life, but an artistic genius in his current life RAW novel - Chapter 23
22화 동아리 (2)
다음 날, 아침.
정환은 한국예고 교문을 통과했다.
그런데 어제까지만 해도 텅 비어 있던 중앙 광장에는 어느새 수십 개의 동아리 부스가 설치되어 있었다.
아직 3월 초순.
쌀쌀한 바람이 불고 있었는데도, 2학년 학생들은 빨갛게 꽁꽁 언 손에 입김을 호호 불어 가며 부스에 홍보물을 붙이고 있었다.
그들은 이제 막 등교하던 1학년 신입생들을 보곤, 마치 먹잇감을 발견한 맹수처럼 돌변했다.
“1학년이다!”
“얘들아! 지금이야!”
부원들이 삽시간에 신입생들에게 달려들었다.
“판화의 매력에 흠뻑 빠져 보고 싶지 않니? 그렇다면 너도 판화 동아리다!”
“우리 동아리는 5년 연속 국제 판화 대회 입상한 전적이 있어!”
“조각도에 손을 다치면 그림은 물론이고, 공부도 못 하겠지? 차라리 만화 동아리는 어때? 우리는 BIAF 학생 만화 애니메이션 대전에서 3년 연속 금상을 차지했다!”
각 동아리 부원들이 서로 경쟁하듯 실적을 자랑하며 동아리를 홍보했다.
신입생들 역시 서로 관심이 가는 동아리 부스 앞에 발을 멈추고 구경했다.
그런데 서미동과 연기동은 홍보 부스가 없었다.
‘과연, 홍보할 필요도 없는 동아리라더니.’
정환은 부스들을 찬찬히 살폈다.
그런데 중앙 광장에서 멀리 벗어난 곳에 아주 허름한 부스 하나가 설치되어 있었다.
‘저런 곳에도 부스가?’
외진 곳에 덜렁 설치된 부스라니.
호기심이 생겼다.
정환은 그 앞에 다가가서 부스에 적힌 동아리 이름을 읽었다.
“패션 디자인 동아리 유어드림?”
뭔가 이상했다.
패션 디자인 동아리라면 꽤 인기가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러면 중앙 광장에 부스를 설치할 법도 한데, 왜 이런 구석에 있는 걸까?
부스 안에서 새어 나온 부원들의 한탄이 들려왔다.
“1등으로 왔는데도 다른 동아리에 자리나 뺏기고, 이게 뭐냐?”
“신생 동아리라 그렇지, 뭐. 1년 동안 아무 성과도 없었으니 당연한 거 아니겠냐?”
정환은 동아리 부스를 자세히 살폈다.
부원들이 직접 제작한 것처럼 보이는 옷들이 낡은 마네킹 위에 걸려 있긴 했지만, 다른 동아리들처럼 실적을 자랑하는 문구나 홍보물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즉, 내세울 게 하나도 없다는 뜻이었다.
‘신생 동아리, 게다가 실적도 전무. 다른 동아리에 밀릴 수밖에 없겠지.’
그때, 몇몇 신입생들이 주변을 지나갔다.
“패션 디자인 동아리?”
“이런 동아리도 있었네? 한번 볼까?”
“아, 됐어. 아무 실적이 없잖아. 가입해서 활동해 봤자 생기부에 아무것도 못 쓸걸? 시간 낭비야.”
말소리를 들은 부원들이 헐레벌떡 부스 밖으로 나왔다.
“패션 디자인 동아리 유어드림입니다!”
“한번 보고 가세요. 저희가 직접 디자인하고 만든 옷이에요…….”
부원들이 딱딱하게 얼어붙은 몸을 삐걱대며 열심히 홍보했다.
하지만 신입생들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부원들이 실망 가득한 표정으로 돌아서자 뒤편에서 한 남학생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좀 더 적극적으로 홍보해! 올해 신입 부원 못 받으면 우리는 망해! 폐부된다고!”
“그건 잘 아는데…….”
“부장, 아무도 관심이 없어.”
부스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남학생.
패션 디자인 동아리의 부장인 모양이었다.
“잘 봐. 홍보는 자신감이야!”
그는 멀찍이 지나가던 신입생들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우렁차게 소리쳤다.
“패션 디자인 동아리, 유어드림입니다! 저희가 만든 옷 보고 가세요!”
하지만 반응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신입생들이 연달아 무시하며 지나가자 유어드림 부장도 고개를 푹 떨궜다.
털레털레 돌아오던 그는 근처에 서 있던 정환에게도 말을 걸었다.
“패션 디자인 동아리 유어드림……. 뭐야.”
그러더니 갑자기 정환의 얼굴을 보곤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그냥 돌아서자 정환이 호기심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왜 그냥 가세요?”
“네가 누군지 아니까. 너 미술과 수석이지? 어차피 서미동에 가입할 생각이잖아.”
“음, 가입 권유를 받긴 했지만…….”
“유진우가 직접?”
유어드림 부장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녀석이 직접 권유를 했다고? 선배들한테 어지간히 시달렸던 모양이네.”
“아는 사이인가요?”
“알다마다. 잘 아는 사이지.”
정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서미동 부장과 유어드림 부장.
두 사람 사이에는 전혀 접점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유진우가 선배들한테 시달렸다는 건 또 무슨 이야기일까?
정환은 그 관계가 궁금했지만, 더 궁금한 게 따로 있었다.
“저 옷들, 정말 직접 만드신 거예요?”
“물론이지. 가까이 와서 봐.”
정환은 마네킹을 천천히 살폈다.
코트를 걸친 남자 마네킹부터 라이더 재킷을 입은 여성 마네킹까지, 종류도 다양했다.
‘대단한데?’
분명 서툰 부분도 있었지만, 고등학생이 손수 만들었다고 보기엔 어려울 정도로 놀라운 퀄리티의 옷들이었다.
정환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이거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디자인하고 만드신 거예요?”
“물론이지!”
“굉장히 꼼꼼하게 작업하셨네요. 어지간한 컨템퍼러리 브랜드의 마감만큼 섬세해요. 쉽지 않았을 텐데.”
“너 그 차이를 알아보는구나?”
전생에서 정환은 옷을 직접 만들어 입었던 경험이 있었다.
칼로스 대륙에서 유행하던 옷이 마음에 안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때의 경험 덕분일까, 그는 이들이 만든 옷에 들어간 정성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가 명품 수선 일을 하시거든. 어깨너머로 보고 배웠어. 거기서 내가 좀 방법을 바꿔 봤지.”
“눈썰미, 손재주 전부 대단하시네요.”
“어때? 괜찮아 보여?”
정환은 잠시 고민하다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몇 가지 아쉬운 부분들이 있어요.”
“응?”
“예를 들어 여기 코트 소매 부분. 디테일이 조금 떨어진다고 해야 할까요? 전체적으로 옷이 얌전해 보이니 소매 안감에 패턴을 넣는 것도 괜찮았을 것 같아요. 그게 부담스럽다면 단추를 바꾸는 것도 좋았을 것 같고. 그러면 포인트가 생겨서 눈이 한 번 더 갈 것 같아요.”
정환이 기다렸다는 듯 답을 쏟아 놓자 유어드림 부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가 옷을 만들면서도 소매 부분에서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녀석 봐라?’
부장이 소매 부분을 매만지는 사이, 정환은 동아리 부스 책상으로 시선을 옮겼다.
거기엔 스케치들이 잔뜩 쌓여 있었는데, 보아하니 코트를 구상할 때 그렸던 스케치 같았다.
스케치를 한 장, 한 장 넘기던 정환의 머리에 찌릿! 번개가 내려쳤다.
겉보기엔 촌스럽고 서툰 스케치였지만, 여기엔 어떤 확고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남들이 뭐라 해도 나만의 길을 가겠다는 의지.
그가 전생에서 예술가로서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조건 중 하나였다.
“열심히 만들었는데, 아무도 봐주질 않으니 맥 빠지네.”
유어드림 부장이 맥 빠진 목소리로 한탄했다.
“마네킹에 걸어 놓는 것보단 직접 입어서 보여 주는 게 더 홍보에 좋지 않을까요?”
정환의 정확한 지적에 유어드림 부장은 안 그래도 늘어져 있던 입꼬리를 더 늘어뜨렸다.
“그건 그렇지. 그런데 모델이 없어. 보시다시피 나는 170cm도 안 되는 짜리몽땅 단신이고 다른 부원들도 마찬가지야.”
정환은 마네킹에 걸린 옷을 다시 쳐다봤다.
이대로 마네킹에 걸어 놓기엔 너무 아까운 옷이었다.
그는 유어드림 부장에게 물었다.
“제가 한번 입어 봐도 될까요?”
***
서미동 동아리실.
창가에 앉아 있던 유진우에게 이희건이 바나나 우유를 건넸다.
“서미동은 올해도 부스가 없나? 건방진데.”
“굳이 설치할 필요가 없으니까. 그건 연기동도 마찬가지잖아. 그나저나 넌 왜 이정환을 연기동에 넣으려 하는 거야?”
“소문을 들었거든.”
이희건은 바나나 우유를 한 입 들이켜며 말했다.
“이정환이 TN에 캐스팅 제안을 받았다던데, 아마 99% 맞을 거야. 이쪽 바닥은 생각보다 좁으니까. 그런 인재를 연기동에서 놓칠 순 없겠지? 나야 TN 이야기를 들었으니 그렇다 쳐도, 너까지 절절맬 필요가 있냐?”
유진우가 바나나 우유에 빨대를 꽂으며 대답했다.
“이정환이 입시에서 그렸던 그림을 봤어. 인정하기 싫은데, 인정할 수밖에 없는 실력이었어.”
“그 정도라고?”
“게다가 이홍림 교수님의 특강에서도 좋은 그림을 그리고 칭찬까지 받았대. 그런 인재를 놓쳤다간 선배들한테 욕먹지. 게다가 미술과 수석은 서미동에 가입해야 해. 이건 전통이야.”
이희건은 혀를 내둘렀다.
“그 전통은 작년에 깨지지 않았나?”
유진우가 얼굴을 팍 찡그렸다.
이희건은 ‘내가 뭘?’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어 갔다.
“내 말 맞잖아. 작년 수석이었던 양민준은 서미동에 가입 안 했잖아. 차석이었던 너만 가입하고.”
“그 녀석 이야기는 꺼내지도 마. 그것 때문에 선배들한테 얼마나 잔소리를 들었는데.”
“너희 선배들도 참 어지간하다. 겨우 그런 걸 갖고…….”
이희건이 서툴게 위로하자 유진우는 쓴웃음을 지었다.
“어쩔 수 없어. 서미동은 부모님들끼리도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니까.”
“자식들 학연이 부모들의 사업에도 큰 도움이 된다는 거지? 징그럽다, 정말. 그런데 저 구석엔 학생들이 왜 이렇게 몰려 있는 거야?”
창밖을 보던 이희건이 눈가를 살짝 찌푸렸다.
그때 동아리실 문이 벌컥, 열리며 부원 하나가 뛰어 들어왔다.
“저, 저기 밖에!”
***
20분 전.
유어드림 부장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정환에게 되물었다.
“네가 이 옷을 입어 보겠다고?”
“네. 옷을 직접 입고 중앙 광장 쪽으로 가서 학생들에게 보여 주면 홍보가 더 잘될 것 같거든요. 어떠세요?”
유어드림 부장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마네킹에 걸려 있는 걸 보는 것과 모델이 착용한 걸 보는 건 다르긴 하겠지.”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부원들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한마디씩 덧붙였다.
“그래도 핏을 좀 맞춰야 하지 않을까?”
“키가 커서 바지 기장은 괜찮을 것 같은데 다른 부분은 어떨지 모르겠네.”
그럴 만도 했다.
그들이 만든 옷은 판매 목적으로 일반인들에게 맞춘 옷이 아니니까.
옷이 가장 이상적으로,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비율로 제작했기에 웬만큼 팔다리가 긴 모델이 아니고선 소화하기가 어려웠다.
패션 화보 촬영 현장에서도 이런 이유 때문에 옷에 집게나 핀을 꽂아 핏을 맞추는 경우가 빈번했다.
정환 역시 그들이 우려하는 바를 알았지만 크게 개의치 않고 대답했다.
“일단 입어 볼게요.”
당연한 일이었다.
정환은 눈썰미만으로 옷이 딱 맞을 거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정환이 교복 재킷을 벗고 부스 안으로 향했다.
그리고 몇 분 후 부스 문이 다시 열렸다.
그와 동시에 유어드림 부장과 부원들은 동시에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야…….”
“말도 안 돼!”
“저, 정말 이게 우리 옷이라고?”
집게? 핀?
전부 필요 없었다.
마치 옷은 처음부터 정환을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핏이 완벽했으니까.
정환은 이러한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거울 앞에 서서 몸을 한 바퀴 돌리며 말했다.
“괜찮은데요? 이 정도면 볼품없는 마네킹으로 동아리를 홍보하는 것보다 낫겠어요.”
정환의 말에 유어드림 부장과 부원들은 이렇다 할 대꾸도 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정환이 옷을 입고 모습을 드러낸 순간, 단순히 옷이 괜찮다는 생각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아름다움의 극치를 맛본 것 같은 기분.
보면 볼수록 짜릿했고 어느 순간부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옷이 괜찮았기 때문에 이런 상황이 펼쳐지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정환의 외모가 뛰어났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
이제 어떤 것이 정답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이라는 생각.
그렇게 연신 감탄사만 내뱉던 유어드림 부장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답을 냈다.
‘아니, 옷이 아니야. 이정환이야. 이정환의 외모가 완벽했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도출된 거야.’
그런 까닭에 유어드림 부장은 정환에게 패션 디자인 동아리 홍보를 맡기는 게 맞는지 의문이 들었다.
이 정도면 옷이 아니라 정환이 홍보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을 더 이어 나가기 전에 정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 볼까요?”
정환은 망설임 없이 중앙 광장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갔고 뒤늦게 유어드림 부장이 정신을 차리고 외쳤다.
“자, 잠깐만! 같이 가!”
***
잠시 후.
중앙 광장에 도착한 유어드림 부장은 옷이 아니라 정환이 홍보될 것 같다는 생각을 고쳐먹을 수밖에 없었다.
“구경하고 가세요! 판화 동아리입니…….”
“바이올린 동아리, 파가니니…….”
정환이 모습을 드러냄과 동시에 각자 홍보 활동을 펼치고 있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작아졌기 때문이다.
“응? 분위기 왜 이래?”
조금 전까지 부스를 열심히 구경하던 신입생들이 전부 고개를 돌려 같은 곳을 쳐다봤다.
그리고 그들의 표정에 떠오르는 감정은 전부 같았다.
경악.
바로 경악이었다.
그렇게 정환이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곳곳에서 작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대박. 쟤 미술과 수석 맞지? 비율이 원래 저렇게 좋았나?”
“왜 연기동에서 입부 권유를 했나 궁금했는데 그럴 만하네.”
“다 가졌네, 다 가졌어.”
근처를 지나가던 미술과 교사들도 발걸음을 멈추고 놀라더니 한마디씩 덧붙였다.
“와……. 저게 뭐야?”
“이정환? 이정환 아니에요? 원래 쟤가 저렇게 잘생겼나? 뭐가 다른 거지?”
“옷이요. 옷이 달라요. 저거 패션 디자인 동아리 애들이 밤새워서 만들던 거 아녜요?”
“그렇네요. 마네킹에 걸려 있을 땐 몰랐는데, 옷이 되게 예쁘네요. 감각 있어요.”
그렇게 예상보다 훨씬 많은 인파가 모여들었고 정환은 그 사실에 의아함을 느꼈다.
자신이 느끼기에 이 옷이나 스스로의 외모가 이 정도의 인파를 모을 만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뭐지? 내가 생각한 것보다 다른 동아리의 홍보 수준이 낮은 건가?’
어쨌든 정환으로서는 나쁘지 않은 결과였고 정환은 유어드림 부장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이목을 모은 것 같은데, 다시 부스로 돌아갈까요?”
그러자 유어드림 부장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서 있다가 한발 늦게 정환의 말에 대답했다.
“그, 그래!”
그리고 정환을 바라보는 유어드림 부장의 표정에는 경외의 시선이 섞여 있었다.
이제 정환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렇게 정환은 피리 부는 사나이라도 된 것처럼 단 몇 분 만에 수많은 학생과 함께 유어드림 동아리 부스로 돌아왔다.
하지만 모두가 이 일을 좋게 생각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