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Fighter Pilot's Love RAW novel - chapter 9
“누구 짓이야?”
지윤의 볼을 쓰다듬으며 그가 악문 이 사이로 내뱉듯 속삭였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놔줘요. 곧 야간비행이 있어요.”
그의 눈길을 피하며 조용히 속삭이는 지윤을 바라보던 우혁은 그대로 돌아서 책상으로 다가가 전화기를 들었다.
“나야. 김기홍 소령 바꿔.”
지윤의 눈을 들어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그의 눈과 마주쳤다.
“소령. 오늘 이지윤 대위 야간비행 취소해……. 그래.”
상대방의 말을 듣고 있던 그가 그녀를 향해 굵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
“알았다.”
전화를 끊으며 우혁은 방금 전 김 소령의 말을 다시 떠올렸다.
‘이 대위 어머니가 면회를 왔는데 이 대위 얼굴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안 그래도 야간비행은 취소해야 할 것 같아 대대장님께 보고 드리려 했습니다.’
우혁은 더욱 어두워진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지윤. 그 상태로 야간비행을 하려 했단 말인가? 죽고 싶나?”
지윤도 알고 있었다. 비행 시 조종사의 정신 상태나 몸 상태가 얼마나 중요한지…… 하물며 간밤에 꾼 꿈이 불길하다는 이유로 그날의 비행을 취소하기도 할 만큼 비행 시 조종사의 상태는 아주 예민한 사항이었다. 그녀가 입술을 지긋이 깨물자 그가 손을 뻗어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술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어머니가 오셨나?”
“…….”
“아파트에 가 있어. 최대한 빨리 뒤따라 갈 테니.”
지윤의 손에 현관 비밀번호가 적힌 쪽지를 쥐어 주며 우혁은 그녀의 부은 볼을 쓰다듬은 뒤 문을 열고 그녀의 등을 살짝 밀었다.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우혁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부어오른 그녀의 볼을 보는 순간, 자신의 내부를 불태울 듯 타오르는 분노로 보이지 않는 상대를 향한 살인적 충동을 느꼈다. 비록 그 상대가 그녀를 낳아 준 어머니라 할지라도.
우혁이 현관으로 들어서자 어두운 아파트 현관의 불이 자동으로 커졌다. 우혁은 신을 벗고 지윤이 우두커니 앉아 있는 거실의 소파로 다가가 그녀를 뒤에서 살며시 끌어안았다.
“……어릴 땐 다른 친구들과 달리 왜 나만 엄마, 아빠가 없는지 이해할 수 없었어요. 어느 정도 철이 들고 조부모님께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해 들었어요. 비행훈련 중에 아버지가 조종하던 전투기가 갑자기 바다로 돌진했고 군에서는 아버지가 순간적인 비행착각을 일으켜 바다를 하늘로 착각해 사고가 일어난 것 같다고 했다더군요. 하지만 난 들었어요.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걸. 아버지가……스스로 바다에 뛰어들었다고…… 모두들 날 불쌍하다고 했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6개월도 채 되지 않아 어린 나를 버리고 아버지의 절친한 동료와 재혼한 어머니 때문에…….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이미 어머니는 아버지를 떠나려 했었다고…….”
그가 더욱 힘을 주어 그녀를 끌어안았다.
“날 버린 그 여자도 미웠지만 아버지도 미웠어. 아버지도 날 버린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어요…… 그래도 아버지는 용서가 됐어요. 사랑하는 여자를 살아서는 떠나보낼 수 없었던 아버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했어요…… 하지만 그 여자는 용서할 수 없었어. 20년이 넘는 시간동안 그 여자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어요. 원망하고 미워하면서도, 그래도 기다렸어. 내게 용서를 빌고 안아주기를…… 기다리고……”
우혁이 지윤의 몸을 돌려 그의 품속에 가두고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그런데요…… 오늘 그 여자가 그러더라고요. 지금껏 아버지가 스스로 바다로 뛰어들었다 생각하며 자라왔는데 그게 아니래요…… 아버진 그렇게 약한 사람이 아니었어요. 아버지에게 목숨보다 소중했던 사람은 그 여자가 아니라 나였어요…… 훗. 우습죠? 그 말을 듣는 순간 통쾌했어요. 아버지가 선택한 사람이 그 여자가 아니라는 것이 너무나 통쾌했어요. 아버지가 스스로 날 버린 게 아니라는 것이 너무 행복했어요. 그거 알아요? 가끔…… 아주 가끔 당신 품에서 아버지를 생각해요. 아버지의 품도 이렇게 따뜻할까요……? 그리고 만약 아버지가 살아 계시다면 절 자랑스러워 하셨을까요?”
“그래…… 자랑스러워 하셨을거야…… 아주 많이.”
지윤은 두 팔을 올려 우혁의 목을 세게 끌어안으며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안아 줘요…….”
급히 다가온 지윤의 입술이 우혁의 입술에 부딪히고, 그녀가 열정적으로 그에게 키스하기 시작했다. 우혁의 허벅지 위로 올라간 지윤은 그에게 계속 키스하며 자신의 블라우스를 머리 위로 벗어던지고 손을 뒤로 돌려 브래지어의 훅을 풀어 버렸다. 그녀의 성급한 욕망에 똑같은 정렬로 회답하며 우혁은 그녀의 등 뒤로 손을 돌려내려 그녀의 바지 속으로 집어넣고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지윤은 그의 얼굴을 잡고 있던 두 손을 내려 그의 셔츠를 찢듯이 거칠게 벗기고 그의 단단한 맨가슴을 쓰다듬었다. 입술을 내려 그의 부드러운 굴곡을 이룬 어깨를 깨물며 그의 바지버클에 손을 가져갔다.
우혁은 지윤의 손을 도와 바지와 속옷을 한꺼번에 벗어 버리고 다시 그녀를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 지윤도 그와 똑같은 알몸이 된 채 그의 목에 입술을 묻었다.
“으음…….”
그의 어깨에 손톱을 박은 채 그녀의 머리끝에서 부터 발끝까지 느껴지는 전율에 온몸을 떨어야했다.
우혁이 그녀의 허벅지를 벌려 그의 중심에 맞추어 주자 그녀는 자신의 몸을 활짝 열어 그대로 천천히 내려앉았다. 순간 지윤은 자신의 몸을 가득 채우는 충만감에 고개를 한껏 뒤로 젖히며 가슴을 내밀었다.
“아…….”
우혁은 내밀어진 지윤의 가슴을 낚아채듯 입속으로 빨아들임과 동시에 그녀의 등을 받치며 그녀의 엉덩이를 세게 움켜쥐었다. 지윤의 허리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고, 우혁은 그녀의 엉덩이를 받친 채 조금 더 빠른 동작을 유도했다. 우혁의 등이 소파 등바지로 젖혀지자, 지윤은 그의 양어깨를 꽉 잡은 채 허리를 점점 더 빠르게 움직였다. 곧이어 지윤의 환희에 찬 비명소리와 동시에 그녀의 몸속으로 뜨거운 것이 세차게 뿜어져 들어왔다. 그리고 그녀는 무너지듯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지윤은 직접 저녁을 지어주겠다며 가스레인지 앞에서 보글거리는 냄비 속을 숟가락으로 휘젓고 있는 우혁을 바라보고 있었다.
“궁금한 게 있어요.”
그녀의 말에 우혁은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 장교 숙소에 살지 않고 민간 아파트에 살아요?”
“글쎄. 이유는 여러 가지지만 가장 큰 이유는 사생활을 간섭받고 싶지 않아 서지.”
“그 사생활…… 여자들을 집으로 데려오는 것도 속하나요?”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지그시 응시했다.
그리고 갑자기 씨익 미소를 지었다.
“질투하는군.”
“누가!”
강하게 부정하는 지윤을 바라보며 우혁은 더 크게 미소를 지었다.
“질투하는 게 분명해.”
아주 즐겁다는 듯 단정 짓는 그의 말에 지윤은 픽 웃음을 터뜨렸다.
“풋. 냄비가 폭발할 것 같아요.”
그녀의 말에 우혁이 몸을 홱 돌려 끓어 넘치는 냄비의 뚜껑을 열고 불을 조절했다. 그리고 무심히 지나가는 말투로 아무렇지 않게 그녀의 질문에 대답했다.
“내 집에 들어온 여자는 너 뿐이야.”
두근.
사소한 그의 말에 또다시 행복을 느끼는 지윤이었다.
***
털썩.
“완전히 우리가 속았어요.”
김 대위가 자신의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탄식처럼 내뱉는 말에 사물실 안의 모든 편대원들이 그를 돌아보았다.
“뭐가?”
“괜히 대대장님한테 사정한거에요. 스타 게임 대항전 예선이요. 벌써 위에서는 편대원 전부가 통과해야 한다는 규칙이 불합리하다고 1조만 통과해도 본선 진출 가능한 규칙으로 변경한지 오래라던데요.”
“그게 정말이야?”
김 소령과 마찬가지로 지윤도 하던 일을 멈추고 김 대위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니까요. 지금 밖에서는 다들 그 얘기로 시끄러워요. 대장은 벌써부터 알고 있으면서 우리가 사정하고 빌 때도 아무 말 없이 구경한 거죠. 우리가 대장한테 완전히 속았어요. 대장은 이번 게임에 참가할 생각도 전혀 없었던 게 분명해요. 어쩐지…… 대장이 특정 편대에 속해서 게임에 참가하면 불공평하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우리 대장이 그럴 사람이 아니지…….”
김 대위의 말에 김 소령도 속았다는 표정으로 억울함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 그럼 진작 그렇게 말씀하시면 되지. 우리가 그렇게 사정하는 걸 보고 있었다는 거 아냐? 속으로는 막 웃으면서…….”
“그렇죠…… 대대장실로 가서 확 따질까요?”
김 대위의 말에 김 소령만 억울한 것이 아니었다. 정작 그의 농간에 놀아난 사람은 지윤 자신이었다.
지윤은 기가 막힌 표정으로 이 상황에서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보다 이 대위가 더 억울하죠. 우리야 스타 게임에 미쳐서 그렇다 치지만 괜히 관심도 없는 이 대위까지 대대장님한테 불려가고 사정하고……우와~ 가만히 생각해보니 진짜 열 받네!”
“야. 인마. 네가 열 받으면 어쩔 건데? 뭐? 따져? 한번 가서 따져 봐라. 네가 대장한테 가서 따지면 내가 너 부를 때 김 대위님~ 하고 부른다.”
“아! 말이 그렇다는 거죠. 뜻이 그렇겠습니까? 제가 어찌 하늘같은 대대장님께 따지겠습니까? 따지기를…….”
하지만 지윤은 따질 것이다. 이미 그는 그녀에게 대대장 이상의 의미였고 그에게 따질 만한 이유가 충분하므로…….
“어디에요?”
[내 방]근무 시간이 종료되고 지윤이 건전화에 자신의 방에 있다는 우혁의 대답을 들은 지윤은 계단을 뛰어올라 그의 방이 있는 층으로 단숨에 올라갔다.
탁.
그녀가 거칠게 들어서는 모습에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우혁은 자신의 의자에 천천히 들을 기대어 앉았다.
“무슨 일 있나?”
“……당신. 정말 나빠요.”
밑도 끝도 없이 나쁘다는 말에 우혁은 더욱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
“모른 척 말아요. 스타게임 규칙 변경된 것. 알면서도 스타게임을 담보로 내 비행 없는 하루를 저당 잡은 게 분명해. 일부러 그랬죠?”
“아…….”
피식 웃으며 아무렇지도 표정을 짓는 그가, 지윤은 정말 얄미워 보였다.
지윤은 그의 책상 앞으로 다가가 책상에 두 손을 짚고 상체를 숙였다.
“그게 다에요?”
“아니. 아직 많이 남았지.”
말이 끝남과 동시에 우혁은 벌떡 일어서며 그녀의 얼굴을 부여잡고 입술을 밀어붙였다. 그들 사이에 끼어 있는 책상으로 인해 지윤은 엉거주춤한 자세 그대로 그에게 얼굴을 붙잡힌 채 키스를 당하고 있었다. 언제 책상을 돌아갔는지 모르게 지윤은 우혁의 무릎 위에 앉아 있었다. 그의 입술의 그녀의 목선으로 내려가 쇄골을 더듬자 그녀는 속삭이는 목소리로 그에게 경고했다.
“그만……. 그만해요.”
우혁의 얼굴을 밀어내며 지윤은 그의 무릎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을 쳤다.
“알았어. 잠깐. 조금만 이러고 있자.”
지윤을 끌어안은 채 가만히 그녀의 향기를 들어 마시던 우혁이 고개를 들고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소문이 두려운가?”
“…..알잖아요? 오로지 내 실력으로 인정받고 싶어요…… 솔직히 전투조종사로서 탑건에도 도전 해 보고 싶어요.”
“끙…… 그놈의 탑건. 그게 뭐 그리 좋은 거라고……”
“그러는 당신은 왜 탑건이 된 거에요?”
“난 억지로 사격대회에 참가한 거야. 어차피 참가한 것이기 때문에 우승한 거고.”
“당신 그말….. 굉장히 잘난 척 하는 말 인거 알아요?”
“아니. 잘난 척이 아니라 잘난거지. 난 대한민국에서 가장 뛰어난 전투조종사거든.”
“……기막혀.”
지윤은 싱긋 웃으며 다시 그녀를 끌어안으려는 그를 피해 재빨리 일어서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여튼 스타게임 건은 꼭 복수하고 말거에요.”
“훗. 기대대는군. 오늘 야간비행 있나?”
“네.”
“조심해. 항상 너무 큰 자만심이 사고를 부르는 거야. 하늘에서 자만심은 금물이다. 조종사에게 테크닉이란 있을 수 없어.”
“풋. 누구의 자만심만 할.”
“농담 아니다. 이지윤.”
그의 진지한 표정에 지윤은 얼굴에서 웃음기를 거두었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가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걱정 말아요. 난 아버지처럼 허무하게 죽지는 않을 테니까.”
그 말과 함께 지윤은 재빨리 그의 입술에 키스하고 도망치듯 그의 방에서 빠져나갔다.
우혁은 이제 자신에게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한 그녀를 애정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
“야. 김 대위. 이번에 새로 배치된 간호장교 봤어?”
“아니. 왜 이뻐?”
“캬~ 끝내주더구만. 이름 정미소, 나이 27세. 계급 중위. 키 대충 167정도, 하얀 얼굴에 쭉 빠진 다리와 그 야들야들한 몸매, 백의의 천사가 따로 없어. 어떻게 하얀 간호복이 그렇게 잘 어울릴 수 있냐? 지금 20전비 공군들 다 난리 났어.”
“그래? 그렇게 이뻐? 그럼 내가 친히 한번 가서 봐야겠군.”
김유영 대위는 그린울프 편대의 박 대위와 이번에 ‘결추위’의 타깃이 된 정우혁 중령을 결혼시키기 작전을 계획하던 중이었다.
“괜찮으면 그 간호장교하고 우리 대장하고 붙여보자고.”
“야~ 남 주기 아까운데…… 어떻게 나랑 붙이면 안 되겠니?”
“하! 이놈 봐라. 정말 그 정도야? 당장 가봐야겠다.”
정말 눈이 높다고 자부하는 박 대위까지 욕심 낼 정도면 보통 여자가 아니라는 거지. 그래도! 우리 대대장이 먼저지. 암, 그렇게 괜찮은 여자라면 우리 대장하고 붙여야 하고말고. 김 대위는 더욱더 의지를 불태우며 군병원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쾅!
“블랙울프 편대 전원 낙하산 둘러메고 지금 당장 연병장으로 집합해!”
편대장인 김 소령이 문이 부서질 듯 세게 열고 들어서며 편대 전원에게 집합을 명령하고는 다시 성난 발걸음으로 복도를 울리며 멀어졌다.
“올 것이 왔다. 제기랄.”
최 소령이 김 대위를 바라보며 욕설을 내뱉자 김 대위의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
“죄송합니다. 최 소령님. 미안하다. 이 대위.”
오전에 실시한 가속도 내성훈련인 G-테스트에서 제대로 버티지 못한 김 대위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G-테스트는 전투기 탑승을 위해 거쳐야 하는 첫관문이었고, 조종사들은 정기적으로 이 테스트를 받아야 했다. 그들에게는 이것이 큰 스트레스였다.
G-테스트는 모형 조종석, 일명 ‘인간 원심분리기’가 빠른 속도로 돌 때 생기는 자기 몸무게의 6배의 중력에서 30초를 버텨야 한다. 더군다나 최신예 전투기인 KF-16조종사는 9G까지 견뎌내야 했다. 전투기가 급기동할 때, 비행 시 중력 때문에 조종사들은 판단능력이 급격히 떨어지고 피가 머리에서 완전히 빠져나가 의식을 잃을 수도 있었다. 특수호흡으로 혈액이 아래로 몰리는 막는 것은 필수였다. 조종사들이 G-슈트를 입는 이유도 바로 피가 하체로 몰리는 것을 막는 압박붕대 역할을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G-슈트를 입는 것만으로 비행 시 몸에 가해지는 중력을 모두 해결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중력을 이기지 못해 정신이라도 잃게 된다면 그것은 곧 전투기와 함께 조종사도 산화하는 비극을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기적으로 받는 . G-테스트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됐어. 우선 기합부터 받고 나서 보자.”
최 소령, 김 대위와 함께 비행교육 시절처럼 무거운 낙하산 가방을 둘러메고 지윤은 연병장으로 뛰어갔다.
최 소령과 김 대위 그리고 지윤은 일렬로 쭉 서서 차렷 자세를 취하고 있었고 그들의 위로 막바지 여름의 열기가 어김없이 내리쬐고 있었다.
“김유영 대위.”
“네. 소령님.”
“나 요즘 정신을 어디에 빠트리고 다니는 거야? 엉? 죽고 싶어? 내가 오냐 오냐 하니까 훈련이고 뭐고 다 우습나!”
“아닙니다! 시정하겠습니다!”
김 소령의 크게 윽박지르는 소리에 평소의 장난기 가득했던 김 대위는 온데 간데없이 군기가 제대로 든 김유영 대위만 남아 있었다.
“난 군대라 해서 군기만 잡고 엄격하게 생활하자는 주의는 아니다. 그건 우리 대대장님인 정우혁 중령님도 같은 생각이고, 그래서 군 생활을 즐겁게 해 주려고 농담도 하고 장난도 치고 부드러운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데! 그렇다고 훈련이나 비행에서조차 해이해지라는 뜻은 아니다! 비행은 말할 것도 없고 정기적으로 하는 훈련에 제대로 임하지 못한다면 자신의 목숨은 누가 책임지나! 그리고 나라에서 그 비싼 전투기를 우리에게 맡길 수 있겠나! 나아가 대한민국 하늘의 평화를 우리 손에 맡기고 국민들이 편히 잠을 잘 수 있겠나 말이다 !”
“죄송합니다!”
편대원 전원이 한결같은 마음으로 복창하였다.
“김유영 대위.”
“네! 소령님.”
“요즘 무슨 일 있나?”
“아닙니다!”
“……좋다. 김유영 대위의 해이해진 정신 상태를 새로이 무장시키기 위해 편대 전원이 연병장 30바퀴를 돈다. 이의 있나?”
“없습니다!”
곧이어 김 소령의 필두로 최 소령, 김 대위가 뒤를 이어 뛰기 시작하고 지윤도 무거운 낙하산 가방을 맨 채 달리기 시작했다.
뜨겁게 작렬하는 태양 아래 블랙울프 편대 전원이 낙하산을 등에 진 채 연병장을 돌고 있었다. 이제 19바퀴째. 얼굴에는 땀이 비 오듯 후두둑 떨어지고 있었고, 이미 입고 있던 군복(일명 개구리복)은 땀으로 젖어 축축해져 흡사 군복 그대로 샤워라도 한 듯 한 모양이 되었다.
지윤은 눈으로 자꾸만 흘러 들어오는 땀방울을 연신 훔쳐내며 등에 매달려 있는 낙하산 가방을 다시 한 번 고쳐 메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풀리려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이깟 기합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공사 시절에 비행교육 시절, 그 지독했던 교관들에게 넘어지면 발로 차이고 쓰러지면 짓밟히며 무수히 받은 기합이었다. 여자라고 해서 봐주는 교관은 단 한 명도 없었고 그런 걸 바랬던 지윤도 아니었다. 다른 남자 생도들과 똑같이 뛰고 구르고 넘고 날아다녔다. 하루도 멍이 들지 않는 날이 없었고 하루도 긴장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혹시 한순간이라도 긴장을 풀면 저들보다 뒤쳐질까 두려웠고, 여자로서의 체력적 한계를 이겨내지 못할까봐 전전긍긍 했다. 지윤은 무엇보다 체력적 한계를 이겨내기 위해 훈련이 없는 날에도 헬스로 몸을 단련시키고 달리기와 수영으로 폐활량을 늘이는 운동을 해왔다.
저들이 견딜 수 있다면 자신도 할 수 있었다.
우혁은 블랙울프 편대와 비행훈련을 마친 후 격납고를 벗어나다 연병장을 돌고 있는 그들을 보았다. 그들이 블랙울프 편대라는 것을 깨달은 그는 맨 끝에서 달리고 있는 지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얼마나 뛰었는지 머리와 입고 있는 군복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입으로 내뱉는 거친 호흡이 여기까지 들리는 듯 했다.
살짝 눈살을 찌푸리던 우혁은 뜨겁게 타오르는 태양이 떠 있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대대장님. 저기 블랙울프 편대입니다. 무슨 일일까요?”
블랙울프 편대장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다시 말을 이었다.
“이 더운데…… 일사병이라도 걸려 쓰러지면 어쩌려고…… 김 소령이 저럴 정도면 굉장히 화가 났다는 건데…….”
“소령.”
“네. 대대장님.”
“255대대 편대장들 전원 내 방으로 집합시켜.”
“지금 말입니까?”
“지금 당장.”
나지막이 자르듯 대답한 후 돌아서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정우혁 중령을 황당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강 소령은 김 소령을 뛰고 있는 연병장으로 달려갔다.
“우와~ 살았다. 딱 죽는 줄로만 알았는데…….”
세면실의 수도꼭지 아래로 그대로 머리를 들이밀며 물세례를 받던 최 소령이 시원한 탄식을 내뱉었다.
최 소령과 똑같이 물세례를 받던 김 대위와 지윤도 그의 안도의 말에 공감하고 있었다.
“하여튼 김 소령도 지독하다니까…… 난 한 15바퀴 정도면 그만하랄 줄 알았더니…… 야. 김 대위 우리 몇 바퀴 돌았냐?”
“헥헥. 모르겠습니다. 18바퀴까지 세다가 포기했습니다.”
“대장이 우리를 살렸다. 난 한 바퀴만 더 돌았어도 쓰러졌을 거다. 대장은 우리 사정을 어떻게 알고 딱 그 시간에 편대장들을 집합시키냐?….. 그런데 혹시 김 소령한테 보고 받고 더 화나셔서 다시 우리 기합 주러 오시는 건 아닐까?”
최 소령의 살벌한 말에 김 대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설마요…….”
“그럴 바엔 차라리 김 소령님한테 기합 받는 게 더 나은데…… 연병장 몇 바퀴만 더 뛰면 끝나잖아요. 김 소령님도 그렇게 모질지는 못해서 그 정도 선에서 끝낼 테고…… 만약 대장이 우리 기합 주러 오신다면 사태가 심각해지는데…….”
“최 소령님…….”
“왜?”
“우리 도망칠까요?”
“뭐?”
“그냥 확 퇴근 해버리죠…… 이미 근무종료시간도 지났는데…….”
딱.
“네가 이래서 우리까지 욕을 먹는 거야! 벌 받다가 편대장님이 불려갔는데 우리가 먼저 다 퇴근하면 편대장님이 돌아와서 비어 있는 사무실을 보면 혈압이 안 오르시겠냐?”
“아! 농담이에요. 농담.”
최 소령에게 맞는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김 대위가 인상을 찡그렸다.
“야. 김 대위. 너 실연당했지?”
“누구! 저요? 누가 그래요? 어떤 놈이 그래요?”
지윤은 최 소령의 갑작스런 황당한 질문에 과장되게 격분하는 김 대위를 바라보았다.
“하! 이놈 봐라, 진짠가 보네. 왜 이리 흥분을 해? 아니면 말지.”
“소령님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시니까 그렇죠!”
그리고는 수건으로 거칠게 자신의 머리를 털며 세면장을 벗어나는 김 대위였다. 그런 김 대위를 최 소령과 지윤은 의문에 찬 눈길로 바라보았다.
“이 대위. 저 자식 진짜 실연당했나 본데? 그렇게 느껴지지 않아?”
“글쎄요……. 하지만 뭔가 있긴 한 것 같아요.”
“그렇지. 저놈 저러다 뭔 큰일 나기 전에 해결돼야 할 텐데……. 저런 상태로 비행하면 좋지 않지…… 이제야 말이지만 김 소령이 그렇게 화가 나실 만도 하지. G-테스트 때 9G를 견뎌야 하는 KF-16조종사가 겨우 6G에서 정신을 놓다니…… 분명 정신이 다른데 가 있었던 게 분명해. 그렇지 않고서야 G-테스트 할 때마다 싱글벙글 웃으며 자신 있게 응하던 놈이 오늘 같은 일이 있을 수 있겠어?”
최 소령의 말에 지윤도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요 근래 김 대위의 표정이 어두웠고 넋을 잃고 먼 산을 바라보는 그를 한두 번 본게 아니었다. 8월 말에 치러진 스타게임 예선전에서도 당당히 통과하고 이틀 후에 있을 본선에서도 유력한 우승후보라고 들었었다. 그런 그가 갑자기 변한 것은 최 소령의 말대로 여자문제일 확률이 가장 컸다. 확실히 김 대위가 임자를 만난 게 분명해 보였다.
“며칠 후에 있을 가상 요격 훈련 결과를 봐야 알겠지만 내 생각에는 블랙울프 편대의 김유영 대위와 블랙울프 편대의 박유찬 소령이 가장 적합하다고 보는데 어떤가?”
자신의 방 소파에 앉아 있던 우혁은 모여 있는 편대장들을 둘러보았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공비행으로 사격 적중률이 90% 이상이었던 김 대위와 박 소령 둘 중 한사람이 보라매 공중사격대회에 출전하는 것이 가장 나은 것 같습니다.”
앉아 있던 블랙울프 편대장인 강 소령이 정우혁 대대장의 의견에 동의하고 나섰다.
“음. 다른 의견이 없다면 두 사람 중 한 사람을 결정해서 탑건 선발에 내보내도록 하지. 이상.”
대대장의 회의 종료 명령에 3명의 편대장들은 앉은 자리를 정리하고 255대대장실을 나섰다.
“김기홍 소령. 잠깐 나 좀 보지.”
“예. 대대장님.”
김 소령은 사무실을 나가려 일어서려는 찰나 자신을 붙잡는 정우혁 중령의 말에 다시 자리에 앉았다.
“블랙울프 편대 무슨 일 있나?”
“아닙니다. 군기가 너무 빠진 듯해서 기합 좀 줬습니다.”
‘그래? 너무 심하게 하지 마라. 더운 날씨에 쓰러지기라도 하면 큰일 아닌가?”
김 소령은 전혀 평소의 대장답지 않는 말을 하는 정우혁 소령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예전의 대장이라면 군기 빠진 군인은 정신무장을 다시 시켜야 한다며 더욱 심한 기합을 주라고 했을 것이다. 전투조종사가 정신이 해이해져 원칙을 지키지 못한다는 것은 그만큼 비행사고의 위험에 노출될 확률이 높다는 의미였다. 거기다 연병장을 돌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을 호출시킨 것은 대장이 그 상황을 종료시킨 것이나 다름없는 행동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