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dwarf in his previous life, but an artistic genius in his current life RAW novel - Chapter 55
53화 힘을 드러내다 (1)
“그럼 하은영 디자이너님.”
“…네.”
“다음 발표 시작해 주십시오.”
김효빈의 부름에 하은영이 딱딱한 표정을 한 채 사람들 앞에 섰다.
그리고 PPT가 떠오름과 동시에 발표를 시작했다.
최성원의 발표에 영향을 받은 것인지 하은영의 목소리에서는 긴장감이 느껴졌다.
“저는 ‘성공, 그 순간에 나도 있었다’라는 주제로 오피스룩을 준비해 봤습니다.”
하은영이 손을 살짝 떨며 자신이 준비한 시제품 의상을 선보였다.
그것은 흰색 트위드 재킷과 검은색 개버딘 팬츠였다.
이름만 나열해 놓고 본다면 별로 특별한 점을 찾을 수 없는 평범한 오피스룩.
하지만 디테일로 들어간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무엇보다도 트위드 재킷 단추에 LE의 글자를 형상화해서 새긴 게 인상적이었다.
개버딘 팬츠 또한 아래쪽으로 갈수록 통이 넓어지는 독특한 라인으로 색다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저는 오피스룩을 일종의 용포라고 생각합니다. 입는 것만으로도 왕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바로 그렇죠. 그리고 하이엔드 패션 브랜드를 가장 많이 소비하는 여성 중 직장인 비율은 상당합니다. 그런 점에서 오피스룩을 하이엔드 패션화하는 데 성공할 수 있다면 우리가 비싼 외제 차를 보고 성공을 떠올리는 것처럼 그러한 상징성을 LE의 이미지에도 입힐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디자인을 발표하고 마음이 좀 놓인 것인지 하은영이 긴 설명을 잘해 냈다.
괜히 한 브랜드의 수석 디자이너 자리에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잘 보여 주고 있었다.
실력 또한 한 브랜드의 수석 디자이너로서 부족한 부분이 없었다.
그만큼 디자인의 수준이 높았다.
하지만 하은영에게도 치명적인 단점이 존재했다.
김효빈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재밌는 주제네요. 그럼 질문을 해 보도록 하죠. 오늘 하은영 디자이너는 옷을 입고 출근하면서 왕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나요?”
“아. 그건…….”
“아니겠죠. 오늘도 출근을 해야 하는구나, 한숨이 나왔을 테니까요.”
“…….”
“자신의 의도를 고객이 있는 그대로 받아 주길 바라는 것은 오만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은영 디자이너의 주제와 디자인은 고객을 마음을 충분히 헤아리지 못했다는 것이 아쉽군요.”
“…….”
하은영은 김효빈의 비판에 어떻게든 반박하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
두 번째 녹다운이었다.
그렇게 하은영 또한 최성원만큼이나 얼굴을 붉히며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최성원이나 하은영 모두 훌륭한 디자이너였다.
하지만 자신만의 사고에 갇혀 치명적인 단점을 극복하지 못했다는 점이 아쉬웠다.
그리고 김효빈은 어째서 이러한 결과가 나오게 됐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김효빈이 속으로 생각했다.
‘다들 디자인에 대한 고민을 뒷전으로 두고 다른 짓이나 하고 다녔으니 당연한 결과죠. 이참에 초심을 찾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세 번째 차례가 됐다.
이번에는 TF팀에서 누구보다 열의를 불태우고 있는 김형태의 차례였다.
김형태는 하은영이 자리에 돌아오자마자 곧장 앞으로 나서며 호기롭게 PPT를 띄웠다.
앞서 발표한 두 사람과는 다른 결과물을 보여 줄 거라는 자신감이 엿보이는 태도였다.
김효빈은 김형태의 태도에 흥미를 보이며 눈을 반짝였다.
확실히 김형태는 회사에서도 성장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는 디자이너 중 한 사람이었다.
“제 주제는 ‘링 위에 올라간 도전자’입니다. 인정하긴 싫지만 지금까지 패션 위크의 챔피언 타이틀은 제일 패션이 독식해 오고 있었죠. 하지만 이 옷에는 더 이상의 패배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의지에는 승리를 향한 확신이 담겨 있기도 하죠.”
김형태가 설명을 마치고 시제품을 선보였다.
거기에는 MA-1 재킷과 데미지가 들어간 후드, 그리고 워싱이 들어간 조거 팬츠가 걸려 있었다.
전체적으로 땀 냄새가 물씬 풍길 것 같은 스포티한 느낌의 디자인이었다.
하지만 사용된 소재나 디테일이 하이엔드 패션이라는 것을 충분히 보여 주고 있었고 그게 매력으로 다가왔다.
“고압 가먼트 다잉 기법을 이용해 자연스러운 구김을 줬고 봉제 부분이 수축하는 퍼커링 효과로 빈티지하면서도 하이엔드에 걸맞은…….”
“잠깐만요.”
김효빈이 자신감 넘치게 긴 설명을 이어 나가는 김형태의 말을 끊었다.
그렇게 말을 멈춘 김형태는 의아함이 담겨 있는 눈빛으로 김효빈을 쳐다봤다.
김효빈이 말을 끊은 이유를 생각하지 못할 만큼 김형태는 자신의 디자인에 큰 자신감이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김효빈은 그 자부심에 손쉽게 상처를 냈다.
“일단 소재, 디테일은 접어 두고 다른 이야기를 먼저 하고 싶네요. 저 또한 김형태 디자이너의 말에 공감합니다. 확실히 우리는 도전자의 입장이죠. 하지만 말입니다. 고객은 도전자의 옷을 입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특히 하이엔드 패션 브랜드를 소비하는 고객은 모두 스스로가 챔피언이라고 생각하죠. 그렇지 않다면 굳이 비싼 돈을 들여서 옷을 사야 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무슨 말인지 이해하십니까?”
“아.”
김효빈의 이야기를 들은 김형태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김형태는 실수를 깨닫고 얼른 입을 다물었지만 도저히 변명의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미 김효빈의 지적이 타당하다는 걸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효빈은 아쉽다는 듯 휴, 하고 한숨을 내쉬며 김형태에게 조언했다.
“자신에 비춰서 고객의 마음을 헤아려 보는 것은 좋은 자세입니다. 다만 자신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한 자는 고객의 마음에 닿지 못한 채 자기만의 세상에 갇히고 말죠. 김형태 디자이너가 다음번에는 그런 우를 범하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김효빈은 자연스럽게 김형태의 다음 기회를 기약하는 멘트로 발표를 마무리 지었다.
결국 김형태마저 그렇게 자리로 돌아갔다.
그와 동시에 회의실에는 이상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다음 차례는 김효빈이었기 때문이다.
오늘 종일 강한 비판의 어조를 유지한 김효빈.
김효빈이 어떤 디자인을 보여 줄지 모두가 기대하고 있었다.
***
묘한 긴장감 속에서 앞으로 나선 김효빈은 디자이너들을 쭉 훑어봤다.
발표 내내 독설을 퍼부은 탓인지 자신을 향한 시선에는 전부 부정적인 감정이 담겨 있었다.
어느새 멘탈을 회복한 최성원은 어디 얼마나 대단한 디자인을 꺼내는지 보자, 하는 표정이었고 하은영 또한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김형태의 경우에는 방금 발표를 끝냈기 때문인지 독기보다 허탈함이 더 많이 느껴졌지만 비판의 의지가 없는 상태라고는 할 수 없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긴장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
이 분위기 속에서 김효빈이 느끼는 감정은 뜻밖에도 만족감이었다.
이제 곧 자신의 주제와 디자인이 발표되는 순간, 이 사람들의 표정이 어떻게 바뀔지 예상됐기 때문이다.
‘디자인을 보자마자 경악하며 날 인정하게 되겠지. 그렇게 우리는 한 팀이 될 거야.’
김효빈 또한 한 번쯤 이러한 방법이 너무 무리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 적 있었다.
하지만 김효빈은 이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을 선택할 수 없었다.
동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을 무시하고 밀어내는 사람들.
이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어렵게 익힌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결과만 좋으면 돼. 결국 결과가 좋으면 모든 게 용서될 수밖에 없어.’
김효빈은 애써 자신의 마음을 다독였고 그렇게 마침내 발표를 시작했다.
기존과 달리 김효빈의 손에서는 주제가 아니라 디자인이 먼저 공개됐다.
“먼저 디자인부터 보시죠.”
그렇게 김효빈이 벌거벗은 마네킹의 몸에 한 벌의 옷을 걸쳤다.
그 옷은 바로 검은색 램스킨 라이더 재킷이었다.
이번에도 저번처럼 에코 패션을 꺼내 보일 거라 생각했던 사람들은 김효빈의 디자인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만큼 김효빈의 선택은 뜻밖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놀란 것은 단순히 라이더 재킷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 아니었다.
하나둘 라이더 재킷 속에 감춰져 있던 디테일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놀람은 곧 김효빈의 예상처럼 경악으로 바뀌었다.
그만큼 김효빈이 선보인 라이더 재킷은 훌륭한 디테일이 다수 담겨 있는 작품이었다.
그렇게 디자이너들이 감탄하고 있을 때였다.
“Bring new wind.”
김효빈이 유창한 발음으로 디자이너들의 이목을 끌었다.
그와 동시에 PPT 화면에는 하나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한 남자가 비바람을 맞으며 서 있었는데, 얼마나 바람이 세차게 부는지 그의 옷이 반쯤 벗겨지고 있었다.
“이것이 제가 이번에 새롭게 정한 주제입니다. 익숙함에서 새로움을 주고, 입는 것만으로 왕이 된 것처럼 만들어 주고, 도전자에서 챔피언으로 거듭이 나려면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 그것은 바로 새바람이니까요.”
김효빈의 주제를 발표함과 동시에 최성원, 하은영, 김형태의 입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Bring new wind라는 주제를 듣자마자 자신들이 발견한 디테일이 어째서 이런 형태로 표현됐는지 그 이유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김효빈이 세 사람의 반응에 만족하며 발표를 이어 나갔다.
“이미 여러분은 Bring new wind라는 주제를 말한 순간, 제가 어째서 라이더 재킷을 이렇게 디자인했는지 이해했을 겁니다. 그만큼 이 라이더 재킷은 그 자체로서 완벽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라이더 재킷만 있다면 복잡한 코디가 전혀 필요 없을 정도죠. 그리고 그것은 LE가 이제부터 불러일으키게 될 새바람이 얼마나 완벽한지 상징적으로 보여 주게 될 겁니다.”
확실히 김효빈의 라이더 재킷은 과거 OPC에서 선보였던 것보다도 한 발짝 진보한 터치가 돋보였다.
특히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재킷의 라인을 시원시원하게 가져간 것이 인상적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어깨를 강조하면서도 기장을 쇼츠하게 빼서 아이코닉한 멋을 강조한 것도 눈에 띄었다.
도저히 비판할 거리를 찾을 수 없는 완벽한 디자인.
최성원, 하은영, 김형태의 머릿속에는 이러한 문장이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어떻게든 비판을 해 보려던 의지마저 접혀 버렸다.
그렇게 디자이너들이 침묵을 유지하자 김효빈은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다.
‘역시 이 디자인 앞에서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 모양이군. 그렇다면 이제 팀원들을 다독일 차례인가?’
김효빈이 이런 생각을 하며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분명…….”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입을 연 사람.
그 사람은 지금껏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정환이었다.
“옷 자체로는 완벽한 작품이네요. 그런데 과연 그걸 입은 사람까지 돋보이게 해 줄 수 있는 그런 옷이 맞을까요? 오히려 그 자체로 너무 완벽해 부담스럽지 않을까요?”
정환의 날카로운 질문.
이 질문에는 김효빈조차 미처 생각하지 못한 문제가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