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dwarf in his previous life, but an artistic genius in his current life RAW novel - Chapter 41
39화 대한 예술제 (1)
6월 말. 기말고사가 끝났다.
유어드림 부원들도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였다.
“1학기가 순식간에 지나갔어.”
“그렇지? 실습하다가 경연 준비에 이어서 캡슐 컬렉션 마치고, 우리는 바로 기말고사까지 달렸으니까. 하지만 아직 하나 더 남아 있다는 사실.”
“대한 예술제 말이지?”
대한 예술제.
기말고사가 끝나고 7월 중순에 열리는 동아리 행사였다.
대개 동아리 행사 같은 학교 축제는 여름 방학이 끝난 후 가을에 진행하는 학교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한국예고의 경우는 좀 달랐다.
방학 동안 해외로 나가는 학생들이 많았기에 그 기간을 앞당겨서 여름 방학이 시작되기 전에 예술제를 개최했다.
1년에 한 번 있는 행사다 보니 각 동아리에서도 힘을 잔뜩 줬다.
그러다 보니 예술제는 입학식 공연만큼이나 유명해졌고 이 예술제를 보러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양민준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번 예술제가 중요해. 우리 동아리의 인상을 강하게 심어 줘야 내년에 신입 부원들이 많이 들어올 테니까.”
이재철이 양민준에게 물었다.
“생각해 둔 건 있어?”
“우리 유어드림은 패션쇼를 개최할 거야. 비록 작년에는 신생 동아리여서 아무것도 못 했지만 올해는 달라.”
2학년 부원들은 작년에 겪었던 굴욕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는 제대로 만든 옷이 한 벌도 없어서 양민준이 그렸던 크로키만 벽에 붙여 놨다.
예술제는 이틀 동안 화려하게 이어졌지만 엉성한 유어드림 부스에 구경하러 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4명의 부원은 그저 손가락만 빨면서 다른 동아리의 행사만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봤다.
그러나 올해는 다를 것이다.
이는 유어드림 부원들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이 실전 같은 연습과 내부 경연, 그리고 캡슐 컬렉션까지 거치면서 부끄럽고 초라하기까지 했던 작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성장했다.
내부 경연을 위해 만들었던 여덟 벌의 옷이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명색이 패션쇼인데 마네킹에 옷만 덩그러니 걸어 놓을 순 없잖아?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디자인부터 조명, 무대 연출, 모델, 스타일링, 헤어 메이크업까지. 누군가 이 모든 걸 진두지휘해야 해. 그래야만 이 패션쇼를 성공시킬 수 있을 테니까.”
그때 윙, 양민준의 핸드폰이 울렸다.
문자를 확인한 양민준이 말했다.
“철웅 쌤 문자야. 동아리 대표들은 실기실로 모두 모이래.”
하지만 양민준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정환아. 우리 패션쇼를 진두지휘할 총괄 디렉터를 네가 맡아 줬으면 해.”
이정환이 눈을 번쩍 떴다.
“네? 제가요?”
그가 손사래를 치며 거절했다.
물론 디렉터 자리를 맡아 보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규모를 떠나서 어떤 쇼를 처음부터 끝까지 연출한다는 경험은 아무나 할 수 없으니까.
이 경험은 정환이 앞으로 연출과 관련된 일을 할 때도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하지만 정환은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감사한 제안이지만 제가 그런 막중한 자리를 맡을 순 없어요. 이런 활동은 생활 기록부에도 반영되잖아요. 이번 기회는 다른 선배님들께 먼저 돌아가는 게 맞을 듯해요.”
단순 동아리 활동도 아니라, 행사 자체를 연출했다는 이력은 분명 대입에도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었다.
정환은 이 기회가 자신보다 당장 내년부터 대입을 준비해야 하는 2학년들에게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양민준은 이러한 정환의 마음을 읽은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사실 네가 그렇게 거절할까 봐 이미 2학년들끼리 이야기를 나눴어. 우리 패션쇼를 패션쇼답게 보여 줄 능력이 있는 사람은 바로 너뿐이야. 경연에서도 조명을 써서 1분짜리 쇼를 만들었잖아. 이건 학년이나 나이가 중요한 게 아니야.”
내부 경연에서 정환이 짧은 쇼를 연출했던 그때, 양민준은 직감했다.
정환이 이번 예술제에서 디렉터를 맡아야 한다는 사실을.
다른 2학년들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사실을 증명하듯 오가을을 비롯한 다른 1학년 학생들도 서로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환은 이것을 특혜라고 생각했지만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달랐다.
이는 오히려 무거운 책임을 지워 준 것이었다.
그만큼 처음 동아리의 이름을 걸고 패션쇼를 선보인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부담스럽겠지만 우리도 최선을 다해서 도울게.”
양민준의 제안을 이재철이 거들었다.
그와 동시에 유어드림 부원들의 모든 시선이 정환에게 모였다.
정환으로서는 긍정적인 대답을 내놓을 수밖에 없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그 순간, 정환의 머릿속에서 패션쇼와 관련된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렇게 한참 머릿속에 떠오르는 장면을 가슴속에 되새긴 정환은 주먹을 꼭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와 동시에 유어드림 부원들 사이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
모두의 박수를 받은 뒤 정환은 실기실로 향했다.
거기엔 유진우와 이희건을 비롯해 먼저 도착한 2학년 동아리 대표들이 몇몇 있었다.
“뭐야? 1학년이잖아.”
“유어드림은 올해 예술제도 포기한 거야?”
“양민준이 뭐 이것저것 하는 거 같더니, 결국 그렇게 됐나 보네.”
유어드림과 양민준을 비웃는 2학년 대표들.
정환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건만 유진우와 이희건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조용히 해.”
한국예고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서미동과 연기동의 부장들이 그러자 다른 대표들도 입을 다물었다.
그사이 구철웅이 커다란 수첩 하나를 손에 쥔 채 실기실로 들어왔다.
“다들 왔구나? 자, 올해는 또 다들 어떤 예술제를 기획하셨을까?”
“애니 동아리, 판화 동아리는 전부 작년이랑 똑같아요. 광장 근처에 부스 펼쳐 놓고 작품 전시를 할 예정입니다.”
“서미동은? 너희도 작년이랑 똑같니?”
유진우는 잠깐 머뭇거렸다.
유어드림의 행사 내용을 먼저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철웅의 질문을 그냥 넘길 수 없었고 유진우가 대답했다.
“아뇨. 작년이랑 좀 달라요. 작은 사생 대회 같은 걸 열어 볼까 생각 중이에요.”
“사생 대회?”
“네. 보름 정도 먼저 공지해서 학생들에게 그림을 준비할 시간을 주고 예술제 때 이를 중앙 광장에 전시하면서 동시에 평가도 할 생각이에요.”
구철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작년이랑은 다르네. 그런데 기말고사를 끝낸 학생들이 사생 대회에 참여할까?”
“누가 평가하냐에 따라 달라지겠죠. 그러잖아도 말씀드리려 했는데 심사위원으로 외부 손님을 초청하려 합니다.”
“외부 손님?”
음악과에서도 간혹 초청을 받은 연주자들이 학교에서 학생들과 합주 행사를 한 적이 있었다.
미술과라고 못 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이러한 사실을 상기한 구철웅이 유진우에게 물었다.
“누구를 모셔 오려고?”
“알렉스 제이 작가님이요.”
“어, 뭐라고?”
생각지도 못한 이름을 들은 구철웅이 입을 떡 벌렸다.
“알렉스 제이?”
구철웅도 알렉스 제이와 그의 작품을 잘 알고 있었다.
사자의 형상을 한 존재가 백수의 상징 같은 파란 트레이닝복을 입고 휴대전화에 푹 빠져 있는데, 그 밑에 인간의 해골을 의자처럼 깔고 앉아 있다.
고전 명화,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라는 문구가 절로 떠오르는 그림이었다.
알렉스 제이의 그림에서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소름 돋는 표현력이었다.
옷감이나 털 같은 촉각적 요소들을 두 눈이 간지러워질 만큼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작가였다.
알렉스 제이의 나이는 이제 겨우 30대 초반.
하지만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뉴욕 현대 미술관에서 그의 작품을 소장하면서 크게 화제가 된 적 있었다.
‘한국 현대 미술관에서 알렉스 제이 전시회가 있다는 말은 들었는데…. 또 누구 부모가 힘을 쓴 건가?’
구철웅은 서미동 부원들의 집안을 전부 꿰고 있었다.
저번엔 서미동 실습으로 현대 미술관 관장 도슨트 투어까지 진행했으니, 알렉스 제이를 학교에 초청하는 것도 마냥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구철웅은 애써 당황한 기색을 감추며 말했다.
“음, 그래. 그런 작가님이 학교에 오신다면 학생들도 많이 참여할 수밖에 없겠네. 하지만 외부 손님을 초청 부분은 교장 선생님이랑 같이 논의해야 해. 이 부분은 다시 이야기하자.”
“네.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알렉스 제이 작가님이 따로 요청하신 게 있어요.”
“뭔데?”
“축제 당일 중앙 광장에서 라이브 드로잉을 보여 주고 싶으시대요. 학생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구철웅의 눈이 커졌다.
“라이브 드로잉? 정말이야?”
“네. 그 작가님이 라이브 드로잉을 좋아하시잖아요. 지난번엔 유튜브 라이브로 24시간 내내 작업 방송을 켜 놓기도 했고.”
뉴욕 미술관에서 작품을 소장한 작가의 라이브 드로잉을 눈앞에서 볼 수 있다니.
구철웅은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설렜다.
“어. 그래. 그럼 꼭 중앙 광장을 써야겠구나. 우선 알겠어.”
구철웅은 애써 놀란 티를 감추며 정환에게 시선을 돌렸다.
“응? 민준이는 무슨 일 있니?”
“아뇨. 제가 유어드림 대표로 나왔어요.”
“어? 정말?”
서미동에선 알렉스 제이로 그를 놀라게 하더니, 유어드림은 정환이가 그를 놀라게 했다.
‘동아리 대표로 예술제에 나오면 생활 기록부에 적을 게 많을 텐데, 민준이가 이걸 포기했어?’
보아하니 양민준이 일부러 정환에게 특혜를 준 것 같지 않았다.
사실 동아리 대표로서 행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준비하는 건 중노동이나 마찬가지니, 특혜라고 볼 수도 없었다.
“음. 그래. 그럴 수 있지. 유어드림은 이번 행사에 뭘 할 거니?”
“중앙 광장에서 패션쇼를 진행할 거예요.”
정환의 말을 들은 2학년 대표 몇몇이 비웃었다.
“패션쇼? 작년에는 아무것도 없어서 크로키 붙여 놓은 게 전부였잖아.”
“그냥 부실에서 하는 게 좋지 않아? 굳이 광장까지 쓸 필요 없을 텐데. 뭐, 무슨 컬렉션에 나갔다고 해 봐야 옷은 한 벌뿐이잖아. 너무 썰렁하겠다.”
유진우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들은 유어드림이 얼마만큼 성장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멍청한 놈들.’
구철웅도 머리를 긁적였다.
그도 유진우처럼 유어드림이 작년과는 확연히 달라졌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유어드림 부원들이 그린 미스틱 실습을 거쳐서 캡슐 컬렉션에서도 좋은 성과를 거뒀다는 건 학교에서도 유명한 이야기였으니까.
‘난감하네. 작년 같았으면 그냥 서미동에 중앙 광장을 내주면 끝인데, 하필 유어드림이랑 겹치잖아?’
쉽게 답이 나올 문제가 아니기에 구철웅은 조금 더 고민해 보기로 했다.
“일단 두 동아리 모두 구체적인 광장 사용 계획서를 제출해. 그때 다시 논의해 보자.”
“네.”
***
짧은 회의가 끝나고 모두 실기실을 빠져나갔다.
“이정환.”
유진우가 정환을 불러 세웠다.
“중앙 광장은 그냥 포기하고 다른 장소를 알아보는 게 어때?”
“구체적인 협의는 구철웅 선생님이 다시 하자고 말씀하셨는데요.”
“알렉스 제이 작가가 직접 요청했어. 중앙 광장에서 꼭 라이브 드로잉을 진행하고 싶다고.”
유진우가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이걸 방해할 생각이야?”
잠자코 듣고 있던 정환이 나지막이 말했다.
“선배님. 대한 예술제는, 한국예고를 다니고 있는 학생들을 위한 축제 아닌가요?”
“……!”
“알렉스 제이 작가가 한국예고 학생인가요? 그건 몰랐는데.”
정환은 입만 꾹 다물고 있는 유진우를 뒤로한 채 돌아섰다.
그리고 생각했다.
‘유진우가 우리 동아리를 많이 의식하고 있는 모양이구나. 그런데 이걸 이렇게 대놓고 티를 내는 게 맞나? 아직 어려서 그런 건가?’
그렇게 유어드림 부실로 돌아온 정환은 실기실에서 나눴던 대화를 전달했다.
“뭐? 알렉스 제이?”
“유명한 사람이야?”
“유명하지. 좀 또라이 같은 기질이 있어.”
이재철이 핸드폰으로 알렉스 제이의 라이브 드로잉 영상을 보여 줬다.
커다란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던 그가 갑자기 관객석에 난입해서 관객의 옷에 그림을 그리는 모습이었다.
“평상시엔 멀쩡한데, 꼭 라이브 드로잉을 하면 저런 미친 사람이 되더라고.”
“하. 그런데 알렉스 제이가 미술관에서 전시를 마치고 바로 우리 학교로 오는 거면 그 사람을 따라오는 손님들도 많겠다. 전부 서미동 전시회로 넘어가겠는데?”
양민준도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이 우르르 움직이면 우리 부스를 보던 사람들도 전부 따라갈 거야. 그게 군중 심리니까.”
유어드림 부원들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알렉스 제이에게 중앙 광장을 빼앗긴다면, 패션쇼를 진행할 공간 자체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환은 오히려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꼭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괜찮아요. 저희는 그 사람들도 같은 편으로 만들면 돼요. 그걸 가능케 하는 게 바로 쇼와 연출의 힘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