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Fortune-telling Princess RAW novel - Chapter (112)
그렇다고 이제 와 돌아갈 수도 없고.
“정말 눈 폭풍을 잠재울 수 있어요?”
카밀라는 최대한 목소리를 내려 물었다.
[아이슬라, 그녀가 분노하는 이유는 마르스의 죽음이네. 그를 내가 죽였다고 생각하고 있지.]그건 이미 다른 정령왕들에게 들어 대충 아는 내용이다. 그래서 그녀의 핏줄이 황위를 잇고 있는 이곳 그라시아 제국을 아주 꽁꽁 얼려 버린 거라고.
“안 죽였어요?”
직설적인 물음에 마리아나 황비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내가 죽인 거지.]죽인 거 맞네. 그런데 이제 와서 뭐?
[그녀가 모르는 진실이 있어. 그걸 알려 준다면 분노가 가라앉을지도 모르지.]“그럼 직접 전하지 그러셨어요.”
그 긴 세월 동안 뭐 하고 이제 와 난리래?
[아이슬라가 나와 대화를 하지 않으려 한다네.]‘그렇긴 하겠네.’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저렇게 분노를 표하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 원흉이 눈앞에 나타나면 대화는 고사하고 더 난리를 쳤겠지.
[이쪽으로.]결국 카밀라는 조용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여기예요?”
얼마 후 본궁의 지하 공간으로 들어선 카밀라는 연신 기침을 토해 냈다. 사람 발길이 전혀 없던 곳인 듯 걸을 때마다 엄청난 먼지가 피어올랐다.
“아니, 무슨 궁에 이런 곳이… 쿨럭!”
[죽은 자가 한곳에 오래 머물다 보면 그 장소는 점점 사람들에게 잊힌다네.]즉, 마리아나 황비가 그동안 머문 곳이 이곳이라는 말이었다.
[여길 치워 보게.]그녀가 가리킨 건 낡은 흔들의자였다. 그걸 치우고 밑에 깔린 카펫까지 치우자 작은 문이 하나 나왔다.
그 문을 열고 밑으로 내려가자 좀 더 작은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물건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마르스, 그와의 추억이 담긴 물건들이지.]선반에 놓여 있는 물건들을 만지는 그녀의 손길이 무척 조심스럽고 애틋했다. 그러다 그녀가 책장 한 곳을 가리켰다.
[저거네.]카밀라는 그녀가 가리킨 책을 뽑아 들었다.
[모든 진실이 담겨 있는 나의 일기장이지. 그걸 아이슬라에게 꼭 전해 주게.]일기장? 대체 여기에 뭐가 적혀 있길래.
[잘 부탁하네.]어라? 일기장을 잠시 살피던 카밀라의 눈이 동그래졌다. 마리아나 황비의 몸이 점점 희미해져 갔기 때문이다.
설마 이대로 승천한다고? 아니, 자신을 뭘 믿고? 내가 안 전하면 어쩔 건데!
그 긴 시간을 이곳에서 버틴 게 무색할 정도로 그녀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마치 오랫동안 짊어지고 있던 짐을 툴툴 털어 버린 사람처럼 아주 홀가분한 표정으로 말이다.
“와, 씨…….”
뭐지? 이 뒤통수 맞은 기분은?
저 발끝에서부터 밀려드는 찜찜함에 카밀라는 손에 들고 있는 일기장을 지그시 노려봤다. 그냥 확 버릴까?
“에휴.”
어쨌든 읽어나 보자는 생각에 카밀라는 일기장을 품에 잘 넣은 후 지하 공간을 빠져나왔다. 하지만 다음 순간 다시 긴 한숨을 토해 냈다.
‘저기요.’
날 방에 무사히 데려다 놓고 사라졌어야죠!
이곳까지 오는 내내 마리아나 황비의 뒤만 따랐던 카밀라는 병사들의 위치나 사람이 없는 지름길 따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대체 혼자 어떻게 돌아가라고!
‘그냥 처음 계획대로 뻔뻔하게 나갈까?’
혹시나 한 마음에 옷도 최대한 화려하게 입고 왔다.
[자네, 그렇게 입고 갈 건가?]‘네.’
[잠입하러 가는데 빨간색 옷이라니.]‘걸리면 변명할 게 있어야죠. 도둑처럼 입고 갔다가 들키면 그거야말로 낭패 아닌가요?’
물론 안 걸리는 게 제일 좋은 거지만 걸려도 길을 잃었다거나 구경 중이었다는 핑계를 댈 생각이었다.
그래! 그냥 나가서 길을 잃었……!
저벅.
‘히익!’
그냥 병사들에게 자진 신고할 마음으로 발을 막 떼려는 순간이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병사들의 발소리에 그대로 몸이 굳어져 버렸다.
머리는 자진 신고를 외쳤지만 몸이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휙!
“……!”
그 순간 누군가 자신의 입을 막으며 구석으로 확 몸을 당겼다.
“쉿!”
귓가에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바로 에드센 황태자의 음성이었다.
저벅. 저벅.
잠시 후 병사들의 발소리가 빠르게 멀어져 갔다. 그제야 짧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 카밀라는 그에게서 한 걸음 물러섰다.
“여기서 뭐 하세요?”
“그건 내가 물어야지 않나?”
에드센은 카밀라를 묘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조금 전 별궁에서 창밖을 바라보다 붉은 형체, 카밀라가 은밀히 어딘가로 향하는 모습을 봤다.
이 날씨에 어디를 가나 싶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쫓았는데, 그녀가 향한 곳이 바로 본궁이라는 사실에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공녀가 잠입에 소질 있는 줄 미처 몰랐어.”
마치 본궁의 지리를 잘 아는 이처럼 빠르게 움직이는 그녀를 결국 놓쳤다.
한참 후에야 그녀가 사라진 주변을 서성이다 병사의 등장에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녀를 다시 발견한 것이었다.
“잠입이라니요. 전 단지…….”
“단지 뭐지?”
“……!”
그 순간 뒤에서 들려오는 나직한 목소리.
급히 뒤를 돌아본 카밀라의 얼굴에 낭패가 서렸다. 자신들을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서 있는 이는 바로 에스크라 공작이었다.
“이 시간에 여기서 뭘 하는 거지?”
“우린…….”
자신을 대신해 앞으로 나서는 에드센 황태자를 카밀라가 급히 붙잡았다.
“공작님을 뵈러 온 겁니다.”
“날?”
“네, 그런데 궁이 워낙 넓다 보니 길을 잃었지 뭡니까.”
조금 전 당황하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는 잔잔한 미소까지 입가에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
“에드센 전하께선 제가 홀로 이곳에 오는 걸 보고 걱정이 되어 따라오신 듯합니다.”
“이 시간에 굳이 날 만나려 한 이유는?”
“저와 거래 좀 하시죠.”
“…거래?”
“공작님께도 나쁘지 않을 거래일 겁니다.”
진실인지 거짓인지, 자신을 판별하듯 지그시 응시하는 에스크라 공작의 시선에 카밀라는 그저 빙긋 웃을 뿐이었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에드센 황태자는 살며시 고개를 내저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병사들의 발소리에 움츠리던 이가 맞나 싶었다.
‘당연하지. 내가 연기 내공이 얼만데.’
솔직히 에스크라 공작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긴 했지만, 그걸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내가 그동안 살려고 얼마나 아등바등했는데! 고작 이런 곳에서 도둑으로 몰려 죽을 수는 없지 않겠어?
“거래라.”
결국 한발 물러서는 에스크라 공작의 기색에 카밀라는 더욱 밀어붙였다.
“그런데 계속 이렇게 서서 말씀드려야 하나요?”
그녀는 두 팔로 몸을 감싸며 부르르 떨었다. 솔직히 여기 복도, 더럽게 춥다. 건물 안임에도 불구하고 두꺼운 겉옷도 딱히 소용이 없었다.
“따라오게.”
잠시 카밀라를 말없이 응시하던 그가 먼저 돌아섰다.
그 모습에 카밀라는 속으로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한고비 넘긴 거니까. 그녀는 서둘러 에스크라 공작의 뒤를 따랐다.
* * *
“전하께서도 저와 거래하실 게 있으십니까?”
에스크라 공작은 자신의 집무실까지 굳이 따라온 에드센 황태자에게 먼저 말을 건넸다.
“혹 제국민이 불이익이라도 당할까 지켜보는 중이오.”
왜 따라온 거냐는 말에 뻔뻔함으로 받아치는 그였다.
“그래서, 나와 무슨 거래를 하겠다는 거지?”
“공작님, 일단 차라도 좀 드시게 한 뒤 말씀 나누시죠.”
아직까지 퇴근하지 못하고 있었던 듯 알트온 백작이 차를 내려놓으며 에스크라 공작의 말을 막았다.
파리한 카밀라의 안색이 안쓰러워 보였는지, 백작은 그녀에게 제일 먼저 차를 건넸다.
“드세요, 영애.”
“고마워요.”
아우, 어찌 저런 냉혈한 인간 밑에 저리 친절한 부하가 있을 수 있대? 제가 제국에 돌아가서도 이 친절, 절대 잊지 않을게요!
“휴우.”
따뜻한 차가 몸에 들어오자 긴 숨이 절로 토해졌다. 찻잔을 쥔 손끝에서부터 전해지는 온기가 참으로 좋았다.
하지만 마냥 차를 즐길 수는 없었다. 자신이 말을 꺼내기를 기다리는 에스크라 공작의 눈빛이 하도 살벌해서…….
“그라시아 제국에 납품되는 물건들은 대부분 다 겨울 용품들이죠.”
자신의 말에 그 자리에 있던 세 사람의 눈빛이 똑같아졌다. 뭘 당연한 걸 묻느냐는 눈빛이다.
“딱 3년.”
“3년?”
“더 바라지도 않을게요. 그 기간 동안 다른 계절에 필요한 용품 전부를 저희 소르펠 가문하고만 거래하기를 원합니다.”
순간 방 안에 묘한 침묵이 흐른다. 세 사람의 표정이 또 똑같아졌다. 다들 황당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다른 계절?”
“네.”
“겨울이 아닌 다른 계절?”
“맞아요.”
계속해서 같은 질문을 던지는 에스크라 공작을 보며 카밀라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를 들면 이런 거죠. 바람이 잘 통하는 여름 옷감. 햇살을 막아 주는 차양막이나 우산. 봄가을에 입을 수 있는 적당한 두께의 옷들? 뭐 대충 이런 것들이요.”
그녀의 말이 이어질수록 세 사람의 표정은 더욱 기이해졌다.
“영애, 죄송하지만 그리시아 제국은…….”
“알아요. 사시사철 눈발이 날리는 곳이라는 거.”
“그런데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필요 없으면 구입을 안 하시면 됩니다. 단 필요하시게 되면 저희 가문하고만 하는 겁니다.”
“영애, 이건…….”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인 이들을 보며 카밀라는 말을 더 보탰다.
“저희 가문과의 독점을 조건으로 저 역시 하나의 혜택을 드리도록 하죠.”
“혜택?”
“이번에 계약한 마력석, 거래한 가격에서 3퍼센트 더 할인해 드리겠습니다.”
에스크라 공작의 눈이 부릅떠졌다. 저 말도 안 되는 조건을 들어주는 대신 마력석 가격을 내려 주겠다?
놀람도 잠시, 이내 의아함이 다시 찾아들었다.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군.”
뭐긴 뭐야? 일종의 도박이지.
카밀라는 자신의 품에 잘 숨겨져 있는 마리아나 황비의 일기장을 슬쩍 다독였다.
이걸로 정말 겨울의 정령왕 아이슬라의 분노가 거짓말처럼 풀린다면?
봄이 온다. 그라시아 제국에도 다시 다른 계절이 찾아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 겨울 용품만 준비되어 있는 이곳에 당장 무엇이 필요해질까?
‘한여름에 겨울옷 입고 다닐 수는 없지 않겠어?’