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dwarf in his previous life, but an artistic genius in his current life RAW novel - Chapter 59
57화 나만의 브랜드
LE의 피날레가 끝났다.
패션쇼장을 가득 메웠던 음악 소리가 잦아들고 관객들이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박옥정은 제자리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충격 때문이었다.
박옥정은 원래 이번 패션쇼에서 LE의 싹을 완전히 밟을 생각이었다.
제일 패션의 쇼가 아니면 국내의 쇼를 보지 않는 걸로 유명한 박옥정이 오늘 LE의 쇼를 굳이 보러 온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LE의 실력을 비웃고 승리를 만끽하기 위해서.
하지만 박옥정은 LE의 실력을 비웃을 수도, 승리를 만끽할 수도 없었다.
박옥정이 할 수 있었던 건 그저 우두커니 앉아 이 쇼를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그만큼 LE의 쇼는 훌륭했다.
관객들의 시선을 단번에 끌어모은 스테이지 구성부터 디자인까지.
아무리 흠을 잡으려 해도 어디 하나 빠지는 게 없었다.
이 완벽한 쇼의 정점을 찍은 건 바로 마지막 피코트였다.
LE 패션쇼의 모든 것을 집약한 그 작품.
평범한 모델이 그 작품을 걸치던 그 순간, 박옥정은 제일 패션의 패배를 누구보다 빠르게 직감했다.
‘내가 김효빈을 너무 과소평가했나?’
박옥정은 이번 쇼의 주제를 짜고 피코트를 디자인한 사람이 당연히 김효빈일 것이라 확신했다.
만년 2등 LE에서 이만한 실력을 선보일 만한 사람은 해외에서 굵직한 경력을 쌓은 김효빈뿐이었으니까.
그리고 그것은 그만큼 박옥정이 LE의 전력을 잘 파악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쇼가 끝나고 난 후 이번 쇼의 메인 디자이너가 정환이었다는 사실을 전해 들은 박옥정은 큰 충격을 받았다.
고작해야 고등학생에 불과한 정환이 자신에게 이런 패배감을 맛보게 해 주리라곤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었다.
한동안 충격에 휩싸여 있던 박옥정은 어느 순간, 갑자기 피가 확 끓는 것을 느꼈다.
제일 패션이 업계 1위로 군림한 지도 벌써 20년.
해외라면 모를까, 국내에선 박옥정의 입지를 위협할 만한 디자이너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박옥정도 다소 안일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정환의 디자인을 눈앞에서 보고 나니 다시 현역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이번에는 박옥정 또한 LE를 확실히 찍어 누르려 자신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기에 더욱더 그랬다.
“이정환…….”
박옥정은 피날레에 섰던 정환의 모습을 다시 떠올렸다.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환하게 미소 짓던 정환의 모습.
그리고 쟁쟁한 LE 디자이너들이 한발 물러서서 정환의 공을 치켜세우는 장면까지.
그 장면이 머릿속에서 다시 한번 재생되자 박옥정은 분한 마음이 들었다.
오롯이 자신에게 향했어야 할 박수와 환호를 정환이 모두 빼앗아 간 느낌이었기 때문이었다.
박옥정은 정환을 처음 봤을 때만 해도 단순히 손녀 앞을 가로막는 귀찮은 녀석으로 여겼다.
하지만 이는 박옥정의 큰 오판이었다.
정환은 겨우 그 정도의 인물이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앞까지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다음번에는 호락호락하지 않을 거야…….’
한동안 자리에 못 박힌 듯 앉아 있던 박옥정이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당장 회사로 돌아가 정환을 이기기 위한 디자인을 다시 뽑아내고 싶었다.
그리고 이는 박옥정이 자신의 완패를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
피날레를 끝까지 지켜본 건 박옥정뿐만이 아니었다.
이웅희 회장 역시 피날레의 마지막까지 뜨거운 박수갈채를 보내며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이웅희가 LE 패션쇼 현장에서 이렇게까지 큰 웃음을 지은 건 몇 년 만의 일이었다.
‘진짜 우리 LE가 1등 하는 거 아냐?’
이웅희는 이번 패션 위크에서 제일 패션을 꺾는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제일 패션의 디자이너는 박옥정의 아바타인 박한결이었다.
즉, 박한결을 이겼다는 건 박옥정을 이겼다는 뜻과도 같았다.
그렇기에 이번 승리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값진 것이었다.
그때, 누군가 옆으로 다가왔다.
바로 제일 패션의 회장 박옥정이었다.
“아, 안녕하십니까.”
인사를 받은 박옥정이 이웅희의 밝은 표정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네. 오랜만입니다. 회장님. 좋은 쇼였습니다. 특히 마지막 피코트는… 인정할 수밖에 없는 작품이더군요.”
“…감사합니다.”
“이번에는 제가 졌습니다만, 다음번에는 다를 겁니다.”
박옥정은 이웅희와 간단히 눈인사를 나눈 후 비서와 함께 빠르게 패션쇼장을 벗어났다.
이웅희는 그 뒷모습을 지켜보며 평생에 맛보지 못한 희열감을 느꼈다.
‘박옥정이 패배를 인정하다니.’
너무 기뻐서 환호성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보는 눈만 없다면 이 자리에서 춤이라도 덩실덩실 췄을 텐데, 패션쇼장에는 아직 사람이 많았다.
이웅희는 간신히 몸이 들썩이는 걸 참으며 생각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거지?’
이웅희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김효빈이었다.
사실, 이웅희가 김효빈을 데려오겠다는 뜻을 밝혔을 때만 해도 회사 내부에선 찬성보다 반대가 더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국내 패션 업계의 제왕은 제일 패션으로 굳어진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김효빈을 데려와 봤자 바뀔 게 없다는 생각이 회사 전체에 먹구름처럼 깔려 있었다.
하지만 이웅희에게는 어떻게든 제일 패션을 꺾고 1위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포부가 있었다.
이 포부를 위해서라면 이웅희는 무엇이라도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이웅희는 내부 직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직접 영국까지 가서 김효빈을 만났다.
몇 번의 제안 끝에 마침내 김효빈을 데려오게 됐고 그 결과가 보기 좋게 나타났다.
실제로 김효빈이 디자인 실장 자리를 맡으며 LE의 매출이 크게 올랐던 것이다.
하지만 이웅희의 머릿속에는 한 사람이 더 떠올랐다.
바로 정환이었다.
물론 정환을 LE로 데려온 건 김효빈이었다.
그리고 이웅희와 김효빈에게 정환은 일종의 미끼에 불과했다.
LE의 디자이너들을 자극하는 데 사용할 미끼.
하지만 정환은 그 역할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더 플레이의 수석 디자이너가 되어 처음으로 제일 패션의 브랜드 AAA를 이기는 성과를 이뤄 낸 이가 정환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정환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 패션쇼에서 메인 디자이너로 활약해 박옥정 회장까지 꺾었다.
그러니 이웅희로서는 김효빈보다 정환을 더 높게 평가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 동시에 어떻게 하면 정환을 더 잘 이용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환을 잘 이용한다면 제일 패션을 앞지르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을 것 같았다.
‘LE 매출 대부분을 책임지고 있는 메이주를 맡겨 볼까? 아니야. 이 정도 실력이면 하이엔드 패션 브랜드인 지오미아를 맡기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이 부분은 김 실장이랑 상의를 해 봐야겠군.’
이웅희는 이렇게 생각을 정리하며 정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늘따라 정환의 얼굴이 유난히 금덩이처럼 보이는 이웅희였다.
***
그로부터 2년 후.
LE 회장실.
이웅희 회장이 간곡한 목소리로 정환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김 실장한테 먼저 소식을 들었지만…. 한 번 더 생각해 볼 순 없겠나? 충분히 생각하고 결정한 일이겠지만 나로선 자네를 잡지 않을 수 없어.”
“LE에서 어린 저에게 큰 기회를 주셨던 일은 참 감사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다른 길을 가고자 합니다.”
정환의 뜻은 확고했다.
이웅희도 그 뜻을 읽은 듯 더는 남아 달라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잠시 아쉬움을 담아 정환을 바라보던 이웅희가 휴, 하고 한숨을 내쉬며 말을 꺼냈다.
“자네 덕분에 LE도 많이 바뀌었어.”
그와 동시에 이웅희의 머릿속에는 지난 2년간의 일이 스쳐 지나갔다.
DDP 패션 위크의 성공 직후 LE의 매출은 큰 폭으로 증가했다.
그냥 아슬아슬하게 제일 패션을 쇼에서 이긴 정도였다면 이런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누가 봐도 압도적인 승리였고 대중은 만년 2위의 승리에 뜨겁게 열광했다.
그 결과, LE의 하이엔드 패션 브랜드에 관심을 두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 관심은 LE 산하의 다른 브랜드 쪽으로 연결됐다.
도미노가 넘어가듯 LE의 브랜드들이 재조명되자 이를 경계한 제일 패션이 반격에 나섰다.
하지만 속수무책이었다.
한 번 흐름을 타기 시작한 LE는 1년 만에 제일 패션의 매출을 턱 밑까지 쫓아갔다.
그리고 1년 후, 또 한 번 펼쳐진 DDP 패션 위크에서 정환은 다시 박옥정을 상대로 승리했다.
이번에 박옥정은 박한결이 아닌 자신이 직접 제일 패션의 메인 디자이너로 나섰지만 결과적으로 정환을 넘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정환은 다시 한번 피코트와 같은 테마의 디자인을 선보여 1등의 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그것은 올해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LE는 정환 덕분에 3년 연속 DDP 패션 위크에서 1위 자리를 차지했고 그것이 매출로 나타나 마침내 제일 패션의 아성을 누르는 데까지 성공했다.
그 결과, 정환의 옷은 국내 셀럽이 가장 선호하는 옷이 되었다.
특히 정환이 처음 선보였던 피코트는 한여름에도 재고가 없어서 못 팔 지경이었다.
많은 사람이 기를 쓰고 정환의 옷을 구매하려 했지만 모두가 가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정환은 자신이 만든 옷을 한 달에 딱 10벌만 판매했기 때문이다.
1성이라는 마나의 한계 때문에 더 많이 팔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그리고 정환이 하이엔드 패션 브랜드의 수석 디자이너가 되면서 할 일이 많아진 것도 문제였다.
그렇게 정환이 제작한 옷의 숫자는 한정적이었고 이런 이유로 더욱 값어치가 높아졌다.
정환의 옷이 리셀 마켓에서 프리미엄이 잔뜩 붙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리고 디자이너로서 정환의 명성은 국내에서만 그친 게 아니었다.
DDP 패션 위크의 포상으로 정환의 컬렉션이 3년 연속 4대 패션 위크에 오르면서 정환의 이름이 해외에도 익히 알려진 것이다.
그리고 이 유명세 덕분에 정환은 현재 셀린느를 비롯한 루이비통, 그리고 최근에는 프라다에서도 러브콜을 받은 상태였다.
그래서 이웅희도 사표가 수리되면 정환이 해외로 넘어갈 것이라 예상했다.
이미 국내에선 한 획을 그었으니 해외로 눈을 돌리는 게 당연한 순서였다.
‘아쉬운 건 어쩔 수 없구만.’
이웅희는 입맛을 다셨다.
겨우 스무 살 나이에 국내에서 손꼽는 디자이너가 된 정환을 LE에서 떠나보낼 생각을 하니 자꾸만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기대감도 생겼다.
과연 정환이 해외에서 어떤 활약을 보여 줄지 기대가 됐기 때문이다.
특히 순수 국내파 출신의 디자이너가 해외에서 크게 명성을 떨친 경우가 없었기 때문에 더욱더 그랬다.
김효빈이 OPC의 수석 디자이너가 되긴 했지만 그 이상으로 평가받는 브랜드로는 넘어가지 못했으니까.
이웅희는 정환이 콧대 높은 해외 명품 브랜드의 수석 디자이너가 되기를 바라며 격려의 말을 건넸다.
“이미 떠나겠다고 마음을 먹었으니 어쩔 수 없지. 아마 자네라면 어딜 가도 활약을 할 수 있을 거야. 혹시 기대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하더라도 실망하지 말게. LE가 자네를 그리워하고 있을 테니.”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그래서 갈 곳은 정했나? 파리? 밀라노?”
정환의 행선지가 궁금한지 이웅희가 물었다.
하지만 정환은 그 말을 듣고 오히려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네? 파리요?”
“응? 자네 해외에서 제안받고 떠나는 게 아니었나? 나는 그렇게 들었는데.”
“아아. 네네. 셀린느, 루이비통, 프라다의 제안을 받은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저는 해외로 가지 않습니다.”
이웅희의 눈이 커졌다.
“그럼?”
“저만의 브랜드를 준비할 생각입니다.”
그랬다.
마침내 스무 살이 되면서 미성년자의 딱지를 뗀 정환.
정환은 오래 염원한 대로 자신만의 브랜드를 준비할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