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dwarf in his previous life, but an artistic genius in his current life RAW novel - Chapter 75
73화 동업, 그리고 새로운 사업
이동기는 목이 마른 듯 정환이 건넨 커피를 쭉 들이켰다.
정환은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A&K는 미술품 전시 기획에 있어 내실이 탄탄한 회사라고 들었는데 그만큼 일이 많이 힘드셨나?’
정환은 이동기와 K-컬쳐 페스티벌을 진행하면서 서로 많은 대화를 나눴다.
그래서 이동기가 A&K의 총괄 팀장으로 재직 중이라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다.
“이렇게 퇴사를 결정할 정도면 일이 많이 힘드셨나 봐요.”
정환의 말을 들은 이동기가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일이 힘들어서 그만둔 건 아닙니다. 일은 재미있었어요.”
“네? 그럼요?”
“그게 말입니다…….”
이동기는 정환에게 그간의 사연을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지난 몇 개월 동안 매너리즘에 지독하게 시달렸던 것.
그러다 우연히 ‘엘프의 숲’을 관람하면서 매너리즘을 극복했던 것.
그리고 정환의 능력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K-컬쳐 페스티벌에 추천했던 것까지.
정환은 이동기의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디렉터가 누구냐고 물었을 때 운영 팀장이 그런 표정을 지었던 거구나.’
이동기가 고개를 꾸벅 숙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개인적인 욕심 때문에 작가님을 속였습니다.”
“아닙니다. 사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동기 디렉터님이 절 추천했을 거라 예상은 어렴풋이 했어요.”
“아, 정말입니까?”
이동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이동기 디렉터님이 마치 절 테스트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뭐랄까, 페스티벌의 흥행을 위해서가 아니라 디렉터님이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 보였어요.”
정환의 말을 들은 이동기는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민망하군요.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제 작품이 디렉터님에게 큰 도움이 됐다니 오히려 다행입니다. 그런데 디렉터님, 사직서를 내고 바로 여기에 오신 이유를 여쭤봐도 괜찮을까요?”
이동기는 한동안 입술을 달싹거리며 대답을 망설였다.
그러다 결심을 굳힌 듯 힘 있는 목소리로 또박또박 대답했다.
“저, 작가님과 꼭 함께 일해 보고 싶습니다.”
“저랑요?”
이동기가 눈을 질끈 감고 말을 이어 갔다.
“작가님이라면 어마어마한 작품들을 계속 세상에 내놓으실 테니까요. 작가님의 작품이 탄생하는 그 순간을 곁에서 함께하고 싶습니다. 꼭 전시 기획자가 아니라도 괜찮습니다!”
한바탕 말을 쏟아 낸 이동기가 고개를 푹 떨궜다.
‘음.’
정환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분명 이동기처럼 예술에 대한 조예가 깊고 업계 전반에 걸쳐 발이 넓은 인물이 함께 일한다면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연출과 기획은 정환 혼자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들이었다.
특히 정환은 개인전과 K-컬쳐 페스티벌을 통해 자신의 연출 능력까지 입증한 상황이었다.
고민을 마친 정환이 말했다.
“죄송합니다. 지금 저에게는 전시 기획자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정환의 대답을 들은 이동기가 감았던 눈을 작게 떴다.
그러고는 힘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작가님 입장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오히려 제가 무리한 부탁을 드린 거죠. 작가님은 기획, 연출 실력이 모두 뛰어나니 굳이 전시 기획자가 필요하지 않으실 텐데…….”
이동기가 풀 죽은 모습으로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났다.
“죄송합니다. 실례 많았습니다.”
그렇게 이동기가 돌아서려고 할 때였다.
정환이 한마디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네?”
“아까 디렉터님이 말씀하셨죠? 꼭 전시 기획자가 아니라도 괜찮다고?”
“네? 네!”
한 가닥, 희망을 느낀 것인지 이동기가 초롱초롱해진 눈으로 정환을 쳐다봤다.
“디렉터님. 혹시 사업에 관심 있으십니까?”
***
몇 주 후.
공실인 사무실에 두 사람이 들어왔다.
정환과 이동기였다.
이동기는 부동산 중개인에게 들었던 설명을 정환에게 그대로 반복했다.
“이 사무실은 지난달까지 중형 패션 브랜드가 입주해 있던 곳이랍니다. 입주한 지 3년 만에 규모가 커져서 다른 곳으로 회사를 옮겼다더군요. 터가 좋다는 소문이 돌아서 그런지 이 사무실을 탐내는 곳이 많답니다.”
정환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확실히 터가 좋다는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둘러봤던 다른 사무실에 비해 유독 마나가 넉넉하다는 게 바로 그 증거였다.
이동기는 창가 쪽으로 다가가 블라인드를 젖혔다.
블라인드 너머로 서울숲의 모습이 시원하게 드러났다.
정환은 이 사무실에 마나가 넉넉한 것이 어쩌면 저 숲 때문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동기가 창밖 너머의 풍경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어떻습니까? 작가… 아니, 대표님. 대표님께서 요청하신 대로 숲이 가까운 사무실입니다. 여기에 작업실도 같이 딸려 있어요. 물론 그만큼 세가 비싸지겠지만…….”
정환이 이동기에게 씩 웃어 보였다.
아직 이동기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정환의 통장 잔고에는 300억이라는 돈이 잠자고 있었다.
월세는 그리 걱정할 부분이 아니었다.
“세는 괜찮습니다. 그런 건 걱정하지 마세요.”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이렇게 터가 좋고 넓은 사무실은 쉽게 구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이제 남은 것은 브랜드를 런칭하는 데 필요한 인력들을 고용하는 것뿐이겠네요.”
이동기는 텅 빈 사무실을 곳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는 재무관리팀, 이쪽으로는 인사지원팀, 저쪽으로는 판매유통팀을 배치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사업이 본격화되면 이 사무실이 좁아질 수도 있겠네요.”
“그러면 좋겠네요.”
정환과 이동기는 이곳에서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상상하며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두 사람이 마침내 동업을 결심하게 결정적인 계기.
그것은 때마침 이동기에게 짧게나마 회사를 운영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한때, 이동기는 A&K에서 회장이 건강상의 이유로 갑작스럽게 경영에서 한발 물러나면서 임시로 1년간 CEO 업무를 대리한 적이 있었다.
이후 전문 CEO가 고용되며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야 했지만 A&K의 규모가 워낙 컸기 때문에 이 기간에 회사 운영에 대해서 많은 걸 배울 수 있었다.
물론 처음에 이동기는 자신에게 회사 운영을 맡기는 일에 반대했다.
‘그래도 전문 경영인을 소개받는 게 좋을 겁니다.’
하지만 정환이 고개를 저었다.
‘회사 규모도 크지 않은데 전문 경영인을 영입하는 건 조금 부담스러워.’
무엇보다 전문 경영인을 고용한다고 해서 무조건 회사 운영이 잘될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
정환이 세우고자 하는 회사의 모습은 단순히 이윤을 추구하는 형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윤보다도 예술을 우선으로 삼는 회사.
정환은 이러한 회사를 원했고 이런 점에서 봤을 때 전문 경영인과 함께하는 것은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었다.
전문 경영인의 경우 정환의 생각과 달리 예술보다 이윤을 추구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괜히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정영주와 이한용이 괜찮은 전문 경영인을 소개해 주지 못하는 게 아니었다.
그런 까닭에 정환은 웬만한 전문 경영인보다도 이동기가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회사 운영에는 조금 부족할지 몰라도 예술을 향한 열정이 남다른 이동기라면 자신의 마음을 이해해 줄 수 있을 테니까.
이게 정환이 이동기를 동업자로 선택한 이유였다.
그렇게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정환이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여기로 계약하죠.”
그렇게 정환과 이동기는 사무실을 둘러보며 인테리어를 어떻게 진행할지 잠시 의견을 나눴다.
그러던 중 이동기가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겨서 정환에게 질문했다.
“그러고 보니 아직 회사 이름을 듣지 못했네요. 혹시 정해 둔 게 있을까요?”
이동기의 질문에 정환의 입가에는 자연스럽게 미소가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정환은 한 치의 고민도 없이 회사 이름을 댔다.
“블랙해머. 회사의 이름은 블랙해머로 하려고 합니다.”
***
잠시 후.
두 사람은 사무실에서 나와 늦은 점심 식사를 한 뒤 카페로 걸음을 옮겼다.
아직 사업에 대해서 나눠야 할 대화가 많았기 때문에 카페에서도 어김없이 관련된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
이번 주제는 사업 모델 선정이었다.
이동기가 먼저 이와 관련해 입을 열었다.
“가장 만만한 것은 아무래도 패션 관련 사업일 겁니다. 따로 알아보니 대표님의 패션계 복귀를 고대하는 사람이 무척이나 많더라고요.”
이동기는 이렇게 말하며 핸드폰을 꺼내더니 어떤 쇼핑몰의 홈페이지 링크를 정환에게 전송했다.
그곳에서는 놀랍게도 정환이 K-컬쳐 페스티벌에서 만들었던 무대 의상을 뻔뻔하게 판매하고 있었다.
“…이미테이션이군요.”
“이곳뿐만이 아닙니다. 이미 여러 곳에서 작가님이 페스티벌에서 선보이셨던 무대 의상을 카피해 내놓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래의 반응처럼…….”
이동기가 자신의 핸드폰 화면을 넘겼다.
그러자 구매자들이 남긴 댓글 목록이 나타났다.
정환 또한 이동기를 따라서 댓글을 확인했다.
-품질이 너무 조악하네요ㅠㅠ 싼 맛에 샀는데 돈 낭비ㅠㅠ
-이정환 허락은 받고 만든 거임?
-존나 구림;; 사지 마셈;; 진짜 후회함;;
-존버하다가 이정환이 새로 브랜드 런칭하면 그때 사요 레알 돈 낭비임ㅅㅂ
-그나저나 이정환은 패션 브랜드 런칭하긴 함?
-소문은 돌고 있는데 확실하지 않음… 하지만 그래도 이걸 돈 주고 사는 건 반대
그렇게 정환이 댓글을 어느 정도 살펴봤을 때 이동기가 입을 열었다.
“보시다시피 팬들은 대표님의 오리지널 제품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대표님께서 자체 브랜드를 만들어 화려하게 복귀한다면 반응 또한 엄청나게 올라올 겁니다.”
확실히 구미가 당길 만한 제안이었다.
그만큼 정환이 패션계로 돌아온다면 파급력이 대단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정환은 이동기의 말을 듣고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지루하다는 표정이었다.
‘이럴 줄 알았지.’
이동기는 실망하지 않고 곧장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패션계 복귀가 내키지 않는다면 회화 쪽으로 방향을 트는 것도 방법일 겁니다.”
이동기가 이번에는 사진 몇 장을 정환의 핸드폰으로 전송했다.
화면을 확인해 보니 미술품 경매 회사인 홍콩 크리스티, 그리고 도쿄 아트 옥션의 관계자와 대화를 나눈 것이었다.
“슬쩍 운을 띄워 보니 홍콩 크리스티, 도쿄 아트 옥션 모두 대표님을 예의 주시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이미 개인전 그림 몇 점은 홍콩과 도쿄 쪽으로 넘어가기도 했고요. 국내에서는 이미 인지도를 충분히 확보했으니 이제 해외 전시를 노리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겁니다.”
하지만 회화와 관련한 제안에도 정환의 표정에는 여전히 지루함이 떠올라 있었다.
이동기는 후, 하고 한숨을 내쉬며 다른 제안을 했다.
“다음은 조각입니다. 아시다시피 총면적 1만 제곱미터 이상의 건축물을 지으면 공사비의 1% 금액에 해당하는 미술 작품을 설치하거나 문화예술진흥기금에 출연해야 합니다. 사실 이 건은 의뢰를 따내기 쉬운 편이 아닙니다만 대표님의 경력이라면 어렵지 않을 겁니다. 다만 조각의 경우 패션이나 회화와 달리 사업의 다양성이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그렇게 이동기가 며칠간 정환이 어떤 브랜드를 런칭하면 좋을지 고민한 결과를 모두 꺼내 놨다.
그러나 역시 이번에도 정환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이동기는 그 사실을 파악한 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역시 마지막 조각도 마음에 들지 않는 거죠?”
정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전부 한 번씩 해 봤던 거라 그런지 솔직히 구미가 당기지 않습니다. 이왕 브랜드를 런칭하는 거 새로운 걸 해 보고 싶어요.”
이동기가 잠시 고민하더니 반대의 의견을 냈다.
“그래도 우리 블랙해머의 첫 번째 사업인데 안전한 길로 가서 확실히 브랜드를 각인시켜야 하지 않을까요? 모험은 그다음에 해도 늦지 않을 겁니다.”
일리가 있는 의견이었다.
자칫 잘못했다간 잘하는 걸 놔두고 이상한 사업을 벌였다며 손가락질을 받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사업 실패의 손해를 보는 것은 물론, 정환의 이미지 또한 조금 실추될 수 있었다.
첫 사업에서 이미지 실추는 뼈아픈 결과였다.
하지만 정환의 생각은 달랐다.
“브랜드를 확실히 각인시켜야 하는데 안전한 길로 가면 재미가 없죠. 아마 대중들도 이런 걸 원치 않을 겁니다.”
“그럼 대표님께서 생각하고 계시는 사업 모델은 무엇일까요?”
이동기의 물음에 정환은 기다렸다는 듯 조용히 웃으며 뭔가를 꺼냈다.
이동기가 정환이 꺼낸 물건을 쳐다보며 물었다.
“뭡니까?”
자세히 보니 그것은 연분홍색 액체가 담긴 향수병이었다.
정환은 별다른 설명 없이 그 향수를 허공에 대고 칙칙, 뿌렸다.
“이게 무슨…….”
뜬금없는 행동에 당황한 이동기가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공기를 촉촉하게 적신 향기는 그보다 더 빨리 이동기의 콧속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이동기의 눈앞에 어떤 광경이 펼쳐졌다.
그것은 흐드러지게 만개한 꽃밭의 풍경이었다.
꽃밭에서 풍겨 오는 향기.
그 향기가 얼마나 달콤한지 마치 공기가 핑크빛을 띠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눈앞이 아찔해질 만큼 향긋한 꽃향기.
그사이에 숨은 흙냄새.
두 뺨을 때리는 바람까지.
이동기는 마치 꽃으로 빚은 천국에 온 기분이었다.
그렇게 황홀경에 빠져 있던 이동기를 깨운 건 정환의 목소리였다.
“부대표님? 괜찮으십니까?”
“아, 네!”
이동기가 번뜩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아직 그 여운이 가시지 않는 듯 말을 더듬었다.
“어, 사장님. 어…….”
정환은 여전히 황홀경에 빠져 있는 이동기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것이 제가 생각하고 있는 새로운 사업 모델입니다.”
그랬다.
정환이 블랙해머의 첫 브랜드 런칭을 위해 준비한 아이템.
그것은 향수 사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