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Fighter Pilot's Love RAW novel - chapter 1
프롤로그
2003년 11월 20일. 21:01:33. 제20전투비행단 격납고
“팰컨 5, 준비완료, 브레이크 해제”
나직한 목소리로 관제탑과 교신한 지윤은 교신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엔진추력조절레버를 최대로 밀어 에프트버너(제트엔진의 후기 연소장치) 를 점화했다. 그와 동시에 KF-16 파이팅 팰컨은 순간 부르르 떨더니 쏜살같이 튀어나갔다.
지윤은 KF-16 의 엄청난 힘으로 뒤로 밀려나는 몸을 바로 세우고 꺾이려는 목에 힘을 주었다. 뒷좌석에 철썩 달라붙은 몸에 힘을 주며 조종간을 꼭 쥐었다.
이어서 전방의 활주로가 엄청난 속도로 밀려오고 활주한지 10초여만 에 주변의 공기의 흐름을 무너뜨리며 솟구쳐 올랐다.
KF-16은 순식간에 13,000피트의 고도에 오르고 지윤은 수평비행으로 순항, 고도 20,000피트에 도달하자 속도 약 420노트에서 간단한 회전과 360도 상승 회전을 해보았다.
지윤은 눈앞에 있는 허드(상황표시장치)의 G수치가 1에서 7로 급등할 때까지 스틱을 잡아당겼다. 순간 온몸의 피가 한곳으로 몰리며 숨통을 조르는 듯 한 압박감이 몸 전체를 짓누르자 지윤을 숨을 고르고 정신을 바짝 차리며 조종 관을 꽉 움켜쥐었다.
곧이어 지윤은 선회를 멈추고 다시 수평비행을 하며 속도를 유지했다.
그때 헤드셋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굵고 낮은 목소리…….
“로저.”
지윤은 아래를 내려 보았다.
눈 아래로 펼쳐지는 도시의 야경은 수많은 별빛을 뿌려놓은듯 저마다의 색을 뿜어내고 있었다.
너무나 아름다웠다. 수많은 야간비행을 하는 지윤 이었지만 매번 부담이 가는 야간비행에도 여전히 하늘에서 내려다보이는 야경은 눈이 부실정도로 아름다웠다.
헤드셋에 들려오는 경고의 목소리에 지윤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계기판을 들여다보았다.
자신이 순간적으로 항공기가 측면으로 기울여져 나는 것 같은 착각이 드는 ‘버티고’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전투기를 타고 빠른 속도로 360도 회전이나 높고 낮은 고도로 오가는 것을 계속하다보면 위와 아래를 구분할 수 있는 감각이 둔해진다.
푸른 바다와 하늘을 혼동하여 바다로 질주하는 현상이 대표적인 버티고 현상이었다. 또 야간에는 검은 밤바다에 떠있는 어선의 불빛과 밤하늘의 별빛을 혼동하기도 한다.
많은 조종사들이 이 비행착각 현상으로 아까운 목숨을 잃었다.
지윤은 정신을 차린 후 다시 밤바다를 바라보았다. 아름다웠다. 검은색 물결이 밤바다에 떠 있는 부표와 고깃배에 밝힌 불빛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때 관제탑으로 부터 교신이 들려왔다.
[여기는 관제탑. 날씨가 좋지 않다. 현재 빠른 속도로 번개를 동반한 비구름이 몰려있다]지윤이 눈앞의 화면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가 탑승한 팰컨1의 위치가 깜빡이고 있었다. 팰컨1은 어느새 그녀의 뒤로 바짝 붙어 비행하고 있었다.
“로저”
그에게 응답한 후 지윤은 조종간을 잡고 90정도를 기울여 우측선회를 실시했다. 순간, 우측으로 선회해야할 지윤의 KF-16기가 좌측 아래로 기울었다.
[팰컨5, 여기는 관제탑 무슨 일인가?]그의 목소리와 관제탑에서 들려오는 다급한 목소리가 그녀의 귀에 시끄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여기는 팰컨5, 조종기가 말을 듣지 않는다.” 찰나간의 침묵이 흘렸다.
지윤은 그의 명령대로 조종간을 좌로 움직였다. 하지만 역시 예상대로 움직임은 없었다. 지윤이 조종하는 KF-16은 점점 아래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지윤은 조종간을 최대한 위로 치켜 올린 채 힘을 주었다.
“여기는 팰컨5, 조종간의 방향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고도가 점점 낮아지고 있습니다.”
곧이어 무거운 침묵이 뒤를 이었다. 순간 그녀가 탄 KF-16기의 고도가 급격히 낮아지기 시작했다.
[여기는 관제탑 이젝션하라.]그의 명령에 이어 관제탑에서도 교신이 들렸다.
이젝션. 비상탈출. 지윤의 눈앞에 비상탈출 버튼이 놓여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민가가 조금 보이고 조금 더 앞으로 밤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지금은 안 됩니다. 바로 아래가 민가 입니다. 조금만 더 …….”
낮게 울리는 그의 목소리에 다급함과 그녀의 대한 걱정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그의 성난 고함소리를 들었지만 지윤은 탈출할 수가 없었다. 조금만 더 가면 밤바다다. 거기까지만 가면 민가를 덮치지 않을 수 있다. 조금만……. 조금만 더 ……..
만약 이대로 목표지점까지 가지 못하고 자신이 조종간을 놓고 탈출한다면 민가를 덮칠 확률이 컸다. 최소한 민가 옆에 해변으로 곤두박질칠 때까지는 가야 한다.
지윤는 이를 악물었다. 순간 머릿속으로 우혁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느새 자신에 심장의 주인이 되어 버린 그의 모습이. 거친 눈썹 아래 빛나던 그의 부드러운 눈빛, 자신에게 사랑을 속삭이던
낮은 목소리, 자신을 어루만지던 뜨거운 손길…….
“여기는 팰컨5. 바다 위로 최대한 접근한 후 비상 탈출하겠다. 이상.”
지윤은 교신을 끝내고 조종간에 집중했다. 그 뒤로 그의 소리 높여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팰컨5, 지금 당장 탈출하라. 이지윤 대위 탈출하라! 명령이다!
다시 한 번 그의 고함소리가 기내에 울렸다.
"팰컨1…….정우혁 중령님……당신을 사랑합니다…… 이상."
그리고 지윤은 조종간을 꽉 잡은 채 밤바다를 향해 속력을 최대한으로 높였다.
2003년 02월 04일 09:00. 제20전투비행장 단장실.
지윤은 자신이 입은 파란색 공군 제복을 쓸어내려 구김이 간 곳이 없나 다시 한 번 점검했다. 그리고 독수리 문양의 공군 마크가 달린 모자를 다시 고쳐 쓰며 눈앞의 문을 살짝 노크했다.
똑똑
“들어와.”
문 반대편에서 들려오는 명령에 살짝 문을 열며 들어선 지윤은 맞은편의 커다란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중년의 남자를 향해 거수경례를 붙였다.
“필승! 대위 이지윤은 제20전투비행단 255대대에 2003년 2월 4일부로 근무를 명받아 ㅣ에 신고합니다. 필승!”
“필승.”
지윤은 자신이 문을 열고 들어서며 보았던 맞은편의 앉아있는 중년의 남자가 제20전투비행단의 단장인 이영훈 준장임을 확인하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네로군. 우리 비행단의 첫 여자 전투 조종사로 임명된 걸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하하하. 아주 미인이구만. 그리고 여기는 자네가 소속된 255대대의 대대장 정우혁 중령이다.”
지윤은 준장이 앉아 있는 책상 바로 옆에 우뚝 서 있는 그를 보았다. 큰 키에 다부진 몸을 가진 사람이었다. 짧게 자른 머리에, 전투 조종사다운 이미지를 강하게 풍기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중령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젊어 보이는 외모였다. 날카롭게 빛나는 눈빛과 놀랍도록 잘생긴 얼굴이었다.
“필승!”
“필승”
그녀의 거수경례에 마주 경례를 붙이며 그녀를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날카롭게 훑어보는 그의 눈빛에서, 지윤은 알 수 없는 거부감을 느꼈다.
“음……. 정우혁 중령은 진급이 아주 빠른 편에 속해 아마 자네가 놀랐을 걸세. 2001년 이라크 참전해 커다란 공을 세우고 훈장까지 받으면서 일 계급 특진한 우리 비행단의 인재지. 하하하. 안 그런가? 중령.”
“훗. 너무 비행기 태우시는군요. 준장님”
“그런가? 하하하하.”
준장은 한 개전투비행단을 책임지는 단장치고는 여느 동네 옆집 아저씨 같은 소탈함이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반면 그의 옆에서 여전히 차가운 미소를 짓고 있는 중령은 감이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을 것 같은 거리감이 느껴졌다.
“대위. 우리 대대에 적극 지원했더군?”
“네. 그렇습니다.”
중령이 차갑게 내뱉듯 자신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질문을 하자 그녀는 뒷머리가 주뼛 서며 오싹함마저 느꼈다.
“우리 대대는 KF-16기가 주 기종이다. 웬만한 베테랑이 아니면 힘든 기종이지. 자네 비행 조종 경력은 3년이더군.”
중령의 말은 비행 조종 경력도 얼마 되지 않는 햇병아리 대위 주제에 감히 자신의 대대에 지원을 했느냐는 식의 비난으로 들렸다. 그것도 여자의 몸으로.
“비행교육 때부터 제 목표는 KF-16기였고 이번에 기회가 되어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지윤도 알고 있었다. 홍보. 대한민국 공군의 이미지를 좋게 하고 크게 홍보가 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여자 전투 조종사의 존재였다. 단지 그 목적만으로 여자 전투조종사를 양성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홍보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KF-16기는 근 6, 7년 가까이 전투기를 조종한 베테랑 조종사들이 주로 모는 기종이었고, 이번처럼 지윤이 KF-16기의 조종사로 발탁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자신 있으니 지원 했을 테고 다른 대대는 어떤지 모르지만 내가 이끄는 대대에서 여자라고 봐주는 일은 없다.”
“네. 중령님.”
“중령. 살살해. 왜 그리 딱딱하게 그러나? 오늘이 첫날인데…… 대위. 너무 겁먹지 마라 여기 정우혁 중령 밑에서 비행하다 보면 1년 안에 자네도 베테랑이 될 테니……하하하.”
어차피 각오했던 일이었다. 여자 전투조종사로 참아내야 할 일은 무수히 많았다. 그럼에도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 바로 전투기를 조종하는 일이었다.
따라오라는 중령의 말에 준장님께 인사를 하고 따라나서며 저 냉기가 철철 흐르는 대대장에게 자신이 여자로서가 아닌 정식 조종사로서의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철저히 배우겠다고 다짐하는 지윤이었다.
중령의 방으로 들어선 지윤은 단출한 방 안을 재빠르게 훑어보며,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바로 전화기를 드는 그의 책상 앞으로 가 차렷 자세를 취했다. 책상 옆에 붙은 사이드 테이블에는 최신 기종의 컴퓨터가 놓여 있었고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족히 몇 백 권은 되어 보였다. 책상 뒤편에 위치한 큰 창문 밖으로 활주로가 길게 이어져 있었고, 이제 막 이륙하는 전투기의 모습이 보였다
“225대대장이다. 블랙울프 편대장 김기홍 소령 내 방으로 오라고 해.”
중령이 지윤이 속할 편대의 편대장을 호출하는 전화를 끊으며 자리에 앉자 지윤은 그의 앞에서 긴장한태 차렷 자세를 취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중령의 눈동자는 차갑기 그지없었다.
“대위가 소속된 KF-16대대는 총 3개의 편대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 하나인 편 대명 블랙울프. 자네가 소속될 편대다. 불랙울프는 총 다섯 대의 팰컨(KF-16)에, 소령이 두 명, 대위가 한 명, 그리고 나. 이렇게 네 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번에 대위까지 포함시키면 총 다섯 명이다. 대위를 제외한 모든 조종사들이 6년이 넘게 한 베테랑들이지. KF-16대대에 여자 전투조종사는 대위가 처음인데 이게 무슨 뜻인 줄 아나?”
“네. 알고 있습니다.”
대대장이 무슨 뜻으로 묻는지 어렴풋이 짐작이 되었다. 전투나 비상시 편 대원들의 단합은 곧 목숨과도 같았다. 그만큼 편대의 결속은 중요한 사항이었다. 하지만 남자들로만 편대에 여자인 자신이 들어감으로써 벌어진 혼란을 걱정한다는 의미이리라.
“앞으로 지켜보지.”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노크소리와 k
문을 열고 들어서는 그들을 웃음기 가득한 얼굴의 대위가 밝은 표정으로 반겼다.
“이야~. 드디어 우리 비행단에도 여자 전투조종사가 왔네. 반갑다, 대위. 내가 자네보다 선배인건 알지?”
“필승.”
지윤은 얼굴에 가득 웃음을 지으며 악수를 청하는 그에게 차렷 자세로 경례를 붙였다.”
“이……됐어, 됐어. 뭘 그렇게 빡빡하게 해? 우리 조종사들 좋은 점이 지상에 있을 때는 상하관계에 있어서 다른 군 생활보다는 좀 자유롭다는 거 아니겠어? 뭐 편대, 대대마다 다 다르지만 우리 편대장님이나 대대장님은 앞뒤 꽉 막힌 사람들 아니니까 긴장 풀어. 하하하하.”
“야. 김 대위. 그래도 신입인데 너무 풀어 주면 안 돼지. 이지윤 대위. 저 친구하고 너무 친하게 지내지마. 나쁜 물드니까 알았나?”
“…….”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는 그녀를 향해 크게 웃어 보이는 두 사람에게 왠지 편안한 감정이 생기는 지윤이었다.
***
2003년 7월 24일. 14:32:52 제20전투비행단 연병장.
지윤은 KF-16기종변경교육의 마지막 단계인 야간비행교육을 위해 최 소령과 함께 격납고로 향했다. 아직 시간적 여유가 있었지만 다시 한 번 주의 점을 숙지하고 전투기를 점검하기 위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와아…….”
연병장 쪽에서 들려오는 커다란 함성소리에 지연과 최 소령이 걸음을 멈추었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것을 보니 무슨 시합을 하는 듯했다.
“족구 시합이다. 어. 우리 대대잖아? 254대대하고 붙었네. 왜 내가 몰랐지? 야. 이 대위. 잠깐 구경하고 가자 .”
연병장 쪽에서 들려오는 함성에 최 소령이 목을 길게 빼고 족구 시합이 한창인 곳을 쳐다보고는 그쪽으로 바삐 걸어갔다.
지윤도 제20전투비행단에 오기 전, 제 10전투비행단에서 대대별 족구 시합이 열리는 때면 함께 참가해서 열심히 뛴 적이 있었지만 그리 흥미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떤 시합이든 자신이 속한 대대가 하는 시합이라면 흥미가 생기고 이왕이면 자신의 대대가 이겼으면 하는 바람이 생기는 것은 인지상정이었다. 지윤은 시합이 벌어지는 곳으로 뛰어간 최 소령의 뒤를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시합은 각각주전 4명의 인원으로 구성되어 진행 중이었다. 낮은 네트를 사이에 두고 양쪽 모두가 땀에 흠뻑 젖어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벌써 막바지에 이른 듯했다.
“야, 소위. 몇 대 몇이야?”
최 소령이 눈을 빛내며 주변에서 구경하고 있는 정비대 소위에게 물었다.
“3전 2승제고 각각 1승씩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이 마지막 세트입니다. 지금 세트 스코어가 10 : 6이니까 5점만 더 따면 255대대가 이깁니다.”
“그래? 어, 우리팀 공격수가 정우혁 중령님이잖아?”
“예. 경기 내내 주전으로 쉬지도 않고 뛰고 계십니다. 여튼 대단하십니다.”
“이제 알았냐? 우리 대대장님이 대단하신 거 ?”
지윤은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경기장을 바라보았다. 상대편에서 넘어오는 공을 받아내느라 긴장으로 굴 곡직 그의 상체가 단단한 선을 그리고 있었다. 넓은 어깨와 강인해 보이는 팔뚝이 군살 없이 매끈한 등과 배로 이어져 있었고 날아오는 공을 받아치기 위해 움직이는 다리는 단단한 근육들이 굵은 물결을 이루었다.
그때 갑자기 상대편에서 날아오는 공을 받으며, 그가 허리를 뒤로 젖혀 오른발을 앞으로 내밀듯 중심을 잡고 왼발을 허공으로 띄워 공을 힘껏 네트 너머로 찍어 넘겼다.
“와아!”
254대대의 주전들은 강하게 넘어오는 공을 제대로 받아 보지도 못하고 허무하게 게임이 끝나고 말았다. 구경하고 있던 대원들과 시합에 참가한 255대대원 전원이 함성을 지르며 얼싸안고 펄쩍 펄쩍 뛰며 좋아했다.
지윤의 옆에 있던 최 소령도 기쁜 탄성을 내지르며 경기장을 달려갔고, 지윤도 덩달아 미소 지으며 최 소령의 뒤를 따라 경기장으로 걸어갔다. 이런 기분이 바로 결속이었다. 자신이 속한 대대의 우승……무엇이 되었든 대대의 우승은 곧 자신의 승리와 같은 것이었다.
수고한 상대팀과 가벼운 농담과 주고받으며 경기장은 정리되고 있었다. 그때 정우혁 중령이 자신이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목에 수건을 걸고 벗어둔 군복 상의를 걸친 채 걸어오는 그의 모습은, 최선을 다해 게임에 임하고 승리를 움켜진 ㅣ자의 여유가 넘치고 있었다.
“야간비행인가?”
목에 걸린 수건으로 턱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그가 가까이 다가왔다.
“네. 대대장님.”
“아직 시간이 있나 보군.”
“예. 아직 1시간 정도 남았습니다.”
“그래. 수고해라.”
지윤은 그에게서 나는 땀 냄새가 싫지 않았다. 평소에는 아주 드물게, 그가 스쳐 지나갈 때면 상쾌하고 은은한 향이 느껴지곤 했다. 향수 냄새 같지는 않았고 아마 남자들이 쓰는 화장수의 향일 것이다. 지금도 그가 흘린 땀 냄새와 섞여 은은하게 맡아지는 향이 부드럽게 그녀의 코를 간질이고 있었다.
“필승.”
지윤은 그에게 간단한 거수경례를 하고 최 소령과 함께 격납고로 향했다.
우혁은 멀어지는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처음의 우려와는 달리 여자라서 뒤쳐지는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다른 남자 대원들과 똑같이, 아니 노력으로 치자면 그녀가 더 우수했다.
비행이 없는 날은 거의 모든 시간을 체력 유지를 위한 운동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 같았다. 우혁이 볼 때마다 항상 그녀는 스포츠센터에서 달리기를 하거나 볼링, 등산을 하고 있었다.
솔직히, 우혁은 지윤을 다시 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녀의 취약점을 찾기 위해 관심이 점점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땀 흘리는 그녀의 모습에서 곧은 의지를 보았고, 그녀의 거짓 없는 맑은 눈동자에 빨려들 것 같은 매력을 느꼈다.
빌어먹게도 그녀의 붉은 입술마저도 탐이 날 정도였다.
우혁은 목에 걸어둔 수건을 꽉 움켜지며 손에 힘을 주었다. 이제 어떤 결론이든 내야 했다. 그녀를 향한 거부할 수 없는 이 감정의 결론을 내야만 했다.
대낮의 활주로는 이제 완연한 한여름의 열기로 끓어오르고 있었고, 덩달아 조종사들에게도 힘겨운 시간이었다. 한여름이라도 비행이 있는 날은 아래위가 붙은 조종 복을 갖춰 입어야 했고, 헬멧과 그 외에의 장비들은 빠짐없이 갖추어야 하는 조종사들에게 있어서 불볕더위는 최악의 고문이었다.
지윤은 오늘로써 KF-16 기종변경 마지막 비행교육을 마치고, 자신에게 할당된 KF-16기의 점검을 끝낸 후 헬멧을 벗어들고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사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격납고에서 벗어나 막 사무실에 있는 건물로 들어서려는데,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정우혁 중령이 보였다.
“필승.”
“음. 지금 비행 끝난 건가?”
“네. 그렇습니다.”
“오늘이 비행 마지막 날이라더군.”
“네. 그렇습니다.”
“그래. 수고했다.”
대대장의 수고했다는 말에 지윤은 은근히 기분이 좋아졌다. 비록 첫 대면에서는 차가운 인상과 자신을 보는 못마땅한 눈길에 그에게 좋은 감정을 가질 수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중압감이나 카리스마에 압도된 것이 사실이었다. 첫 만남 이후 젊은 나이에 중령까지 오른 그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으며 그에게 존경심마저 생긴 그녀였다.
주로 같은 편대의 김유영 대위에게 들은 이야기가 대부분이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정우영 중령에 대한 다른 편 대원들이나 대대 원들의 이야기로도 충분히 그에 대해 짐작할 수 있었다.
어릴 때부터 뛰어난 영재로 18살에 공군사관학교에 입학했고, 4년 후 최우수 졸업생으로 졸업했으며 2년간의 비행조종교육을 이수하고 바로 미국으로 유학을 다녀온 인재였다. 그 후 한국으로 돌아와 최단 기간에 소령으로 진급해 이라크 전에 지원했고, 한미 협동 작전에서 후세인의 최측근 지도자의 은신처를 폭격하는 공을 세워 또다시 중령으로 특진하여, 대한민국 조종비행단을 통틀어 최연소로 현제의 제20비행조종사단의 255대대 대대장으로 임명되었다. 모두들 혀를 내두르며 무서운 사람이라고 입을 모아 말을 하고 있었다.
김유영 대위의 말에 따르면 중령은 그러한 인재임에 불구하고 거드름이나 잘난 척을 하며 아랫사람을 무시하는 태도는 보이지 않고, 모두에게 공정한 지휘관으로 인정받고 있는 듯 했다.
근 6개월간의 비행단 생활을 했지만 지윤은 그와의 접촉이 거의 없었다. 비록 같은 편대에 속했지만 그는 3개의 편대를 지휘하는 대대장이었고, 지윤이 속한 불랙울프 편대의 보고가 있는 시간에도 그녀가 대대장에게 직접 보고를 올리는 일은 없으니 그를 알 수 있는 시간도 없었다.
다만, 가끔 스포츠센터에서 운동하는 그를 보거나, 오다가다 마주치기라도 하면 경례를 하는 것이 다였다. 지금처럼.
“오늘 저녁에 255대대원 전원 Beer-Call이 있으니 전원 참석해.”
“네. 알겠습니다.”
조종사들이 비행을 마치고 그날의 스트레스를 풀기위해 간단히 술 한두 잔씩을 하는 행사가 Beer-Call이었다. 그녀도 가끔 교육이 끝나는 시간에 편 대원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했지만 정우혁 중령이 참석하는 자리는 처음이었다.
지윤의 대답에 잠시 말이 없던 그가 다시 걸음을 옮기는 듯 하더니 다시 멈춰서 그녀를 돌아보았다.
“이지윤 대위.”
“네. 대대장님.”
“지내는 데 불편사항 없나?”
“……없습니다.”
그녀의 망설이듯 늘어지는 대답에 정우혁 중령이 그녀를 다그쳤다.
“뭔가?”
“…… 수영장을 이용 시간 외에 쓰고 싶습니다.”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며 의문을 표하던 그가 곧 알겠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수영하기가 불편하군.”
“네. 그렇습니다.”
기지 내 수영장의 시설은 아주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오전 11시부터 오후 9시까지 운영되는 수영장은 모든 공군들이 다 같이 이용하는 곳이라 여자인 그녀가 이용하기에는 불편함이 있었다. 물론 다른 여자 간호장교들도 있었지만 다른 동료 조종사들에게 그녀가 그들과 달리 여자의 몸을 가졌다는 점을 굳이 인식시키고 싶지 않았다.
“한번 알아보지. 밤 시간이면 되겠나?”
“네. 감사합니다.”
“장담은 못한다.”
돌아서는 그의 얼굴에서 얼핏 미소를 본 것은 그녀의 착각일까…….
저녁 시간의 기지 내 호프집은 255대대원들이 거의 모두 모여 왁자지껄하니 시끄러웠다. 무거운 맥주잔이 부딪치는 소리, 누군가 크게 웃음을 터트리는 소리와 부드러운 듯 감미로운 피아노 조율까지 하루의 고단함을 모두 날려버릴 편안한 분위기였다.
야간비행이 없는 지윤은 간단한 티셔츠와 청바지 차림으로 입구를 들어서며 자신의 편대원들을 찾았다. 한쪽 구석 테이블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있는, 비행교관을 맡았던 최강우 소령을 보였다. 그 옆에서 연신 큰 소리로 다른 편대원들과 떠드는 김유영 대위도 있었다.
그리고 편대장 김기홍 소령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그를 보았다. 정우혁 소령. 하얀 티셔츠에 진한 청바지를 입은 그의 모습은 몰라보게 편안해 보였다. 그리고 ……. 너무도 매력적이었다.
두근.
지윤은 갑작스런 심장의 이상 징후에 당황하며 재빨리 자신을 추슬렀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녀의 목표는 고의 전투조종사였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여자라는 사실조차 잊고 살아야했다. 아무것도 아닌 감정 소모로 자신의 목표에 해가 되는 일은 절대 있을 수 없었다.
남자들만의 전유물이었던 전투조종사가 되기 위해 그녀가 흘렸던 땀방울을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의 체력적 한계를 넘어선 고통을 모두 이겨내야 했던 지난 시간을 생각해서라도 티끌만 한 감정도 허용할 수 없었다.
지윤은 다시 한 번 자신의 굳은 결심을 다지며 편대원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어이. 햇병아리. 여기야.”
같은 편대 소속 김 대위는 같은 대대원들에 비해 그녀의 비행 경력이 얼마 되지 않는 걸 알게 된 그날부터 자신을 햇병아리라 부르며 놀리는 것을 서슴치 않았다. 물론, 악의 없는 놀림이었지만 그 별명이 썩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오늘같이 이렇게 거의 모든 대대원들이 있는 자리에서는 더욱더.
김 대위를 향한 살짝 인상을 찌푸린 지윤은 그가 자신의 옆에 마련해 주는 자리에 앉으며 고맙다는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야……드디어 오늘의 주인공이 오셨군. 이지윤 대위 한잔 받아.”
“네. 감사합니다.”
편대장인 김기홍 소령이 주는 잔을 받으며 지윤은 살짝 웃음을 머금었다.
“어때? F-5 몰다가 KF-16로 변경하니까 조종 할 만해?”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여기 대대장님께도 보고 드렸지만 교육 내내 아주 훌륭했습니다. 이지윤 대위 같은 교육생이면 얼마든지 교관하겠던데요. 하하하하.”
자신의 비행교육을 맡았던 최 소령의 칭찬과 방금 전 마신 맥주 탓에 지윤의 얼굴은 발그레해지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소령님.”
“그래. 그래. 우리 이제 잘해보자고. 이틀 후 우리 블랙울프 편대원 전원 비행시험이 있을 테니 그렇게 알고 있어. 우리 대대장님까지 끼워서.”
비행훈련은 편대비행이 주를 이루었고 정우혁 중령은 3개의 편대를 번갈아가며 함께 비행에 나서고 있었다. 하지만 주로 함께 비행하는 것은 블랙울프 편대였다.
그때까지 조용히 맥주만 마시고 있던 중령이 눈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수고했다. 이지윤 대위.”
그가 내미는 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치며 지윤은 감사 인사를 중얼거렸다.
“감사합니다. 대대장님.”
“자자. 255대대 이지윤 대위의 성공적인 KF-16기 기종변경을 다 같이 축하하며 건배!”
“건배!”
호프집을 나서는 지윤은 평소에 잘 마시지 않던 술을 마신 탓으로 약간의 취기가 오르고 있었다. 따뜻한 밤바람을 느끼며 자신의 숙소인 기지 내 아파트로 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숙소로 가는 건가?”
지윤은 어느새 옆에 다가온 우혁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네. 대대장님.”
그녀의 보폭에 맞추려는 듯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그가 아무 말 없이 담배를 하나 꺼내 물자 그녀는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왜? 아, 담배……싫은가?”
“아닙니다. 그냥…… 담배를 피우고도 힘든 훈련을 견디는 조종사들을 보면 존경스러워서요.”
“훗. 안 피우는 게 좋지. 이라크 전에 참전했을 때 피우게 됐는데 끊기가 힘들군.”
“대대장님은 BOQ(남자장교숙소)로 가셔야 하는거 아닌가요?”
“나도 아파트가 숙소다.”
의외였다. 보통 미혼 남자 장교의 숙소는 BOQ라해서 따로 마련되어 있었고 아파트는 자신과 같은 여자 조종사가 아니라면 기혼자들에게 할당되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듣기로는 그는 분명 미혼이었다.
“궁금한가? 궁금하면 비행 없는 날 밥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