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dwarf in his previous life, but an artistic genius in his current life RAW novel - Chapter 7
6화 천재로 다시 깨어나다 (6)
3년 치 학원비를 한 번에 결제한다고?
말 그대로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였다.
학부모 중에서는 가끔 몇 달 치 학원비를 미리 결제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3년 치 학원비를 한 번에 결제하겠다고 나선 사람은 처음이었다.
“한도에 걸릴 텐데…….”
카운터 데스크에 앉아 있던 실장의 중얼거림에도 정영주는 아랑곳하지 않고 검은색 카드를 내밀었다.
무광의 검은 카드 테두리에는 금빛 패턴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고, 그 가운데에는 고급스러운 필기체가 새겨져 있었다.
‘Supreme Express Card 0.1’
슈프림 익스프레스 카드 0.1.
뒤에 붙은 숫자처럼 대한민국에서도 상위 0.1% 안에 속하는 극소수만이 쓸 수 있다는 카드.
엄격한 발급 심사를 받으려면 기존 회원들의 추천이 있어야만 한다는 그 카드였다.
실장은 카드의 정체를 깨닫고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나 받을 수 있는 카드가 아니라고 들었는데.’
그런 뒤 정영주의 얼굴을 슬쩍 쳐다봤다.
다시 보니 그녀가 풍기는 인상이 뭔가 범상치 않았다.
“학원비에 재료비까지 포함해서 넉넉하게 결제해 주세요.”
“재, 재료비까지요?”
3년 치 학원비에 이어서 재료비까지.
옆에서 이를 듣고 있던 민영은 현기증 때문에 뒤로 쓰러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먼저 무릎을 휘청인 사람은 박수현 원장이었다.
그는 비틀거리며 정영주와 실장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러고는 두 팔로 크게 X자를 만들며 쥐어짜듯 말했다.
“안 됩니다! 받을 수 없습니다! 실장님도 결제하지 마세요!”
“뭐야? 지금 정환이를 안 받아 주겠다는 거야?”
정영주가 기분 상한 티를 팍팍 내자 박수현 원장은 침이 튈 만큼 세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뒤늦게 제정신을 차린 민영도 끼어들었다.
“아뇨, 아뇨! 그게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마음은 감사하지만 그렇게 큰돈을 받을 순…….”
박수현 원장과 민영이 새끼 새처럼 동시에 쫑알대자 정영주가 두 눈가를 찌푸렸다.
“아유, 시끄러워! 그만!”
카리스마 섞인 정영주의 목소리에 두 사람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당사자 의견을 안 물어봤네. 이게 제일 중요한데.”
정영주는 이 상황을 뒤에서 지켜보던 정환에게 다가갔다.
그런 뒤 그의 두 눈을 지그시 바라봤다.
‘보면 볼수록 희한한 눈이야.’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하건만 눈빛은 몇백 년을 산 사람처럼 보였다.
“정환아, 솔직하게 말해 주렴. 이 학원에 다니면서 그림을 그리고 싶니?”
정환은 벽에 걸린 그림들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여기엔 그가 전생에서 추구했던 철학과 부합하는 그림들이 가득했다.
이런 그림을 그리는 사람과 함께할 수 있다면 바랄 게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었다.
정환은 고개를 돌려 어머니를 쳐다봤다.
그녀는 언제 갈아입었는지 모를 꼬질꼬질한 옷을 아직도 입고 있었다.
‘부모님이 병원비 때문에 고생하시는데 혼자서 편하게 학원에 다닐 순 없어…….’
정영주는 정환의 마음을 읽은 듯 그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어른들이 할 걱정을 어린아이가 하면 안 되지.”
몸을 일으킨 정영주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응, 나예요. 지금 한국대 병원이죠? 원무과장 만났어요? 잘됐네. 지금 바로 정환이 병원비 전부 대납해요.”
“예?”
3년 치 학원비에 이어서 밀린 병원비까지 대납한다고?
천만 원이 훌쩍 넘는 치료비를?
민영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정영주의 팔을 붙잡았다.
실례란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도무지 입이 떨어지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전화를 끊은 정영주가 부드럽게 말했다.
“민영 씨. 난 계산을 확실하게 하는 사람이에요. 내가 학원비를 결제한 건, 정환이 그림값을 치른 거예요. 그리고 병원비를 대납한 건, 민영 씨가 제 언니를 가족처럼 돌봐 줬기 때문에 그 값을 치른 거고요. 오히려 더 해 드려도 모자랄 판이에요.”
“…….”
민영은 목이 멘 듯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간혹 TV에서 형편이 어려운 환자에게 누군가 거액을 기부했다는 뉴스를 본 적 있다.
하지만 그런 드라마 같은 일이 자신에게도 일어날 거란 상상은 한 번도 해 본 적 없었다.
정영주는 입만 벙긋거리는 민영에게 흰색 명함 하나를 내밀었다.
“받아요.”
“이, 이건…….”
“지인이 작은 회사를 운영하고 있어요. 사업이 잘돼서 성실한 사람을 더 뽑을 생각이라고 하는데 생각 있으면 이쪽으로 전화해요. 일한 만큼 벌 수 있을 거예요.”
민영의 머릿속이 완전히 새하얘졌다.
기적 같은 일.
아니, 기적의 연속이었다.
민영은 자기도 모르게 정영주를 와락 끌어안고 어깨를 들썩였다.
정영주는 어색하게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그녀는 아무래도 이런 상황이 무척 민망한 것처럼 보였다.
“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눈물 콧물 범벅이 된 민영의 얼굴.
정영주가 눈썹을 살짝 위로 치켜뜨며 손을 들자 박수현 원장이 재빨리 티슈를 건넸다.
그녀는 티슈로 옷에 묻는 콧물을 닦으며 말했다.
“김칫국부터 마시지 말아요. 채용은 그쪽에서 결정하는 거고 난 어디까지나 소개만 해 준 거니까.”
민영을 겨우 떼어낸 정영주는 한 발짝 물러서 있던 박수현 원장에게 말했다.
“박수현 원장, 할 수 있지?”
“어, 그게…….”
“내가 아는 사람 중에 당신만큼 이력서 특이한 사람 없어. 유화부터 판화, 조각까지 올라운드 플레이어잖아?”
“좋게 말해서 올라운드 플레이어고 나쁘게 말하면 이도 저도 아닌…….”
박수현 원장이 손가락만 꼼지락거리자 정영주가 날카롭게 말했다.
“이도 저도 아닌 놈이 대학생 때 전국 회화대전에서 대통령상을 받진 않았겠지?”
민영은 콧물을 닦으며 실장에게 작게 물었다.
“대, 대통령상이요?”
“저도 잘 모르는데 저희 원장님도 왕년엔 잘나가는 작가였대요.”
박수현 원장은 마른침을 삼켰다.
한때는 그도 예술에 온몸을 던졌던 작가로서 자기 자신에게 물었다.
내가 과연 이 아이를 가르칠 수 있을까?
괜히 이 아이의 앞길을 망치는 게 아닐까?
나보다 더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게 좋지 않을까?
완전히 꺼져서 재만 남은 줄 알았던 그의 마음속에 조그만 불씨가 다시 피어올랐다.
‘보고 싶다, 내 눈으로 보고 싶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소년의 재능이 만개할 그 순간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있고 싶었다.
마침내 마음을 굳힌 박수현 원장이 두 눈에 힘을 주며 말했다.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정영주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세를 낮춰 정환과 눈높이를 맞췄다.
“정환아, 혹시 꿈이 있니?”
정영주는 자신도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웃긴다고 생각했다.
어린아이의 꿈은 하루에도 몇 번씩 바뀌기 마련이다.
하지만 꼭 대답을 듣고 싶었고 정환은 그녀를 실망하게 하지 않았다.
“예술의 끝을 보고 싶어요. 그런데 시간이 부족해요.”
예술의 끝을 보고 싶다.
그러나 시간이 부족하다.
누가 들으면 헛웃음을 터뜨릴 만큼 당돌하고 오만한 소리였다.
하지만 그런 말도 누가 뱉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정영주는 생각했다.
정환이라면, 이 꼬맹이라면 진짜 예술의 끝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 지켜보마.”
***
몇 년 후, 사계절 미술 학원.
강사들마저 퇴근한 시간이었지만 교실 한쪽에는 아직도 불이 켜져 있었다.
박수현 원장은 택배 상자를 들고 교실로 들어갔다.
“이정환 학생. 택배 왔어요.”
정환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박수현 원장은 그런 모습이 익숙한 듯 커터 칼로 상자를 뜯었다.
상자 안에는 하얀색 상장과 금색 트로피가 담겨 있었다.
“아, 이거 올해 초에 나갔던 대회 상장이구나.”
상장에는 ‘제15회 전국 중학생 미술 대회 금상 이정환’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너 인간적으로 상장 좀 가져가면 안 되니? 가뜩이나 학원 창고도 좁은데 네 상장이랑 트로피 때문에 뭘 넣을 수가 없어요.”
박수현 원장이 툴툴거리자 정환도 고개를 살짝 숙였다.
“죄송해요. 집에도 놓을 곳이 없어서 어머니가 싫어하세요.”
“아이고, 참.”
박수현 원장은 혀를 내둘렀다.
“그냥 버리셔도 될 것 같은데요.”
“다른 상이면 몰라도 전부 대상인데 어떻게 막 버리겠니?”
정환이 이 학원에 등록한 지 벌써 꽤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실력을 갈고닦은 정환은 작년부터 전국에서 열리는 크고 작은 미술 대회에 전부 출전했고 대상을 휩쓸었다.
처음에는 박수현 원장도, 민영도 기뻐했다.
그러나 과유불급이라 했던가.
정환이 상을 너무 많이 받은 게 문제였다.
상장이며 트로피를 놓을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별생각이 없나 보네?”
“네?”
“항상 대상만 받다가 전국 미술 대회에서는 금상을 받았잖아. 아쉽지 않아?”
정환은 무심한 표정으로 답했다.
“뭐, 그럴 수도 있죠.”
박수현 원장은 머리만 긁적였다.
학원가에서 전국 미술 대회 수상자와 관련한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굳이 어린 학생에게 뜬구름 잡는 소문을 말할 필요는 없었다.
“집에 안 가니?”
“그림 좀 봐주세요.”
박수현 원장이 수염을 벅벅 긁으며 정환의 자리로 다가왔다.
그가 그리고 있는 그림은 바로 한국예고 입시 유형인 정물 소묘였다.
정환이 의자에서 일어났지만 박수현 원장은 앉지 않았다.
굳이 앉아서 지적할 만한 게 없을 만큼 완벽한 입시 그림이었다.
‘외계인 같은 놈. 현역 강사가 홍보용으로 그렸다고 해도 믿겠네.’
박수현 원장은 그림을 건드리는 척하다 옆에 선 정환에게 물었다.
“정환아, 한국예고 말고 다른 학교를 생각해 봐도 되지 않을까? 포트폴리오만 잘 준비하면 해외도 노려볼 만할 텐데.”
“아직 해외는 생각이 없어요. 장학금을 받는다고 해도 생활비도 만만찮게 들 테고.”
정환의 당돌한 대답.
박수현 원장은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장학금을 받는 건 기정사실이구나? 하긴, 그럴 만도 하지.’
“우선 한국에서 제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싶어요. 한국예고에는 좀 그린다 하는 녀석들이 몰린다면서요.”
박수현 원장은 상장을 가리키며 물었다.
“지난 1년 동안 충분히 파악하지 않았니?”
“아직 멀었어요. 그건 몸풀기 같은 거죠.”
“건방진 놈. 덩치가 커져서 한 대 쥐어박을 수도 없고.”
그동안 정환은 무척 많이 성장했다.
이제 겨우 중학교 3학년이건만 언뜻 봐도 키는 180㎝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
게다가 힘도 무지막지하게 세졌다.
박수현 원장은 요통을 핑계로 그에게 창고 정리를 맡길 때도 있었다.
문자를 확인하던 정환이 박수현 원장에게 말했다.
“이만 가 볼게요. 엄마가 일찍 오라고 하셔서요.”
“그래. 고생했다.”
정환이 나가자 박수현 원장은 교실 불을 껐다.
그러고는 정환이 받은 상을 들고 털레털레 창고로 걸어갔다.
잡동사니가 가득한 창고 속 유일하게 먼지가 쌓이지 않은 상자.
바로 정환의 상을 보관하고 있는 상자였다.
그런데 그 상자 안에 쌓인 수많은 상패 중 유독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바로 ‘용감한 시민상’이었다.
박수현 원장은 그 상을 보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저 녀석은 커서 뭐가 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