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dwarf in his previous life, but an artistic genius in his current life RAW novel - Chapter 65
63화 첫 번째 개인전 (4)
자신이 신진 작가의 경매 최고 기록을 경신했을 거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한지성.
하지만 한지성은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 다른 말을 꺼냈다.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전부 무의미한 가정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개인전을 최선 다해서 준비하고 있으니 부디 좋은 결과가 나오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후로 백수정은 일부러 한지성을 몇 번이나 도발했다.
한지성의 입에서 정환을 제치고 국내에서 가장 주목받는 신진 작가가 되고 싶다는 대답을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지성은 흥분이 가라앉았는지 백수정이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지 않았다.
그렇게 결국 인터뷰가 끝났다.
“수고하셨습니다, 작가님.”
“기자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두 사람이 작별 인사를 나눴고 백수정이 먼저 돌아섰다.
하지만 백수정은 뭔가가 생각났다는 듯 다시 한지성에게 말을 걸었다.
“아. 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 잊었네요.”
“네?”
“작가님의 개인전 말이에요. 공교롭게도 신진 작가 경매 최고가 기록을 경신한 이정환 작가의 개인전과 날짜가 겹치는데 혹시 이게 우연일까요?”
갑자기 비수처럼 파고드는 질문.
그 질문에 한지성은 당황해서 입을 다물었다.
그와 동시에 백수정이 눈을 빛냈다.
한지성이 입을 다묾으로써 대답을 들은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뒤늦게 한지성이 정신을 차리고 백수정의 질문에 답했다.
“아. 그러고 보니까 날짜가 겹치네요. 저는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확실히 얘기를 듣고 나니 뭔가 의도가 있어 보이네요. 하하.”
백수정은 그 대답을 들으며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그냥 혹시나 해서 물어봤습니다. 원래 저 같은 사람들은 말도 안 되는 곳까지 상상력을 펼쳐 나가잖아요. 그렇죠? 말도 안 되는 상상 맞죠?”
“네. 그렇고 말고요. 저는 이정환 작가의 개인전 날짜도 방금 들어서 다시 생각났어요. 완전히 오해입니다, 오해.”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렇게 다시 백수정이 등을 돌린 채 걸음을 옮기며 생각했다.
‘오해는 무슨 오해야. 정환 씨를 저격하고 있다는 게 딱 느껴지는데.’
이와 함께 백수정의 머릿속에 지금의 인터뷰를 어떻게 가공하면 좋을지 재밌는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백수정이 인터뷰가 진행됐던 명성 갤러리 로비를 떠났다.
얼마 뒤 ‘월간 예술’에는 다음과 같은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 신진 작가 한지성, 도전장을 내밀다.
정환과 한지성의 맞대결이 공론화되는 순간이었다.
***
정환의 첫 번째 개인전이 열리는 날이 밝았다.
대산 백화점에 도착한 이한용은 놀이동산에 놀러 가는 아이처럼 설레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사실 정환의 개인전이 성사된 이후부터 이한용은 이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으려 노력했다.
정환의 개인전을 아무 힌트도 없이 온전히 날것으로 감상하고 싶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그래야 감동이 배가될 테니까.’
띵,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5층 갤러리에는 초청장을 받고 온 손님들이 가득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이한용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이들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어머, 부회장님!”
자연스레 사람들이 이한용 주변으로 모여들고 이한용은 이들과 차례대로 악수했다.
하지만 이한용의 신경은 이들이 아닌, 다른 한 사람에게 쏠려 있었다.
바로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서서 개인전 팸플릿을 읽고 있는 안소영 작가였다.
이한용이 주변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한 후 안소영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안 작가님. 처음 뵙겠습니다.”
안소영도 팸플릿을 내려놓고 이한용에게 인사했다.
“아, 안녕하세요. 부회장님. 이런 좋은 자리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소영에게 초대장을 보낸 건 이한용이었다.
이한용은 정환의 개인전이 비평적인 부분에서도 흥행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미술 전문 기자들을 비롯해 안소영에게도 초청장을 보냈다.
“요즘 작업 때문에 바쁘실 텐데, 이렇게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정환 작가 개인전은 저도 궁금했는데, 부회장님이 초청해 주신 덕분에 구경할 수 있게 됐네요. 영광입니다.”
“저야말로 영광이죠. 같이 가실까요?”
이한용은 안소영을 비롯한 여러 손님과 함께 갤러리 입구에 섰다.
이유경이 나란히 줄을 선 이들에게 말했다.
“이정환 작가의 개인전, ‘숲으로의 초대’는 총 다섯 개의 섹션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관람 순서는…….”
이한용은 관람객들에게 간단한 설명을 이어 가던 이유경과 눈을 마주쳤다.
이유경의 눈빛에는 평소보다 더 자신감이 가득해 보였다.
‘이 상무가 기대할 만하다고 얘기했지만 과연 완벽한 빈틈만큼 훌륭한 그림이 나올지 모르겠군. 어쩌면 완벽한 빈틈이 이정환의 최고작일 수도 있는 거니까.’
이유경의 설명이 끝나자 이한용은 드디어 갤러리로 첫발을 내디뎠다.
첫 번째 섹션은 ‘숲에서 온 초대장’이었다.
하지만 몇 미터를 걸어도 그림이 통 보이질 않았다.
그저 평소 대산 갤러리에서 볼 수 있는 아이보리색의 가벽만이 세워져 있을 뿐이었다.
‘이정환 작가가 실수한 건가?’
이한용이 바닥을 내려다봤다.
바닥에는 앞으로 계속 걸어가라는 화살표 표시가 붙어 있었다.
실수가 아니라 의도였다.
이런 과감한 배치에 이한용은 조금 불안해졌다.
배치 자체도 걱정스러웠지만 숲으로의 초대라는 주제와 자로 잰 것 같은 모던함은 꽤 거리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자칫 잘못했다간 그림과 갤러리가 따로 노는 참사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
이한용은 불안한 마음을 뒤로한 채 화살표를 따라 오른쪽으로 몸을 꺾었다.
“아.”
눈앞에 등장한 첫 번째 그림.
이한용은 이를 보자마자 자신의 걱정이 기우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이보리색 가벽 가운데 걸린 거대한 100호 캔버스는 마치 하늘을 나는 새가 광활하게 펼쳐진 숲을 내려다보면서 그린 것 같았다.
끝도 없이 펼쳐진 녹색 초목과 그사이에 낀 짙은 안개.
이한용은 자기도 모르게 코를 벌름거렸다.
분명 그림일 뿐인데도 코가 간질거릴 만큼 강렬하고 산뜻한 숲 내음이 풍겨 오고 있었다.
그제야 이한용은 정환이 왜 이렇게 동선을 길게 짰는지 이유를 눈치챘다.
‘관람객들이 멀리서부터 한 발짝씩 숲에 가까이 다가오길 원했던 거야. 과연, 숲에서 온 초대장이라는 주제에 걸맞은 그림이군.’
정환의 의도를 파악한 이한용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번졌다.
지난 몇 달 동안의 기다림이 이 그림 한 점에 모두 보상받는 기분까지 들었다.
그렇게 이한용이 다음 작품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이어진 두 번째 작품과 세 번째 작품.
완벽함의 빈틈이란 작품이 잊힐 정도로 대단한 그림의 연속이었다.
게다가 갈수록 더 좋은 그림이 등장하니 이한용은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었다.
특히 강렬한 색채 대비를 보여 준 노송 그림은 이한용이 갖고 있던 노송에 대한 편견을 모두 깨 버릴 만큼 파격적이었다.
‘마치 숲에는 한 가지 얼굴만 있는 게 아니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 같아.’
게다가 정환의 작품 수준도 다음 작품으로 넘어갈수록 향상되고 있다는 게 확연히 드러나고 있었다.
첫 번째 섹션이 끝나고 두 번째 섹션인 ‘숲의 일상’ 시작될 무렵, 이한용은 갤러리 주변이 뭔가 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아이보리색이었던 가벽과 바닥의 색이 어느새 은은한 그린과 브라운 계열의 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를 파악한 이한용이 입을 살짝 벌리며 감탄했다.
‘숲에서 온 초대장을 받고 숲의 일상으로 들어간다. 즉, 우리는 숲으로 점점 더 깊숙이 들어가고 있는 거야.’
물론, 이를 눈치채지 못한 관람객들도 수두룩했다.
그만큼 자연스럽게 관람객들이 관람에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다는 뜻이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한 섹션의 마지막 작품마다 방점을 찍는 어마어마한 그림이 있었다.
이한용은 두 번째 섹션의 마지막 작품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푸른 잎사귀들을 생생하게 그린 그림이었는데, 이를 보고 있으니 완벽함의 빈틈을 처음 봤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 들었다.
온탕에 들어간 것처럼 노곤해지는 기분.
하지만 그때와 느낌이 조금 달랐다.
완벽함의 빈틈에선 그저 편안해지고 피로가 풀리는 기분을 느꼈다면 이번에는 마음에 배어 있던 불안함까지 조금씩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이한용은 손님들을 챙겨야 한다는 사실도 잊은 채 작품 감상에 푹 빠졌다.
손님들을 챙기지 않은 행동이 문제가 될 수도 있었지만 오히려 괜찮았다.
이한용뿐만 아니라 다른 손님들도 무아지경에 빠져 정환의 그림을 감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넋을 놓고 멍하니 서서 그림을 보고 있는 이들도 있었고 황홀경에 빠져 주저앉을 것처럼 구는 이들도 있었다.
이한용은 다섯 번째 섹션인 ‘숲, 그리고 예술’의 마지막 그림을 보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한 걸음 걷는 이한용의 가슴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마치 몇 겹으로 포장된 크리스마스 선물 상자의 마지막 포장지를 뜯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마지막 그림 앞에서 발을 멈춘 이한용이 탄식했다.
“아…….”
마지막 그림은 밑에서 올려다본 시점으로 그린 거대한 나무 한 그루였다.
새파란 하늘 아래에 양팔을 길게 늘어뜨린 어마어마하게 큰 나무는 마치 어머니가 자식에게 따스한 품을 내어 주듯 이한용에게 손을 뻗고 있었다.
후계자 경쟁으로 인해 이한용의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초조함이나 불안함 같은 감정들이 하나씩, 하나씩 지워지는 것만 같았다.
이 마지막 작품은 이번 개인전의 마무리에 가장 잘 어울리는 그림이라 할 수 있었다.
아마 이 작품이 첫 번째 섹션에 전시됐더라면 관객들은 발걸음을 떼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 이한용과 함께 그림을 관람해 오던 안소영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마지막 피날레에 가장 잘 어울리는 그림이네요.”
“작가님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네. 보통 이런 거대한 나무 그림은 그 형태 자체만으로도 압도적인 위압감을 뿜어내기 마련이죠. 그래서 많은 작가들이 자연의 웅장함을 표현할 때 이런 거목을 그려요. 상대적으로 쉬우니까요. 그런데 이정환 작가는 쉬운 길을 택하지 않고 어려운 길을 택하고도 거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갔네요. 그것도 아주 훌륭하게.”
이한용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안소영은 마지막 그림 앞에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갔다.
안소영 역시 이한용과 마찬가지로 최근 작품 활동이 잘 풀리지 않아 가벼운 우울감과 무기력함을 느끼고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다 때려치우고 죽은 듯이 잠만 자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이 마지막 그림을 보니 그 지독한 감정들이 모두 깨끗이 씻겨 나가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한동안 그림을 감상하던 안소영이 입을 열었다.
“사실 어제 한지성 작가 개인전에 다녀왔어요.”
“아. 한지성 작가 말입니까?”
이한용도 한지성 개인전이 열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월간 예술’을 통해 한지성이 정환과의 맞대결을 원하고 있다는 기사가 발표됐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심지어 한지성의 개인전이 열리는 곳은 대산과 백화점 시장을 양분하고 있는 명성의 갤러리였다.
이한용으로서는 관심을 두지 않으려 해도 그럴 수 없었다.
그렇게 안소영으로부터 한지성의 이야기가 나오자 이한용은 흥미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안소영이 한지성의 개인전을 어떻게 평가할지 너무나도 궁금했다.
안소영은 이한용의 기대감을 눈치챈 것처럼 한 박자 느리고 답했다.
“…네. 프리뷰 시사에 초대받았거든요. 생각보다 좋은 그림들이 많아서 좀 놀랐는데 오늘 보니 그건 그림도 아니었네요.”
“그렇다는 건?”
“맞습니다.”
안소영이 단호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한지성 작가는 이정환 작가를 자신의 라이벌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만…. 이 대결의 승자는 누가 봐도 이정환 작가네요.”
정환 이전에 신진 작가 경매 신기록을 가지고 있던 안소영.
안소영이 정환의 승리를 확언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