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Fighter Pilot's Love RAW novel - chapter 19
“!”
지윤은 기가 막혔다. 이건 부정의 청탁이었다. 장군인 아버지의 지위를 이용해 그녀를 함께 데려가려는 우혁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놈이 그러더군. 내가 손을 써서 파견조종사 리스트에 자네를 포함시켜도 자네가 거절할 수 있다고. 그렇게 되면 어차피 이런 부탁은 불필요한 것이겠지만 자네를 최대한 설득할 생각이라더군. 훗. 내 생전 그렇게 자신 없어 하는 아들놈의 표정을 보게 될 줄이야…… 함께 가 주게.”
“……! 그럴 수 없습니다. 장군님. 자격 없는 제가 가게 되면 다른 조종사 한 명이 기회를 놓치게 됩니다.”
“그건 걱정 말게. 인원을 한 명 더 추가하는 것일 뿐이니…… 나도 그놈에게 뭔가를 해주고 싶어 이러네. 이 일을 계기로 아들과 화해하고 싶네. 이젠 그러고 싶어. 이대로 그놈과 화해하지 못하게 된다면 앞으로 태어날 내 손주들을 제대로 안아 볼 수나 있겠나?”
지윤은 장군의 마지막 말에 얼굴이 빨개지고 말았다.
“훗. 뭘 그리 부끄러워해? 가까운 시일에 결혼하겠다 하더군. 그놈이 그래도 제 어미한테는 자네 이야기를 한 모양이더라고.”
“네…….”
“그래 주겠나?”
지윤은 장군의 질문에 쉽게 답을 줄 수가 없었다. 지윤이 가장 우려했던 일이었다. 그녀가 미국 파견을 허락한다는 것은 바로 정우혁 중령을 이용해 자신의 경력을 만들어 나가겠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처음에 우혁의 마음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던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러한 일 때문이었다.
지윤은 처음 인상과 달리 날카로운 눈동자가 부드러워지고 기대감으로 가득한 표정으로 변한 장군의 얼굴을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래. 자네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지……덧붙이자면 나도 자네를 파견하면서 진급을 시킨다거나 다른 특전을 줄 생각은 전혀 없네. 그리고 물론 자네가 파견되는 사실 자체가 비공식으로 진행 될걸세. 자넨 미국으로 가서 F-15E로 기종 변경하는 데만 힘을 써. 그러면 돼.”
“네? F-15E? F-15K가 아닌 F-15E 말씀입니까?”
“그래. 그놈이 자네와 함께 탑승할 수 있는 2인용 전투기 F-15E로 기종변경을 원하고 있네.”
지윤은 순간 가슴이 찌릿하며 온몸에 전기가 흐르는 듯 느꼈다. 자신이 병원에 입원해 있는 어느 날 그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다시는…… 다시는 그런 상황에 널 혼자 두지 않겠다. 다시는.”
맹세하듯 속삭이는 그의 눈빛에서 지윤은 결연한 의지를 보았다. 그 말이 이런 뜻이었을 줄은 그땐 짐작조차 못했다.
사고 후 시간이 한참 지난 어느 날, 우혁은 그녀에게 고백하듯 말했다. 사고 시 가장 두려웠던 순간은 그녀가 사라진 순간도 아니었고, 병원에서 그녀의 심장이 잠깐 멈추었던 때도 아니었다고. 그녀가 추락하는 상황을 보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 순간,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가 추락하는 과정을 고스란히 보고만 있어야 했던 그 순간이야말로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무서웠던 순간이었다고.
F-15E…… 2인이 조종하는 대한민국 공군 차세대 전투기. 매번 그와 함께 하늘을 날 수 있다는 사실은 지윤으로서는 무시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지윤은 갈등에 휩싸인 눈을 들어 그의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결심했다.
“가겠습니다. 그와 함께 미국으로 가겠습니다.”
***
2004년 1월 20일. 14:21:03. 공군회관.
공군회관 정문 앞에는 넘쳐나는 차량들과 잠시 후 신혼여행을 떠날 신랑, 신부를 기다리는 255대대원들 및 제20전투비행단의 공군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으~ 추워. 왜 이리 안 나오시는 거죠?”
김 대위의 엄살에 김 소령이 그의 등을 딱 소리나게 쳤다.
“이놈이! 하여튼 공군 망신은 네놈이 다 시켜! 겨우 요 정도 추위 가지고 공군 전투조종사가 춥다고 엄살 피우면 다른 사람들이 공군을 뭐로 보겠냐?”
“아! 공군은 사람 아닌가요? 전투조종사도 다른 사람과 똑같이 추위를 느끼는가보다 하겠죠.”
“추워 죽겠다면서 그 입은 안 얼었냐?”
“안 그래도 얼기 직전입니다. 소령님이야 안에서 결혼식 구경하셨지만 전 밖에서 공항까지 갈 차량 꾸미고 있었잖습니까?”
“참. 그랬지? 그래, 그래 수고했다. 차는 어딨냐?”
김 소령과 함께 최 소령이 두리번거리며 신혼부부를 공항까지 실어 줄 자동차를 찾자 김 대위가 주차장 한 곳을 가리켰다.
“저기요. 캬~ 내가 생각해도 정말 잘 꾸몄네. 역시 난 감각이 있다니까. 잘 보셨다가 제 결혼식 때도 저렇게 만들어 주셔야 합니다.”
김 대위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눈을 돌린 김 소령과 최 소령은 순간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저…… 저…… 저게 뭐야?”
“헉! 맙소사. 김 대위가 드디어 일냈습니다.”
미끈하게 잘빠진 까만색 자동차의 앞부분에는 양쪽으로 작은 태극기와 공군을 상징하는 독수리 문양의 깃발이 꽂혀 있었다. 여기까지는 그런대로 무난했다. 문제는 앞 범퍼부터 차 지붕을 가로지르며 뒤쪽 범퍼까지 이어져 있는 하늘색 구름 모양의 띠였다. 그 띠의 맨 마지막엔 풍선으로 만들어진 모형 전투기가 달려 있었다. 그리고 자동차 뒤 범퍼 양쪽에 하트 모양의 핑크빛 풍선…….
“왜요? 멋있지 않습니까? 저 모형 전투기 보이시죠? 자동차가 달리기 시작하면 저 모형 전투기도 함께 날아오른다 이 말입니다. 오늘은 바람도 없어서 곧장 차가 움직이는 직선으로 날을 테니 진짜 멋있을 겁니다.”
김 대위의 말에 최 소령과 김 소령은 슬쩍 공군 회관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중령님이 나오시기 전에 어떡해든 일을 수습해야 했다. 하지만 벌써 폐백을 마치고 공군 제복을 갖춰 입은 정우혁 중령과 마찬가지로 웨딩드레스를 제복으로 갈아입은 이지윤 대위가 입구를 나서고 있었다.
최 소령이 김 소령의 옆구리를 살짝 찌르며 자신들로 몰려 있는 사람들 틈으로 숨자는 눈짓을 보냈다.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며 최 소령과 김 소령이 사람들 속으로 숨는 줄도 모르고 김 대위는 이제야 모습을 드러낸 신랑, 신부를 보며 반가운 탄성을 내질렀다.
“야! 이제 나오시네요…… 엥? 아니, 이분들이 다 어디 가셨지?”
김 대위가 김 소령과 최 소령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사이 지윤은 배웅 나온 할머니와 할아버지께 인사를 드리고 있었다.
“다녀올게요. 할머니.”
“그래, 그래. 우리 강아지. 훌쩍…… 주책스럽게 이리 기쁜 날 눈물이…….”
“할머니. 추운 날 울면 얼굴 얼어요. 여행 다녀와서 이천으로 갈게요. 할아버지.”
“그래. 아가. 잘 다녀와라. 우린 너만 행복하면 된다…… 흠흠…… 정서방.”
“네. 할아버님.”
우혁의 대답에 할아버지가 그의 두 손을 꼭 잡았다.
“우리 지윤이. 잘 부탁하네. 다른 건 안 바라네. 그냥 지금 마음 변치만 말고 우리 지윤이 아껴주기만 하면 돼.”
“네. 걱정 마십시오. 할아버님.”
할아버지의 주름 잡힌 두 손을 다시 꼭 마주잡으며 우혁은 뒤에 서 있는 부하를 향해 명령했다.
“대위. 두 분, 댁까지 안전하게 잘 모셔드려.”
“예! 중령님. 저만 믿으십시오.”
“고맙다. 대위.”
그리고 다시 지윤의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할머님도 이젠 아무 걱정 마십시오. 제가 지윤이 평생 소중하게 여기겠습니다.”
“그래. 그래. 고맙네. 고마워.”
우혁의 손을 연식 토닥이며 고맙다 하는 할머니의 두 눈엔 안도의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중령님. 비행기 시간에 늦겠습니다.”
“알았다. 대위.”
그들은 공항까지 데려다 줄 김 대위가 재촉하자 지윤도 그제서야 흐르는 눈물을 닦고 이제 시부모님이 우혁의 부모님을 바라보았다.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조심해서 잘 다녀오너라.”
처음 만남부터 후덕한 인상이었던 우혁의 어머니는 정형적인 한국의 어머니였다. 항상 노심초사 아들의 건강을 걱정하고 남편을 존경하는 그런 평범한 어머니였다.
급히 진행된 비상 작전으로 그의 동생은 오늘 결혼식에는 참석하지 못하였다. 처음 지윤이 그의 동생을 잠깐 보았을 때는 정말 우혁의 몇 년 전 모습을 보는 듯했다. 거의 비슷한 큰 키에, 우혁이 조종사에 알맞게 날렵하고 강인한 몸을 지녔다면 그의 동생은 단단함과 견고함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특수부대 UDT/SEAL의 이름에 걸맞은 혹독한 훈련으로 다져진 근육질 몸과 날카로운 눈빛이 인상적이었다. 지금은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우혁에게서 부드러움과 사랑만을 느끼는 지윤이었지만 우혁과의 첫 만남에서 느낀 날카로움과 평소 임무에 임하는 그를 생각하다면 둘의 이미지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흠흠. 잘 다녀오너라.”
아직도 부자지간에 풀리지 못한 앙금이 남아 어색하기만 한 똑같이 닮은 두 남자를 바라보며 지윤은 아무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고집스러운 성격이며,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두 사람의 신경전을 보고 있으면 지윤은 항상 웃음이 났다. 마치 대 여섯 살 난 어린아이들이 서로 대장하겠다고 싸우는 것 같았다. 오늘도 여전히 어색해하는 두 사람을 대신해 지윤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다녀오겠습니다. 아버님.”
지윤이 인사를 하는 동안 자신의 옆에서 다른 곳을 바라보며 서 있는 우혁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슬쩍 찔렀다. 그가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곧 포기한 듯 한 표정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다녀오겠습니다.”
“흠흠……오냐.”
뒤이어 다시 한 번 재촉하는 김 대위의 성화에 두 사람은 공항으로 출발할 자동차로 걸음을 옮겼다.
“!”
“……풋.”
“……이런.”
자동차를 본 지윤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숨길 수 없었고 우혁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대위. 자네 작품인가?”
“네. 대대장님. 제가 힘 좀 썼습니다. 어제 밤새워서 디자인 구상하느라 잠 한숨 못 잤습니다.”
김 대위의 칭찬을 바라는 눈빛으로 우혁을 바라보자 우혁은 더욱 난감한 표정이 되었다.
“흠흠……그래. 고맙다. 대위.”
그리고 지윤을 바라보았다.
“음……고마워요. 김 대위님. 정말 멋있어요.”
“그렇지? 내 결혼 선물로 생각해. 정 고마우면 신혼여행 다녀와서 밥 사.”
자동차에 올라타는 신랑, 신부에 이어 싱글거리며 운전석에 올라탄 김 대위가 사람들 속에 숨어 있는 김 소령을 발견하고 큰소리로 그를 불렀다.
“김 소령님! 빨리 타세요. 공항까지 함께 가신다면서요?”
김 대위의 목소리에 놀란 김 소령은 옆에 허리를 숙이고 숨어 있는 최 소령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재빠르게 자신을 외면하는 최 소령을 한껏 노려보며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며 얼른 자동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운전석에 앉아 있는 김 대위를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으이그~ 쪽팔려~.”
이윽고 자동차는 미끄러지듯 공군 회관을 벗어나 공항으로 향했다. 자동차 뒤에 매달려 날고 있는 모형 전투기가 팔랑팔랑 흔들리며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리고 한 달 후 2월의 어느 따뜻한 날, 우혁과 지윤을 태운 미국행 비행기가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2004년 12월 23일. 11:10:42. 무주리조트 레이더스 슬로프.
만선 베이스 최상단에 위치한 직벽에서 느껴지는 코스인 레이더스 슬로프를 미끄러지듯 내려오는 한 여자가 있었다. 몹시 빠른 속도로 활주하는 몸이 왼쪽과 오른쪽으로 리듬감 있게 움직이며 거의 직선으로 이루어진 경사를 능숙한 솜씨로 내려오고 있었다. 그 뒤를 바싹 뒤따르며 내려오는 장신의 남자와 함께 어우러져 하얀 설원 위를 가르는 두 사람의 실루엣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워낙 힘든 코스라 인적이 드문 레이더스 슬로프에는 사람의 그림자 하나 찾아볼 수 없이 고요했다. 두 사람의 스키가 하얀 설원을 스치는 마찰음만이 주변의 공기를 가르고 울러 퍼지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여자가 움찔하더니 균형을 잃으며 미끄러져 설원 위로 쓰러졌다. 곧바로 남자가 몸을 비틀고 한쪽 다리에 힘을 주어 발 아래로 하얀 눈발을 날리며 멈춰 섰다. 남자가 쓰고 있던 고글을 머리 위로 밀어 올리며 눈밭에 쓰러진 여자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괜찮아.”
“네…….”
그가 그녀를 부축하며 일으켰다.
“이런 실수를 하다니 너답지 않군.”
“풋. 그러게요. 다른 생각을 했나?”
지윤은 그가 걱정할 것을 염려해 일부러 웃으며 명랑하게 말했다. 갑자기 머리가 핑 돌며 어지러웠다는 말을 하면 우혁은 분명히 스키고 뭐고 당장 병원부터 가자고 할께 뻔했다.
“무슨 생각? 그러니까 여긴 너한테 너무 무리한 코스라고 했잖아.”
휴……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말을 했는데도 우혁의 걱정이 또 시작되었다. 도대체 그녀를 보호하고자 하는 그의 조바심은 날이 갈수록 더해가고 있었다.
“괜찮아요. 한번 타보고 싶었어요. 어차피 모레 기지로 복귀해야 하니까 오늘이 마지막이잖아요.”
“…..좀 더 쉬운 코스로 가자고 해도……”
“난 괜찮아요. 또 언쟁하고 싶지 않아.”
우혁은 한숨을 쉬며 지윤의 고집스러운 표정을 보았다. 여기서 그만하고 숙소로 돌아가자고 해도 말을 듣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오늘 아침부터 그녀의 몸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아 걱정이었다. 어젯밤 먹은 것이 잘못되었는지 아침부터 속이 안 좋다고 할 때부터 예감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방법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지.
우혁은 그녀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장갑 낀 손 그대로 그녀의 고글을 머리 위로 밀어 올렸다.
“……왜 이래요……? 흡!”
그의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지윤은 재빨리 눈만 움직여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이 지금은 아무도 없었지만 언제 누군가 저 위에서 스키를 타며 내려올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의 깊어지는 키스에 지윤은 어느새 슬며시 감기는 눈꺼풀은 자신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그의 목을 끌어안고 자신의 입술을 밀어붙였다.
“훅.”
그녀의 적극적인 입맞춤에 우혁이 신음을 내뱉으며 그녀를 더욱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갑자기 그가 지윤을 밀어내더니 서두르기 시작했다.
“먼저 출발해. 지금 당장 숙소로 가야겠다.”
우혁은 지윤의 입술에 재빨리 키스하며 그녀를 재촉했다. 지윤은 웃으며 다시 중심을 잡아 스키를 타고 미끄러져 내려가기 시작했다.
지윤은 호텔에서 제공되는 하얀 가운을 입은 채 침대 위에 양반 다리를 한 채 앉아 있었다.
“마셔.”
그녀는 우혁이 건네주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가 든 머그잔을 두 손으로 감싸며 입김을 호호 붙였다.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밀어붙이는 그의 저돌적인 욕망에 그녀도 마주 호응하며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침실로 들어와 서로의 몸을 탐했었다.
“그럼 정식 훈련은 2월부터 있는 건가요?”
“아니. 1월부터 편대별 교육이 시작되고 7월부터는 영공 방위 임무를 수행하게 돼.”
“그렇군요. 그럼 우선 3개 편대만으로 F-15 대대가 만들어지네요?”
“음. 최 소령이 한국으로 들어오는 대로 한 개 편대의 편대장을 맡길 예정이야.”
예정대로였다면 벌써 6개월 전에 그들은 귀국했어야 했고, 이미 F-15기 대대가 만들어져 있어야 했다. 하지만 미국에서 훈련받는 도중 F-15K의 문제점이 발생해 훈련은 잠정적으로 보류되었고 파견되었던 조종사들 전부가 휴식기를 가지게 되었다. 6개월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문제점이 발견되었고, 다시 시작된 훈련을 무사히 마치고 귀국한 것이 얼마 전의 일이다.
우혁과 지윤이 F-15E의 기종변경을 위해 미국으로 파견 나갈 당시, 같은 블랙울프 편대원이었던 최강우 소령도 한 달 후 F-15K 교육을 받기 위해 미국으로 파견되었다. 우혁이 F-15E 전투기로의 기종변경을 결정하면서 F-15K의 모자라는 인원을 채우기 위해 우혁이 최 소령을 추천한 결과였다.
“김 소령님은 아직도 255대대에 남아 있다고 했죠?”
“음…….”
“김 소령님 보고 싶네요. 김 대위님도 만나보고 싶어요. 김 대위님은 제8비행단 교관으로 갔다던데…… 다들 여전하시겠죠? 둘이 서로 티격태격하던 모습이 참 좋았는데…….”
그녀의 미소를 머금은 표정에 우혁은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다른 남자 생각하면서 그런 얼굴 하지 마.”
“…..! 정말! 정우혁 중령님. 질투할 걸 질투해요.”
“어쨌든. 마음에 안 들어.”
우혁은 투덜거리며 지윤이 들고 있는 컵을 빼앗아 옆의 탁자에 놓고 그녀를 침대에 밀어 넘어뜨리고는, 곧바로 누워 있는 그녀의 얼굴 양옆에 팔꿈치를 짚은 채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댔다.
“훗. 당신 질투는 날이 갈수록 심해져…….”
지윤의 놀림에도 아무렇지 않은 듯 씨익 웃으며 우혁이 입술을 내렸다. 그가 입을 살짝 벌려 그녀의 입술을 머금으며 혀로 쓸었다.
순간 그의 혀에서 느껴지는 진한 커피 향에 갑자기 속이 불편해진 지윤은 그를 힘껏 밀어내며 욕실로 내달렸다.
“우욱…….”
놀란 우혁은 욕실로 들어가 변기통을 붙잡고 앉은 지윤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괜찮아?”
“…..네…… 후, 이젠 괜찮은 것 같아요……”
그녀가 일어서려하자 우혁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아 침대로 데려갔다.
“갑자기 왜 그러지?”
“음……모르겠어요. 갑자기 당신한테서 나는 커피 향이…….”
“커피? 아까 너도 커피 마시지 않았나?”
“그러게…… 아까 마실 땐 괜찮았는데…….”
우혁이 걱정스럽게 쳐다보자 지윤은 살짝 웃음을 머금었다.
“풋. 이제 당신 냄새가 싫어졌나?”
“지금 농담이 나와? 당장 병원부터 가야겠다.”
“지금? 지금 이 시간에 병원 진료하는 곳이 있어요? 그냥 내일 집으로 가면서 병원에 들러요.”
“응급실은 지금도 진료해. 당장 옷부터 입어.”
옷장으로 곧장 걸어가는 우혁을 바라보며 지윤은 살며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자신더러 고집쟁이라고 하지만 정작 고집불통인 사람은 우혁이었다. 그와 처음 만나면서부터 지금까지 그의 뜻대로 되지 않은 것이 뭐하나 있냐 말이다. 겉으로야 고집 부리는 사람은 지윤 자신이었지만 결국엔 꼭 그의 뜻대로 되고야 말았다. 사랑에서부터 결혼, 미국 파견까지…… 지금도 어김없이 그의 뜻대로 할 기세였다.
지윤은 침대의 몸을 쭉 뻗어 누으며 눈을 감았다.
“뭐하는 거야? 옷 입으라니까.”
“아……피곤해. 졸려 죽겠어. 난 이 침대에서 절대 꼼짝하지 않을 거야. 가고 싶으면 당신 혼자 가요.”
“…..이지윤.”
그의 낮은 목소리로 화난 듯 자신의 이름을 불렀지만 지윤은 더욱 눈을 꼭 감으며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몰라. 지윤이 자요…….”
“정말 이럴 거야? …..이지윤 대위. 명령이다. 당장 눈 떠.”
“핏. 여기가 군댄가? 기지를 벗어난 곳에선 당신 명령 안 먹히는 거 아직도 몰라요?”
“쿡…..완전히 군기가 빠졌군.”
우혁은 침대 위로 올라와 지윤을 감싸 안으며 그녀의 귓볼에 키스했다. 그녀가 우혁을 향해 돌아누우며 그의 목에 팔을 감고 입술에 키스하자, 다시 그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정말 괜찮은 거야?”
“음…… 괜찮아요. 내일 꼭 병원에 가 볼게요. 이제 말은 그만하고 키스해 줘요.”
지윤이 그의 목으로 입술을 미끄러트리며 진한 키스를 퍼붓자 그제야 우혁도 그녀에게 마주 키스하기 시작했다.
지윤은 아파트 주변에 있는 산부인과의 문을 밀고 나오며 손에 쥐고 있던 작은 흑백사진을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아침에 스키장을 출발해 아파트로 돌아오는 길에 이영훈 준장으로부터 호출을 받은 그를 기지로 보내고 자신은 혼자 병원을 찾았다. 처음엔 내과를 방문했지만 산부인과 진료를 받아 보라는 의사에 말에 방금 전 초음파 실에서 내진을 받고 나오는 길이었다.
꼭 작은 점 같았다. 아직 형태도 갖추지 않은 작은 점. 지윤은 손바닥으로 자신의 아랫배를 살며시 쓰다듬어 보았다. 아무 느낌도 없었다. 실감도 나지 않았다. 여기 이 뱃속에 그의 아기가 있다니…….
지윤은 아기를 가질 계획이 없었다. 이제 겨우 F-15E의 기종변경을 마치고 미국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복귀하기 전 주어진 얼마간의 휴가를 우혁의 본가로 가서 시부모님과 며칠 보내고 나머지 시간은 그와 함께 스키장에서 보냈던 것이었다.
아직은 공군 내의 여자 전투조종사가 아기를 낳고 기를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 모든 악조건에도 지윤은 하늘을 비행하는 희열과는 또 다른 기쁨의 전율이 자신의 몸을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의 아기였다. 그와 자신의 분신이 지금 자신의 몸속에서 자라고 있었다.
엄마…… 자신이 이 아기의 엄마였다. 지윤에게 엄마라는 존재는 낯설고 멀기만 한 존재였다. 자신은 가질 수 없었던 엄마라는 존재를 이 아이에게 주리라. 내 아이에게는 엄마의 사랑을 넘치도록 받게 할 것이다.
따르릉~ 따르릉~
지윤은 거실에서 울리는 전화기를 바라보며 슬쩍 미소를 띠었다. 우혁일 것이다. 병원에 갔던 결과가 궁금해 전화했을 것이 분명했다.
“여보세요.”
– 병원 다녀왔나?”
“네.”
– 결과는?
“괜찮대요.”
– 그리고?
“그리고…..음…… 앞으로 빈혈도 좀 있을 거래요.”
– 빈혈?
“네. 영양 섭취도 많이 해야 하고, 또……아, 맞다. 조금 있다 철분제도 먹어야 한대요.”
–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아……피곤하다. 좀 자야겠어요. 잠도 많이 올 거라고 하더라고요.”
– 젠장. 지금 갈 테니 기다려.
지윤이 이상한 말만 해대자 답답했는지 그가 집으로 오겠다는 말과 함께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풋……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사뭇 기대가 되었다.
우혁이 멍한 표정으로 맞은편에 앉아 있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파트로 들어오는 우혁을 식탁 앞에 앉히고 오전에 만든 샌드위치를 내놓았다. 그리고 지윤은 맞은편에 앉아 그에게 폭탄을 터뜨렸다.
그이 멍한 표정에 장난기가 발동한 지윤은 그의 눈앞으로 손을 흔들었다.
“풋. 정우혁 중령님. 정신 차려요.”
우혁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지윤이 앉은 쪽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 천천히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고맙다.”
우혁의 말에 지윤은 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그의 머리 위에 입술을 묻었다.
“사랑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