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dwarf in his previous life, but an artistic genius in his current life RAW novel - Chapter 47
45화 LE (1)
오현섭은 옆 교실에서 들리는 학생들의 목소리에 발을 멈췄다.
그들은 지난주에 있었던 예술제로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연기동 연극 봤어? 진짜 재밌더라.”
“거기 연극은 원래 유명하잖아.”
“알렉스 제이 드로잉도 장난 아니었어. 몇 시간 동안 그림 그리는데도 손 한 번 안 떨던데?”
“근데 서미동 말이야. 솔직히 그 드로잉 빼고는 별로 볼 게 없지 않았어?”
학생 하나가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었구나?”
“전시된 그림도 잘 모르겠더라. 1등 한 그림 말고는 다 거기서 거기였어.”
“1등이 이정환이었지? 진짜 미친놈이야. 패션쇼 준비하느라 그림 그릴 시간도 없었을 텐데.”
“패션쇼. 맞아. 제일 대박인 건 유어드림이었어.”
유어드림 이야기가 나오자 학생들은 이구동성으로 말을 쏟아 냈다.
“패션쇼 보고 기절하는 줄 알았잖아.”
“맞아. 옷 진짜 예쁘더라. 그중에 몇 벌은 소장하고 싶던데, 방법 없을까?”
“난 무엇보다 쇼 연출이 진짜…. 무슨 콘서트장에 간 느낌이었어.”
오현섭은 그 이야기를 듣고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사실 쇼 현장에는 오현섭도 있었다.
원래 오현섭은 유어드림 패션쇼를 처음부터 끝까지 볼 생각이 없었다.
살짝 구경만 하고 빠져나올 요량이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애초에 패션쇼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다양한 목소리가 녹음돼 있는 오프닝 멘트를 듣는 순간, 오현섭은 마치 마법에 걸린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쇼에 매료됐고 피날레까지 보고 말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오현섭은 손바닥이 빨갛게 부어오를 정도로 환호를 보내고 있었다.
런웨이 위에 서서 관객들에게 인사하는 유어드림 부원들에게.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총괄한 정환에게.
그렇게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서미동으로 돌아온 오현섭은 패션쇼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유진우와 알렉스 제이가 맞붙는 모습을 보게 됐다.
그리고 결국 알렉스 제이의 뜻대로 정환의 그림이 1위를 차지하는 모습까지 확인했다.
서미동에 대한 실망감과 정환에 대한 놀라움.
오현섭은 정환이 예술제의 진짜 주인공이 됐음을 확신했고 이것은 다른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예술제의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정환이 홀로 가져간 셈이었다.
그렇게 정환이 예술제의 주인공이 되는 과정을 실시간을 지켜본 오현섭은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단순히 정환의 재능이 뛰어나서?
아니었다.
오현섭이 충격을 받은 이유는 정환이 그간 보여 줬던 모습 때문이었다.
정환은 주변 상황과 시선에 개의치 않고 자신의 꿈을 꿋꿋이 밀고 나갔고 마침내 꿈을 이뤄 냈다.
그뿐만 아니라 그와 뜻을 함께했던 이들의 꿈까지 런웨이 위에서 펼쳐졌다.
오현섭에겐 정환의 이런 모습이 너무나도 눈부시게 느껴졌다.
그리고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자신도 정환과 함께 자신의 꿈을 현실로 만들어 내고 싶다는 생각.
그렇게 다짐하니, 어느새 오현섭은 컴퓨터 앞에 앉아 동아리 변경 신청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게 지금 오현섭이 유어드림 부실 근처에 서 있는 이유였다.
하지만 오현섭은 유어드림 부실 앞에 서고도 섣불리 그 문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한 가지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이정환이 날 받아 줄까?’
한국예고 입시를 치렀을 때부터 오현섭은 정환을 방해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런 까닭에 미운털이 단단히 박혔을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현섭도 여기서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정환이 모든 상황에 맞섰던 것처럼 자신도 그럴 생각이었다.
하물며, 정환이 동아리 변경 신청을 거절한다 해도 상관없었다.
오현섭이 이 신청서를 냈다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어머니의 그늘에서 벗어나서 한 걸음 나아갔다는 게 증명되는 거니까.
그만큼 오현섭으로서 서미동을 탈퇴한다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오현섭은 한 차례 심호흡을 한 후 유어드림의 부실 문을 열었다.
그런데 이미 부실은 학생들로 가득 차 있었고 그들 사이로 정환과 양민준은 정신없이 학생들의 동아리 변경 신청서를 받고 있었다.
어찌나 바쁜지 현섭에게 눈길 한 번 줄 수 없을 정도였다.
오현섭은 문 앞에 선 채 잠시 망설이다가 부실 벽에 걸린 옷들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정환이 컬렉션과 패션쇼에서 선보였던 옷들이 쭉 보였고 그 뒤로 알렉스 제이가 1위로 뽑은 그림까지 세워져 있었다.
그것을 확인하자 오현섭의 입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내가 이런 녀석을 잠깐이나마 라이벌로 생각했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그때, 정환의 시선이 오현섭에게 향했다.
그와 눈을 마주친 오현섭은 바짝 긴장했다.
각오를 하긴 했지만 정환이 자신의 동아리 변경 신청을 받아 주지 않을까 걱정이 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정환은 오현섭을 보며 부드럽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현섭이 왔구나. 혹시 동아리 변경 신청하러 왔니?”
***
오후 다섯 시.
정환은 기지개를 쭉 켰다.
정환의 앞에는 동아리 변경 신청서가 잔뜩 쌓여 있었다.
“아침부터 정신없었지? 고생했어.”
양민준이 정환의 어깨를 토닥였다.
“아니에요. 고생은 선배가 더 하셨죠.”
유어드림이 예술제에서 보여 준 모습 덕분일까?
아침부터 학생들이 물밀듯이 몰려와 동아리 변경 신청서를 냈다.
덕분에 유어드림 부원들은 쉬는 시간마다 교대로 변경 신청서를 받아야만 했다.
“변경 신청한 애들만 서른 명이 넘네요.”
정환이 신청서를 다시 세며 말했다.
“그중에는 허수도 섞여 있을 거야. 진짜 패션 디자인에 관심이 있는 학생만 받아야 하니까 내일부터 한 사람, 한 사람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 봐야지.”
양민준은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개학할 때만 해도 폐부 걱정하던 동아리였는데, 이젠 골라 받아야 할 상황이네. 전부 네 덕분이야.”
정환이 양민준이 덧붙인 말에 겸손하게 대답했다.
“아니에요. 선배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아서 이렇게 성공할 수 있었던 거죠.”
“짜식. 하여튼 재수 없어. 잘생긴 게 겸손하기까지 하고. 어쨌든 피곤할 텐데 먼저 들어가. 여긴 내가 정리할게.”
“네. 그럼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그렇게 먼저 부실을 빠져나온 정환은 흔들리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눈을 감자 지난주에 있었던 예술제가 스쳐 지나갔다.
많은 일이 일어났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역시 김효빈과 만났던 순간이었다.
사실 정환은 유아림과 대화를 나누기 전까진 LE의 제안을 거절하려 했다.
아직 그린 미스틱에서 해야 할 일이 몇 가지 더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일은 바로 유아림에게 은혜를 갚는 일이었다.
결과적으론 유아림이 덕을 보긴 했지만, 정환이 유아림에게 신세를 진 건 사실이었다.
애초에 유아림이 아니었다면, 정환은 자신의 꿈을 이루기까지 조금 더 먼 길을 돌아가야 했을 테니까.
유아림 덕분에 정환은 남들보다 몇 배나 시간을 아낄 수 있었다.
그러니 여기에 대해 보답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다른 사람의 눈에는 LE 제안을 거절하고 그린 미스틱에 남는 게 시간 낭비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정환은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캡슐 컬렉션을 성공시키고 패션쇼를 만족스럽게 연출하며 어느 정도 자신이 궤도에 올라섰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말인즉, 정환이 원한다면 유아림을 통해서 조금 더 나은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정환은 이 기회를 이용해 그린 미스틱의 브랜드 밸류도 크게 높이고 확실한 경력을 쌓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정환은 물론, 유아림에게도 도움이 되는 완벽한 전략이었다.
‘심지어 나는 이 일을 무조건 성공시킬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어.’
그랬기 때문에 정환은 굳이 LE의 제안에 목을 맬 필요가 없었다고 판단했다.
이게 정환이 거절 의사를 밝히려고 했던 이유였다.
‘하지만 짧지 않은 대화를 통해 디자이너님의 진심을 확인할 수 있었지.’
정환은 이러한 사실에 고마움을 느꼈다.
그리고 정환으로서는 이 또한 나쁘지 않은 선택지였다.
어쨌든 무슨 일을 벌이더라도 LE에서 성과를 낸다면 더 큰 주목을 받을 수 있을 게 확실하니까.
그렇게 정환은 김효빈의 제안을 최종적으로 받아들였고 그 사실에 만족한 김효빈이 미소를 지어 보이며 얘기했다.
“정식으로 결정된 건 아니지만, 정환 씨가 저희와 함께한다면 아마 더 플레이라는 브랜드의 수석 디자이너를 맡게 될 겁니다.”
정환은 이 이야기를 듣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새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싶다는 김효빈의 이야기에서 흥미로운 일이 벌어질 거라는 생각은 잠깐 했다.
하지만 그게 이렇게 바로 한 브랜드를 담당하는 일이 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랬기 때문에 정환은 이렇게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제가 더 플레이를 담당해도 괜찮은가요?”
솔직히 한편으로는 좀 의아했다.
LE 디자이너들의 고정 관념과 패배 의식을 깨는 방법이 꼭 이것만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효빈은 별문제가 없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당연하죠. 궁금한 게 많겠지만, 우선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에 하도록 합시다.”
그리고 김효빈이 돌아서기 전 한마디 말을 덧붙였다.
“너무 부담 가질 필요 없습니다. 어찌 됐든 저희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셈이니까요.”
두 마리 토끼?
정환은 김효빈이 마지막에 했던 말이 마음에 걸렸다.
아니나 다를까, 주말 동안 자료 조사를 해 보니 아동복 브랜드인 더 플레이는 이미 침몰하고 있는 배였다.
몇 년 동안 누적된 적자 때문에 LE에선 철수까지 고려하고 있다는 기사까지 있었다.
이를 본 정환은 김효빈이 왜 자신에게 더 플레이를 맡기려고 하는지 깨달았다.
‘날 바람잡이로 이용하겠다?’
자신을 통해 LE 소속 디자이너들을 자극하려는 것이었다.
아무리 사라질 브랜드라 해도 고등학생인 정환이 수석 디자이너로 들어왔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다른 브랜드 디자이너들의 분위기도 바뀔 것이다.
누군가는 위기감을 느낄 것이, 누군가는 향상심을 가질 것이 분명했다.
LE가 노리고 있는 건 바로 이것이었다.
물론 더 플레이 내부에서 큰 반발이 생겨나겠지만 상관없었다.
더 플레이는 어차피 접을 브랜드였으니까.
결국 정환이 LE에 적응할 때쯤 미련 없이 더 플레이를 접고 정환을 다른 부서에 보낼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정환은 여기까지 모두 추측한 후에 생각했다.
‘그래서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셈이라고 말한 거였어. LE 디자이너들을 자극하는 동시에 내게는 회사 경험도 시켜 줄 수 있으니까.’
어찌 보면 바람잡이보다 미끼라는 표현이 더 정확할 수도 있었다.
LE 디자이너들이 2인자라는 고정 관념과 패배 의식을 깨고 밖으로 튀어나오게 만들 미끼.
다른 이들이라면 이 사실을 깨닫고 불쾌해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정환은 오히려 이 상황이 흥미롭다고 생각했다.
정환에게는 이러한 상황을 이용할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
LE 그룹 본사 회장실.
이웅희 회장이 김효빈 실장에게 물었다.
“어때? 그 친구 만나 보니 괜찮아 보이던가?”
“예. 어디 하나 빠지는 데가 없더군요.
“그 정도였나?”
김효빈 실장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옷에 대한 감각만 뛰어난 줄 알았는데, 쇼 연출도 아주 탁월했습니다. 이 친구를 수석 디자이너로 영입했다는 소식이 회사에 퍼진다면, 계획대로 다른 디자이너들도 큰 자극을 받을 겁니다.”
“마음에 안 든다고 사표 던지는 디자이너들도 있겠지.”
“그런 디자이너들은 남아 있어 봤자 우리 회사의 발목만 잡을 뿐입니다. 오히려 제 발로 나가는 게 고마운 일이죠. 진짜 디자이너라면 이 상황에 자극을 받고 자신을 돌아보며 성장해야 합니다.”
김효빈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웅희 회장이 미소를 지었다.
2인자 타이틀을 벗기 위해 영국에서 갖은 고생을 해 가며 김효빈 실장을 데려온 보람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좋아. 그 정환이라는 학생은 자네가 잘 보듬어 주도록 해. 어쨌든 고등학생이지 않은가? 자기가 미끼 역할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상처받을 수도 있을 거야. 이왕 이렇게 된 거 적응이 충분히 끝나면 괜찮은 브랜드로 보내는 게 어떻겠나?”
“그러잖아도 미리 봐놓은 자리가 있습니다.”
김효빈의 대답을 들은 이웅희 회장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척하면 척이었다.
김효빈이 물었다.
“회장님. 더 플레이는 계획대로 내년 초에 접으실 겁니까?”
“물론. 그때 백화점 계약이 만료되니까. 마음만 같아선 지금이라도 정리하고 싶은데, 위약금 문제가 있으니 어쩔 수 없지.”
“알겠습니다. 그 시점을 앞당길 방법이 있는지도 찾아보겠습니다.”
“좋아.”
이웅희 회장도, 김효빈 실장도 더 플레이는 이미 끝난 브랜드로 여기고 있었다.
정환이 들어온다고 해서 상황이 달라질 거란 조금의 기대조차 없었다.
애초에 그들이 정환에게 바라는 건 더 플레이에서 활약하는 게 아니라 LE에 새로운 바람을 집어넣을 자극제 역할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큰 착각이었다는 걸 알아차리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