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dwarf in his previous life, but an artistic genius in his current life RAW novel - Chapter 53
51화 숨겨둔 힘 (2)
LE의 오픈 작업실.
디자이너 김형태는 한쪽에 앉아 두 팔을 걷어붙이고 생각나는 대로 메모와 낙서를 휘갈기며 아이디어를 짰다.
‘지금까지 없었던 디자인과 주제…. 뭐가 있을까?’
불과 몇 시간 전, 회의실에서 오간 싸움 따위는 이미 까맣게 잊은 지 오래였다.
지금 김형태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좋은 디자인을 향한 일념뿐이었다.
김형태의 목표는 뚜렷했다.
김효빈을 뛰어넘어 국내 최고는 물론, 세계에서도 인정받는 최고의 패션 디자이너가 되는 것.
그리고 김형태는 사실 자신이 김효빈 이상의 실력을 갖췄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김형태가 생각했을 때 자신이 김효빈과 비교해서 모자란 점은 단 하나, 명성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김형태는 이번에 반드시 자신의 주제와 디자인이 메인으로 선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내 실력이 김효빈보다 낫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을 테니까.’
심지어 LE의 대표로서 DDP 패션 위크에 쇼를 올렸을 때의 이득은 단순히 김효빈보다 나은 실력을 인정받는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제일 패션을 누르고 국내 최고의 하이엔드 패션 브랜드의 자리에 오를 수만 있다면, LE의 대표로 나섰던 디자이너 또한 국내 최고의 디자이너라는 타이틀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설사, 제일 패션에 밀려 LE가 2등을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국내에서 두 번째로 뛰어난 디자이너가 된다는 것도 충분히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아직 젊고 유망한 자신이었으니 꾸준히 LE의 대표로서 기회만 받는다면 빠른 시일 내에 제일 패션 또한 누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야. 그래도 이왕이면 단번에 1등을 하는 게 좋지. 1등을 하면 내 주제와 디자인을 가지고 그대로 4대 패션 위크에서 쇼를 선보일 수도 있으니까. 이번에는 뉴욕 패션 위크 차례였지, 아마?’
어느새 김형태는 다음 TF팀의 회의에서 자신의 주제와 디자인이 메인으로 채택될 거라고 가정한 채 생각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확실히 그게 가능해 제일 패션을 찍어 누를 수만 있다면 국내 최고의 디자이너라는 타이틀 외에도 실질적인 포상을 받는 게 가능했다.
4대 패션 위크.
이게 LE와 제일 패션이 국내 브랜드끼리의 대결에 불과한 DDP 패션 위크에 사활을 거는 가장 큰 이유였다.
DDP 패션 위크의 주최 측은 국내 하이엔드 패션 브랜드에 기회를 주자는 취지에 맞게 1위를 하는 곳에 4대 패션 위크 중 한 곳에 설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불과 몇 시간 전에 별 볼 일 없는 디자인을 선보인 김효빈마저도 해외에서 통했어. 그러니 내 주제와 디자인이 뉴욕 패션 위크 소개가 되기만 해도 분명 반응이 있을 거야.’
그렇게 김형태가 밝은 미래를 그리며 즐거워하고 있을 때였다.
최성원, 하은영이 함께 카페를 다녀왔는지 바닥을 보이는 커피를 들고 작업실로 들어왔다.
“아이고. 젊네, 젊어. 벌써 디자인을 짜고 있네.”
최성원이 큰 소리를 내자 김형태는 쥐고 있던 연필을 내려놓았다.
불청객들이 찾아왔으니 작업하긴 글렀기 때문이다.
하은영이 김형태의 스케치를 힐끗 보며 물었다.
“너무 초반부터 달리는 거 아녜요?”
“저도 쉬엄쉬엄하고 싶은데 김효빈 실장님의 시안을 보고 실망을 좀 많이 해서요. 그래도 뭐 하나 보여 주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김형태는 ‘내가 해도 그것보단 잘했을 거예요.’라는 말을 삼키며 대답했다.
김효빈의 이야기가 나오자 최성원은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회장님은 어쩌자고 김효빈 같은 사람을 데려왔나 몰라. 그 이정환이라는 친구도 그렇고.”
하은영도 최성원의 이야기에 공감하며 말을 거들었다.
“좀 그렇죠?”
“좀이 아니라 많이 그래. 솔직히 우리 회사에 외부 사람이 들어와 잘된 적이 있나? 우리끼리 영차영차 했을 때가 결과는 항상 더 좋았지. 하여간 두고 봐요. 조만간 김효빈도, 이정환도 다 나가떨어지고 뒷수습은 우리 몫이 될 테니까.”
“정말 그렇게 될까 봐 걱정이네요.”
하은영이 남은 커피를 입에 털어 넣은 후 목소리를 낮췄다.
“사실 주변 디자이너들도 말이 많거든요. 김효빈 실장이 이정환 데려와서 디자이너들 자극 주려는 게 영 못마땅하다고. 의도가 너무 보이잖아요?”
그런데 하은영의 이야기를 들은 최성원이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응? 이정환을 데려온 것에 그런 의도가 있었어?”
“설마 모르셨어요? 근데 왜 김효빈 실장님을…….”
“말했잖아. 난 외부 사람이 우리 회사 들어와서 이것저것 참견하는 것 자체가 싫다고. 항상 개혁이다, 혁신이다 일은 죄다 벌이면서 결국 나 몰라라 도망쳐 버리니까.”
“아…….”
김형태는 최성원, 하은영이 자신 바로 옆에 서서 들으라는 듯 관심도 없는 사내 정치 이야기로 잡담을 나누자 약간 짜증이 났다.
그래서 툭, 한마디를 던졌다.
“그래도 김효빈 실장님이 OPC에서 보여 줬던 성과는 인정해 줄 만하지 않나요? 이정환 디자이너도 더 플레이에서 나름 괜찮은 모습을 보여 줬고요.”
김형태의 이야기를 듣고 최성원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허, 하고 소리를 냈다.
“그래? 우리 형태 씨는 김 실장 디자인이 꽤 마음에 들었나 봐? 그럼 아까는 왜 깠대?”
“말씀드렸잖아요. 그냥 주제랑 시안이 너무 별로였다고. 그뿐이에요.”
“하여튼, 잘난 척은. LE에서 디자이너는 자기뿐인 줄 아나 봐.”
“…….”
김형태는 역시 말을 섞어 봐야 도움이 되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하며 다시 작업대로 시선을 옮겼다.
그 와중에 속으로 최성원의 험담을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저러니 회장님이 디자인 실장 자리를 김효빈한테 줬지.’
최성원이 LE 내에서 좋은 경력을 쌓아 온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 경력과 실력만 놓고 본다면 충분히 디자인 실장 자리에도 오를 법했다.
하지만 항상 저 입이 문제였다.
매사 부정적인 말밖에 안 하는 저 입.
이웅희 회장도 최성원이 디자인 실장이 된다면 회사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뻔히 알고 실장 후보에 올리지 않은 게 분명했다.
그리고 최성원과 동조하는 하은영도 별반 다를 게 없는 인간이었다.
물론 하은영 또한 만만치 않은 실력을 보유하고 있는 디자이너였다.
하지만 최근 수석 자리에 오른 후 사내 정치에 관여하려는 모습을 자주 보이며 좋지 않은 행보를 이어 가고 있었다.
‘이에 비한다면 이정환은…….’
김형태의 머릿속에는 잠깐 정환이 더 플레이에서 선보였던 디자인이 떠올렸다가 사라졌다.
확실히 정환은 다른 두 사람과 달랐다.
자신처럼 여전히 디자인을 향한 열정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김형태는 다른 디자이너들과 달리 정환을 약간 경계하고 있었다.
특히 정환이 더 플레이에서 선보였던 뉴트로를 뛰어넘는 클래식은 김형태에게도 다소 충격적인 작품이었다.
기본에 충실하면서도 핵심을 예리한 날 끝으로 찌르는 게 나이답지 않게 노련했다.
‘하지만 기대가 좀 되는 정도…. 딱 거기까지야. 어차피 내 밑일 테니까.’
김형태가 다시 승부욕을 불태우며 작업에 열중하자 잡담을 나누던 최성원과 하은영의 말수도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두 사람은 서로 인사도 없이 각자의 사무실로 돌아갔다.
***
한편, 정환은 김효빈의 사무실에서 나와 새롭게 배정받은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의자에 등을 편안히 기댄 채 김효빈과 나눴던 대화를 복기했다.
‘국내 최고의 디자이너 타이틀, 그리고 4대 패션 위크에 내 이름으로 쇼를 올릴 수 있는 기회라…. 이 정도면 전력을 다해도 나쁘지 않겠어.’
정환은 TF팀 첫 회의에서 어째서 김효빈이 부족한 주제와 디자인을 보여 줬는지 그 이유를 이미 알고 있었다.
김효빈과 대화하면서 그 사실을 딱히 짚어 내지 않았지만 오랜 경험으로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 역시 전생에서는 수많은 이들과 협업을 해 왔기 때문이다.
특히 자기 실력에 자부심이 대단한 드워프 수십, 수백 명과 함께 작업했던 적도 있었다.
이런 경험 덕분에 정환은 김효빈이 왜 이런 식의 전략을 택했는지 알 수 있었다.
‘일부러 자신의 부족함을 내비쳐서 다른 이들의 호승심을 건드린다. 그리고 그들이 최고의 작품을 가져왔을 때 이를 찍어 누르면 자기 목소리에 확실한 힘을 실리게 되지.’
최선은 아니었지만 팀을 하나로 만드는 나름대로 효율적인 전략이라고 할 수 있었다.
굳이 최선을 따지자면 모두가 처음부터 솔직해질 수 있게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었다.
‘아쉽게도 김효빈에게는 이러한 리더십은 없는 듯하군. 애초에 날 데려온 것부터 의도가 불순했지.’
김효빈의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정환으로서는 크게 중요한 부분이 아니었다.
정환은 이곳에서 뼈를 묻으며 일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LE 또한 정환에게 있어 거쳐 가야 하는 하나의 단계에 불과했다.
자신만의 브랜드를 만들기 위해 거쳐 가야 하는 단계.
그보다 중요한 사실은…….
‘다른 사람들을 찍어 누르기 위해 김효빈도 다음 회의에선 베스트 작품을 가져올 거라는 것.’
바로 이 부분이었다.
심지어 정환이 경계해야 할 사람은 김효빈만이 아니었다.
김효빈에게 자극을 받은 최성원, 하은영, 김형태도 칼을 갈아 베스트 작품을 가져올 게 확실했다.
또한 이들을 이긴다고 해서 끝이 아니었다.
진짜 싸움은 DDP 패션 위크에서 펼쳐질 제일 패션과의 1위 다툼이었으니까.
뉴욕 패션 위크라는 먹음직스러운 상품까지 걸려 있는 만큼 제일 패션에서도 이를 악물고 최고의 디자인을 뽑아 올 게 분명했다.
‘재밌겠군…….’
정환은 진심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이 대결에 걸려 있는 상품이 달콤해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니었다.
드디어 자신이 전력을 다해도 되는 상대를 만났다는 사실이 정환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사실 돌이켜보면 정환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대결을 펼쳐 본 적이 없었다.
‘전부 전력을 다할 필요가 없는 상대들이었으니까.’
그림 대회에서 수많은 상을 휩쓸었을 때도 상대는 학생에 불과했다.
입시에서도 조금 수준이 나을 뿐 학생을 상대로 경쟁했다는 것은 같았다.
유어드림에 들어가 내부 경연과 예술제를 펼칠 때도 상대는 계속 학생이었다.
결국 날고 긴다는 한국예고 학생들조차 정환의 눈에는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아기들이나 다름없었다.
그랬으니 정환으로서는 전력을 다할 이유가 없었을 수밖에.
물론, 유아림의 인정을 받는 과정에서 정환은 대결 아닌 대결을 벌인 적 있었다.
하지만 유아림은 엄밀히 따지자면 대결 상대가 아닌 협력 관계였다.
더 플레이에서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성미주와 박기용은 프로 디자이너였지만 최고 수준의 실력자는 아니었다.
그나마 김예원이 나았지만 김예원 역시 폼을 회복하는 단계였기 때문에 실력이 다른 두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아동복 시장은 정환이 전력을 다하기에 조금 규모가 작은 곳이었다.
결국 정환으로서는 이 몸에 빙의한 후 단 한 번도 전력을 다해야 할 상대를 만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 눈앞에 싸워 볼 만한 상대가 나타났다.
특히 김효빈의 디자인은 TF팀 디자이너들이 가혹한 평가를 내리긴 했지만 수준이 상당한 편이었다.
부족한 부분이 채워진다면 유아림이 최선을 다한 작품과도 비교할 만한 수준이었다.
‘그리고 다음 주가 되면 김효빈은 몇 배는 더 훌륭한 작품을 가져오겠지. 다른 디자이너들도 그럴 거고.’
다들 꼭꼭 숨겨 뒀던 비장의 무기를 가져올 것이다.
그러니 정환도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자신의 디자인이 선정될 거란 확신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미 정환에게는 괜찮은 아이디어가 한 가지 있었다.
LE의 제안을 받았을 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던 아이디어.
‘뉴 웨이브.’
뉴 웨이브, 새로운 물결.
정환은 뉴 웨이브를 주제로 이번 대결을 준비할 생각이었다.
뉴 웨이브를 주제로 선정한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하이엔드 패션 브랜드계에 자신을 처음 드러내는 자리인 만큼 단순히 자신을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정환은 이참에 제대로 새로운 물결을 일으키고 싶었다.
모두가 예상하지 못한 천재 디자이너의 탄생.
이것을 모든 이들에게 뚜렷하게 각인시킬 생각이었다.
그렇게 생각을 굳히고 보니 정환은 뉴 웨이브라는 주제와 김효빈이 자신을 LE로 부른 이유가 맞닿는 부분이 있다는 걸 발견했다.
LE에 새로운 물결을 일으키길 바라는 마음.
어쩌다 보니 정환이 그 바람을 이뤄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효빈의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과는 별개로 이 사실은 상당히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의도한 방식은 아니지만 결국 김효빈이 그 뜻을 이루게 되겠어.’
잠시 이렇게 생각한 정환은 본격적으로 디자인을 그리기 위해 책상 앞으로 이동해 도화지를 펼쳤다.
그러고는 도화지 위에 뉴 웨이브의 핵심을 구체화해 나가기 시작했다.
가장 강력한 물결.
금방이라도 세상을 덮칠 것처럼 높은 파도.
정환이 뉴 웨이브라는 주제와 함께 떠올린 이미지였다.
그리고 이 이미지를 디자인으로 승화시키는 게 정환의 목표였다.
‘파도는 높아질수록 곡선이 아니라 직선에 가까워져. 특히 쓰나미는 거의 직각의 형태를 길게 유지하지.’
그렇게 정환의 손끝이 조금씩 하나의 형상을 완성해 나갔다.
점차 도화지에서 완성되는 것.
그것은 바로 ‘피코트’였다.
피코트에는 여러 유래설이 있었다.
제일 유력한 것은 ‘영국 유래설’과 ‘네덜란드 유래설’이었는데, 둘 다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다.
18세기 네덜란드가 해군 강국이었던 것은 사실이었고, 영국 또한 의류 제조사 캄플린이 1850년도에 해군 군복을 납품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리퍼설’과 ‘테일러&커터설’도 있었지만 이러한 유래설 중 어떤 게 옳은지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모두가 인정하는 것은 피코트가 바다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피코트는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었다.
성난 파도를 피하지 않고 가장 오래 맞섰던, 거친 선원의 옷.
그래서 정환은 뉴 웨이브의 이미지를 피코트에 투영하고자 했다.
하지만 정환이 그리는 것은 일반적인 피코트와 달랐다.
자신이 상상한 파도의 이미지처럼 완전한 직선을 닮았으면서도 곡선인 것이 계속해서 연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묘한 선들이 너울처럼 이어지면서 강력한 파도의 이미지를 표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선이 이어져 옷 한 벌의 형상을 갖췄다.
거기에는 누구도 경험한 적 없는 강력한 이미지의 피코트가 완성되어 있었다.
어떤 세찬 바람이 불어와도 절대 쓰러지지 않을 것 같은 이미지.
더 놀라운 사실은 피코트의 이미지가 정환이 그렸던 더 플레이의 디자인처럼 클래식한 느낌을 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완벽한 재현만을 목표로 하는 복각과는 또 다른 재미와 맛을 지닌 새로운 옷.
피코트가 가진 역사와 정환이 추구하는 파도의 이미지가 결합한 결과물이었다.
‘좋았어. 이제 실물을 완성할 차례야.’
정환은 망설일 틈 없이 곧장 작업실로 향했다.
TF팀은 아직 따로 작업실을 배정받지 않았기 때문에 시제품을 제작하려면 오픈 작업실을 이용해야 했다.
정환이 늦게까지 고민하고 디자인을 짠 탓인지 작업실은 비교적 한산했다.
김형태 또한 퇴근한 듯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조용해서 좋네.’
정환은 필요한 원단, 재료, 도구를 작업대 위에 깔았다.
이윽고, 가위를 쥔 정환의 손이 원단을 순식간에 자르며 작업이 시작됐다.
정환은 마치 태풍 속에서 키를 잡은 선원처럼 바늘을 쥔 손을 세심하게 움직였다.
이미 이 옷에는 거친 파도가 담겨 있었다.
조금이라도 방심한다면 키를 놓치고 배도 잃게 되리라.
그렇게 점점 더 옷의 모양이 갖춰졌고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피코트 한 벌이 완성됐다.
정환이 옷을 완성한 시간은 어느새 작업실에 있던 몇 명 안 되는 사람들까지 전부 퇴근한 때였다.
‘됐다.’
정환은 자기 옷을 확인한 후 만족했다.
하지만 정환의 작업은 끝이 아니라, 이제 시작이었다.
단순히 디자인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면 그림을 그리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정환은 그림을 그리는 것만으로도 완성된 옷 한 벌을 머릿속에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는 상상력과 경험이 있었으니까.
그런데도 정환이 시간을 들여 가며 옷을 직접 완성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마나…. 그리고 인챈트.’
그랬다.
정환은 이번 패션 위크에서 정말 자신의 전력을 다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전력은 바로 마나를 사용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