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dwarf in his previous life, but an artistic genius in his current life RAW novel - Chapter 92
90화 콜라보 (1)
그린 미스틱 작업실.
유아림은 푹신한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당장 처리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지만 손 하나 까딱하기 싫었다.
그때 이재철이 문을 두드리곤 고개를 쏙 내밀었다.
“대표님! 크로키 확인 언제 해 주실 거예요?”
“조금만 있다가 볼게.”
유아림이 게으름을 피우자 이재철이 독촉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도쿄 패션 위크에서 선보일 아이템이잖아요. 대표님이 빨리 확인해 주셔야 시제품 만들고 추가로 수정하죠.”
“아유, 알았어. 지금 볼게.”
이재철의 성화에 유아림은 억지로 몸을 일으켜 컴퓨터 앞에 털썩 앉았다.
그러고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코듀로이 원단 어디에 뒀니?”
“창고 오른쪽 선반 아래에 있어요.”
“쓰고 제자리에 좀 두라니까! 내 가위는 또 누가 가져갔어?”
넓은 작업실에서는 안정미와 양민준을 비롯한 여러 디자이너가 마네킹 앞에 서서 분주히 원단을 자르고 붙이며 끝없는 씨름을 하고 있었다.
유아림이 조그만 작업실에서 그린 미스틱이라는 브랜드를 런칭한 지도 벌써 5년.
5년 동안 그린 미스틱은 어엿한 하이엔드 패션 브랜드로서 자리를 잡았다.
이미 국내 패션쇼는 졸업한 지 오래였고 지금은 홍콩과 도쿄 패션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 바로 그 증거였다.
이렇게 그린 미스틱이 해외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것에는 유어드림 출신 디자이너들의 도움이 컸다.
꼬마 같았던 제자들이 어느새 성장해서 그린 미스틱의 허리 부분을 든든하게 맡아 준 덕분에 유아림은 해외 시장에 집중할 수 있었다.
유아림은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다.
거기에는 내년 도쿄 패션 위크에 선보일 컬렉션 크로키가 가득했다.
크로키에서 수정할 부분을 체크해야 했지만 유아림의 손은 어쩐 일인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하…. 평소 같았으면 10분이면 끝날 일인데.”
유아림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유아림이 지난주에 올라왔던 크로키를 체크하지 않은 이유.
그것은 최근 들어 아이디어가 잘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단순히 과로 탓이라 생각해서 며칠 휴가를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한 번 말라 버린 아이디어는 좀처럼 되살아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유아림은 지금처럼 온종일 멍하게 시간만 보내기 일쑤였다.
‘한창 아이디어가 솟아나야 할 시기에 이런 슬럼프가 찾아오다니.’
유아림은 답답한 마음에 손바닥으로 얼굴을 비비며 마른세수를 했다.
그린 미스틱 디자이너들은 유아림이 이렇게 슬럼프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유아림이 일부러 감췄기 때문이다.
‘그린 미스틱이 이렇게 잘나가고 있는데 대표인 내가 찬물을 뿌릴 수 없지.’
그래서 유아림은 이렇게 혼자 끙끙 앓을 수밖에 없었다.
이럴 때 유아림의 머릿속에는 가끔 정환의 얼굴이 떠오르곤 했다.
정환이라면 이런 상황을 극복할 아이디어를 툭, 내놓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유아림은 이미 정환을 자신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성장한 최정상급 디자이너로 여기고 있었다.
정환이 지오미아 디자이너 시절 선보였던 디자인들은 자부심 강한 유아림마저 이걸 어떻게 좀 따오면 안 될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훌륭했으니까.
‘정환이는 요즘 뭐 하려고 지내려나?’
유아림은 그 자리에서 핸드폰을 들어 정환의 이름을 검색했다.
이름 세 글자를 검색하자마자 블랙해머의 엄청난 활약상이 쭉 나열됐다.
특히 작년에 정환이 런칭한 패스트 패션 브랜드인 오리진은 일본에서 어마어마한 돌풍을 일으키고 있었다.
유아림은 오리진 특집 기사를 쭉 훑으며 생각했다.
‘오리진은 역시 잘나가고 있네. 텐탑, 파스오는 이미 빌빌거리고 있고. 이러다 얘 진짜 앤드클럽까지 꺾는 거 아냐?’
그때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렸고 유아림이 조금 짜증 섞인 표정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아이, 지금 하고 있다니…. 어머? 이게 누구야?”
유아림의 표정이 대번에 밝아진 이유.
그것은 작업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이 정환이었기 때문이다.
***
유아림은 정환과 마주 앉아 그간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렇게 잠시 서로의 근황을 확인한 유아림이 정환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한일 양국을 오가느라 정신없는 애가 여기까지는 어쩐 일이야?”
정환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예전에 저랑 한번 약속한 적 있었죠?”
“무슨 약속?”
“언젠가 제가 더 훌륭한 디자이너가 된다면 저랑 같이 콜라보 작업을 해 주겠다는 약속.”
“어. 너 설마……?”
“네. 그래서 하는 말인데, 혹시 오리진이랑 콜라보할 생각 있으세요?”
의외의 제안을 들은 유아림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이내 침착함을 되찾았다.
생각해 보면 패스트 패션 브랜드에서 콜라보는 꽤 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앤드클럽은 말할 것도 없었고 다른 패스트 패션 브랜드 역시 여러 브랜드와 콜라보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러니 오리진이 그린 미스틱과 콜라보를 하는 것 또한 그리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야, 이거 영광인데. 음…….”
하지만 유아림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 따로 과거의 약속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유아림으로서 오리진과의 콜라보는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다.
특히 그린 미스틱은 현재 일본에서 브랜드 인지도를 차곡차곡 쌓아 가고 있는 단계였다.
그런 만큼 오리진과의 콜라보를 성공할 수만 있다면 그린 미스틱의 브랜드 인지도를 몇 단계나 끌어 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유아림은 걱정스러운 마음이 앞섰다.
당장 지금은 평소 같았으면 10분 만에 끝냈을 크로키 수정조차 버겁게 느껴질 만큼 아이디어가 완전히 고갈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런 상황에서 오리진과의 콜라보를 섣불리 진행했다간 오리진에 큰 민폐를 끼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콜라보를 해야 한다면 지금보다 더 멋진 모습으로 하고 싶다는 게 유아림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렇게 유아림의 얼굴이 조금씩 어두워지자 정환이 불쑥 물었다.
“디자이너님…. 요즘 많이 힘드시죠?”
정환의 질문에 유아림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너무 잘나가서 힘이 든다, 야. 작년에 홍콩 패션 위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 우리 옷을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다 사겠다는 부자가…….”
유아림은 홍콩, 도쿄 패션 위크에서 있었던 일들을 쭉 늘어놓았다.
확실히 유아림의 이야기만 들어 보면 그린 미스틱은 좋은 성과를 보이며 아무 문제 없이 순항 중이었다.
하지만 정환은 그 속에 한 가지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상하네요. 저는 디자이너님 작품이 예전 같지 않다고 생각했거든요.”
정환의 한마디에 유아림의 얼굴에서 미소가 싹 사라졌다.
“…어째서?”
“솔직히 말씀드려도 될까요?”
“물론이지. 네 의견이잖아.”
유아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꺼냈다면 듣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정환의 의견이니 유아림 역시 진지하게 들어 볼 수밖에 없었다.
“뭐랄까…. 어느 순간부터 디자이너님 작품은 너무 강한 새로움만을 추구하고 있는 것 같아요.”
유아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강한 새로움만 추구하고 있다고?”
“네. 디자이너님이 미학성에 사로잡혔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 같네요.”
“말이 너무 어려운데. 조금 더 쉽게 풀어서 설명해 줄래?”
그러자 정환은 유아림 쪽으로 몸을 가까이 당겼다.
그러고는 조금 더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디자이너님이 지난 패션 위크에 선보이셨던 옷들을 과연 몇 명이나 실제로 입을 수 있을까요?”
“글쎄…….”
유아림은 정환의 질문에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최근 옷을 디자인하면서 매번 새로움과 아름다움에만 집중했을 뿐,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100명? 아니면 1,000명? 하이엔드 패션이니 많아 봐야 그 정도겠지.”
정환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전 세계 60억 인구 중에서 단 100명만이 입을 수 있는 옷은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음…. 그 말은 꼭 하이엔드 패션이 의미가 없다는 뜻으로 들리는데?”
유아림이 조금 날이 선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정환은 손을 휘휘 저었다.
“아뇨. 하이엔드 패션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죠. 다른 패션이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하는 가이드 역할을 하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실용성이 완전히 배제된 패션은 한계가 뚜렷해요. 마치 지금 디자이너님이 막다른 길에 몰린 것처럼요.”
유아림은 말문이 막혔다.
유아림이 답답해하던 부분을 정환이 정확히 꼬집었기 때문이다.
“디자이너님의 옷은 정말 아름다워요. 누구도 부정할 수 없죠. 하지만 동시에 너무 불편해 보여요.”
정환은 테이블 위에 놓인 잡지를 가리켰다.
잡지 표지에는 그린 미스틱의 옷을 입고 홍콩 패션 위크 런웨이에 선 모델이 포즈를 잡고 있었다.
“프로 모델도 겨우 소화할 정도로 아름다움에만 치중한 옷이잖아요. 만약 이 옷을 일반인이 입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유아림은 정환의 물음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옷은 프로 모델이 아니라면 입어 볼 엄두조차 못 낼만큼 불편하게 디자인된 게 맞았으니까.
그만큼 최근 유아림의 옷은 아름다움 하나만을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지고 있었다.
정환이 유아림에게 물었다.
“단순히 아름답기만 할 뿐, 실생활에서는 너무 불편해서 입을 수 없는 옷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
“물론 1,000명만 입을 수 있는 옷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죠. 하지만 저는 많은 사람이 편안하게 입을 수 있는 옷을 디자인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유아림은 그제야 자신이 지금까지 무엇을 놓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실용성이었다.
디자이너로서 옷을 만들기 전, 제일 먼저 생각해야 할 점을 놓쳤다는 사실에 유아림은 크게 충격을 받았다.
‘내 시야가 이렇게 편협해졌다니…. 아이디어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던 것도 바로 그것 때문이었던 건가? 도대체 언제부터 이랬던 거지?’
유아림은 진지하게 자신의 디자인을 반추했다.
그린 미스틱의 디자인이 극단적으로 아름다움과 새로움만을 추구하게 된 것은 다름 아닌 해외 패션쇼에서 큰 호평을 받았을 때부터였다.
그린 미스틱의 이름이 국내 무대를 벗어나 세계 무대에 알려지자 유아림은 더욱더 큰 아름다움과 새로움에만 집착했다.
그 과정 중에서 실용성은 철저히 배제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야만 계속 세계 무대에서 인정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큰 깨달음을 얻은 유아림은 다시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어졌다.
정환은 그런 유아림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자신 역시 전생에서 숱하게 겪어 봤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분명 이런 시기가 올 거라 예상했지. 이럴 때는 한 번씩 옆길로 빠져 보는 것도 방법이야.’
정환은 미리 준비한 태블릿을 유아림에게 건넸다.
“제가 오늘 디자이너님을 찾아온 것은 약속 때문도 있지만 이와 관련해 도움을 드리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에요. 제 이야기에 기분이 상하신 게 아니라면 태블릿을 한번 봐 주세요.”
유아림은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고 대답하며 정환이 건넨 태블릿을 확인했다.
그 태블릿 안에는 오리진과 그린 미스틱의 콜라보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이 담겨 있었다.
“세상에…. 이걸 너 혼자 준비한 거야?”
“마음에 드세요?”
“마음에 들다마다. 너, 진짜…….”
유아림은 말을 잃은 채 다시 태블릿에 집중했다.
정환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어떤 식으로 콜라보를 진행할 것인지 구체적인 계획을 설명했다.
그리고 이 설명을 듣는 유아림의 얼굴에는 최근 사라졌던 생기가 조금씩 돌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