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Fighter Pilot's Love RAW novel - chapter 2
싱긋 웃으며 장난스럽게 말을 하는 우혁을 지윤은 당황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만약 다른 일반적인 남자였다면 자신에게 작업이라도 거는 걸로 착각할 수도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는 정우혁 소령, 그녀가 속한 대대의 대대장이었다. 설마 그가 그녀에게 다른 마음을 가졌을 리는 만무했다. 아마도 자신을 놀리는 듯했다. 하지만 그마저 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이럴 땐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한단 말인가…….
지윤의 얼굴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복잡한 표정을 바라보며 그는 기분 좋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 밥 사기 싫은가?”
“아니……아닙니다.”
“사기 싫으면 됐어. 내가 사지.”
지윤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우혁의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보고서야 그녀는 지금 그가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곧게 조각한 듯 한 얼굴에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웃음이 감도는 모습은 평소 그의 모습이 아니었다.
비상! 적색경보. 경계태세 강화!
그의 부드러운 눈빛에 자신의 심장이 불규칙한 진동을 울리자 그녀는 자신에게 소리 없는 비상 경계령을 내렸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에게 빠져 들 수는 없었다. 그는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가 속한 대대의 대대장이었다. 그녀가 특히 사적인 감정을 가질 수 없는 사람 중의 한 명이라는 뜻이었다.
“숙소까지 데려다 주지.”
우혁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해 멍하니 서 있는 지윤의 팔을 잡고 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에게 붙잡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끌려간 곳은 이미 밤이 깊어 모든 차량이 빠져나간 썰렁한 주차장이었다.
지윤은 주차장 한쪽에 서 있는 검은색 RV차량의 조수석 문을 여는 그를 바라보았다.
“타지.”
우혁이 마치 데이트하는 여자 대하듯, 지윤이 탈 때까지 조수석 문을 잡고 서 있는 것이 그녀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에게 전투조종사가 아닌 여자로 보이고 싶은 마음은 결코 없었다.
“아닙니다. 전 걸어가겠습니다.”
“밤이 늦었다.”
“괜찮습니다.”
평소에 자신이라면 태워 준다는 말에 별 이의 없이 탔겠지만 오늘 밤은 상황이 달랐다. 한여름 낮의 불볕더위가 식으면서 시원하게 피부에 닿는 밤공기와 은은한 달빛이 좋아 걷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거기다 평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그가 운전하는 자동차에 타고 싶지 않았다. 특히 자신이 여자임을 강하게 느끼게 하는 그의 옆자리에 앉는 것은 더더욱 내키지 않았다.
우혁은 얼굴에 웃음기를 지우고 그녀의 고집스러운 표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대위, 명령이다.”
명령하는 것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투로 명령을 내리는 그의 말에 지윤은 살며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군인에게 명령 불복종이란 있을 수 없었다. 그 명령이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도.
그제야 지윤이 아무 말 없이 조수석에 올라타자 그가 문을 닫고 운전석으로 돌아가 시동을 걸었다.
“화났군.”
“……아닙니다.”
누가 봐도 화난 게 분명한 얼굴 표정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레 화나지 않았다고 대꾸하며 전방을 응시하고 있는 지윤의 옆모습을 보며 우혁은 자동차를 출발시켰다.
자동차가 아파트 앞에 도착하자 지윤은 재빨리 차에서 내려 열린 창문으로 그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태워다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지윤. 잠깐 기다려.”
지윤은 돌아서려는 그녀에게 작은 쇼핑백을 내미는 그의 손에 놀라 그가 자신을 이름만으로 부르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이게…..?”
“가져가.”
지윤은 얼떨결에 쇼핑백을 받아들고 안에 들여다보는 순간 우혁은 시동을 걸어 차를 출발시켰다. 지윤은 아파트를 벗어나는 그의 자동차를 바라보며 한동안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쇼핑백 안에는 반짝이는 큐빅 알맹이로 포인트를 준 까만색 그물 머리핀이 들어 있었다. 보통 여자 군인들이 머리를 깔끔하게 정리하기 위해 사용하는 머리핀으로, 핀의 아래쪽에 그물이 달려 있는 것이었다.
지윤은 며칠 전 사무실에서 비행계획을 짜던 중 꽂고 있는 머리핀이 그녀의 숱 많은 머리카락을 감당하지 못해 툭 하고 풀어졌던 일이 떠올랐다. 핀은 못 쓰게 돼 버렸고 책상 앞에 있던 노란 고무줄로 서둘러 머리를 묶던 그녀는, 여자는 머리가 길어서 불편하겠다던 둥 김 대위의 핀잔 섞인 농담을 들어야 했다. 그땐 그런 지윤에게 관심조차 두지 않는 그였었는데.
우혁이 사라진 방향으로 다시 눈길을 돌린 지윤의 눈동자는 혼란스러운 감정으로 차갑게 일렁이고 있었다.
***
2003년 8월 1일. 08:10:09. KF-16대대 격납고.
지윤은 위아래가 붙은 비행복에 G-슈트를 입고 격납고로 향했다. 최 소령이 이미 도착해 자신이 조종할 KF-16기를 점검하고 있었다.
“오셨어요?”
“어. 이 대위. 일찍 왔네. 아직 1시간이 남았는데…….”
“네. 좀 긴장이 돼서요.”
“그렇지? 아무래도 교육 때와는 틀리지. 게다가 대대장님까지 함께하는 비행이니…….”
“네…….”
사실 아침부터 긴장으로 아랫배가 조이는 듯 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오늘의 비행은 KF-16으로 기종변경을 마치고 KF-16기의 정식 조종사로서 가지는 첫 시험무대였다. 이 시험무대를 훌륭하게 통과해야 했다. 그래서 그녀가 여자라는 이유로 못미더운 눈빛을 보내는 모든 대원들에게 전투조종사로서의 인정을 받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우혁 중령. 그에게 인정받는 것이 급선무였다. 지윤은 자신이 조종하게 될 KF-16기로 다가가 점검에 들어갔다. 얼마 후 편대장인 김 소령과 김 대위가 도착했고 맨 마지막으로 정우혁 중령이 도착했다. 이후 아무 말 없이 자신들이 조종할 전투기를 점검하며 이륙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곧이어 정우혁 중령의 탑승 명령이 떨어지고, 지윤도 자신의 팰컨에 탑승해 헬멧을 쓴 뒤 KF-16기의 캐노피를 닫고 시동을 걸었다. 제일 먼저 정우혁 중령의 팰컨1이 서서히 격납고에서 벗어나 활주로로 향하고 , 이후 팰컨2, 3, 4까지 이동한 뒤 지윤의 팰컨5도 맨 마지막으로 활주로로 향했다.
이윽고 지윤이 쓴 헤드셋을 통해 정우혁 중령과 관제탑의 교신 내용이 들렸다.
[팰컨1, 이륙을 허가한다.]제일 선두에 있던 팰컨1의 엔진 노즐에서 하얀 백열관이 길게 뿜어져 나왔다.
“팰컨5. 준비완료.”
그녀의 준비 완료 교신을 끝으로 대대장의 출발 신호가 떨어졌다. 팰컨1이 가장 먼저 이륙하고 바로 10초뒤 팰컨2와 팰컨3이 이륙했다.
지윤이 밟고 있던 브레이크 페달에서 발을 떼자 기다렸다는 듯이 KF-16기가 튀어나갔다. 순간적으로 등이 조종석에 찰싹 달라붙으며 그녀의 몸에 힘이 들어갔다. 전신으로 몰려오는 엄청난 압박감으로 목이 뒤로 꺾이지 않도록 힘을 힘껏 주며 전방을 응시했다.
그의 명령이 하늘에서 팰컨1을 선두로 팰컨2와,3 팰컨4와 지윤이 탑승한 팰컨5가 V자 대형으로 정렬되었다.
편대는 비행장 상공을 한 바퀴 선회한 다음 고도를 높여 구름 속으로 들어갔다.
“여기는 팰컨5. 감동적입니다.”
“감사합니다.”
이미 사전에 비행계획을 세웠던 대로 고도와 속도를 유지한 채 순항해 상공을 선회하며 편대원들과의 호흡을 맞추는 훈련에 들어갔다.
선두의 대대장이 조종하는 팰컨1이 3차례 정도의 횡전을 거듭하며 고도를 낮추었다 다시 솟구쳐 오르자 그 뒤를 이어 나머지 팰컨들도 팰컨1이 지나간 자취를 그대로 따라갔다.
하늘에 떠 있는 구름 집단을 파헤쳐 깊숙이 들어가고 나오며 고도를 낮추다 다시 높이며 고도 적응 훈련을 마치기까지 약 30여분의 비행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그의 명령에 지윤은 조종간을 기울여 우측으로 선회하며 하늘에 구름길을 만들며 지나갔다.
정우혁 중령이 조종하는 팰컨1이 가장 먼저 착륙하고 ㅣ어서 차례대로 팰컨2, 3, 4도 착륙에 성공했다.
지윤은 KF-16기의 스피드 브레이크를 펼치며 착륙 진입에 들어갔다. 작은 진동이 전해지는 소프트 랜딩을 끝으로 부드럽게 착륙에 성공했다.
자신의 전투기에서 내리며 헬멧을 벗어드는 지윤에게 모두들 축하의 말을 건네며 지나갔다.
“대위 축하한다. 잘했다.”
“이 대위. 잘하던데?”
편대장의 칭찬 뒤로 장난스럽게 웃음 짓는 김 대위도 칭찬의 말을 건네며 격납고를 빠져나갔다.
“잘했다. 대위.”
“감사합니다.”
정우혁 중령의 칭찬에 유독 기뻐하는 자신을 느끼며 지윤은 입가에 피어오르는 미소를 재빨리 감추었다.
“자 받아. 21시부터 23시까지 사용해도 좋다.”
열쇠 하나를 던져 주며 격납고를 빠져나가는 그를 보며 놀란 표정을 짓던 지윤은, 그제야 열쇠의 용도를 알아차렸다. 자신이 일전에 부탁했던 수영장 사용 건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사용 허가를 받았을까……? 그가 빠져나간 입구를 바라보는 지윤의 눈동자는 한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
“그러니까 말입니다. 전 제대해서 제 후배가 공군 간다면 무조건 말립니다. 육군보다 외출 많고 행군 없으면 뭐합니까? 남들 26개월이면 제대하는 게 공군은 30개월인데. 군대는 무조건 뭣 같아도 짧기만 하면 장땡이라 이겁니다 .”
“훗. 그래?”
지윤은 자신이 조종했던 KF-16기를 점검하고 청소하는 야전정비대대 소속 전우철 상병의 하소연을 들으며 입가에 웃음을 짓고 있었다.
“자대배치 받기 전에 특기교육을 받으면서 청운의 꿈을 안고 있었죠. 그리고 그 속임수의 최고봉인 특기교육 말기에 치르는 시험이 있습니다. 공식적으로 공군에서는 이 시험만 잘 보면 원하는 부대로 배치된다고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엉터립니다. 백그라운드 있고 힘 있는 놈들은 입대 시부터 근무 환경 좋고 편한 부대로 가기 이미 결정이 다 나 있는 상태라 이겁니다.”
“그래? 그게 정말이면 나쁘네.”
“아이고 우리 대위님은 말씀도 어찌 그리 곱게 하십니까? 나빠요? 나쁜 정도가 아니죠. 불쌍하고 순진한 놈들이 이왕 하는 군 생활 멋지고 폼 나게 하려고 청운의 꿈을 안고 공군에 지원하는데 힘 있고 백 있는 놈들이 그런 식으로 힘쓰면 어떤 머리 빈 놈이 공군을 지원하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그래. 상사 말이 맞다.”
“그리고 우리 같은 시설대대, 그 중 제가 속해 있는 야전정비대대는 한마디로 노가다 부댑니다. 평생 만질 시멘트는 군 시절에 다 만지고 삽과 절친한 사이가 관계가 되는 토목반. 여기서 잘못하면 허리 디스크에 걸리고 그러면 남자 생명 다하는 겁니다. 그리고 각종 중장비 운전하면 소지자들로부터 구성된 중장비반. 요거 요거, 여기 모인 놈들 무섭습니다. 눈 오면 여기 중장지반 애들다 죽음입니다. 눈이란 눈은 이 부대에서 다 치워야 합니다. 그렇다고 정비반은 쉬운 줄 아십니까? 절대 아닙니다. 전기반 애들 제대할 즈음에는 온갖 상처만 남아 거짓말 좀 보태서 괴물 손을 가지게 됩니다. 거기다 제대라도 하면 다행입니다. 전선 만지다 감전돼서 죽는 놈 많다더라고요”
“저런.”
“아. 계속 말하면 입 아픕니다. 제가 이제 제대하려면…….제장. 다시 계산 해야겠네요. 어쨌든 얼마 안 남았다 치고 제가 공군 생활을 해 본 결과 절대 편한 군대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리고 전 처음에 조종사분들은 무지 편한 줄 알았습니다. 물론 조종사가 되기까지야 혹독한 훈련으로 힘들었겠지만 일단 조종사만 되면 걸어 다니는 돈 덩어리 아닙니까. 그러니까 어깨 딱 힘주고 다니면서 유유자적 전투기 조종만 하면 되는 줄 알았거든요. 하! 근데 그것도 아니더라 이 말입니다. 세상에, 매일 매일이 훈련의 연속이고 항상 대기와 긴장이더라 이겁니다. 아니 솔직한 말로 군대를 벗어나 퇴근하고 나면 내 시간을 즐기면서 맘대로 보내야 되는데 이건 담날 비행 있으면 술 먹으면 안 돼, 비행 몇 시간 전에는 먹기 싫더라도 꼭 밥 먹어서 위를 비우면 안 돼, 거기다 제가 들은 바로 의하면 다음날 비행이 있으면 부부관계도 피한다더라고요.”
지윤은 상사의 마지막 말에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풋. 하하하하…….”
“아니. 왜 웃으십니까? 대위님이야 아직 미혼이시니까 모르시겠지만 이건 제가 유부남 조종사님께 직접 들은 이야기라 이겁니다. 진짭니다. 못 믿으시겠다면 삼자대면도 가능합니다.”
말을 하면 태연히 KF-16기의 캐노피를 닦는 상사를 바라보며 지윤은 너무 웃어 어느새 눈물이 맺힌 눈가를 훔쳐냈다.
“상병은 군대 오기 전에 뭐했나? 말솜씨가 보통이 아닌데…….”
“역시 대위님은 얼굴만 이쁘신게 아니시네요. 사람 볼 줄도 아십니다. 제가 사실 지방에 있는 3류 대학을 다니던 대학생인데 개그맨 시험 준비 중이었습니다.”
“그래?”
“예에. 정말입니다. 제대하고 나가면 다시 개그맨 시험 볼 겁니다. 혹시 제가 TV에 나오면 많이 웃어 주십시오. 그리고 유명해졌다고 모른 체 안할 테니 꼭 연락 주십시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대위님 연락은 언제든 대환영입니다.”
“풋. 그래 고맙다.”
“별 말씀을요. 그런 의미에서 피엑스에서 고소한 건빵이라도 하나…….”
“뭐가 그렇게 재밌나?”
갑자기 주기장(비행기를 세워두는 일종의 주차장)을 가득 울리는 굵은 목소리에 사다리에 올라가 있던 전 상병뿐만 아니라 조종석에 앉아 있던 지윤까지 소스라치게 놀라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필승!”
“필승”
놀라 허겁지겁 거수경례를 붙이는 상병의 뒤로 지윤은 조금 전보다는 차분해진 목소리로 정우혁 중령을 향해 거수경례를 붙였다.
“상병. 전투기를 닦는 게 그렇게 즐겁나?”
“네? 아닙……. 네. 즐겁습니다.”
“저런. 그럼 상병에게는 이제부터 매일 전투기 청소를 시켜야겠군.”
그의 말에 상사의 표정은 울상이 되었다. 조종사의 생명줄이나 다름없는 전투기를 청소하다 괜히 사고라도 나면, 꼼짝없이 청소를 했던 병사도 그 책임을 면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전투기 청소는 당연히 큰 부담일 수밖에 없었다.
“그게 아니라…….”
지윤은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웅얼거리는 전상병을 미안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괜히 자신이 그를 부추겨 웃고 떠드는 바람에, 저 얼음 같은 대대장에게 들켜서 상사가 억울하게 당하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지윤 대위.”
“네. 대대장님.”
“주기장에서 기기 점검을 하는 시간이 자네에게는 놀면서 쉬는 시간인가?”
“아닙니다.”
지윤은 굳은 얼굴로 그의 질문에 대답했다. 마음속으로는 부당함을 느끼며.
“기기 점검 철저히 하고 퇴근해.”
“네. 대대장님. 필승!”
“필승.”
지윤이 멀어져가는 정우혁 중령에게 거수경례를 하자 그때까지도 시무룩하게 서 있던 상사가 급히 지윤을 거수경례를 붙였다.
돌아서서 주기장을 벗어난 우혁은 도대체 자신이 왜 그랬는지를 생각하며 스스로에게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활주로를 돌아보던 중 주기장내에서 들려오는 그녀의 웃음소리에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하지만 그녀가 야전정비대대의 어린 상병과 눈을 맞추고 웃고 있는 장면을 보는 순간 속에서 불길이 치솟아 결코 조용히 지나갈 수가 없었다.
젠장. 이젠 도저히 그녀를 그냥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지윤은 퇴근 후 숙소로 돌아가려다 오후에 주기장에서 있었던 일이 계속 마음에 남아 화가 풀리지 않았다. 주기장에서 하는 기기 점검은 자유 시간에 하는 것이고 기기 점검을 하면서까지 심각하게 기합 들어갈 필요가 무엇인가 말이다. 괜히 어린 나이에 부모와 떨어져 힘들게 군 생활을 하는 전 상병만 주눅 들게 만들고…….아무리 생각해도 오늘 오후에 정우혁 중령은 평소 부하들을 배려하고 편안한 군 생활을 하게 해 주는 자상한 대대장의 모습이 아니었다.
지윤은 계속 풀리지 않는 의문과 짜증에 결국 운동을 하기로 했다. 스포츠센터의 헬스장은 밤늦게까지 이용이 가능하므로 힘껏 달리기도해 실컷 땀을 흘리며 지금의 답답한 마음이 개운해질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 시간에는 헬스장이 거의 비어 있을 확률이 높았다.
지윤은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아무도 없는 넓은 헬스장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곧장 러닝머신 쪽으로 다가가 기계 위로 올라섰다. 스위치를 켜려는 순간 갑자기 헬스장 저쪽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지윤은 몸을 홱 돌렸다.
“……!”
벤치프레스로 가슴운동을 하고 있는 정우혁 중령을 보는 순간 지윤은 인상을 팍 찌푸렸다. 지금 이 순간 가장 마주치고 싶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정우혁 중령일 것이다.
“후…….”
지윤은 다시 답답해지는 가슴을 추스르며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도대체 자신이 속한 대대의 대대장인 정우혁 중령만 가까이 있으면 가슴이 답답해지고 숨을 고르기 힘든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거기도 요즘은 중령에게서 나는 향기에 멍해지는 순간까지 있었다.
‘빌어먹을. 이지윤. 정신 차려.’
지윤은 자신에게 욕설을 퍼붓고 다시 몸을 돌려 러닝머신의 속도를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최대치로 높였다.
한참을 최대한의 속력으로 달리기를 반복하던 지윤은 점점 자신의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머리카락에서부터 떨어지는 땀방울은 이미 방울 정도가 아니라 소낙비처럼 온몸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머릿속은 아득해지고 귓가에 울리는 윙윙거리는 소리는 이미 자신의 몸이 스스로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을 잃었다는 신호였다.
그때였다. 갑자기 러닝머신의 속도가 현저히 줄어들고 지윤의 뒤로 누군가 올라서며 곧바로 강인한 팔이 그녀의 허리를 안고 함께 달리기 시작했다.
“서서히 속력을 줄여.”
지윤은 그의 팔을 풀어내고 싶었지만 이미 자신의 한계를 넘어선 그녀는 그의 팔에 자신의 몸을 의지하며 달릴 수밖에 없었다. 최대한의 속도로 달리다 갑자기 멈출 경우 심장에 이상이 있을 수 있으므로 서서히 속도를 줄이는 것은 달리는 것의 상식이었다. 지금처럼 지윤이 최고의 속력으로 장시간 뛰었을 경우는 더욱더 서서히 속력을 줄이며 멈춰 서는 것이 중요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자신의 속도를 조절할 수 있는 힘을 잃었고 그것을 눈치 챈 우혁이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함께 속도를 조절해 주고 있는 것이었다.
지윤은 그에게 의지한 채 서서히 자신의 페이스를 조절하며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힘으로 완벽히 속도를 제어할 즈음 러닝머신도 작동을 멈추었다.
“이젠 괜찮습니다. 대대장님.”
지윤은 호흡을 고르며 자신의 허리를 두르고 있는 그의 팔을 떨치려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우혁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는지 그녀의 허리를 더욱 세게 안으며 자신에게로 끌어당겼다.
“지금…….”
지윤이 화를 내려는 찰나 그의 팔이 순식간에 그녀의 허리에서 멀어졌다. 그녀는 몸을 돌려 그를 마주 보았다.
그가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지윤은 그의 강렬한 눈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의 몸을 학대하는 것이 취미인가?”
“무슨……?”
“대위는 뭐든 너무 심하게 하는군. 과할 정도로. 지금처럼.”
“오늘은 제가 생각 없이 무작정 뛰었던 것이 실수였습니다. 하지만…….”
“오늘뿐이 아니다.”
“……?”
“비행이 있든 없든 비가 오든 안 오든 매일 새벽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더군. 거기다 하루에 3번의 비행이 있어 모두들 녹초가 될 정도의 날인데도 대위는 운동을 해. 이쯤 되면 운동도 해가 될 수 있다. 뭐든 과하면 차라리 아니한 만 못하다는 것을 모르는 건가?”
“…….”
지윤은 아무런 대꾸도 할 수가 없었다. 구구절절 그의 말이 옳았다. 그녀는 병적으로 자신의 몸을 혹사시키는 부분이 있었다. 생도 시절부터 남자 생도들에게 체력적으로 뒤쳐지지 않기 위해 습관 들었던 운동이었는데, 어느새 그녀는 과할 정도로 운동을 즐기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지윤이 그에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는 이유는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자신의 행동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우혁의 말에 심한 충격을 받았다. 그가 어떻게 그런 사실을 안단 말인가……? 새벽마다 달리는 것도, 오전 오후 비행 두 번과 거기에 야간비행까지 있어 온몸이 흐느적거릴 정도로 힘이 빠졌던 날까지 헬스장을 찾았단 것도. 그 모든 사실을 우혁이 알고 있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윤은 의문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말없는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은 채 자신의 할 말만 하고 뒤돌아섰다.
“근육이 모두 놀랐을 테니 뜨거운 물로 목욕하고 풀 쉬도록 해. 난 오늘 비상대기근무니까 대위가 여기서 운동을 하는지 하지 않는지 알 수 있다. 만약 내 말을 어기고 계속 남아 운동을 한다면 명령 불복종으로 간주하겠다.”
빠르게 헬스장을 벗어나는 상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지윤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최근에 보이는 자신에 대한 그의 모든 행동들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머리핀을 준 것부터 시작해서 오늘 오후 주기장에서의 돌발적인 행동, 그리고 바로 조금 전 자신을 끌어안던 그 순간까지…… 도무지 그가 어떤 의도로 자신에게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단 한 가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가정. 그가 자신을 여자로 보고 있는 거라면…… 그가 자신에게 이성으로서의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면……지윤은 거친 동작으로 머리를 가로지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그는 자신이 속한 대대의 대대장이었고 자신은 그 대대에 갓 들어온 햇병아리 조종사일 뿐이었다. 그와의 사이에 다른 무엇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았다.
지윤은 더욱 세게 입술을 깨물며 그가 사라진 헬스장 입구를 노려보았다.
“야. 이 대위. 브리핑 실로 가봐. 편대장님 호출.”
“네? 편대장님께서요?”
“응. 개인상담이야. 난 어제 했고.”
“네에…….”
편대장은 자신의 휘하에 있는 편대원들에게 힘든 점이 있는지, 또는 어려운 문제는 없는지 등을 알아보기 위해 정기적으로 개인 상담을 실시하고 있었다. 조종사들에게 있어 정신적인 어려움 등으로 오는 혼란은, 비행 시 집중력을 잃게 하고 호흡곤란과 비행착각 같은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 올 수 있는 문제였다.
소령과 거의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서며 거수경례를 하는 지윤은 그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왠지 요즈음 그가 자신의 주위에 나타나는 것만으로도 안정을 찾을 수가 없었다.
“뭔가? 개인상담인가?”
“네. 대대장님.”
“그래? 소령. 준장님께서 찾으시던데?”
“네? 준장님께서 저를요?”
“음. 가봐. 이 대위 상담은 내가 하지.”
“아……예. 알겠습니다.”
편대장이 급하게 나간 뒤 소령이 앉아 던 의자에 걸터앉은 우혁은 그녀의 정보가 든 파일을 들여다보았다. 한동안 파일을 넘기는 소리만이 들리는 어색한 정적이 감돌았다. 갑자기 그가 고개도 들지 않고 파일에 시선을 고정한 채 그녀에게 말을 던졌다.
“이름 이지윤. 나이 28세.키 165㎝, 생일이 11월 24이군. 음……혈액형은 A형. A형 여자들이 꼼꼼하다더군. 조종사들에게 꼼꼼하고 세심하다는 점은 좋은 조건이지.”
그 후 한동안 파일을 훑어보며 말이 없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조부모님과 살았나?”
“네.”
그가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버님이 조종사로 순직하셨군.”
“네.”
“비행사곤가?”
“네.”
그가 한동안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버님은 대위가 다섯 살 때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재혼하셨습니다.”
지윤의 냉랭한 말투에 그가 살짝 눈살을 찌푸린 채 그녀의 굳어진 얼굴을 바라보았다.
“말하기 싫은가?”
“……아닙니다.”
다시 지윤의 예의 그 고집스러운 표정과 맞닥뜨린 우혁은 그녀를 바라보며 눈썹을 치켜 올렸다.
“내가 질문할 때는 솔직하게 대답해라. 대위.”
“…….”
“사생활에 대해 말하기 싫은가?”
“……네. 대대장님.”
일부러 대대장이라는 호칭에 힘을 주어 대답하는 지윤이었다.
“훗. 군대 상사로서 사생활에는 간섭 말아라 이거군.”
“…….”
“좋다. 언젠가는 말하고 싶을 때가 오겠지. 사생활이든 뭐든.”
말을 끝내며 지윤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우혁의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 눈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짐작도 할 수 없는 그녀는 그런 그의 눈빛이 부담스럽기만 할 뿐이었다.
“상담은 편대장하고 다시 하는 게 좋겠군.”
그가 파일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지윤도 벌떡 일어섰다. 여전히 그의 눈길은 피한 채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간 우혁은 손잡이를 잡고 돌리기 직전 다시 그녀를 돌아보았다.
“이지윤 대위.”
“네. 대대장님.”
“내가 자네한테 다른 마음이 있어 보이나?”
“……!”
“그런가?”
“……아닙니다.”
“훗…… 틀렸다, 대위.”
“……!”
그녀에게 강력한 원자폭탄 하나를 투여한 채 그는 돌아서 문을 열고 유유히 사라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